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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2월 23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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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2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 폴리카르포 주교 순교자 기념일 -

 

 

2022년 2월 23일 (수) 성 폴리카르포 주교 순교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성 폴리카르포 주교 순교자 기념일

 

폴리카르포는 요한 사도의 제자로 스미르나 곧 오늘날 터키 이즈미르 지역의 주교였습니다. 그는 특히 정통 교리의 열렬한 수호자로 여러 이단들과 격렬한 투쟁을 벌였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당시 이교적 교리에 심취하였던 아우렐리우스 황제에게 체포되어 166년경 순교했습니다. 폴리카르포 주교는 사도 시대와 이후의 교회를 연결하는 위대한 기록자이자, 2세기 그리스도교 최고의 지도자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 오늘 제1독서

 

야고보는 우리가 우리의 생명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기에, ‘주님께서 원하시면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2월 23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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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야고 4장 13-17절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명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하
말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13 
자 이제, “오늘이나 내일 어느 어느 고을에 가서 일 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 하고 말하는 여러분! 

14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15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16 
그런데도 여러분은 허세를 부리며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입니다. 

17 
그러므로 좋은 일을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곧 죄가 됩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모든 백성들아, 잘 들어라. 세상 모든 사람들아, 귀를 기울여라. 천한 사람 귀한 사람, 부유한 자 가난한 자 다 함께 들어라.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뒤쫓는 자들이 악행으로 나를 에워쌀 때, 그 불행한 날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랴? 그들은 자기 재산만 믿고, 재물이 많다고 자랑한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어찌 구원하랴? 하느님께 제 몸값을 치를 수도 없거늘. 그 영혼의 값 너무 비싸, 언제나 모자란다, 그가 영원히 살기에는, 구렁을 아니 보기에는.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정녕 그는 보리라, 지혜로운 이도 죽고, 어리석은 자도 미욱한 자도 사라진다. 재산을 남들에게 남겨 둔 채 모두 사라지리라.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르코 9장 38-40절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그때에 

38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이 거룩한 신비에 참여하고 비오니 저희에게 굳센 정신을 심어 주시어 저희가 복된 폴리카르포처럼 언제나 주님을 충실히 섬기며 온갖 고난을 꿋꿋이 이겨 내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이관배 스테파노 신부 집전

 

 

2022년 2월 23일 (수)
성 폴리카르포 주교 순교자 기념일
이관배 스테파노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2월 23일 (수)
성 폴리카르포 주교 순교자 기념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더 ‘좋은 일’에 우리의 소중한 시간을 내어 주기

 

현대인들은 대개 바라는 목표를 이루고자 빈틈없이 계획을 세우고, 그렇게 정해진 시간표대로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는 데 익숙합니다. ‘시간이 없다’, ‘바쁘다’는 표현을 습관처럼 사용하는 사회에서 정해진 시간을 잘 쪼개어 쓸 줄 아는 사람은 칭송을 받지만, 시간을 허투루 보내거나 낭비하는 사람은 한심한 취급을 받습니다.

이 세상의 삶은 죽음으로 한정된 시간이기에 그 가치는 더욱 귀하게 여겨집니다. 그런데 그렇게 귀한 시간이 주로 무엇을 얻으려는 데 소비되는지 들여다보면, 많은 경우 현세에서 가지고 싶거나, 되고 싶거나, 누리고 싶은 것을 얻고자 사용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주님의 선물임을 일깨워 줍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현세의 시간을 언제까지 허락하실지 우리는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고귀한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물론 먹고 사는 일도 중요하고, 각자 종사하는 일에 보람을 느끼며 살 권리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로지 현세의 가치만 좇으면서 주님께 받은 한정된 시간을 모두 써 버린다면, 오히려 그것이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약속된 하느님 나라를 구하는 일, 곧 기도와 말씀 읽기, 이웃 사랑 실천에도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내세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행복은, 현세에서 우리가 어떻게 시간을 보내느냐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의 마지막 말씀을 기억하며 더 ‘좋은 일’에 우리의 소중한 시간을 내어 주면 좋겠습니다.

