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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3월 1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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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8주간 화요일 -

 

 

2022년 3월 1일 연중 제8주간 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에 모든 희망을 걸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당신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복을 받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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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1베드 1장 10-16절

 

여러분의
앞날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려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영혼의 

10 
구원에 관해서는 여러분이 받을 은총을 두고 예언한 예언자들이 탐구하고 연구하였습니다. 

11 
그들 안에서 작용하시는 그리스도의 영께서 그리스도께 닥칠 고난과 그 뒤에 올 영광을 미리 증언하실 때에 가르쳐 주신 구원의 시간과 방법을 두고 연구하였던 것입니다. 

12 
예언자들은 그 일들이 자신들이 아니라 여러분을 위한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 일들이 하늘에서 파견된 성령의 도움으로 복음을 전한 이들을 통하여 이제 여러분에게 선포되었습니다. 그 일들은 천사들도 보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13 
그러므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에 여러분의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 

14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전에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15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16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은
당신 구원을 알리셨네.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그분이 기적들을 일으키셨네. 그분의 오른손이, 거룩한 그 팔이, 승리를 가져오셨네. 주님은 당신 구원을 알리셨네.

주님은 당신 구원을 알리셨네. 민족들의 눈앞에,  당신 정의를 드러내셨네. 이스라엘 집안을 위하여, 당신 자애와 진실을 기억하셨네. 주님은 당신 구원을 알리셨네.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주님께 환성 올려라,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주님은 당신 구원을 알리셨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르 10장 28-31절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복을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28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29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30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31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구원의 성체를 받아 모시고 자비를 간청하오니 현세에서 저희를 길러 주는 이 성사로 저희가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서창수 베드로 신부 집전

 

 

2022년 3월 1일 (화)
서창수 베드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3월 1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그분과 함께 걷고 있는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지방 카파르나움을 떠나 유다 지방 예루살렘으로 걸어가고 계십니다(마르 9,33; 10,1 참조). 십자가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길 위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을 멈추지 않으십니다(10,1 참조).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하여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10,28). 하느님 나라를 위한 제자들의 과감한 선택과 결정은 부자 청년의 머뭇거림(10,22 참조)과 대조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물었던 부자는 지상에서 가지고 있던 재물 때문에 하늘에서 받을 수 있는 보화를 포기하고 떠났습니다. 반면에 제자들은 가족의 유대와 소유의 안전을 포기하고 예수님 곁에 머물러 있습니다(1,18.20 참조). 

제자들은 부자 청년이 하지 못한 행동, 곧 소유한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요청에 응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용기 있는 결정에 대한 보상을 약속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그 어떤 것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포기한 것들을 백 배로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은 부자 청년이 간절히 바라던 것이었습니다(10,17 참조).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따를 때 수많은 어려움(포기, 박해 등)이 함께 따른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얻게 될 유익도 많음을 환기시켜 줍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분과 함께 걷고 있는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있습니까? 그것을 받고자 가진 것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주님께서 주시는 것은 다 복이다.

 

어제 부자 청년이 가진 많은 재산을 포기하지 못해 주님 따르기에 실패한 것을 보고 오늘 베드로는 그와 달리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음을 얘기하고 이에 주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에게 매우 고무적인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하시는데 이 말씀은 매우 문제적인 말씀 다시 말해서 잘 이해해야 할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어머니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이 말씀을, 주님을 위해서 땅 한 마지기를 버리면 내세가 아니라 현세에서 백 마지기를 받는다는 말로 이해해도 되는 것일까요? 한 5년은 박해를 받고 고생도 하겠지만, 한 10년 뒤에는 떼부자가 될 거라는 말일까요? 

이것은 유명한 개신교 모 목사의 삼박자 축복과 같은 의미인가요? 하느님을 믿으면 내세에서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재물과 건강과 성공의 그 세 가지 축복을 하느님께서 주실 거라는 그 삼박자 축복 말입니다. 

물론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부유하고 건강하다면 그 부와 건강이 하느님께서 주신 것임을. 그런데 지금 내가 가난하고 건강하지 않다면 하느님께서 복을 주시지 않고, 오히려 벌을 주신 것이 되는 그런 뜻이라면 그렇게 믿는 것은 잘못된 겁니다. 

