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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3월 3일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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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3월 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

 

 

2022년 3월 3일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모세는 백성에게 그들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당신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3월 3일 (목)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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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신명 30장 15-20절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축복과 저주를 내놓는다.
(신명 11,26)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5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16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 또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너희에게 복을 내리실 것이다. 

17 
그러나 너희의 마음이 돌아서서 말을 듣지 않고, 유혹에 끌려 다른 신들에게 경배하고 그들을 섬기면, 

18 
내가 오늘 너희에게 분명히 일러두는데, 너희는 반드시 멸망하고, 요르단을 건너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19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20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 그리고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땅에서 너희가 오랫동안 살 수 있게 해 주실 분이시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 같아라. 의인의 길은 주님이 아시고, 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리라.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9장 22-25절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22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전능하신 하느님, 천상 선물을 받고 간절히 비오니 이 선물이 언제나 저희에게 용서와 구원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서창수 베드로 신부 집전

 

 

2022년 3월 3일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서창수 베드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3월 3일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선택과 결정

 

루카 복음서의 저자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9,18-21 참조)에 이어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9,22 참조), 예수님을 따르는 방법과 조건(9,23-27 참조),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9,28-36 참조)를 차례로 전해 줍니다. 이와 같은 전개는 마르코 복음서와 마태오 복음서에서도 같습니다. 세 복음서의 저자들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시작으로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예수님의 파스카 사건을 준비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당신의 미래, 곧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여기에서 루카는 ‘-해야 한다’를 뜻하는 비인칭 동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선택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뜻에 따른 필연적 결과임을 강조합니다. 루카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성경에 기록된 것, 다시 말해 이미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하느님의 구원 약속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 다음에, 제자가 되기 위한 조건을 제시하십니다.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합니다.’ 여기에서 ‘자기 부인’은 관계의 재설정, 곧 하느님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여 제자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중심적인 생활 방식에서 벗어나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합니다.’ 이에 따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십자가 형벌을 선고받은 것처럼, 선고받은 장소에서 처형당하는 장소로 옮겨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실 ‘십자가의 길’은 제자들이 뒤따라 걸어갈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시선을 향하시면서, 먼저 당신께서 걸어가실 십자가의 길을 보여 주시고, 제자들에게 그 길을 함께 걸어가자고 초대하십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고난과 영광으로 초대받은 우리에게 남은 것은 선택과 결정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살려면 

 

“나는 오늘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오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내놓고 선택을 강요하고 사랑하라고, 말씀을 들으라고, 매달리라고 압박하는 듯한 느낌을 줘 사람에 따라서는 거부감이 들기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도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이나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과 말씀을 들으라는 것은 기꺼이 수용하겠지만 하느님께 매달리라는 말씀은 너무 지나친 요구가 아닌지 생각이 살짝 들며 이 매달리라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나는 매달릴 것인지 생각해봤습니다. 

왜냐면 전에부터 간간이 생각했던 것 그러나 아직 결심이 서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인데 제게 암이 발견되면 수술을 할 것인가, 하느님께 살려달라고 기도를 할 것인가가 그것입니다. 

지금의 생각으로는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은 여기까지라고 받아들이고, 수술을 하거나 살려달라는 기도는 하지 않겠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막상 암에 걸리면 제가 수술도 하고 싶고 살려달라고 매달리게 되지 않을까 하는 저에 대한 의심도 있기에 결심이 안 선 겁니다. 

어쨌거나 결심이 아직 안 섰어도 지금 생각으로는 수술이 무망하다할 경우 수술을 안 하고 싶고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생명만큼만 살고 싶습니다. 살려달라고 하느님께 매달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신명기가 하느님께 매달리라고 한 것이 이 세상에서의 생명 연장을 위해 하느님께 매달리라는 것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우리 앞에 놓여있다는 생명과 죽음도 이런 것이 아닐 것이고, 축복과 저주도 이런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시작되는 것일지는 몰라도 영원한 생명과 죽음, 이 영원한 생명과 죽음과 연결된 축복과 저주일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과도 통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자기 목숨>과 <목숨>을 말씀하십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여기서 <자기 목숨>은 뭐고, 그냥 <목숨>은 무엇입니까? 문맥상 <자기 목숨>과 그냥 <목숨>은 분명 다릅니다. 

