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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2월 26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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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2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7주간 토요일 -

 

 

2022년 2월 26일 연중 제7주간 토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야고보는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낸다며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고 하시며 어린이들을 축복해 주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2월 26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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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야고 5장 13-20절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13 
여러분 가운데에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찬양 노래를 부르십시오. 

14 
여러분 가운데에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부르십시오. 원로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십시오. 

15 
그러면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병이 낫게 될 것입니다.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 

17 
엘리야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지만, 비가 내리지 않게 해 달라고 열심히 기도하자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18 
그리고 다시 기도하자, 하늘이 비를 내리고 땅이 소출을 냈습니다. 

19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진리를 벗어나 헤맬 때 누가 그 사람을 돌이켜 놓았다면, 

20 
이 사실을 알아 두십시오. 죄인을 그릇된 길에서 돌이켜 놓는 사람은 그 죄인의 영혼을 죽음에서 구원하고 또 많은 죄를 덮어 줄 것입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 저의 기도
당신 앞의 분향으로 여기소서.

 

주님, 당신께 부르짖사오니 어서 오소서. 부르짖는 제 소리 들어 주소서. 저의 기도 당신 앞의 분향으로 여기시고, 저의 두 손 올리오니 저녁 제사로 받으소서. 주님, 저의 기도 당신 앞의 분향으로 여기소서.

주님, 제 입에 파수꾼을 두시고, 제 입술에 문지기를 세우소서. 주 하느님, 저는 당신을 바라보나이다. 당신께 피신하나이다. 제 영혼을 내버리지 마소서. 주님, 저의 기도 당신 앞의 분향으로 여기소서.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르 10장 13-16절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때에 

13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14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16 
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전능하신 하느님, 이 거룩한 제사에서 구원의 보증을 받았으니 저희가 실제로 그 구원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임시백 치백요셉 신부 집전

 

 

2022년 2월 26일 (토)
임시백 치백요셉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2월 26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여러분은 ‘나’ 아닌 ‘남’을 위해서도 자주 기도를 바치십니까?

 

여러분은 ‘나’ 아닌 ‘남’을 위해서도 자주 기도를 바치십니까? 주변에 “당신을 위하여 기도하겠습니다!”라고 스치듯 인사하기는 쉬워도, 나와 별 인연이 없는 누군가를 특별히 기억하고 기도한다는 것이 생각만큼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나를 위하여 기도할 시간도 부족한데 남까지 신경 쓸 여유는 더더욱 없다.’라며 속으로 단념해 버리곤 하지요.

오늘 제1독서는 기도에 관한 여러 권고를 들려줍니다. 그런데 특별히 ‘남’을 위한 기도가 큰 힘을 발휘한다는 내용이 눈에 들어옵니다. 야고보 서간의 저자는 교회 원로들이 병자를 찾아가 기도해 주면 그 믿음의 기도가 그를 구원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범위를 확대해서 이제 신앙인 모두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병이 낫게 될 것입니다.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

누군가를 위하여 기도할 때 발휘되는 효력이 이토록 큰 것이라면, 그런 놀라운 힘을 그냥 묵혀 두기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변에 기도가 필요한 이웃들을 하나둘 떠올려 보고, 시간을 내서 이들을 위하여 기도해 봅시다. 별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섣부르게 예단하지 말고 정성을 다하여 기도합시다. 주님께서는 ‘남’을 위하여 바치는 우리의 정성을 꼭 기억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분명 누군가에게 실현되는 구원의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 구원이 어떤 이에게는 육체 또는 마음이 겪는 고통에서의 해방일 수도 있고, 어떤 이에게는 그릇된 길에서 돌아서서 하느님을 향하게 하는 회개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듯 보이는 우리의 작은 기도가 주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의 놀라운 도구로 쓰인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여지없음에 대하여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오늘 복음에서 축복을 청하는 어린이들을 막는 제자들을 주님께서 나무라시며 하느님의 나라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고 하시고, 그것은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라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때문인데 그것은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가 하늘로 올라갈 필요가 없다는, 그런 수고를 애써 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기도 하지요. 

