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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2월 27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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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2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8주일 -

 

 

2022년 2월 27일 연중 제8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집회서의 저자는 사람은 말로 평가되기에 말을 듣기 전에는 사람을 칭찬하지 말라고 합니다.

 

 

✠ 오늘 제2독서

 

바오로 사도는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나무는 열매를 보면 안다고 하시며, 사람은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2월 27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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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집회 27장 4-7절

 

말을 듣기 전에는
사람을 칭찬하지 마라.

 


체로 치면 찌꺼기가 남듯이 사람의 허물은 그의 말에서 드러난다. 


옹기장이의 그릇이 불가마에서 단련되듯이 사람은 대화에서 수련된다. 


나무의 열매가 재배 과정을 드러내듯이 사람의 말은 마음속 생각을 드러낸다. 


말을 듣기 전에는 사람을 칭찬하지 마라. 사람은 말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 당신을 찬미하오니
좋기도 하옵니다.

 

주님을 찬미하오니 좋기도 하옵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여, 당신 이름 찬송하나이다. 아침에는 당신 자애를, 밤에는 당신 진실을 알리나이다. 주님, 당신을 찬미하오니 좋기도 하옵니다.

의인은 야자나무처럼 우거지고, 레바논의 향백나무처럼 자라나리라. 주님의 집에 심겨, 우리 하느님의 앞뜰에서 우거지리라. 주님, 당신을 찬미하오니 좋기도 하옵니다.

의인은 늙어서도 열매 맺고, 물이 올라 싱싱하리라. 불의가 없는 나의 반석, 주님이 올곧으심을 널리 알리리라. 주님, 당신을 찬미하오니 좋기도 하옵니다.

 

 

매일미사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1코린 15장 54-58절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형제 여러분,

54 
이 썩는 몸이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이 죽는 몸이 죽지 않는 것을 입으면, 그때에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렸다. 

55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 

56 
죽음의 독침은 죄이며 죄의 힘은 율법입니다.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시다. 

58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주님 안에서 여러분의 노고가 헛되지 않음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6장 39-45절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제자들에게 

39 
이르셨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40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41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43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44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따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지 못한다. 

45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나무의 열매가 재배 과정을 드러내듯이, 사람의 말은 마음속 생각을 드러낸다.” 

우리 모두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는 선한 사람으로서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도록 합시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

 

주님, 구원의 성체를 받아 모시고 자비를 간청하오니 현세에서 저희를 길러 주는 이 성사로 저희가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배존희 스테파노 신부 집전

 

 

2022년 2월 27일 (일)
배존희 스테파노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2월 27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도 않을 잔부스러기 같은 ‘티’와 일반 성인 크기의 배에 달하는 ‘들보’가 함께 비교되는 해학의 말씀 속에서, 우리네 인간의 타고난 기질이 엿보입니다. 그것은 알게 모르게 우리가 남을 비판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타인의 잘못을 지적함으로써 얻는 자기만족과 뿌듯함 때문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상대보다 우위에 서서 그의 단점을 고쳐 주겠다고 의기양양하게 말하곤 합니다.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우리는 일상에서 이와 비슷한 말들을 얼마나 자주 하면서 살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은 그 비판적인 시선을 타인이 아닌 자신에게 돌리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남을 지적할 때 들이대는 엄격한 잣대로 먼저 자기 자신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학교에 상주하고 있는 저에게 오늘 복음 말씀은 큰 묵상 거리로 다가옵니다. 