“좋은 일을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곧 죄가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한 줄기 연기가 분향 연기가 되도록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우리의 생명과 인생이 '한 줄기 연기'라는 표현이 전에는 지나쳐버렸던 표현인데 오늘 눈에 들어옵니다. '한 줄기 연기'는 '풀잎 끝의 이슬'처럼 인생의 덧없음, 인생무상과 허무함을 대표적으로 표현하는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의 인생은 진정 이렇게까지 덧없고 허무한 것입니까? 그리고 인생을 꼭 이렇게까지 얘기를 해야 하겠습니까? 이것을 이십 대 청춘들이 들으면 창창한 앞날을 시작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때는 저도 이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아니, 불과 5년 전만 해도 저는 이 말을 흘려버렸지요. 그러니 이 말은 나이 먹은 사람에게나 들리고 유효한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은 누구에게나 유효한 말이고, 이 말은 인생의 덧없음과 허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우리가 무엇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것이 하느님 뜻과 잇닿아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오늘 야고보서는 오늘이나 내일 어디 가서 이렇게 돈을 벌겠다는 사람에게 그것은 허세를 부리고 자랑이나 하는 것이라며 그렇게 얘기하기보다는 이렇게 얘기해야 한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 무얼 원하시는지 살피지 않고 하는 계획과 실행은 한 줄기 연기처럼 흩어져버리고 말겠지만 살아있는 동안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면 영원하신 하느님과 잇닿아 있는 것이니 괜찮다는 뜻일 겁니다. 

제가 러시아 시베리아 갔을 때 참으로 인상적인 것이 있었습니다. 시베리아가 매우 춥고 바람도 엄청날 거라고 생각하고 갔는데  제가 갔을 때는 바람이 그리 세지 않았고 습도가 그리 높지 않았지요. 그래서 연기가 전혀 흩어지지 않고 하늘 끝까지 똑바로 쭉 올라가는 거였습니다. 

태어나서 흩어지지 않는 연기를 처음 봤는데 이럴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과 땅이 하늘과 연결되는 느낌이 같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인생과 우리가 하는 일이 한 줄기 연기와 같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면 이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한 줄기 연기가 분향 연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바람에도 흩어지지 않고 직통으로 하느님께 가 닿을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사랑으로 하는 일이요, 이 세상에서 끝나는 허무한 일이 아니라 천국에다 공로를 쌓는 일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속 좁은 사람이 믿지 못하는 이유 ; 믿음을 옳고 그름의 문제로 보기 때문.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속 좁은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닌데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았는데, 그를 막아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누가 마귀를 쫓든 마귀가 쫓겨나면 좋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요한은 왜 그렇게 했을까요? 바로 자신의 입지가 줄어들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면 안 된다고 했는데, 이는 예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생존에도 위협이 되기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은 마음이 매우 넓으십니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 9,39-40)

우리는 왜 속이 좁아질까요? 단순합니다. 나의 생존만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존만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나의 생존에 위협이 됩니다. 그래서 불쑥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몰라 몸을 잔뜩 웅크립니다. 나의 생존에 도움이 되면 옳은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옳지 않은 것으로 분별합니다. 

초보 운전자를 생각해봅시다. 초보 운전자는 의자를 앞으로 바짝 당기고 백미러나 룸미러를 볼 생각도 안 하고 자신의 앞만을 봅니다. 하지만 운전이 능숙해지면 도로의 현황을 한눈에 파악하는 것은 물론이요, 주위의 경관도 살피며 여유롭게 운전합니다. 만약 누가 위험하게 끼어들기라도 하면 브레이크를 잡으며 양보를 합니다. 그런 사람들로 운전하는 즐거움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초보 운전자 앞에 누가 끼어들면 그리 위험하지도 않은 상황이었는데도 왜 운전을 그따위로 하느냐며 불같이 화를 냅니다. 상대의 행위를 옳지 못한 행위로 단정한 것입니다. 

보복 운전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전히 자기 생존만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아주 조금 자존심이 상해도 자신이 죽을뻔한 것처럼 화를 냅니다. 그래서 보복을 하지 않으면 식성이 풀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속 좁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아마 조직 폭력배처럼 언제라도 생명의 위협을 당할 수 있어 매우 긴장된 삶을 사는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존에 아주 조금만 위협이 되는 것도 옳지 못한 일이라고 여기고 응징하려 듭니다. 