<자기 목숨>은 내 안에 들어온 목숨이고 언젠가는 나갈 목숨이며, 그냥 <목숨>은 목숨/생명 그 자체이고, 하느님의 목숨/생명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의 코에 숨을 불어넣으시자 붙은 숨이 <자기 목숨>이고, 하느님의 숨이 그냥 <목숨>입니다. 

우리의 목숨은 하느님의 숨이 우리의 목에서 끊이지 않고 들락날락할 때까지만 붙어있고, 그 숨이 끊어지면 우리 목숨, 생명이라는 것도 끊어지는 거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조금 연장은 될지언정 언젠가 끊어질 목숨, 내 안에 갇힌 목숨은 구하려고 애쓰거나 하느님께도 매달리지 말아야 하고 영원히 끊어지지 않는 목숨, 하느님의 목숨을 구하고 그 목숨을 위해 하느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께 매달여야 할 것은 내 목숨이 아니라 하느님의 목숨이고 하느님께 매달림 그것이 바로 매일 성령을 숨 쉬는 기도입니다. 

사실 생명이 걸린 기도만큼 절실한 기도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실 저도 매일 제 주변의 편찮은 분들을 위해 기도를 하고, 그중에서도 생사가 걸린 분들을 위해 제일 절실하게 기도하는데, 그런데 이보다 더 절실히 해야 할 기도가 영원한 생명을 위한 기도임을 다시 한 번 생각게 되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하느님께서 피를 흘리실 수밖에 없는 이유

 

오늘은 예수님께서 당신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고를 하십니다. 예수님은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 그리고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왜 인간을 창조하고 또 인간을 위해 피를 흘리시는 것일까요? 하느님의 피 흘림 없이는 인간이 구원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느님께서 피를 흘리셨는데 모든 인간이 구원받을 수는 없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하느님의 피를 흘리게 한 장본인이 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만 구원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내가 사는 세상에 나오기 위해 반드시 나의 창조자의 피를 흘리게 했음’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태중에서 나올 때 어머니를 피흘리게 했습니다. 누구도 이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알아야 할 것은 내가 어머니의 피를 흘리게 했음을 깨닫는 자만이 어머니의 세상에서 살아갈 힘을 얻는다는 사실입니다. 

유튜브 채널 ‘우와한 비디오’에 ‘누워서 수업 듣는 아이, 엄마와 아들의 위대한 등교’가 있습니다. 성우는 척수근위축증을 앓고 있습니다. 17살 성우는 몸을 움직이지 못할 뿐 아니라 휜 허리 때문에 왼쪽 세상밖에는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의 꿈은 의사가 되는 것입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어서 정신과 의사가 되겠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성우를 학교에 데리고 갑니다. 체력이 안 되어 오전만 수업하고 오후는 집에 와서 과외를 합니다. 어머니는 쉽지 않은 가정 살림에도 과외 선생님을 붙여 아이가 공부할 수 있게 합니다. 성우는 왜 이렇게까지 공부에 매달리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가 어머니에게 타인의 손을 빌려 쓴 편지로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엄마에게. 엄마, 아들 성우에요. 요즘 많이 힘드시죠? 엄마도 다른 엄마들처럼 놀러도 가고 영화도 보고 자유로운 생활도 하시고 싶을 텐데 저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하시잖아요. 가끔씩 그런 생각을 해요. 제가 아프지 않게 태어났으면 엄마도 마음이 안 아팠을 텐데….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받아서 짜증 내고 투정 부려서 미안해요. 마음은 그렇지가 않은데 나 자신을 못 이기나 봐요. 엄마에게 투정 부린 날은 하루 종일 마음이 안 좋아요. 엄마 힘든 거 누구보다 제일 잘 아는 놈이 저인데 자꾸 몸이 힘들고 아프니까 저도 모르게 그러는 것 같아요. 엄마한테 말은 한 했지만, 하루하루 더 늙어가는 어마 얼굴이 너무 속상하고 죄송해요. 내가 아프지만 않았어도…. 공부한다고 너무 유난 떨고 엄마 힘들게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공부를 잘해야지 엄마도 호강시켜 드릴 수 있잖아요. 꼭 성공해서 호강시켜 드릴게요. 우리 조금만 참고 힘내요. 사랑해요, 엄마. 이 세상에서 엄마를 가장 사랑하는 성우가.”