신학생들을 지도하며 ‘진실해야 한다’, ‘성실해야 한다’, ‘겸손해야 한다’, ‘형제적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등 다양한 요구를 하는 것은 물론이고, 학생들의 잘못이나 단점이 보일 때면 어김없이 지적하곤 합니다. 그런데 그런 기준이나 잣대가 나에게도 엄격하게 적용되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부끄럽게도 저 자신에게는 무척이나 관대한 사람임을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누군가의 변화를 바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에게 ‘본’(本)을 보이는 것이 아닐까 묵상해 봅니다. 상대방의 눈 속에 박힌 티를 빼내 주겠다고 신나게 소매를 걷어붙이기보다, 자기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를 빼내려는 노력을 상대방에게 보여 주는 것이 훨씬 감동적입니다. 회개는 그렇게 쌍방에서 함께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말의 곳간

 

연중 제8주일은 말이 주제입니다. 복음은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라고 얘기하고 독서 집회서는 "사람의 말은 마음속 생각을 드러낸다."고 얘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독서와 복음이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말이란 이런 것인 줄 모르고 사람들이 말을 하거나 침묵하거나 하기 때문이지요. 지금도 말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옛날에 저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침묵은 금'이라는 것을 어렸을 때 많이 듣고 자랐고, 그래서인지 말을 많이 하는 것은 남자답지 못한 거라는 생각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말이 가볍지 않다는 평과 함께 사람들이 저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기도 했지만,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사람이 되어 관계를 어렵게도 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말 실수 경험이 있고 그래서 말을 많이 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되고 말 실수는 아니더라도 자기를 너무 까발리거나 내세우는 말로 자기를 깎아먹기에 말을 줄이려 하지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말에는 하지 말아야 말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들이 바로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말들이지요. 인격을 모독하는 말, 관계를 벌어지게 하는 말, 공동체가 쪼개지게 하는 말은 개인과 공동체를 파괴하는 폭력적인 말들이지요. 그런데 폭력적이지는 않아도 우리가 하지 않으면 좋을 말들이 있습니다. 말은 자기를 표현하고 자기의 뜻이나 생각을 전달하는 기능도 있는데 자기 표현과 전달이 지나치거나 잘못 된 경우의 말들입니다. 지나친 하소연이나 자랑이나 허풍 같은 것이 이런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이런 말들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아무튼, 이런 말의 폐해 때문에 우리는 제가 과거에 그랬듯이 아예 아무런 말도 안 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는데 오늘 가르침은 그런다고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이 아니기에 표현을 하지 않으려고 하기 보다는 속 마음과 생각이 올바라야 한다고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화가 나 있거나 미울 때지요. 그런 것들은 아무리 감추려 해도 눈이 말을 하고 표정이나 행동이 말을 하며 심지어 세포가 말을 합니다. 물건을 탕탕 놓거나 살이 부르르 떨리면 화가 나 있는 표시고 그래서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즉시 알아채지 않습니까? 그러니 속은 그대로 놔두고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통제해서는 안 됩니다. 

또 말은 하지 말아야 할 말도 있지만, 해야 할 말도 있습니다. 곧 사랑의 말이고 이런 말들은 적극적으로 표현해야 하지요. 남자들이 사랑하면서도 사랑한다는 표현을 할 줄 몰라 관계를 그르치는데 사랑한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에서부터 생일이나 축일을 잊지 않고 전하는 축하와 관심의 말이나 위로와 격려의 말과 진심어린 충고의 말은 적극적으로 해야 하겠지요. 

지난주에 야고보서가 같은 입에서 저주하는 말을 나오기도 하고 찬미 노래가 나오기도 한다고 했듯이 우리의 같은 입에서 축복의 말이 나오기도 하고 저주의 말이 나오기도 하며 미움과 분노를 토해내는 말이 나오기도 하고 사랑과 위로의 말이 나오기도 하는데 그것은 입이 아니라 마음의 곳간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것이 오늘 가르침이지요. 그러므로 우리의 입에서는 선과 사랑의 말이 주로 나오도록 우리는 오늘 주님 말씀대로 말의 곳간을 선하게 만들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눈먼 인도자를 분별하는 손쉬운 방법.

