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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2월 24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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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2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7주간 목요일 -

 

 

2022년 2월 24일 연중 제7주간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야고보는 부자들에게 닥쳐오는 재난을 생각하며 소리 높여 울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작은 이들을 죄 짓게 하는 자는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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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야고 5장 1-6절

 

일꾼들에게서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그 아우성이 주님 귀에 들어갔습니다.

 


자 이제, 부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닥쳐오는 재난을 생각하며 소리 높여 우십시오. 


그대들의 재물은 썩었고 그대들의 옷은 좀먹었습니다. 


그대들의 금과 은은 녹슬었으며, 그 녹이 그대들을 고발하는 증거가 되고 불처럼 그대들의 살을 삼켜 버릴 것입니다. 그대들은 이 마지막 때에도 재물을 쌓기만 하였습니다. 


보십시오, 그대들의 밭에서 곡식을 벤 일꾼들에게 주지 않고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곡식을 거두어들인 일꾼들의 아우성이 만군의 주님 귀에 들어갔습니다. 


그대들은 이 세상에서 사치와 쾌락을 누렸고, 살육의 날에도 마음을 기름지게 하였습니다. 6 그대들은 의인을 단죄하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대들에게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이것이 자신을 믿는 어리석은 자들과, 그 말을 좋아하며 따르는 자들의 운명이다. 그들은 양들처럼 저승에 버려져, 죽음이 그들의 목자 되리라.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아침에는 올곧은 이들에게 짓밟히고, 저마다 그 모습이 썩어, 머나먼 저승으로 사라지리라. 하느님은 내 영혼을 구원하시고, 저승의 손아귀에서 기어이 빼내시리라.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누군가 부자가 된다 하여도, 제집의 영광을 드높인다 하여도, 부러워하지 마라. 죽을 때는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으며, 영광도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한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네가 잘한다고 사람들이 칭찬한다.” 사는 동안 스스로에게 말할지라도, 조상들이 모인 데로 내려가, 다시는 빛을 보지 못하리라.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르 9장 41-50절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42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43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4)·45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6)·47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8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49 
모두 불 소금에 절여질 것이다. 50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전능하신 하느님, 이 거룩한 제사에서 구원의 보증을 받았으니 저희가 실제로 그 구원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정민규 도미니코 신부 집전

 

 

2022년 2월 24일 (목)
정민규 도미니코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2월 24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우리의 손과 발, 그리고 눈은 지금 자기 역할에 충실합니까?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이 섬뜩한 말씀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적잖이 당황하곤 합니다. 너무 극단적이라는 생각이 들지요. 솔직히 나약한 인간이 죄짓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닐 텐데, 그럴 때마다 몇 개 되지도 않는 주요 신체 부분들을 정말로 하나둘 잘라 버리라는 말씀이신지 묻게 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실제로 그렇게 하라는 의도로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전달하고자 하는 바(‘죄짓지 않아야 함’)를 과장되게 표현해서 듣는 이들에게 강렬한 효과를 주는 수사학적 방법을 택하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손과 발을 잘라 버려라.’, ‘눈을 빼 던져 버려라.’와 같은 다소 충격적인 표현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보다는 죄와 관련한 우리의 내적 성찰을 더 강화해서 죄짓는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체의 주요 부분 가운데 특히 손과 발, 그리고 눈이 언급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인간의 온갖 행위를 돕는 ‘손’은 악행을 저지를 때에도 가장 많이 사용되는 부분입니다. 인간의 공간적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발’은 우리를 악행의 현장으로 이끄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인간의 시각적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눈’은 악행을 저지르고자 하는 다양한 유혹이 들어오는 창구가 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선을 위하여 쓰도록 이 모두를 손수 우리에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손과 발, 그리고 눈은 지금 자기 역할에 충실합니까? 아니면 악행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습니까? 주님 보시기에 선하고 좋은 역할만 하는 아름다운 손과 발, 그리고 사랑스러운 눈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외눈박이로라도.

 

오늘 독서와 복음은 둘 다 우리가 이 말씀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먼저 야고보서를 보면 부자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자 이제, 부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닥쳐오는 재난을 생각하며 소리 높여 우십시오." 

우리 중 대부분은 "자 이제, 부자들이여"라는 듣는 즉시 이는 내게 하는 말이 아니라고, 곧 부자들에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의 나눔을 읽으시는 분 거의 모두가 나는 부자가 아니라고 생각하시잖아요? 