돈과 건강과 성공만 하느님 축복이고 가난과 병고와 실패는 하느님의 축복이 아니거나 벌이 되는 그런 믿음은 아주 아주 잘못된 믿음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믿는 사람에게만 축복을, 그것도 이 세상에서의 축복을 주시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서 아무런 축복을 주지 않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믿는데도 내가 지금 가난한 것은 하느님께서 복을 주지 않아서가 아니고, 내가 지금 병고를 겪는 것도 복을 주지 않으시거나 벌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믿건 안 믿건 복을 주시는 분이시고, 돈과 건강과 성공의 복을 주실 수도 있고 안 주실 수도 있으며, 하느님이 주시는 복은 돈과 건강과 성공일 수도 있고, 그 반대인 가난과 병과 실패가 복일 수도 있습니다. 

자식을 모두 사랑하는 부모가 효자에게는 복을 주고 불효자에게는 벌을 줍니까? 하느님도 당신을 믿건 안 믿건 당신의 자녀이기에 사랑하시고, 당신을 믿건 안 믿건 똑같이 햇빛과 비를 내려주십니다. 

돈과 건강과 성공만 하느님의 복이요 하느님의 사랑의 표시이고 그 반대이면 하느님의 벌이요 사랑이 없는 표시라면 이런 하느님의 사랑은 가난하고 병들고 실패한 자식을 더 사랑하는 부모의 사랑만도 못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은 벌도 사랑이고 복도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돈과 건강과 성공의 복도 주시고 그 반대의 복도 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 말씀은 하느님은 내세에서나 현세에서 다 복을 주실 수 있고 주시는 분이며, 박해도 복이고 재물이나 건강이나 가족도 복이라는 말씀이며 그런 하느님을 믿고 당신의 뒤를 따라 하느님께 가자는 초대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내가 매일매일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증거는?

 

어제 복음은 돈이 많은 부자가 예수님을 따를 수 없어 슬퍼하며 돌아간 이야기입니다. 재산을 버릴 수 없어서 예수님을 따름을 포기합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오늘 복음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당신을 따르기 위해 버린 것의 백 배를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그 버리는 정도에 따라 첫째와 꼴찌가 결정된다고 하십니다. 사람은 내가 만나러 가는 사람에 따라 어떻게 변하느냐가 결정됩니다. 

모든 인간은 누군가를 만나러 갑니다. 그 만나러 가는 대상이 만든 세상으로 들어갑니다. 그 대상이 지옥으로 안내할 수도 있고 천국으로 안내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향하는 방향에 있는 대상이 사랑 가득한 분이라면 당연히 그 뒤엔 천국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탄이 있다면 그 뒤엔 지옥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조건 두 방향 중 한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내가 사랑이신 하느님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바로 세상 집착에 대한 욕구가 사라짐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부자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재물에 대한 집착을 버렸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름은 세상 집착을 버림입니다. 세상 집착이 늘어나는 삶을 살고 있다면 사랑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살려고 하는 욕구를 죽이기 때문입니다.

‘우와한 비디오’에서 성장 가능성이 최대 1m밖에 안 되는 희소병을 지니고 태어난 대성이를 소개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인데 키가 매우 작고 몸무게도 10kg을 넘지 못합니다. 손가락도 작고 팔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은 매우 크고 자유롭습니다.

동생과 놀다가 동생에게 밀려도 “형이니까 참아야지요”라고 말합니다. 아빠가 “대성이 몸 작아서 불편하지 않아?”라고 물으니 대성이는 “아빠, 어쩔 수 없는 거지. 슬퍼하지마, 걱정하지 마!”라고 씩씩하게 말합니다. 모두 자신의 탓인 거 같다며 혼자서 못할 것 같다고 걱정하는 엄마에게 대성이는 “엄마, 나 혼자 할 수 있어”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하려고 합니다. 

부모에게 다가가기 위한 이러한 감미로운 죽음. 이것이 기도입니다. 그래도 기도하지 않으면 주님 앞에 설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도는 어쩔 수 없이 자신과 피나는 싸움을 전제하지만, 부모와 함께할 수 있는 감미로움을 선사합니다. 대성이는 그 불편한 손가락으로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그림도 열심히 그립니다. 