따라서 마음이 넓은 사람이 되려면 안 죽는다고 믿으면 됩니다. 초보 운전자는 혹시 운전 잘못하면 사고가 나서 다치거나 죽을 수 있다고 여기지만 수천 번 운전을 한 사람은 당연히 오늘도 죽지 않을 것을 압니다. 그러니 마음이 여유로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

어떻기 우리가 죽지 않는다고 믿을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두 번째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신 다음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셔도 부활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고, 우리도 그런 사람이 될 것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어린이도 받아들일 수 있는 포용력이 생긴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마음 넓은 사람은 그리스도를 따라 죽으면 반드시 부활할 것임을 믿는 사람입니다. 어떤 순교성인은 나이가 너무 어려서 자신의 목을 치는 사람이 힘들까 봐 자신의 목을 늘려주었습니다. 이런 마음은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믿음에서만 나옵니다. 

사람이 어떻게 부활할 수 있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세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보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죽어서 심판도 없고 내세도 없고 창조주도 없다는 것을 증명해보라고 하십시오. 그것도 증명할 수 없습니다. 부활이 있건 없건 이것은 둘 다 증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선택’의 문제이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냥 믿고 넓은 마음으로 살던지, 아니면 믿지 않고 두려움 속에 속 좁은 사람으로 살던지는 선택에 달린 것입니다. 

어차피 한 인생 사는데 노련한 운전자처럼 죽음 걱정 안 하고 좋은 경관도 즐기며 살다가 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왜 굳이 좋은 삶의 길이 있는데 질이 나쁜 것을 선택하며 살아야 할까요? 이처럼 선택하면 그만인데 이것도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려는 어리석은 사람이 속 좁은 사람입니다. 

옛날에 돌쇠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시 신을 사려면 집에서 종이 위에 자신의 발을 그려서 그것을 내밀면 그 크기에 맞는 신발을 주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돌쇠가 신발을 사려는데 자신의 발 치수를 그려놓은 그림을 가져오지 않은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 그 종이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시장은 다 닫혀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어떤 사람이 말했습니다. 

“아니, 돌쇠 양반. 그냥 신발을 신어보면서 고르면 되지 왜 그걸 가지러 다시 다녀왔소?”

돌쇠는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내 발 크기를 증명해 줄 수 있는 게 집에 있는데 왜 내 발로 신발을 맞춰봐야겠소? 당신은 옳고 그름도 판단할 줄 모르오?”

어리석음과 속 좁음은 하나입니다. 너무 옳고 그름만 생각하면서 우리가 안 죽는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질 좋은 삶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도 옳지 않은 일이라 여기고 믿음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어리석음 때문에 속 좁은 사람이 됩니다. 

왜 생존을 걱정하면 옳고 그름의 분별심에 갇혀 속이 좁은 사람이 될까요? 만약 한 숟가락의 농약을 먹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내가 죽습니다. 그래서 음식에 독이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분별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속을 좁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존에 대한 문제를 넘어서면 마치 커다란 호수처럼 약간의 독이 퍼져도 전혀 상관없기에 자신 안에 들어오는 것이 독인지, 아닌지 큰 관심이 없습니다. 한 숟가락의 농약을 커다란 호수에 뿌리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옳고 그름에 큰 관심이 없어집니다. 죄가 되지 않는다면 분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넓은 마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두 하인이 자기가 옳다고 싸우다 한 하인이 화가 나서 주인에게 모든 사실을 일러바쳤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네 말이 옳구나!”라고 그의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하인이 와서 또 자신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네가 옳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부인은 “그럼 누가 옳단 말이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양반은 “당신의 말도 옳구려, 허허!”라고 웃었습니다. 

옳고 그름은 나의 생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분별입니다. 그것이 죄가 되지 않는다면 그냥 받아들이십시오. 우린 죽어도 사는 사람입니다. 이 믿음은 옳고 그름이 아닌 선택의 문제입니다. 

한 사람이 천년 된 산삼을 더덕인 줄 알고 우연히 먹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아프셔서 자신의 피를 마시게 했더니 어머니가 다시 건강해지고 몇 년은 더 젊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피가 아픈 사람도 낫고 몸도 젊어지게 하는 생명력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안 임금이 그 사람을 불렀습니다. 그는 임금에게 드릴 피를 조금 받아서 궁궐에 들어왔습니다. 이때 중간 관리가 “내가 당신의 피를 좀 마셔보면 안 될까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별생각 없이 “그러시지요”라고 하며 병을 건네주었습니다. 그는 피를 조금 마셨습니다. 임금이 이 사실을 알자 노발대발하며 “임금의 것을 탐한 저자를 당장 처형하여라!”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하인이 말했습니다. 