나는 돈이 많지 않을 뿐 아니라 오늘 야고보서가 얘기하는 부자들이 저지르는 여러 죄, 곧 임금을 떼먹는 짓이나 사치와 쾌락을 즐기는 행위나 의인을 단죄하고 죽이는 행위는 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엄하게 성찰한다면, 특히 영적으로 자신을 성찰한다면 나는 부자가 아니고 죄인도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선 부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나는 얼마를 가져야 부자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백억 이상을 가졌거나 상위 1%에 속하는 사람만 부자라고 생각하는 건 아닙니까? 

주님께서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을 때 액수를 말하지 않으셨지요. 

집 한 칸 없이 가난해도 하느님 나라보다 이 세상의 부를 더 집착한다면 그것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부자가 아니겠습니까? 

다음으로 우리가 죄인 아니라고 한다면 어떤 죄를 지어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판공성사 때가 되면 고백소에 들어와서는 자기는 죄가 없어서 고할 것이 없지만 봐야 한다고 하니 들어왔다는 분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살인죄나 사기죄 같은 큰 죄를 지은 사람만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죄를 짓지 않은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는 최후 만찬 때 주님께서 지금 같이 식사하는 사람 중 하나가 당신을 팔아넘길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모든 제자가 말한 것과 같습니다. 

물론 유다처럼 주님을 팔아넘기지는 않았지만 유다처럼 주님을 배반한 제자들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설렁설렁 성찰하고 관대하게 죄를 적용하려는 우리에게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는 죄를 엄격하게 자신에게 적용하고 죄를 칼같이 끊으라고 단호하게 요구하십니다.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죄 짓게 하면 눈을 빼고, 손발을 절단함으로써 죄를 끊으라고 하시는데 실은 눈과 손발을 끊어버리고 죄를 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선택입니다. 

그렇습니다.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 귀한 것들을 버려도 좋을 정도로 귀한 것 곧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끊으라는 주님 말씀은 단호하고 살벌한 명령이 아니라 너 자신을 위해 하느님 나라를 선택하라는 간절한 호소입니다. 외눈박이로라도 제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라는 호소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내가 맛을 간직한 소금인지, 맛을 잃은 소금인지 알아보는 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소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소금을 몇 년 동안 그대로 두면 짠맛을 잃게 된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그런 쓸모없는 소금을 불 속에 없었습니다. 우리도 짠맛을 잃으면 그런 소금처럼 불 속으로 들어가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내가 짠맛을 잃었는지, 아니면 소금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맛을 잃은 소금은 다른 사람을 죄짓게 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마르 9,42)

우리가 누군가에게 죄를 짓게도 하고 짓지 않게도 하는 영향력을 지녔다는 뜻입니다. 다른 이를 죄에서 벗어나게 하는 영향력을 주면 그 사람은 짠맛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리고 지옥 불에 들어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세상은 인간의 운명은 타고나는 것이지 사람이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여깁니다. 정말 그럴까요? 환경의 힘은 상상 이상입니다. 『다정함의 과학』의 저자 ‘켈리 하딩’은 6살 생일 때 특별한 체험을 합니다. 부모님이 마술사를 불러 자신과 친구들에게 생일파티를 열어준 것입니다. 그때 수건에서 흰 토끼가 나오기도 하고 어항과 금붕어가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마술사는 그녀에게 금붕어가 든 어항을 선물하였습니다. 켈리는 그 금붕어를 스누피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좋아하였습니다. 

다음 날 아침 켈리는 스누피가 보고 싶어서 가장 먼저 어항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스누피가 죽어서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우울해진 켈리가 울자 엄마는 이렇게 위로해 주었습니다. 

“얘야, 금붕어는 원래 오래 살지 않아. 이제 떠날 때가 되었던 거야.”

그런데 자라면서 엄마의 말이 거짓인 것을 알았습니다. 금붕어는 환경만 좋으면 20~30년도 살 수 있습니다. 작은 봉지에서 스트레스를 받았던 금붕어가 유리 어항에 혼자만 들어있어서 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그녀는 사람도 환경의 영향을 받는지에 대해 궁금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비만은 개인 성향의 차이일까, 아니면 환경의 영향이 클까를 연구했습니다. 뉴욕에서 소호 스프링가에서 업타운으로 향하는 C라인 지하철을 타면 10명 중 한 사람 정도가 비만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맨해튼에서 북쪽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고 20분 정도(10㎞) 가면 할렘의 웨스트 125번가가 나오는데 여기는 네 명 중 한 명이 비만입니다. 마찬가지로 어퍼 이스트사이드의 96번가에서 6호선 업타운 행을 타고 8㎞ 정도 북쪽으로 가서 브롱크스에서 내리면 비만은 세 명 중 한 명으로 증가합니다.