우리가 나의 처지에 대해 불평하고 남의 탓을 하는 이유는 진정으로 나의 창조자를 찔러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아니 분명히 찔렀는데 기억하지 못해서입니다. 누구도 내가 어머니 밖으로 나올 때 어머니를 피흘리게 했음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영영 기억해내지 못한다면 그 자녀는 어머니의 세상에서 살 힘을 얻을 수 없습니다. 부모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세상의 무게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 이유는 이들은 하느님이 자신들을 위해 피를 흘리셨음을 의지적으로 믿기를 거부하는 이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하느님 나라에서 살 힘을 얻지 못합니다. 성우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힘을 어머니의 희생을 깨달으며 얻어가는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세상에 살아가려면 하느님의 희생에서 힘을 얻어야만 합니다. 하느님의 돌아가심을 인정하지 못하면 진짜 하느님의 죽음을 죽이는 인간이 되어버립니다.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이 같은 경우입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임언기 신부가 한 임종 직전 냉담 신자에게 병자성사를 주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간암 말기 환자였는데 본인이 청한 것은 아니고, 주위 신자들이 끝까지 성사를 거부하는 것이 안타까워 청했던 것입니다. 배에 이미 복수가 차 있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랜 냉담을 하고도 병자성사를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고해할 것이 없느냐고 묻는 신부님의 질문에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말을 못 하나 싶어 십계명을 일일이 읊어주며 해당하는 것이 있다면 고개를 끄덕이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병자는 미동이 없었습니다. 결국, 신부님은 고해성사와 병자성사를 거부하는 것에 대해 확신하고 방을 나섰습니다.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뒤에서 환자가 크게 소리쳤습니다. 

“나 죄 없어!” 

바오로 사도는 “의로운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로마 3,10)라고 말합니다. 천사도 하느님 앞에서는 부끄러워 얼굴을 가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어떻게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는 내 죄가 하느님을 피흘리게 했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진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일입니다. 그분의 희생을 무가치하게 만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전에 자신의 어머니를 친구를 시켜 차로 치게 하여 보험금을 타내려던 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다행히 돌아가시지는 않고 휠체어를 타셨습니다. 아들이 살인미수죄로 재판을 받을 때 어머니는 그 아들을 위해 자신을 대신 감옥에 보내 달라고 탄원을 했습니다. 아들을 잘못 키운 자신의 죄가 크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습니다. 내가 태어나기 위해 어머니가 피를 흘리셨음을 깨닫지 못하면 그 아이는 또 어머니를 죽이려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어머니의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가정과 세상에 적응하려면 내가 어머니와 아버지를 피 흘리게 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부모가 해 주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이를 낳을 때만이 아니라 계속 피를 흘려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는 부모의 끊임없는 작은 피 흘림을 통해 자신이 태어날 때 엄청난 피를 흘리게 했다는 사실까지 다다를 수 있습니다. 평소에 사랑을 보여주지 못하면 나를 낳기 위해 그런 고통을 겪었음을 믿는 것은 매우 힘이 듭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끊임없이 미사로 기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저에게도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말씀을 해 주심으로써, 하느님의 죽음이 나를 당신 세상에 살게 할 힘을 주시기 위함임을 조금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 다 주셨다는 말은 나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번 사순 동은 내가 주님을 찌르는 한 번의 은총이라도 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그러면 누구도 심판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도 우리는 그 엄청난 은총을 받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내가 못 박았음을 깨달으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번이라도 내가 주님을 죽였음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하느님을 진짜로 죽이는 사람이 되어 유대 지도자들처럼 하느님 나라에서 살 자격을 잃게 됩니다. 내가 주님의 피를 흘리게 했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진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입니다. 아기에게 세상이 자신이 찢은 어머니의 배 다음에 있듯, 하느님 나라는 내가 찢은 그리스도의 심장 뒤편에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만일 다시 태어난다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만일 다시 태어난다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이런 질문을 많이 던집니다. 제게도 “만일 다시 태어난다면 또 사제로 살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물론 마지막 날에 부활하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기에, 마치 갓난아기로 다시 태어날 일은 없습니다. 그래도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어떻게 답변하시겠습니까? 
 
