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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2월 25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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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2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7주간 금요일 -

 

 

2022년 2월 25일 연중 제7주간 금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야고보는 심판자가 문 앞에 서 계시니 심판받을 행동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되는지 묻는 바리사이들에게,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2월 25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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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야고 5장 9-12절

 

보십시오,
심판자께서 문 앞에 서 계십니다.

 


형제 여러분, 서로 원망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심판받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심판자께서 문 앞에 서 계십니다. 

10 
형제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 예언자들을 고난과 끈기의 본보기로 삼으십시오. 

11 
사실 우리는 끝까지 견디어 낸 이들을 행복하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욥의 인내에 관하여 들었고, 주님께서 마련하신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과연 주님은 동정심이 크시고 너그러우신 분이십니다. 

12 
나의 형제 여러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마십시오. 하늘을 두고도, 땅을 두고도, 그 밖의 무엇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십시오. 그래야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없애시는 분. 네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내시고, 자애와 자비의 관을 씌우시는 분.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네. 끝까지 캐묻지 않으시고, 끝끝내 화를 품지 않으시네.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은 것처럼, 당신을 경외하는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네. 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가 먼 것처럼, 우리의 허물들을 멀리 치우시네.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르 10장 1-12절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 지방과 요르단 건너편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늘 하시던 대로 다시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하고 되물으시니, 


그들이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10 
집에 들어갔을 때에 제자들이 그 일에 관하여 다시 묻자,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12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전능하신 하느님, 이 거룩한 제사에서 구원의 보증을 받았으니 저희가 실제로 그 구원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이관배 스테파노 신부 집전

 

 

2022년 2월 25일 (금)
이관배 스테파노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2월 25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이기적인 ‘나’를 지우고 ‘우리’로 하나가 되어 가는 시간.

 

오늘 복음은 이혼을 금하는 우리 교회의 입장을 뒷받침하는 주요 근거가 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혼인이 가지는 참된 의미와 신비를 묵상하게 하는 예수님의 소중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완고함’ 때문에 모세가 이혼을 용인해 준 것이지, 본디 하느님 뜻은 그렇지 않다고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창세기의 말씀(1,27; 2,24)을 직접 인용하시면서 태초부터 계획된 혼인의 신비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이처럼 남녀가 혼인을 통하여 이루는 결합은 하느님께서 창조 때 남자와 여자의 인간성 안에 부여해 놓으신 심오한 계획이 비로소 온전히 실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삼위이신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계시듯, 혼인으로 맺어진 부부 또한 서로의 사랑을 통하여 온전한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게다가 부부의 사랑은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가 나누는 사랑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표징이기도 합니다. 교회를 위하여 온전히 자기 자신을 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은, 부부가 서로에게 내주어야 하는 사랑의 본보기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부부 생활이 서로에게 상처받거나 이해받지 못할 때도 많고, 실망도 많이 하기에 순탄한 여정이 아닌 것만은 분명한 듯합니다. 예수님처럼 그렇게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주는 사랑이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렇지만 부부가 함께 걸어가는 여정에 늘 하느님의 축복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이기적인 ‘나’를 지우고 ‘우리’로 하나가 되어 가는 시간 속에, 부부의 사랑은 더욱 단단해지고 그 사랑은 서로를 신앙인으로 더욱 성장하게 하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신적인 결합을 사는 우리

 

오늘 복음의 말씀은 사실 듣기에 불편하고 불쾌하기까지 합니다. 우선 아내를 버려도 되는지 묻는 것이 불쾌합니다. 사람을 물건처럼 소유하고 버리는 대상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남자 중심의 얘기 전개이기에 불편합니다. 남자가 여자를 버려도 되는지 묻는 것이 남자 중심이고 그래서 저는 왜 여자가 남자를 버리는 얘기는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들고 '버리다니 말이 되냐?'며 주님께서 더 강하게 나무라지 않은 것이 아쉽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지는 다음의 말씀으로 분명합니다.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부부는 결합하여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이고, 그 결합이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결합이라는 것이며 그런 것이기에 사람에 의해 갈라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이것이 꼭 부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믿는 모든 이의 모든 만남은 다 이렇다고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부부의 결합이지만 부모와 자식의 결합도 부모가 이 자식을 선택한 것 아니고, 자식이 이 부모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면에서 마찬가지이고, 하느님께서 이 자식과 이 부모를 주셨다고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지요. 