거리가 멀지 않은 같은 뉴욕 시내에서도 이런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정말 유전적으로 비만이 될 사람들이 그곳에 몰려 사는 것일까요? 그러면 지역에 따른 편차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원인은 환경 때문입니다. 비만이 되는 음식을 파는 식당들을 찾기 어려우면 그 지역에서는 비만율이 낮다고 합니다. 

사람은 환경에 지배를 받습니다. 그 환경을 좋아하면 그 환경을 닮아갑니다. 아기에게 환경이 되어주는 부모나 어른들이 곧 아이들의 소금입니다. 그 짠맛을 간직하였다면 아이는 건강하게 성장할 것이고 짠맛을 잃었다면 아이들은 동물의 본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옥사나 말라야’는 세 살 때 알코올 중독에 걸린 부모에게 버려졌습니다. 추운 겨울에 버려진 그녀는 본능적으로 따듯한 곳을 찾아 움직였습니다. 그녀가 찾아간 곳은 바로 개들이 사육되고 있던 오두막입니다. 그들의 부모는 그녀를 다시 찾지 않았습니다. 옥사나는 날고기와 개 사료를 먹으며 살아남았습니다. 

그렇게 5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 우연히 옥사나가 발견되었을 때 그녀의 모습은 이미 사람인지 들개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행히 사람에게 발견이 되었지만, 옥사나가 인간성을 가질 수 있게 되었을까요? 그녀는 인간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네 발로 걷고 개처럼 짖었습니다. 네 발로 나무를 단숨에 뛰어넘는 모습은 영락없는 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옥사나를 보면서 강아지에게서 보는 귀여움을 느낄 수 없을까요? 우리는 사람이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그 옥사나에게서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되지 못하는 옥사나가 안타까운 것입니다. 이것이 이미 인간의 본성을 지닌 사람의 시선입니다. 이 때문에 바꾸고 싶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옥사나에게 정말 오랜 시간 인간답게 사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인간의 옷을 입히고 머리카락을 다듬었습니다. 그런데 옥사나는 자신을 인간으로 생각할까요, 아니면 아직도 개라고 생각할까요? 두 발로 걷는 것을 배우기는 했지만, 여전히 네 발로 걷는 것이 더 안정적으로 보입니다. 사람이 보이지 않으면 네 발로 걸으며 개처럼 으르렁거립니다. 그녀는 자신이 아무리 인간의 모습이라 하도 생존하기 위해 순종하는 것이었고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개라는 믿음이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에게 만들어줄 수 있는 환경이란 바로 ‘내가 누구냐는 믿음’을 주는 것입니다. 부모가 짐승과 같다면 자녀도 짐승과 같은 존재라 여기고 그렇게 자랍니다. 어렸을 때 우리가 종교교육을 제대로 해줘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사춘기는 더는 부모에게 영향을 받지 않는 시기입니다. 다른 성장의 환경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좋은 환경이 제공되지 않으면 아이는 마치 개 우리에서 성장하는 것처럼 세속적인 사람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기 전 첫영성체 때 정말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고 그분들의 환경에서 살게 해야합니다. 

소금의 역할이란 나의 환경에 있는 사람들을 주님의 환경 안에서 살게 하는 일입니다. 아기가 태중에서 성장하는 것처럼, 우리는 하느님의 태중에서 성장한다고 믿게 하는 일입니다. 옥사나는 자신이 부모와 같은 인간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소금의 짠맛을 잃었던 부모입니다. 우리가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짠맛을 유지하려면 내 환경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 본성이 하느님이라는 믿음을 주어야 합니다. 내 안에 머무는 이들은 이 믿음에 따라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소금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소금은 나의 짠맛을 가장 잘 확인할 방법은 자녀를 보는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를 사랑하여 부모의 환경 안에 머뭅니다. 그리고 부모가 만들어주는 환경대로 자랍니다. 내가 키운 아이들이 죄에서 끊임없이 벗어나고 있다면 나는 짠맛의 소금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환경입니다. 
나와 함께 머물기를 원하는 이들이 동물의 본성에서 벗어나고 있나요? 그러면 나는 짠맛을 간직한 소금입니다. 지옥 불에 떨어질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와 함께 머무는 이들이 돈에 대한 욕심과 성적인 즐거움, 교만한 말과 행동을 더 찾게 된다면 나는 맛을 잃은 소금입니다. 나와 함께 머무는 이들 대부분이 어떤 방향으로 가는지 살펴보십시오. 내가 곧 이웃의 환경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심리적 온도를 높이는 삶