 

오늘 복음은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는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이삭을 뜯어먹는 것을 보고 바리사이들이 당신 제자들을 심판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이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기에 불행하다고 하시며 당신 제자들에게는 자신들을 박해하는 이들을 심판하지 말고 기도해 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며 오늘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는데, 바로 자신의 눈에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이웃의 눈의 티를 빼내 주겠다고 말하는 바리사이들이 눈먼 인도자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실천하는 이들이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루카 복음 6장의 줄거리입니다. 

사람은 반드시 인도자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은 다 인도자들이 알려준 것을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나를 인도해주는 인도자가 ‘자아’입니다. 자아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남에게 피해를 줘도 되고 아니 입히며 살아야 당연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부모라는 인도자는 그러면 사회생활을 할 수 없으니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고 오히려 남에게 이익을 주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칩니다. 아이는 갈등을 느끼지 못합니다. 힘이 들기는 하지만 부모와 함께 머무는 행복을 위해 자아와의 싸움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렇게 두 발로 일어서고 말도 할 줄 알고 형제를 위할 줄 아는 아이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학교에 가면 상황이 바뀝니다. 세상은 다시 자아의 인도를 따르라고 가르칩니다. 남을 이기는 사람이 되고 약탈하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경쟁’의 세상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라고 가르칩니다. 많은 부모도 처음에는 자아와 싸우게 만드는 인도자였다고 이쯤 되면 다시 자아와 세상의 인도를 받는 자녀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렇게 아이는 다시 돈을 좋아하고 이웃을 심판하는 약탈자가 되어갑니다. 부모는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눈먼 인도자로 머물게 됩니다. 나중엔 약탈자가 된 자녀에게 약탈당하는 부모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약탈자를 많이 양산하는 사회에서는 노인 빈곤율이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넷플릭스 시리즈 ‘바이킹스’에서 바이킹을 세계 최고의 약탈자로 이끌었던 그들 나름의 위대한 인도자가 나옵니다. 라그나 로스브로크라는 실제 인물입니다. 척박한 땅에서 인구가 불어나자 어쩔 수 없이 남을 약탈하며 살아야 했던 스칸디나비아반도 북 게르만족은 엄청난 몸의 크기와 싸움에 누구보다 특화되어 전 유럽의 위협이 되었습니다. 이들이 하는 일은 약탈과 몰살이었습니다. 그러면 그의 아들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연히 아버지의 명맥을 잇습니다. 모두가 약탈자가 되고 또 모두가 아버지와 같이 안 좋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라그나 로스브로크는 결국 자녀들에게도 버려져 뱀 굴에 던져져 죽습니다. 이것이 자녀들을 약탈자로 키운 잘못된 부모의 결말입니다. 

여기에 라그나의 형제 롤로가 나옵니다. 라그나가 이젠 약탈을 넘어서 세계 정복을 꿈꿀 때 그는 평화롭게 살기를 원했습니다. 형을 따라 싸움을 하기는 하였지만 기회만 있으면 그냥 싸우지 않고 살고 싶었습니다. 라그나가 영국을 넘어 이제 프랑스까지 점령하려고 하자 롤로도 따라나섰습니다. 그러나 파리의 성벽이 너무 높아 점령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라그나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우선 주력 부대를 파리 외곽에 두고 자신은 자신의 빼앗긴 땅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이때 파리의 왕이 롤로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입니다. 롤로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딸과 혼인시킨 것입니다. 공주는 처음엔 완강히 거부했지만 롤로가 자신 나라의 언어를 배우고 라그나로부터 자신들의 나라를 보호해 줄 인물이 될 것을 믿었기에 결국엔 대의를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전해 들은 라그나는 동생에게 분노하여 모든 병력을 이끌고 롤로가 왕으로 있는 노르망디로 쳐들어옵니다. 바이킹의 전술을 전부 알고 있는 롤로는 프랑크 왕국을 위해 싸웁니다. 그리고 그들을 물리칩니다. 