이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 10장 6절에서 누가 하늘로 올라갈까 마음으로 생각지 말지니 그것은 말씀이 우리 가까이에 있고 우리 입술과 우리 마음에 있기 때문이라고 얘기하지요. 

사실 주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이니 그 말씀을 믿는다면 이미 가까이 와 있는 그 나라를 그저 기꺼이 받아들이면 되는데 이걸 잘하는 것이 어린이라고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어른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는 어린이에게서 이것을 배워야 하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어린이처럼 하느님 나라를 잘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어린이처럼 열려있고 비어있는 것입니다. 이론은 너무도 단순합니다. 열려있음과 비어있음이 받아들임의 기본입니다. 

병으로 치면 뚜껑이 열려있어야 물이 들어오고, 집으로 치면 문이 열려있어야 손님이 들어오듯 우리도 열려있어야 하느님께서 들어오시겠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왜 우리를 닫아걸고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 안이 아마 다른 보물로 가득차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문을 잠그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것을 받아들이려 해도 받아들일 여지가 없습니다. 

내 안에 받아들일 여지가 없다는 것, 이것이 참으로 슬프고 안타까운 것입니다. 여지란 말을 그대로 풀이하면 남아있는 땅이라는 뜻인데 내게 남아있는 땅뙤기가 하나도 없다는 뜻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위한 여지가 없을 정도로 우리 안에 가득차 있는 보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느님 말고 소중한 것 또는 하느님보다 더 소중한 것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일 것이고 자기 안에 자기로 가득차 있는 것일 겁니다. 

내 안이 나로 가득차 아무도 들어올 수 없고 하느님께서 들어오실 여지도 없는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은 여지없음에 대해서 묵상하게 되는 하루가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어린이의 하느님 나라는 부모다.

 

오늘 복음에서 어린이들이 예수님께 오는 것을 막는 제자들에 대해 예수님께서 언짢아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14-15)

어쩌면 이 말씀이 마르코 복음의 핵심일 수도 있겠습니다. 마르코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에 관해 설명하면서 그리스도께서 곧 하느님 나라임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는 주제가 핵심입니다. 

먼저 마르코가 설명하려는 하느님 나라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지금 마르코는 예수님의 두 번째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유에 대해 풀어가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면 사람을 악에서 구할 수 없다는 것이고, 두 번째 이유는 그리스도의 수난이 아니면 사람은 사람과 평화롭게 지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가 아니면 사람은 사람과 평화롭게 지낼 수 없을까요? 그리스도께서 ‘창조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왜 창조자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웃과 평화롭게 지낼 수 없을까요? 

역사적으로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 나라들은 생계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특별히 ‘바이킹’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8세기 당시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살던 북게르만족은 인구가 큰 폭으로 상승하자 그 척박한 땅에서는 먹고 사는 것이 힘들이 육로로 동쪽에 있는 나라들을 약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선박기술이 발달하자 바이킹은 잉글랜드 서쪽 지역을 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유럽인들은 커다란 덩치에 무식한 도끼를 들고 싸우는 바이킹을 당해내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바이킹은 오딘이란 신을 섬겼는데 싸우다 목숨을 잃으면 오딘의 나라인 발할라로 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전투 민족답게 방패 처녀라고 불리는 여성 전사가 전쟁에 다수 참여했고 고위직에 올라간 여전사가 존재했을 정도로 여성의 인권이 강한 편이었습니다. 여전사가 생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약탈하기 위해 오랫동안 집을 떠난 남성들을 대신해 자신의 아이들을 지켜야 하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먹을 걱정이 없다면 목숨을 건 약탈은 왜 하겠습니까? 모든 약탈이 일어나는 이유는 생존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린이들은 약탈하지 않습니다. 만약 어린이들이 부모의 돈을 훔친다거나 다른 아이들의 것을 빼앗는다면 그것은 아이들이 생존에 대해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EBS 부모 – 저, 혼나러 나왔어요’에서는 4학년 남자아이를 호랑이보다 무섭게 체벌하는 어머니가 나왔습니다. 우리나라도 2021년부터 법적으로 아이에게 체벌하는 것은 불법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맞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자신은 매 맞지 않으면 제대로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물론 어머니에게도 이유가 있습니다. 아이가 거짓말을 하고 자신의 지갑에 손을 대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이가 친구를 사귀기 위함이었습니다. 먼저 아이가 왜 약탈자가 되어가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부모가 먼저 아이에게 충분히 좋은 환경이 되어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환경입니다. 바이킹이 살던 땅처럼 척박한 부모는 바이킹처럼 약탈자를 양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환경에서 자라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체벌은 약탈입니다. 그리고 아이를 약탈자로 만듭니다. 

