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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3월 5일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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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5일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

 

 

2022년 3월 5일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는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시어 회개시키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3월 5일 (토)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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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이사 5장 9ㄷ-14절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리라.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10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11 
주님께서 늘 너를 이끌어 주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네 넋을 흡족하게 하시며 네 뼈마디를 튼튼하게 하시리라. 그러면 너는 물이 풍부한 정원처럼, 물이 끊이지 않는 샘터처럼 되리라. 

12 
너는 오래된 폐허를 재건하고 대대로 버려졌던 기초를 세워 일으키리라. 너는 갈라진 성벽을 고쳐 쌓는 이, 사람이 살도록 거리를 복구하는 이라 일컬어지리라. 

13 
‘네가 삼가 안식일을 짓밟지 않고 나의 거룩한 날에 네 일을 벌이지 않는다면 네가 안식일을 ′기쁨′이라 부르고 주님의 거룩한 날을 ′존귀한 날′이라 부른다면 네가 길을 떠나는 것과 네 일만 찾는 것을 삼가며 말하는 것을 삼가고 안식일을 존중한다면 

14 
너는 주님 안에서 기쁨을 얻고 나는 네가 세상 높은 곳 위를 달리게 하며 네 조상 야곱의 상속 재산으로 먹게 해 주리라.’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 제게 당신의 길을
가르치소서.
제가 당신의 진리 안에서
걸으오리다.

 

주님, 귀를 기울이소서, 제게 응답하소서. 가련하고 불쌍한 이 몸이옵니다. 제 영혼 지켜 주소서. 당신께 충실한 이 몸, 당신 종을 구해 주소서. 당신은 저의 하느님, 당신을 신뢰하나이다. 주님, 제게 당신의 길을 가르치소서. 제가 당신의 진리 안에서 걸으오리다.

당신께 온종일 부르짖사오니,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당신께 제 영혼을 들어 올리오니, 주님, 이 종의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주님, 제게 당신의 길을 가르치소서. 제가 당신의 진리 안에서 걸으오리다.

주님, 당신은 어질고 용서하시는 분,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나이다. 주님, 제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애원하는 제 소리를 들어 주소서. 주님, 제게 당신의 길을 가르치소서. 제가 당신의 진리 안에서 걸으오리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5장 27ㄴ-32절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27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28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29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함께 식탁에 앉았다. 

30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투덜거렸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3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32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생명의 천상 양식으로 힘을 얻고 비오니 이 세상에서 받아 모신 성체가 영원한 생명의 보증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윤상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2022년 3월 5일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김윤상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3월 5일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죄인의 회개를 위하여 우리를 찾아오시는 예수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세리 레위가 베푼 잔치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과 벌인 논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드신 것을 정면으로 비판하였습니다. 이미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중풍 병자의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께 반감을 드러내었습니다(루카 5,20-21 참조). 

죄의 용서에 대한 선언은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신 배경을 설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과 하신 논쟁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단식과 관련한 논쟁으로 이어집니다(5,33-39 참조).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불만을 담아 던진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당신께서 파견되신 목적을 설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의 회개를 위하여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파견되신 분이십니다(5,32 참조). 예수님께서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시어 회개시키러 오셨기 때문에 앞서 세리 레위를 부르신 것입니다. 레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으며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 잔치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분을 따르겠다는 레위의 의지와 결심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레위는 하느님께 향함, 곧 회개로 부르심을 받은 세리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병자’일 수 있습니다. 병을 치료하려면 의사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치료를 받으려는 의지와 결심 또한 필요합니다. 죄인의 회개를 위하여 우리를 찾아오시는 예수님, 그분을 만나는 우리 자신의 마음가짐과 자세를 살펴봅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필요한 사람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저는 필요한 사람입니다. 돈이 필요하고, 힘이 필요하고, 사랑이 필요하고, 위로가 필요하고, 구원이 필요하고, 영어로 얘기하면 The Person in Need이며 그래서 친구가 필요하고, 구원자 하느님이 필요한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저는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공동체를 위해 정말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고, 공동체에게까지 꼭 필요한 사람은 못되더라도 한 사람에게라도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아마 여러분도 저와 같을 것입니다. 공동체를 위해 아무 쓸모가 없는 불필요한 사람이기보다는 공동체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 말의 진정성과 가능성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지. 필요한 사람이 될 수는 있는 것인지. 