“물론 저는 죽을죄를 지었고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임금님이 옳으신 분이시다면 임금님께 바쳐야 할 것을 저에게 준 저 사람도 함께 처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임금이 그의 현명한 말에 그를 높은 자리에 앉혔습니다. 내 안에 생명이 들어오면 옳고 그름의 분별심에서 벗어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의 인정을 받습니다. 결국, 사회에서 인정받는 길은 포용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옳고 그름으로 속이 좁아지는 이유는 죽음이 두려워서입니다. 제자들도 아직은 부활을 믿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속이 좁아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영원한 생명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곧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어느 신부로부터 “개나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어. 분명 자기보다 먼저 죽을 것을 알면서도 왜 키우는 거야?”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 역시 신부가 되고 나서 몇 차례 개를 키웠고, 지금도 네 마리나 키우고 있습니다. 
 
동물의 생애는 인간보다 훨씬 빠르기에, 키우고 있는 개의 죽음을 직접 볼 확률이 높습니다. 그런데도 반려동물을 키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반려동물과 사랑을 주고받기 때문입니다. 이별의 상실이 있지만, 사랑의 기억이 이별의 상실보다 훨씬 크기 때문입니다. 
 
사람 역시 죽음으로 이 세상 안에서의 이별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닙니다. 사랑의 기억 속에서 소중한 만남은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 사랑의 가치가 이별의 가치보다 더 큽니다. 이 사랑으로 우리는 또 다른 힘을 얻어 지금을 열심히 살 수 있게 됩니다. 다시 사랑할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만남을 기억하며 삽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신 계명은 ‘사랑’이었고, 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곧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사도 시대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돌팔이 구마자들이 주문을 외며 마귀를 쫓아낸다며 떠들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들은 병자를 고치고 마귀를 쫓아내는 데에 예수님의 이름을 도용했고, 사도들에게 그 능력을 팔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이 예수님 생전에도 있었나 봅니다. 성격이 불같다고 하여 천둥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가진 요한이 이 모습을 보았으니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는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는다고 사마리아 마을에 하늘에서 불을 내려치겠다고 했던 사람이었으니, 가만히 있지 못하고 중단시키고 예수님께 보고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를 막지 말라고 하시지요. 
 
주님을 반대하지 않고 지지하는 이는 비록 교회 안에 공동체 생활을 하지 않더라도 교회를 해칠 리가 없으니 배척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을 반대하지 않고 지지하는 이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교회 안에 많은 은사가 있기에 교회의 성사 생활로 더 많은 사랑과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소속되어 있지 않더라도 사랑을 실천하는 이를 배척하지 않으십니다. 사랑의 실천이 곧 주님을 따르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의 사랑 실천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죽음 뒤의 하느님 나라 안에서도 그 영향이 미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사랑하며 주님을 따르고 지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제1 독서의 야고보 사도의 말씀처럼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하늘로 돌아갈 시간이 되면 최선을 다해 잘 이별하는 것. 그것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아닐까?

- 송정림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막지 마라. (마르 9,39)

 

주님의 보편적 진리는 막을 수 없다. 예수님께서도 아집과 편견의 무서움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신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 주님의 일이다. 독점할 수 없는 주님의 일이다. 주님의 일은 결코 막지 못한다.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반대와 지지 사이에 우리의 자아가 있다. 우리의 자아는 개방된 삶으로 나가야 한다. 개방된 삶은 사람을 살리는 일을 노골적으로 반대하지 않는다. 순간 순간 우리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은총의 시간이다. 

하느님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하느님의 뜻을 우리는 반대하게 된다. 반대하는 이들의 마음엔 배타적인 마음이 있다. 맹목적인 반대와 맹목적인 추종도 올바르지 않다. 지나친 편향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편견과 아집이 아니라 보편적 진리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 

진리는 남용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실천이다. 대립과 차별 모순과 불일치를 극복하게 하는 것은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는 성찰에 있음을 믿는다. 되돌아가야 할 길은 우리가 주님의 일을 막지 않는 것이다. 가르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처럼 살리는 삶을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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