아이에게 부모는 환경입니다. 부모가 생계 걱정을 하고 있다면 자녀는 어떨까요? 당연히 약탈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부모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좋은 환경이 되어주기 위해 제가 항상 추천하는 것이 ‘십일조’를 온전한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내가 에덴동산의 환경 안에 있다면 자녀도 에덴동산의 환경 안에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절대 아이가 약탈자로 성장하지 않습니다. 

저는 디팩 초프라의 훈육법을 배우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는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빠가 먹고사는 건 다 책임질 테니까, 너희는 너희가 왜 태어났는지 그 이유를 찾고 이웃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만 생각하며 살아라.”

아들 둘은 에덴동산에서 산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와 같은 환경에서 자란 것입니다. 아들 둘이 있었는데, 형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잘 도와주었고 동생은 공부 못하는 아이들을 가르쳐 주며 학교에 다녔습니다. 형은 인도에서 커다란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고 동생은 하버드대 교수가 되었습니다. 

디팩 초프라는 자신이 언제까지 좋은 환경이 되어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신을 찾고 그 신이 창조한 이유를 찾으라고 합니다. 모든 창조된 것은 목적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자신들을 사업가로 혹은 교수로 하느님이 부르셨음을 찾았습니다. 그리고는 그런 삶이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삶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춘기가 되어 부모가 더는 아이의 환경이 되어주지 못해도 아이들은 신의 섭리 안에서 자랄 수 있었습니다. 

이것과 반대되는 삶은 ‘경쟁’을 시키는 것입니다. 경쟁이란 환경은 지옥입니다. 지옥에서는 약탈자들이 생겨납니다. 약탈자들이 사는 세상은 또 지옥이 됩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녀를 낳을 부모는 없습니다. 약탈자를 낳고 싶은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자아는 자신이 자기 주인의 주인이 되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만 믿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뱀은 진정한 나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자신의 땅에 살고 싶으면 세속-육신-마귀의 욕망을 스스로 채워야 한다고 말해줍니다. 그리고 자아를 환경으로 사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약탈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모기나 기생충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어떤 환경에 살고 있습니다. 나는 자아가 만들어낸 척박한 이집트와 같은 환경에서 종살이하고 있나요, 아니면 에덴동산에서 살고 있나요? 어린이처럼 부모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린이는 자신에게 양식을 주는 이를 부모로 믿습니다. 이는 증거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양식을 주는 부모를 찾지 않으면 지옥의 삶을 살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춘기가 되며 자아가 강해지면 자아는 그런 환경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며 창조자가 있다면 증거를 찾으라고 합니다. 하지만 아기가 부모를 찾는 것은 증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런 선택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느님 나라를 믿는 것은 선택입니다. 그 하느님 나라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를 창조자로 믿으면 어떻게 될까요? 물론 그분이 창조자이심을 믿기 위해 십일조도 내야 하지만 내가 에덴동산에서 살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자녀들도 또 다른 그리스도처럼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천국의 백성이 됩니다. 어린이처럼 단순하게 생각합시다. 어린이처럼 그리스도를 하느님 나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두 선택밖에 없습니다. 뱀의 나라를 선택하든, 하느님 나라를 선택하든.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내 주변의 소리를 잠시 끌 수 있는 침묵의 시간이 필요해

 

외출을 위해 옷을 갈아입고 시계를 차려고 하는데 시계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원래 시계를 풀어 놓는 곳이 있는데 그 자리에 없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 두었나 싶어 이곳저곳을 찾았지만, 도대체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정전된 것입니다. 전기가 나가서 실내등이 모두 꺼져서 암흑이 되었습니다. 시계를 찾아야 하는데, 빛까지 없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곧바로 시계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가운데 어디선가 ‘째각째각’ 시계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시계는 책상 위의 책 아래에 있었습니다. 
 