수도 공동체의 형제들도 지금 이렇게 만나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 것은 나의 선택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에서 시작되었다고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고 그렇게 믿고 형제를 받아들일 때 수도 공동체는 인간적 결합에 의한 인간 집단이 아니라 하느님의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 말하지만, 부부 관계든 부모자식 관계든 수도원 형제 관계든, 모든 관계는 신적인 결합이어야만 깨지지 않고 하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야합으로는 하나가 될 수 없을뿐더러 설사 하나가 되었더라도 그것은 정치권에서 많이 볼 수 있듯이 한순간의 목적을 위해 한순간의 결합에 불과하고 곧 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적인 결합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신앙적인 결합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고, 삼위일체적인 결합을 닮으면 제일 좋을 것입니다. 

우선 사랑의 결합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결합이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결합이 아닙니다. 

이기적인 결합이란 앞서 봤듯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 합치는 야합에 불과하고, 자기중심적인 결합이란 자기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하나같이 있기를 바라는 결합인데 그런 것이기에 이런 결합은 있을 수 없거나 곧 깨어지는 결합이지요. 

사랑의 결합은 이 반대지요. 너를 위해 나의 이익을 희생하고, 너를 위해 내가 존재하는 거라고 할 수 있는데 요즘와서 저는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를 위해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굳이 희생을 한다면 한쪽의 일방적인 희생이 아니라 서로 희생하고, 어느 한쪽을 위해 있기보다는 서로를 위해 있는 것이며 이때 우리는 너와 나로 따로 있지 않고 진정 우리로 곧 하나로 있을 수 있지요. 사랑은 너에게 나를 내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로 하나되어 서로 내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신적인 결합은 사랑의 결합일 뿐 아니라 순종의 결합입니다. 서로 사랑해서 하나가 되는 결합일 뿐 아니라 하느님께서 맺어주시는 그 섭리에 순종하는 결합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사랑하고 내가 선택해서 하나가 된 것이 아니고, 내가 좋아하고 내가 찜해서 하나가 된 것은 더더욱 아니며 맺어주시는 하느님의 섭리에 순종하여 하나가 되는 것인데 내가 그를 사랑하게 된 것도 그 당시에는 나도 몰랐지만 하느님께서 그를 만나게 하시고 사랑하게 하신 거라고 믿는 것이 우리 믿음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뭐, 십일조가 부부관계도 회복시킨다고?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마르 10,2)라는 주제로 예수님을 시험하려 듭니다. 예수님께서 모세는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냐고 물으시니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마르 10,4)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문제를 ‘창세기’로 끌어올리십니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 10,6-9)

왜 예수님은 부부 문제를 창조할 때로 끌어올리실까요? 부부고 창조자의 의도 안에서 살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부부의 이혼 사유 중 가장 큰 것이 ‘성격 차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1. 비난, 2. 방어, 3. 경멸, 4. 벽 쌓기, 위 네 가지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면 이혼으로 간다고 합니다. 비난은 말 그대로 남 탓을 하는 것이고, 방어는 자신의 탓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며, 경멸은 자신을 무시하는 상대를 미워하는 감정이고, 벽 쌓기는 아예 상대와 대화를 섞을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다 상대를 ‘판단’하는 데서 오고 더 근원적으로는 자신이 모든 것을 ‘옳고 그름’으로 양분하여 판단하는 시스템의 인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EBS 부모 – 아이 교육법, 달라도 너무 달라요’에 아이들 양육 태도가 너무나 다른 부부가 나왔습니다. 엄마는 아이들이 잘못할 때 ‘타이르자’라는 주의이고 아빠는 ‘단호하게 훈육하자’라는 주의입니다. 부부는 서로 너무 안 맞아 남자가 먼저 답답해서 TV 출연을 제안한 것입니다. 

첫째 아이는 남자이고, 둘째 아이는 여자아이입니다. 여자아이는 태어나서 얼마 안 되어 평생 장애로 살 수 있다는 진단을 받고 힘겹게 병원 생활로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아무래도 첫째 아이가 소외되어 부모로부터 사랑을 덜 받는다고 느낄 것입니다. 아빠는 최선을 다해 첫째 아이에게 사랑을 주지만 아이는 항상 외롭습니다. 부모가 자신을 버리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둘째 딸도 몸이 아프기에 나름 부모의 사랑을 더 확인하려 합니다. 그 방법이 물고 할퀴는 것입니다. 첫째는 동생이 자신을 물고 할퀴었다고 엄마에게 이릅니다. 아빠는 둘째를 꽉 잡고 훈육합니다. 그러나 그런 강제적인 훈육보다는 엄마는 타이르자는 주의입니다. 