먼저 정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으십니까? 공동체에게나 한 사람에게나 꼭 필요한 사람이 되려면 나를 내어주어야 하는데 그래도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픕니까? 

가난한 사람일수록 더 많은 도움이 필요로 하고, 그만큼 더 많은 도움을 줘야 하는데 그래도? 

문제가 많은 사람일수록 더 많은 상담이 필요하고, 그만큼 더 많이 내 시간이 뺐길 텐데 그래도? 

애정결핍이 심할수록 더 큰 사랑을 필요로 하고, 그만큼 그 한 사람에게 사랑이 쏠리게 되는데 그래도? 

상처가 많은 사람일수록 더 세심한 사랑이 필요하고, 그만큼 더 많은 배려를 해야 하는데도 그래도? 

더 말썽꾸러기일수록 나를 성가시게 하고 괴롭게 하고, 그만큼 더 많은 인내와 시간이 필요한데 그래도? 

진정 이런 사랑의 바람과 의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제 이런 사랑을 할 수 있겠는가? 크고 깊고 넓고 높은 사랑, 세심하고 부드러우면서 강하고 끈질긴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능력 없는 사람은 필요 없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의 의지도 소중하지만 사랑의 능력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다시 우리는 사랑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나눠줘도 부족함이 없도록 우리를 채워줄 사랑이 필요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며, 이웃 사랑을 위해서 부족함 없는 하느님 사랑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필요한 사람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자녀는 부부가 서로 사랑할 때 차려진 식탁에서만 성장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레위라는 세리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당신 제자들과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십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왜 식사하는 것까지 트집일까요? 그리고 왜 예수님이 아닌 제자들에게 투덜댈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을 대신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혼자가 아니라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서 죄인들을 치료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삼위일체 신비가 드러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식탁. 이어서 그 식탁 안에서 치유되고 자라는 자녀들입니다. 

먼저 ‘아빠–엄마–사랑’을 ‘성부-성자-성령’처럼 삼위일체로 생각해봅시다. 그런데 ‘사랑’은 어디에서 드러날까요?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 식탁입니다. 식탁은 아빠가 벌어온 돈과 엄마가 아빠를 위해 자신을 내어줌이 만나는 곳입니다. 

저도 사제가 되어서도 결혼해서 신혼생활 할 때의 꿈을 꾸었는데 그 식탁에서 아내가 불만을 말하니 꿈속에서도 기분이 나빴던 것이 기억납니다. 나가서 돈 벌어오기 싫은 마음이 확 일어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 상황에 아이가 놓여있다면 아이는 당연히 자아가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아는 생존이 불안할 때 커집니다. 왜냐하면, 생존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아빠가 아내에게 돈을 벌어다 주기 싫거나 아내가 남편을 위해 제대로 된 식탁을 차려주기 싫으면 그 식탁에서 식사하는 자녀는 ‘불안’을 느낍니다. 부모의 불안함이 자녀에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녀는 스스로 생존하려는 마음이 커지는데, 그렇게 자아가 큰아이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그래서 식탁에 앉은 자녀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습니다. 부모의 마음이 안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는 모든 생존의 문제를 주님께서 해결해 주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이 신앙고백 안에서 자녀는 돈에 대한 집착이나 자신만 아는 마음이 성장할 수 없고 오히려 치료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제자 사이에서 오고 가는 사랑은 바로 이러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세리는 특별히 돈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의 식탁 안에서 돈에 집착할 필요가 없어지고 세리는 그렇게 돈 좋아하는 마음이 치료되는 것입니다. 