아마 지금까지의 후회되는 일을 고치고, 차마 하지 못했던 일을 다시 하는 삶을 살겠다고 대부분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회학자 토니 캠폴로가 이제 삶의 끄트머리를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는 95세 이상의 어르신에게 위의 질문을 했습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다음 세 가지의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날마다 반성하며 살겠다.”, “용기 있게 살겠다.”, “세상을 떠난 뒤에도 무언가를 남기는 삶을 살겠다.” 
 
‘많은 돈을 벌겠다’라는 답변이 없었습니다. ‘높은 지위를 얻겠다’라는 답변도 없었습니다. 세상 안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에 대한 소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변화를 이야기하고 계셨습니다. 이 생각이 지금을 사는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마 다시 태어난 것과 같은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 복음의 대목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데 필요한 조건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에게 새롭고도 어려운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주님의 수난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기에, 먼저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곧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인간에게 가장 소중하다고 하는 목숨까지도 버릴 용기를 가져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우며 사는 것은 오히려 삶의 목표를 잃게 되며, 반대로 진정한 삶은 목숨을 희생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 나아가는 데서 그 진가를 발휘합니다. 그래서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라고 하십니다. 
 
제1독서의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신명 30,16)라는 신명기 말씀이 우리가 가야 할 지표가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희망과 근심, 공포와 불안 가운데 그대 앞에 빛나고 있는 하루하루를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라. 그러면 예측할 수 없는 시간은 그대에게 더 많은 시간을 줄 것이다.

- 호레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루카 9,23)

 

삶이 있기에 십자가가 있고 십자가가 있기에 실존적 현실이 있다. 날마다 지고 가야 할 십자가와 우리들 삶의 현실은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의 관계이다. 십자가와 우리의 삶은 그래서 한 몸이다. 삶을 통하여 하느님을 깨닫게 하는 십자가이다. 

자신을 버리는 노력과 실천 없이는 십자가를 날마다 지고 갈 수 없다. 우리를 날마다 살려내는 십자가이다. 십자가로 진실하고 간절한 마음이 되어간다. 십자가로 빚어지는 삶의 신비이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습이 사실은 삶을 대하는 우리들 마음의 자세이다. 

다양한 마음들의 풍경을 만나게 하는 십자가의 여정이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것이기에 내 것으로 소유할 수 없다. 십자가의 앞면 뒷면, 옆면 모두 우리들 적나라한 우리들 모습이다. 사람은 십자가를 통해 마음이 영글어간다. 

사랑을 창조하는 십자가이다. 사랑으로 가는 길이 십자가이며 구원의 역사가 바로 우리를 위한 십자가의 역사이다. 잃어버린 소중한 가치를 오늘도 되찾아주는 십자가를 날마다 지고 가야 할 사랑과 용서의 삶이다. 

십자가에서 다시 사랑을 배우는 값진 사순의 오늘이다. 십자가는 삶의 절정이며 가장 빛나는 사랑의 꽃임을 믿는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며 자신을 버리는 사랑임을 다시 배운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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