곧바로 전기가 들어오면서 방이 밝아졌습니다. 그러나 전기가 들어옴과 동시에 많은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소리와 함께 살고 있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 소음들 사이에서 들어야 할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었습니다.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 사랑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 모두 반드시 들어야 할 소리이지만 다른 소리에 가려서 듣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정전되어 시계를 쉽게 찾을 수 있었던 것처럼, 내 주변의 소리를 잠시 끌 수 있는 침묵의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와 묵상의 시간입니다. 진짜 들어야 할 소리, 진짜 봐야 할 것을 듣고 볼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소외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죄인, 병사, 세리, 과부 또 여자들도 대접보다는 차별받는 계층입니다. 여기에 또 한 계층이 바로 어린이였습니다. 구약성경에 어린이는 방자하고 이해력이 부족하여 엄한 훈육이 필요한 아이로 취급되었습니다. 또 풋내기이며 철부지로 불리었고, 생각 없고 철없는 아이이기에 부모가 길을 잘 들이고 엄격히 단련 받아야 할 존재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어린이는 율법을 깨닫지 못하기에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집회에 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부족한 존재여도 부모에게는 특별한 존재였기에, 예수님께 어린이를 데리고 와서 축복해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병자가 예수님의 안수로 온전하게 치유되는 것처럼, 아이들도 온전한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보입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의 생각을 제자들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알리는 중요한 일을 하고 계시는 주님을 번거롭게 하는 것으로 생각해서 사람들을 꾸짖었던 것입니다. 
 
하느님 백성 안에서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모두를 사랑해야 합니다. 따라서 소외되고 아파하는 계층의 소리를 듣고 그들 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소외되고 힘들어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그들과 함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기도와 묵상은 필수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그대에게 죄를 지은 사람이 있거든, 그가 누구이든 그것을 잊어버리고 용서하라. 그때 그대는 용서한다는 행복을 알 것이다.

- 톨스토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마르 10, 4)

 

어린이도 어른도 모두 다 똑같은 사람들이다. 덜 소중하고 더 소중한 것이 아니다. 높이와 소유의 나라가 아니라 비어있음과 받아들임의 나라이다.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매순간 놓칠 수밖에 없다. 너무 우리 것으로 가득차 있다. 

겨자씨와 같이 어린이에서 시작되는 하느님의 나라이다. 겨자씨도 어린이도 작고 순수하기에 하느님의 나라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자기 것이 없어져야 하느님의 것으로 가득 찰 수 있다. 이제 곧 비어있는 앙상한 가지에서 봄꽃이 피고 봄 새순이 가득 돋을 것이다. 

작아지고 낮아지고 비워진 자연의 순수한 모습이다. 어린이들과 같이 욕망을 소유하지 않는 행복이 진짜 행복이다. 욕심이 작아져야 제자들처럼 자리싸움을 하지 않는다. 욕심과 걱정으로 가득차 있는 우리 마음을 다시금 반성하는 시간이다. 

어린이는 어른을 비추어주는 하느님 나라의 비어있는 맑은 거울이다. 거울은 맑아야 거짓을 정화한다. 맑고 비어 있어야 주님을 끝까지 따를 수 있다. 이와같이 어린이와 어른은 서로 다른 존재가 아니다. 서로 사랑해야 할 존재들이다. 

판단하지 않는 비어있음이 참사랑이다. 욕심으로 탐하지 않기에 하느님의 나라를 오늘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다. 비워내는 것이 받아들이는 사랑이다. 비워냄과 받아들임 사이에 하느님의 나라가 있다. 나약함과 부족함을 숨기지 않는다. 받아들이는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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