이런 삼위일체로 만들어진 환경 안에서 자라지 않는 아이는 반드시 돈에 대한 욕구이든, 육욕에 대한 욕구든, 힘에 대한 욕구든 간에 치유되지 않는 사람으로 자라날 수밖에 없습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 76회 ‘힘 과시하는 감당 안 되는 아이의 폭력성은 ADHD 때문일까요?’가 방영되었습니다. 금쪽이는 여자아이인데도 친구 사귀는 법을 모릅니다. 자신과 놀아주지 않으면 때리겠다고 하고 하늘나라 보내버리겠다고 합니다. 심지어 엄마에게도 대듭니다. 식탁에서 지시하는 것은 거의 따르지 않습니다. 생떼를 쓰고 욕을 하고 음식을 엄마에게 얹어놓기도 합니다. ADHD로 약을 먹어도 상태가 악화하여 유치원에 등교시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금쪽이는 자신이 아빠를 대신해 엄마를 보호하겠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아빠가 폭력을 가하여 엄마 얼굴에 피가 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혼한 엄마를 보며 아이는 생존에 대해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본 것이 아빠의 폭력과 엄마의 약함이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강해져야 한다는 것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아이를 바꾸려면 엄마에게 자신이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을 내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야합니다. 엄마가 먼저 하느님을 굳게 믿어 마음을 평화롭게 해야합니다. 아이는 엄마의 감정을 먹고 삽니다. 엄마가 불안하면 아이도 불안합니다. 아이를 바꾸려 하지 말고 먼저 엄마부터 마음의 평화를 찾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믿고 십일조를 바치는 것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도 평화를 찾고 그 식탁에서 자아가 죽어가며 온전한 하느님 자녀로 성장합니다. 

상황이 안 좋다고 상황 탓만 해서는 안 됩니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1997)에서 아빠와 엄마는 5살 아이와 함께 독일군 수용소로 향하는 기차에 탑니다. 엄마와 아빠는 수용소에서 만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아빠는 재치있는 행동으로 홀로 떨어진 엄마에게 자신과 아들이 살아있음을 알립니다. 

낯선 환경에서 독일군에게 잡히면 죽임을 당할 것을 뻔히 하는 아빠는 아들에게 1,000점을 따면 탱크를 탈 수 있는 게임이라고 속입니다. 그래서 아들은 아빠의 말을 듣고 수용소의 상황이 탱트를 탈 수 있는 하나의 게임이라고 믿어버립니다. 아빠는 죽음 직전도 아이 앞에서 웃으며 나아갑니다. 아이는 끝내 들키지 않고 살아 엄마와 재회합니다. 그리고 탱크를 타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하는 것은 아이가 불안하지 않으려면 부모부터 불안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빠는 엄마를 안심시키기 위해 축음기를 이용해 아내와 함께 보았던 오페라 음악을 틀어줍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아무 걱정 할 필요 없다며 죽음 직전까지 안심시킵니다. 이 때문에 아이는 죽음의 수용소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감정이 식탁에서도 벌어져야 합니다. 결국, 먹는 것은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지성소에 들어가면 일단 맨 밑에 계약의 궤가 있습니다. 그 안에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십계명 판과 만나, 아론의 지팡이가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는 하느님 아버지를 상징하는 구름이 내려옵니다. 그 중간에 대사제가 잡은 소의 피를 일곱 번 뿌립니다. 그 중간 자리가 속죄소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아빠를 상징하는 구름과 엄마를 상징하는 계명판 사이에서 차려지는 사랑의 식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식탁에서 자녀의 자아가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와 이런 식탁을 마련하여 우리 자아를 죽여 우리를 치료하려고 하십니다. 이것이 미사 안에서 말씀과 성체의 식탁에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식탁은 마치 아버지와 어머니가 마련하는 평화의 자리입니다. 그 평화의 자리에 머물 때 우리는 치유되고 주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납니다. 항상 이 자리에 머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관상의 단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녀가 보는 세상은 아무리 고통스러운 환경일지라도 온통 사랑입니다. 그냥 게임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모든 게임 환경을 자신이 유리하게 만들어갑니다. 그 안에서 또 누군가는 게임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생존 걱정을 하는 부모는 자녀를 식탁에서부터 망칩니다. 