 

사회 심리학자 한스 이저맨이 실험을 했습니다. 그는 학생들에게 각각 다른 주인공이 나오는 이야기를 읽게 했습니다. 주인공은 배려와 공감을 잘하는 인물과 유능하고 창의적인 인물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다 읽은 학생에게 “지금 실내 온도가 어떻게 될까요?”라고 물었습니다. 그 결과 특별한 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배려하는 인물이 나오는 이야기를 읽은 학생이 다른 학생보다 실내 온도를 2도 높게 추정하는 것입니다. 
 
따뜻한 사회는 단순히 물리적인 온도를 높이는 사회가 아닙니다. 심리적 온도를 높이는 사회로, 서로 배려하고 상대방에게 깊은 공감을 해 줄 때 가능합니다. 
 
심리적 온도를 높이는 것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죄를 멀리하고 사랑을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이런 삶을 충실히 살고 있습니까? 혹시 여전히 심리적으로 춥게만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를 위해 자신이 그 따뜻함을 받으려고 하기보다 먼저 다른 이에게 따뜻함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르 9,41) 
 
당시는 지도층과 권력자들만을 중시하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히려 미미하다고 할 수 있는 자들을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당신 스스로가 먼저 세리, 병자, 창녀와 같은 죄인이라고 불렸던 사람들을 먼저 찾아가셔서 적극적인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물 한 잔이 아니라 모든 갈증을 해소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물 한 잔’을 주는 사람은 상대방에 관한 관심이 있음이 분명합니다. 관심이 없으면 그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관심과 공감 그리고 배려의 마음이 주님의 인정을 받아 하늘에서 상을 받게 합니다. 이렇게 사랑을 실천하기도 쉽지만, 세상은 죄로 더 가득한 것 같습니다. 너무 많아서 이제는 죄지은 것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습니다. “남들도 다 그렇게 해.”, “어쩔 수 없었어.” 등의 핑계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죄의 뿌리 자체를 뽑아버리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손이 죄의 뿌리면 손을 잘라 버리고, 발이 죄의 뿌리면 발을 잘라 버리고, 눈이 죄의 뿌리면 눈을 뽑아버리라고 하십니다. 진짜로 손과 발을 잘라버리고 눈을 뽑으라는 것이 아니라, 죄의 뿌리를 뽑아서 버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죄의 뿌리는 사랑을 통해 뽑아낼 수 있습니다. 가장 작은 사랑의 실천도 주님의 큰 힘으로 죄를 끊을 수 있게 합니다. 
 
이렇게 사랑으로 가득 찬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의 자리가 따뜻한 사회가 됩니다.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어 가는 중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세상에서 가장 큰 행복은 한 해가 끝날 때 그해의 처음보다 더 나아진 자신을 느낄 때이다.

- 톨스토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마르 9,43)

 

뒤돌아보면 결단과 결심이 많이 부족했다. 결단해야 할 것이 한 둘이 아니다. 부족한 결단을 주님께 봉헌한다. 믿음은 결단과 함께 간다. 결단은 우리자신을 속이지 않는다. 참된 만남은 결단의 방식으로 서로를 서로를 살린다. 신앙의 축은 결단이다. 

결단으로 참된 가치는 새롭게 회복된다. 참된 출발은 우리의 악습을 잘라내는 결단이다. 사람과 양심 사이에는 결단이 있다. 신앙의 여정은 결단의 연속이다. 악습을 잘라낸 자리에서 부활은 이루어진다. 

결단의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한다. 결단이 중심이 되지 못하면 우리의 생활은 바뀔 수 없다. 결단은 변화이다. 결단은 참된 자유이다. 하느님께 가는 길은 악습을 잘라내고 뽑아내는 결단의 길이다. 

결단이 우리의 오늘을 살리고 우리의 만남을 새롭게 함을 진실로 믿는다. 참된 실천은 잘라내고 뽑아내는 신앙인의 정체성이다. 잘라내고 뽑아야 할 것은 우리의 거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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