전문가들은 아빠가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음을 알았습니다. 장애인 형이 있어서 소외를 당한다고 느꼈고 부모는 매일 이혼하겠다고 부부싸움을 하였습니다. 부모가 창조자로서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나는 ‘생존’에 대한 집착을 하게 되고 그러면 모든 것을 ‘옳고 그름’으로 보게 됩니다. 그래서 아빠는 자녀들이 하는 행동을 또한 창조자로서가 아니라 심판관처럼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가 자신의 훈육법을 무시한다고 느낄 때 여전히 외롭고 고통스러웠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이 중요하게 여겨지고 이해받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사실 부모에게 받지 못했던 사랑을 아내에게 원하고 있었는데 아내는 또 그런 마음을 이해해 줄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빠는 온전한 창조자, 곧 모든 생존의 책임을 져주는 부모와 함께 있지 못하기에 자신도 또한 아내와 자녀들을 옳고 그름, 비난 등으로 화를 내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아내와 자녀들을 심판하고 마음으로 비난하게 된 이유는 그 부모가 충분한 창조자의 역할을 다해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생존을 신경 쓰게 만들었고 그 생존 문제 때문에 사람을 심판하고 비난하는 사람이 되게 만든 것입니다. 

아내가 제일 듣기 싫은 말 1위는 무엇일까요? 여기서 굳이 쓰기는 뭐하고, 그냥 남편이 아내를 자신이 돈 벌어오는 것을 낭비한다는 뉘앙스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난 돈 버는 데 넌 뭐 했느냐는 것입니다. 또 남자가 아내에게 듣기 싫어하는 말 1위는 능력 없다고 무시당하는 말입니다. 돈도 많이 못 버는 주제에 쪼잔하기까지 하다고 말하면 남자는 뒤집힙니다. 다 무엇과 관계됩니까? ‘생존’입니다. 그냥 주님께 이 문제를 다 맡겨드릴 수만 있다면 상대를 비난할 일이 없습니다. 

상대를 판단하고 비난한다는 말은 자신보다 더 높은 권위의 분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하루는 아내가 감자를 삶아서 남편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남자가 감자를 찍어 먹더니 “이거 뭐야? 설탕이잖아. 감자를 어떻게 설탕에 찍어 먹어? 소금 가져와!” 그러자 아내가 “감자를 누가 소금에 찍어 먹어요? 설탕에 찍어 먹지!”라고 말했습니다. 설탕을 찍어 먹든, 소금을 찍어 먹든 상대를 비난할 일은 아닐 것입니다. 이 일이 “너희 집안 씨가 그렇지!”라는 가족까지 비난하는 싸움이 되었습니다. 급기야 이혼하게 되어 판사 앞에 섰습니다. 그들이 판사에게 물었습니다. 

“판사님. 하나만 물읍시다. 판사님은 분명 좋은 집안에서 자라셨을 텐데, 판사님 집안은 감자를 소금 찍어 드시나요, 아니면 설탕 찍어 드시나요?”

판사는 말합니다. 

“아, 저희 집안은 감자를 신김치에 싸 먹습니다.”

소금을 찍어 먹든 설탕을 찍어 먹든 그것은 상대를 비난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비난하는 마음은 그것이 의미 없게 만드는 한 대상을 만날 때 사라집니다. 창조자 하느님께서 그러한 분이십니다. 그분 앞에서는 나의 생존을 위해 발생하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의미 없어집니다. 그러니 부부관계를 위해 창조자 하느님을 앞에 두고 사는 게 얼마나 중요할까요?

우리가 상대를 판단하는 이유는 창조자 하느님을 앞에 두고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모 앞에서 형제끼리 싸운다면 부모는 누구 편을 들어주어야 할까요? 부모 앞에서 싸우면 옳고 그름의 문제는 사라집니다. 그냥 부모 앞에서 싸우는 것 자체가 옳지 않은 행위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유명한 정치인은 두려울 것이 없는데 어머니가 제일 두렵다고 합니다. 자신이 무슨 주장을 하려면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합니다. 

“내가 너를 낳았고 너를 길렀다. 이제 말해봐, 뭐.”

옳고 그름도 내가 생겨나고 나서야 의미가 있습니다. 내가 창조되지 않았다면 옳고 그름도 분별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옳고 그름을 분별할 자격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미 내가 창조자의 지위에 올랐다는 말과 같습니다. 창조의 목적에 어긋나면 그른 것이고 창조의 목적에 순응하면 옳은 것입니다. 창조자도 나의 옳고 그름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자녀들이 사이좋게 잘 지내기를 원할 뿐입니다. 

