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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3월 4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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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4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

 

 

2022년 3월 4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이 무엇인지 알려 줍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왜 단식하지 않는지 묻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에게,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3월 4일 (금)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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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이사 58장 1-9ㄴ절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목청껏 소리쳐라, 망설이지 마라. 나팔처럼 네 목소리를 높여라. 내 백성에게 그들의 악행을, 야곱 집안에 그들의 죄악을 알려라. 


그들은 마치 정의를 실천하고 자기 하느님의 공정을 저버리지 않는 민족인 양 날마다 나를 찾으며 나의 길 알기를 갈망한다. 그들은 나에게 의로운 법규들을 물으며 하느님께 가까이 있기를 갈망한다. 


‘저희가 단식하는데 왜 보아 주지 않으십니까? 저희가 고행하는데 왜 알아주지 않으십니까?’ 보라, 너희는 너희 단식일에 제 일만 찾고 너희 일꾼들을 다그친다. 


보라,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저 높은 곳에 너희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거든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 된다.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단식이냐? 사람이 고행한다는 날이 이러하냐? 제 머리를 골풀처럼 숙이고 자루옷과 먼지를 깔고 눕는 것이냐? 너는 이것을 단식이라고, 주님이 반기는 날이라고 말하느냐?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하느님, 당신 자애로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크신 자비로 저의 죄악을 없애 주소서. 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 잘못을 깨끗이 지워 주소서.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제 죄악을 제가 알고 있사오며, 제 잘못이 언제나 제 앞에 있나이다.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 잘못을 저지르고, 당신 눈앞에서 악한 짓을 하였나이다.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당신은 제사를 즐기지 않으시기에, 제가 번제를 드려도 반기지 않으시리이다.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태 9장 14-15절

 

신랑을 빼앗길 때에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가 거룩한 신비에 참여하고 비오니 이 사랑의 영약으로 모든 죄의 상처를 낫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형진 로무알도 신부 집전

 

 

2022년 3월 4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김형진 로무알도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3월 4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단식의 중심에는 예수님께서 계셔야 한다.

 

마태오 복음 8―9장은 열 가지 기적 이야기를 모아 전합니다. 카파르나움(9,1 참조)에서 일어난 두 가지 다른 기적 사건들 사이에 마태오 복음 9장 9-17절이 삽입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마태오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9,9-13 참조). 이 일은 세례자 요한의 질문을 유발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율법 학자들(9,3 참조)과 바리사이들(9,11 참조)이 그리하였듯이 예수님의 행동에 반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단식을 하지 않는 이유가 궁금하였습니다. 자신들은 세례자 요한을 따라 금욕하며 살았고(3,4; 11,18 참조), 바리사이들도 일주일에 두 번 규칙적으로 단식을 지켰기 때문입니다(루카 18,12; 디다케 8,1 참조). 여기서 단식은 개인의 신심 증진을 위하여 행하는 사적 단식을 의미합니다(마태 6,16-18 참조).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던진 질문에 혼인 잔치를 비유로 들어 대답하십니다. 혼인 잔치는 천상의 삶에 대한 기쁨의 이미지를 제공합니다(22,2-13; 25,1-12 참조). 이러한 축하의 자리에 애도 예절이 적합하지 않듯이,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함께 계실 때 단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기게 될 때, 곧 예수님께서 죽음을 맞게 되시면 그들은 단식을 할 것입니다. 

단식은 중요한 신심 행위 가운데 하나입니다. 엄격한 율법 준수 또는 금욕주의적 삶을 위한 목적을 넘어서 그 근본정신을 기억해야 합니다. 단식은 신심을 더욱더 견고히 하는 것이고, 그 중심에는 예수님께서 계셔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잘하는 단식

 

“저희는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교회는 회개의 사순절에 실천해야 할 것으로 단식, 자선, 기도 이 세 가지를 권면하는데 그것은 그제 읽은 복음말씀대로입니다. 

사실 회개한 사람과 성인들은 예외 없이 이 세 가지를 잘한 사람들이기에 우리도 회개하여 성인이 되려면 이 세 가지 실천을 잘해야 하는데 이 세 가지 중 오늘은 단식에 집중하여 교회는 가르침을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제자들이 자기들은 단식을 많이 한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단식을 아무리 많이 하였어도 어떻게 많이 했다고 주님 앞에서 얘기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건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단식을 많이 하는 것이 뭐 그리 대수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질이 중요한 거야!’라고 흔히 얘기하듯 단식도 많이 하는 것보다 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가 환갑이 되던 해에 서품 30주년이 겹쳐 자연스럽게 제 인생과 수도 생활을 함께 돌아보게 되었는데 그때 든 생각이 제가 60년을 그리고 사제생활 30년을 참 열심히 살았다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열심히는 살았는데 잘 산 것은 아니었다는 반성이 되었고, 그래서 이제부터는 ‘열심히’가 아니라 ‘잘’이어야 한다고 마음먹었지요. 