자신의 동족을 배반하면서까지 프랑크 왕국을 지키려 했던 롤로, 그리고 끝없는 정복의 야욕을 불태웠던 라그나. 누구의 삶이 옳았다고 보아야 할까요? 바이킹스 시리즈에서는 라그나 로스브로크가 주인공이어서 롤로가 배신자로 묘사되고는 있으나 종말은 롤로의 승리입니다. 라그나는 자녀들에게도 버려지고 독사굴에 떨어져 죽지만 롤로는 끝까지 승승장구합니다. 그리고 다른 바이킹들에게도 비옥한 땅에 정착할 것을 권유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냥 약탈자로 사는 삶을 선택합니다. 

약탈한다는 말은 남을 심판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양심상 사람을 착하게 보고 그 사람을 약탈할 수 없습니다. 저 사람들 때문에 내가 힘들다고 판단을 해야 남을 약탈할 수 있습니다. 내가 밟고 올라가는 사람들이 내 사랑하는 부모나 형제들이라고 여긴다면 경쟁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자아와 세상은 사람들을 적으로 보게 만듭니다. 

아우슈비츠에서 독일 병사들이 수많은 유대인을 죽이려면 일단 그들의 양심의 가책을 줄여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라고 판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수치와 모욕, 그리고 먹을 것 하나 때문에 개처럼 되게 만들었습니다. 변을 함부로 볼 수 없게 만들어 자신들이 식량을 배급받는 통에 변을 보고 또 그것을 씻어 음식을 타게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먹을 것으로 서로 싸우게 만들어 그들이 인간이 아니라 짐승과 비슷하다고 여기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야 그들을 약탈하고 죽일 때 양심의 가책이 적습니다. 

히틀러와 같은 이런 인도자 밑에서 히틀러는 자신이 이끈 사람들에게 좋은 대접을 받았을까요? 마지막 때 누구도 그를 목숨 걸고 지켜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유대인을 개로 본다면 언제든 자신도 개로 볼 수 있는 이들이 자신들이 키운 군사들임을 몰랐던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키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웃을 판단하는 사람은 언제든 자신도 판단할 수 있는 자녀가 된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합니다. 세상에서 경쟁시켜서 성공하게 만들다가 결국 부모도 자녀들에게 밟히는 때가 올 수 있습니다. 

우리는 프랑크 왕국의 왕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는 바이킹을 자신의 아름다운 딸과 혼인시켰습니다. 그리고 더는 다른 사람을 약탈할 수 없는 인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비록 상대가 자신을 약탈하는 종족일지라도 사람을 존중할 줄 아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도 자신과 같은 풍요로운 땅에서는 변할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장 아끼는 딸을 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롤로는 변했습니다. 그리고 롤로 덕분에 바이킹에 자신의 나라를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우리 각자는 누군가의 인도자입니다. 내가 먼저 남을 심판할 수 없는 땅에 살아야 합니다. 에덴동산입니다. 내가 에덴동산에서 풍요롭게 산다면 남을 경쟁자로 인식하고 그래서 남을 판단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남을 나처럼 이끌 마음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자녀들도 그런 사람이 되고 나의 미래도 구덩이로 빠지지 않습니다. 

바리사이와 같은 인도자들이 되지 맙시다. 그들은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바이킹이 되었고 그들을 따르던 이들도 구덩이로 다 빠졌습니다. 모든 죄는 선악과를 바치지 않은 탐욕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도들을 본받아야 합니다. 에덴동산에 살며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도 이름을 지어줄 대상들입니다. 우리가 좋은 인도자가 되어 내가 에덴동산에 사는 태초의 아담과 하와임을 증명합시다. 좋은 인도자는 이웃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패배보다 승리 때문에 몰락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풍성한 나뭇잎과 더불어 최대 15m까지 성장하는 만치닐 나무라고 있습니다. 이 나무는 바람을 막는 방풍림으로 해변 도시에 널리 심겨 있으며, 단단하고 조밀해서 배나 가구를 만드는 데 이용됩니다. 특별히 이 나무는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사과 모양의 작은 열매를 만드는데, 이 열매가 아주 위험합니다. 너무나 달콤한 향기에 먹어도 되는 과일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목숨을 잃을 정도의 맹독이 있기 때문입니다. 
 