이를 위해 당신을 창조자 하느님 아버지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는 선악과를 바치도록 명하셨습니다. 그 선악과를 바치지 않고 자신이 생존의 문제를 책임지려 했을 때의 결과가 어떻습니까? 이웃을 심판하는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왜 그런 죄를 지었느냐는 질문에 아담은 하느님께 이렇게 따집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창세 3,12)

이 말 안에는 자신의 잘못이 여자 때문이었다고 말하는 동시에 그 여자를 만들어준 하느님도 판단하는 마음이 들어있습니다. 하느님은 대번에 하와와 당신을 판단하는 아담이 죄의 상태에 있음을 아셨습니다. 이렇게 된 근본 원인이 자신의 생존을 자신이 책임지려고 선악과를 자신의 것으로 취한 데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을 창조자요 우리 모든 생계를 책임지는 주님으로 여기는 ‘십일조’를 바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십일조가 남을 심판하는 마음을 줄어들게 하고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형제들이 되게 만드는 신앙고백임을 잊지 맙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거짓말하지 마라.

 

뉴스를 보면 우리 주변에 추하고 악독한 사람이 참 많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정직함과 성실로 좋은 모범을 보여주는 사람보다 거짓과 편법으로 사는 사람이 삶을 더 편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때 지금 내가 하는 정직과 성실이 과연 옳으냐는 의문이 생깁니다. 하지만 거짓과 편법으로 사는 삶은 떳떳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누군가와 비교하기보다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께도 부끄럽지 않은 삶이고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제 어머니께서 생전에 늘 강조하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거짓말하지 마라.” 
 
거짓과 편법은 언젠가 다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드러났을 때의 후유증은 나중에 수습하기 힘들 정도로 커지게 됩니다. 거짓과 편법을 속이기 위해 또 다른 거짓과 편법이 더해지기 때문입니다. 
 
남들과 비교하면서, “남들도 다 그렇게 한다”라면서 거짓과 편법을 당연하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정직함과 성실함만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해주며, 자기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줍니다. 
 
주님께서는 이 정직함과 성실함을 가지고 새로운 계명을 주십니다. 당시 구약 율법에는 이유가 있으면 여자를 쫓아내고 이혼장을 써주라고 했습니다(신명 24,1-4). 유배 이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결혼은 일종의 매매 계약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여자는 남자의 소유물이기에 여자에게 재산 소유권, 상속권을 주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이혼에 대한 권한도 여자에게는 없었습니다. 
 
이 과정 안에서 여자는 소외되고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자는 여자를 내쫓기 위한 이유를 만들기 위해 거짓과 편법을 사용했습니다. 이는 하느님 뜻이 분명히 아닙니다. 창조 때 하느님 남자와 여자로 만들어 둘이 한 몸을 이루게 하신 것을 다시 굳건하게 세우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 10,9) 
 
이것이 혼인의 불가해소성입니다. 그리고 이 원칙은 인간 존중을 위한 것으로 지금까지도 내려오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진실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께 진실하고 떳떳한 사람은 내 배우자와 가족, 그 밖의 사람들에게도 떳떳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과 편법만을 일삼는 사람은 그 누구에게도 떳떳해질 수 없고, 무엇보다 주님 앞에서도 떳떳할 수 없기에 주님께 외면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나는 언제나 외부에서 힘과 확신을 갈구했지만 그것은 내면에서 나왔다.

- 안나 프로이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마르 10,8)

 

주님께서 혼인의 길을 가르쳐 주신다. 한몸을 만들지 않고서는 유지될 수 없는 혼인의 길이다. 한몸의 방향이 가정을 지키는 책임이며 곧 참된 사랑의 마음이다. 주님께서는 쓰러진 혼인을 다시 일으켜 세우신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혼인의 축복이다. 함께 사는 일은 결혼생활도 수도생활도 쉽지 않다. 끼어들 다른 것들이 너무 많은 요즈음의 결혼생활이다. 최상과 최악은 언제나 가까이 있다. 분별할 지혜가 필요하다. 

사랑하는 법을 아파하며 다시 배워야 한다. 흙으로 빚은 사람들이 부부로 하나가 되는 것은 서로를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해와 사랑은 분리될 수 없다. 이해와 사랑 나눔과 소통으로 오고가는 것이 혼인 안에서 한 몸이 되는 한 몸의 여정이다. 

서로를 품지 않고서는 서로를 내어주지 않고서는 한 몸이 될 수 없다. 한 몸이 갈라지면 남는 게 없다. 갈라놓을 수 없는 혼인의 결합이다. 함께한 세월이 깊어갈수록 혼인의 마음또한 깊어가길 기도드린다. 

좋은 마음이 좋은 한 몸이 되는 신비이다. 주님께서는 혼인의 그 마음을 다시 찾아주신다. 두 마음이 아니라 한 마음이다. 한 마음 한 몸안에 한 분이신 하느님이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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