 대성이가 부모에게 다가가기 위해 하는 행위는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이 자신이 그렇게 태어난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며 오히려 부모님을 위로합니다. 이 사실이 대성이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대성이는 지금 부모를 향하여 가고 있고 그 부모가 사랑이기에 대성이도 자아의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마치 뜨거운 용광로를 지나는 것들은 불순물이 다 제거되는 것처럼 사랑의 불로 다가가는 모든 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욕심이 커지면 잘못 가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에사우는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레베카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야곱은 우리 자신을 상징하고 이사악은 하느님입니다. 우리는 미사 때 에사우를 먹고 에사우임을 자청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기에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에사우와 가까워지기 위해 야곱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야곱은 7년 동안 일하여 레아와 혼인하고 또 7년 동안 일하여 라헬과 혼인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6년은 혼인을 통해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많은 재산과 가축, 그리고 가족이 늘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때 에사우를 만나야 합니다. 물론 열심히 살기는 했지만 여전히 에사우 앞에 나설 자신이 없습니다. 자신이 그동안 번 재산을 미리 보내어 에사우에게 다 바칩니다. 그래도 안 될 것 같습니다. 가족까지 다 바쳐도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야곱은 에사우 앞에 나설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 기도합니다. 기도는 천사와 씨름하는 것과 같습니다. 너무 힘이 든 시간입니다. 천사는 야곱의 엉덩이뼈를 다치게 하여 에사우 앞에서 똑바로 걷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이 기도가 주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나 자신까지도 내어드릴 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감미로운 죽음이 우리를 그리스도 앞에 설 힘을 줍니다. 

야곱은 형에게 나아가며 일곱 번 땅에 엎드려 절합니다. 그리고 “정녕 제가 하느님의 얼굴을 뵙는 듯 주인의 얼굴을 뵙게 되었고, 주인께서는 저를 기꺼이 받아 주셨습니다”(창세 33,10)라고 말하며 자신의 모든 것, 곧 자기 자신까지 에사우에게 봉헌합니다. 에사우는 야곱에게 상속권을 내주기 위해 저주받을 운명으로 태어났지만, 야곱의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아가기 위해 다 내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시사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래야만 그분 땅에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 살려면 그 에덴동산을 주신 분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창조주께 나아가는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그분을 모든 것의 주인으로 믿기 때문에 그분께 나아갈수록 나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합니다. 이 힘을 기도가 아니면 얻을 수 없습니다. 

유튜브 ‘우와한 비디오’에서 ‘꺾인 다리로 전력 질주, 육상선수 상훈 씨’의 사연을 볼 수 있습니다. 상훈 씨는 선천성 소아마비로 갓난아기 때 파출소 앞에 버려져 시설에서 자랐습니다. 늘 방에서 혼자 보내야 했습니다. 시설에 있는 아이들이 부모가 찾아와서 집에 데리고 가면 상훈 씨도 그렇게 따라가고 싶었습니다. 엄마의 사랑이 그리웠던 것입니다. 물론 부모님의 얼굴을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많이 원망하고 많이 그리워했지만, 상훈 씨는 부모를 찾는 노력을 멈추지 않습니다. 

상훈 씨는 전북 장애인 달리기 선수입니다. 나이 쉰이 훨씬 넘었지만, 상훈 씨는 언젠가 만날지 모르는 부모에게 자신이 잘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매일 자신과 싸워나갑니다. 아직 장애인 전국체전에서 달리기 금메달을 따지 못했기에 부모를 위해 금메달을 따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서 있기도 힘든 그 다리로 매일 달리기 연습을 합니다. 낮에는 자신과 같은 중증 장애인들을 위해 봉사하는 일을 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만약에 부모님이 살아 계시면 ‘이렇게 잘 커서 잘 지내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실 것 같아요.”