단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잘’이 중요하고 그래서 오늘 이사야서도 그런 조로 얘기합니다.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요,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요,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자기 욕심을 채우려 사랑을 거스르지요. 내 배 부르기 위해 남의 입의 것 빼앗고, 높이 오르기 위해 남을 짓밟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잘하는 단식의 기준은 사랑입니다. 음식을 끊는 것보다 욕망을 끊는 것이요, 욕망을 끊는 것보다 사랑을 하는 겁니다. 

내 입에 넣기 위해 남의 것 빼앗던 우리가 내 입에 들어갈 것으로 자선을 실천한다면 이것이 진정한 단식인데 그러나 오늘 주님은 여기서도 한 단계 올라서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신랑을 위한 친구의 단식을 가장 완전한 단식의 예로 제시하십니다. 

진정한 친구는 친구가 먼저고 음식은 늘 2차적인 겁니다. 사람보다 먹는 것이 중요한 식도락가는 맛에 탐닉하지만 사랑이 중요한 사람은 맛보다 누구와 먹느냐가 중요합니다. 

요즘 와서 저의 최고의 식탁은 맛집에 가서 먹는 것이 아니라 제가 정성껏 준비하면 사랑하는 사람들이 와 맛있게 먹어주는 식탁이고, 그래서 협동조합을 시작하고 센터가 마련되면 이런 식탁을 마련할 것입니다. 

한 주일에 한 번 열두 분의 조합원을 번갈아 초대하여 미사를 봉헌한 후 제가 준비한 식탁에서 주님과 제자들처럼 사랑의 나눔을 하는 겁니다. 

음식은 내 배를 채우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나누라고 있는 것이니 사랑을 배운 우리는 누구에게 좋은 일이 있을 때는 기쁘게 축하하며 먹고, 안 좋은 일이나 슬픈 일이 있을 때는 넘어가지 않아서 먹지 않습니다. 

세월호 단식투쟁을 할 때 옆에서 폭식한 사람들처럼 그래서도 문제지만 좋은 일에 같이 기뻐해주기를 바라는 사람 앞에서 단식하는 것도 문제지요.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과의 식탁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어쩌시겠습니까? 단식하시겠습니까? 주님과 함께 식사하시겠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단식은 고통의 원인이 허기짐보다는 헛헛함임을 보게 한다.

 

오늘은 ‘단신’ 논쟁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바리사이들까지 단식을 자주 하는데 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단식하지 않느냐고 따집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단식의 참 목적을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단식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5)

예수님은 단식하는 이유를 당신과 함께 있거나 함께 있지 못하는 것으로 귀결시키십니다. 혼인 잔치에서 신랑이 함께 있지 않다면 마치 단팥 빠진 찐빵처럼 헛헛합니다. 배가 부를지라도 무언가 빠진 것 같습니다. 이것은 허기짐과 다른 말입니다. 허기짐은 단팥이 빠졌더라도 빵만 먹으면 채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헛헛함은 단팥을 먹어야만 해결됩니다. 단팥의 필요성을 절감하기 위해 단팥 빠진 빵을 먹는 것을 멈추는 일이 단식입니다. 

지금 하는 일로 나의 고통이 줄어들지 않는다면 지금 나를 채우고 있는 것들을 잠시 멈출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살펴봐야 합니다. 혹시 내가 원하는 것은 단팥인데 빵만 먹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와한 비디오’에 ‘리어카 할머니의 반전 소문 – 집 두 채를 소유하고도 폐지 줍기를 멈추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할머니는 자신의 몸보다도 몇 배 크고 무거운 폐휴지가 산더미처럼 쌓인 손수레를 하루도 빠짐없이 20년간 모아 팔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루 벌어보아야 만 원 돈입니다. 추운데 길에서 식사하고 작은 빌라에서 불도 때지 않고 아주 불편하게 삽니다. 병원에 있는 아들에게 미안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할머니에게는 집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을 팔면 조금 더 여유롭게 살 수 있을 텐데 할머니는 그 집을 병원에서 큰아들이 나오면 결혼해서 살게 해 주려고 아끼고 있습니다. 28년간 월세방을 전전하며 아이들을 키운 할머니는 집 없는 설움을 아이들에겐 절대 물려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큰아들은 조현병으로 쉽게 회복될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할머니는 집을 마련하기 위한 대출금과 아들의 병원비를 위해 오늘도 쉬지 않고 일합니다. 할머니에게 불행은 집이 없는 것이었기에 계속 집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배가 채워질 수 있을까요? 노력하는 데도 행복하지 않다면 잠시 멈춰야 합니다. 