성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제와 신자 간에 남편과 아내가 마련한 식탁처럼 따듯한 온기가 있는 분위기가 없다면 누군가를 성당으로 데려와도 그 사람의 죄가 사해지고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되지 못합니다. 자녀는 따듯한 밥상이 차려진 식탁에서 자란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삶

 

어떤 책을 보다가 인상 깊은 글을 봤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직선이 아니라 원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을 직선 위에 살면 항상 누군가가 내 앞에 있기에 만족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직선 위에 있기에 늘 1등을 위해 애를 쓰고, 1등이 되면 이 1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커다란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직선이 아닌 원 위에 사는 인생으로 생각하면 어떨까요? 직선이 아니기에 항상 선두주자입니다. 스스로 새로운 가치를 만들며 살면 그만입니다. 
 
세상에 놀라운 업적을 남긴 사람을 떠올려보면 직선의 삶이 분명 아니었습니다. 직선의 삶은 남과의 비교를 통해 남을 누르고 그 위에 올라가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창조적인 생각을 할 수 없고, 이에 따라 좌절과 박탈감만 느낄 뿐입니다. 
 
원의 인생을 살기 위해 우선 남의 눈, 세상의 눈으로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고유한 나의 눈, 특히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눈으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하느님의 눈으로 이 세상을 살 수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하느님의 눈보다는 세상의 눈으로 직선의 삶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설교하시던 갈릴래아 해안에는 로마인들이 세워 놓은 세관이 있었습니다. 이곳은 외국 상인이 드나들고, 유다인 상인들이 물건을 밖에 내다 팔려면 이곳을 지나야만 했습니다. 세관에 앉아 있는 세리는 로마인들을 위해 그 상품에 관세를 물립니다. 세리는 보통 로마인이었지만 유다인도 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유다인은 자기 동족들의 눈에는 민족 반역자인 죄인이었습니다. 
 
제자를 뽑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사람들은 당황했을 것입니다. 먼젓번에는 흙투성이 발과 비린내 나는 손으로 사람들과 떨어져 사는 어부를 선택하더니, 이번에는 사람들의 증오 대상인 세리를 부르시니 말입니다. 유다인이 생각하는 죄인이란 율법에 어긋나는 생활을 하는 자, 이방인들과 사귀는 자, 그리고 매춘부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런 자들과 식사를 같이 하는 것은 반율법행위에 해당했습니다. 유다인들에게는 식사 자체가 곧 종교 예절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방인에 붙어서 사는 죄인인 레위의 집에 가셔서 식사까지 하고 있다는 것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엄청난 분노를 가져온 행동이 된 것은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어느 특수 부류의 사람들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신 마음을 돌려 회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바로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신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삶이 필요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시간의 걸음걸이에는 세 가지가 있다. 미래를 주저하면서 다가오고, 현재는 화살처럼 날아가고, 과거는 영원히 정지하고 있다.

- 실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루카 5,28)

 

모든 것을 버려야 길은 다시 새롭게 열린다. 따르면서 새 삶은 시작된다. 우리 삶의 진정한 모습을 만나는 은총의 사순이다. 따른다는 것은 욕망에 빠진 우리 삶을 바로 잡는다는 것이다. 삶의 자세를 바꾸지 않고서는 올바로 따를 수 없다. 

따른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이다. 하느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사순시기는 삶의 정체성을 만나는 시간이다. 우리 일상에서 새로운 뜻의 전환이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다시금 영원한 것을 따르는 마음의 전환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따르는 마음이 있다. 인생전체를 주님께 던지는 마음이다. 그 마음의 실천이 바로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진리는 실천 없이는 다다를 수 없는 복음의 관계이다. 복음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기쁨이다. 일어나 따라야 할 사순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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