달콤한 향기가 난다고 덥석 물었다가는 큰일이 나는 만치닐 나무처럼, 우리 곁에도 달콤한 향기로 유혹하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돈, 지위, 명예… 등으로 욕심과 이기심을 통해 물고 싶게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실제로 순간의 만족을 가져오지만 이로 인해 소중한 만남이 깨지면서 더 나쁜 상황으로 우리를 이끌 때가 참 많습니다. 
 
아마 거액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복권에 당첨된 것은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고, 실제로 당첨이 되면 정말로 기쁠 것입니다. 그런데 당첨된 사람들의 말미는 대부분 불행과 연결됩니다. 돈 때문에 형제간의 우애가 깨지게 되고, 자신의 욕심만을 부리다가 처음보다 더 나쁜 상황에 부닥쳐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향기로운 ‘돈’이 내게 독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의 유혹이 참으로 많은 세상입니다. 이 죄의 유혹에 쉽게 그리고 자주 넘어가게 되면 좋은 나무가 될 수 없으며 좋은 열매도 당연히 맺을 수가 없게 됩니다. 따라서 올바른 판단이 필요합니다. 나쁜 나무에서 생산하는 나쁜 열매가 남에게 큰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마치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의 눈에 있는 티는 보면서,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느냐고 하십니다.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해서 주님의 뜻보다 죄의 유혹에 계속 넘어가는 우리를 꾸짖는 말씀이었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로부터의 승리를 얻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1코린 15,57 참조). 
 
유혹은 언제나 경계하고 이길 수 없다면 피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그런데 너무나 쉽게 유혹에 넘어가는 우리는 아닐까요?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패배보다 승리 때문에 몰락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순간의 만족보다 영원한 만족을 추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승리를 좇기보다는 하늘 나라에서 승리를 좇을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나는 안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자연과 주변 사람, 생물, 집 등 모든 존재를 소중히 다룬다는 것을.

- 타이라 아이린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루카 6, 45)

 

우리의 마음이란 성찰의 부단한 담금질을 통해 깨닫게 되는 마음의 눈떰이며 마음의 간절한 기도이다. 깨닫지 못하면 우리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도 빼낼 수 없다. 마음을 들여다 보는 것에서 열매는 탄생한다. 열매는 마음을 끌어당기고 마음은 열매를 물들인다. 좋은 열매를 줄 수 있는 마음이 좋은 사람이다. 

좋은 마음은 좋은 마음으로 되돌아옴을 보게 된다. 선한 사람은 선한 마음의 곳간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는 우리의 마음으로 결정된다. 마음을 이해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도 이해할 수 없다. 

마음이 달라지지 않으면 우리의 생활도 달라지지 않는다. 서로가 쌓아놓은 어리석음의 아픈 열매들을 보게 된다. 나쁜 것들을 털어내고 버리고 비워야 마음은 되살아난다. 나의 마음이 살아나야 상대의 마음에 좋은 열매를 나누며 줄 수 있다. 

마음의 주님께서는 마음을 만나도록 우리를 일으키신다. 차갑게 굳어버린 마음을 깨뜨리시는 예수님의 선하고 진실하신 마음이다. 사랑과 마음은 분리될 수 없다. 마음에 눈먼 이는 사랑에도 눈먼 이다. 마음의 구덩이에서 올라오는 길은 구덩이를 메우고 꽃을 심는 것이다. 

마음도 대대적인 수리공사가 필요하다. 마음의 물꼬를 터주는 넘치는 마음의 주일이다. 눈먼 이들의 구덩이가 아니라 서로를 살리는 마음의 새로운 물꼬이다. 새로운 복음의 물꼬를 트니 마구 쏟아지는 은총의 새날이다. 새날은 새마음에 담고 기쁘게 나누어야 할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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