그런데 부모님이 상훈 씨를 TV에서 보았다고 해도 상훈 씨 앞에 나타날 수 있을까요? 현실적으로는 양심상 그럴 수 없습니다. 상훈 씨는 부모를 위해 자신과 싸우고 있는데, 부모는 상훈 씨를 키우기 위해 자신과 싸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상훈 씨는 부모를 어디 있느냐고 찾겠지만 부모는 오히려 그럴수록 더 어두운 곳으로 숨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상훈 씨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부모를 만나기 위해 자신을 부모의 뜻대로 봉헌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나아가는 유일한 방법은 매일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봉헌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기도를 따로 하지 않아도 이미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상훈 씨와는 반대로 우리 부모가 되어주시기 위해 매일 당신 외 아드님을 십자가에 죽이십니다. 그래야 우리 양식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양식을 주지 않는 부모는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양식은 부모의 살과 피입니다. 이런 분께 나의 모든 것, 나 자신을 내어 맡기지 않으면 나는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기 위해 조금씩 더 주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분 앞으로 나아갈수록 나는 더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그분으로부터 수백, 수천 배의 상을 받습니다. 바로 하느님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주님을 따른다는 것

 

산책하러 나갔다가 길에서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저를 본 개가 사납게 짓는 것입니다. 갑작스러운 짖음에 깜짝 놀라 움찔했습니다. 솔직히 그렇게 놀랄 것도 아니었습니다. 제가 키우는 개보다 훨씬 작은 중형견이었고, 주인이 개 목줄을 꽉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성적인 생각과 달리 약간의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목줄을 놓쳐 나를 공격하지는 않을까?’라는 ‘혹시’나 하는 두려움일 것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불안과 공포의 분위기가 사라진 적이 있을까요? 그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불안과 공포를 안고 살지도 않습니다. 불안과 공포를 이겨낼 방법을 찾으면서 더 나은 삶을 향해 묵묵히 앞으로 걸어갔습니다. 따라서 노심초사 전전긍긍하며 자신 없는 마음으로 살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이를 극복할 힘을 우리는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시냇가에 자라는 나무는 매일 부는 바람에 걱정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나무는 흔들리지 않을 자신의 체력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더 기울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우리가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불안과 공포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가장 힘센 주님과 함께하고 있음에 안심하며, 조금 더 나은 나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원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을 올바르게 따르는 모습이 아닐까요? 이를 위해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주님을 따른다는 것을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 따름은 모든 것을 버려야만 가능했습니다.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리는 것도 해야만 했습니다. 즉, 세상의 것보다 하느님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박해받을 수도 있지만, 이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사람은 그에 합당한 보상을 얻게 된다고 약속하십니다. 
 
세상의 눈에서는 분명 꼴찌의 삶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세상의 눈을 뛰어넘어, 꼴찌가 첫째가 되는 삶으로 변화시키십니다. 그래서 제1독서의 베드로 사도 말씀처럼,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에 여러분의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를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의 것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멀리해서 어리석다는 말을 듣겠지만, 이런 세상의 꼴찌 모습이 하늘에서는 첫째의 모습이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람은 은혜보다 원수를 갚는데 더 열심이다. 감사는 부담이지만 복수는 쾌감이기 때문이다.

- 타키루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마르 10,31)

 

3월 첫날이다. 봄이 되어간다. 우리의 생활은 우리의 현실이 된다. 현실 안에서 예수님을 위해 버린 것이 하나도 없다. 끊임없는 변명과 헛된 구호만 펄럭일 뿐이다. 버림에 대한 반성과 따름에 대한 화해가 필요한 시간이다. 예수님을 보고 우리 생활을 보니 우리자신이 참 한심하다. 

걸어가면서 깨닫게 되는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따름의 기쁨이다. 예수님의 손을 다시 잡는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우리를 먼저 아신다. 우리의 현실을 이끌고 가시는 주님의 따뜻한 손이다. 사람이란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 

하느님의 사람은 매순간 순간을 버리고 따르는 이들이다. 사람이 되는 것이 첫째와 꼴찌보다 더 중요하다. 다시 버리고 다시 기쁘게 따르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버림이 우리를 씻어주고 따름이 우리를 채워준다. 십자가를 지나야만 참된 따름이 있음을 다시 보게 된다. 

십자가의 꼴찌와 십자가의 첫째 모두 십자가에서 철이 들고 있다. 십자가가 이러한 우리자신을 받아주고 있다. 3월의 십자가와 함께 발걸음을 내딛는 삼월의 첫날이다. 반가운 버림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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