공갈 젖꼭지는 아무리 빨아도 배가 부르지 않습니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엄마의 가슴입니다. 하지만 아이는 어느 순간부터 엄마의 가슴 대신 공갈 젖꼭지로 엄마의 가슴을 대신합니다. 그러면서 점점 엄마의 가슴의 필요성을 잊습니다. 그리고 공갈 젖꼭지가 자신의 허기짐을 채워준다고 믿습니다. 이젠 공갈 젖꼭지를 빼앗으면 웁니다. 이런 아이에게 유일한 약은 공갈 젖꼭지를 물지 않아도 괜찮다는 체험의 시간입니다. 그러면 알게 됩니다. 엄마의 가슴이 그리워 공갈 젖꼭지를 빨고 있었다는 것을.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는 물질적인 것으로라도 배고픔을 해결하려 합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부족한 것은 허기짐이 아닌 헛헛함입니다. 이 헛헛함은 아무리 음식을 먹어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사랑의 실체를 믿지 못하니 헛헛함과 허기짐을 구별하지 못하고 허기짐을 채워주면 헛헛함도 채워질 것이라 믿는 것입니다. 
위 할머니도 아들을 위해 빌라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그 빌라로 돌아오면 아들의 헛헛함이 채워질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아들에게 필요한 것은 엄마의 사랑입니다. 엄마에게 필요한 것은 창조자의 사랑입니다. 

자아가 보지 못하게 만드는 이 헛헛함은 창조주 하느님을 만나 그분의 사랑을 느낄 때만 해결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 안에서 헛헛함을 발견해야 합니다. 하지만 자아는 그 헛헛함을 발견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 허기짐을 채우라고 합니다. 

아이들을 스마트폰에 중독되든 컴퓨터 폰에 중독되든 그것은 다 어머니에게서 오는 사랑의 부재를 잠시 잊기 위해 자아가 만들어내는 수단일 뿐입니다. 모든 집착은 어머니가 진짜 함께 있어 주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불안함을 잊기 위한 방어기제입니다. 잠시 허기짐이 채워지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더 헛헛해집니다. 원인을 알 수 없어 짜증을 내보지만 혼란스러울 뿐입니다. 

이때 해야 하는 것이 단식입니다. 인터넷을 끊어보고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고 음식을 먹어보지 않는 것입니다.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젖도 못 먹는데 공갈 젖꼭지까지 빼어버리는 꼴입니다. 그런데 그런 단식을 하면 그래도 괜찮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때 진정한 고통의 원인이 육체적 허기짐이 아니라 정신적 헛헛함이었음을 보게 됩니다. 

헛헛함을 보게 되면 이제 그것을 채워줄 사랑을 찾습니다. 부모에게서 찾을 수 없었던 사랑을 창조자에게서 찾습니다. 십자가만 바라보아도 바로 발견합니다. 이렇듯 그리스도를 잃은 이들은 단식으로 다시 신랑을 찾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배고프지 않게 됩니다. 

저는 단식이 사도세자가 뒤주에 들어가 있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사도’(2014)에서 영조는 기이한 행동을 일삼던 자기 아들 사도세자를 더는 두고 볼 수 없어서 뒤주에 가두어 굶겨 죽입니다. 

사도세자는 아버지의 꼭두각시였습니다. 왕권이 약했던 영조는 늦게 얻은 아들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 했지만 아들은 아버지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아버지가 두려웠습니다. 아무리 옷을 갈아입어도 아버지 앞에 설 수 없는 자신을 자책했습니다. 

뒤주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아버지로부터 받지 못한 사랑의 헛헛함을 채울 수 있는 기행들을 멈추는 공간입니다. 허기짐이 채워지지 않으면 무슨 생각이 들까요? 비로소 제대로 보게 됩니다. 뒤주 속에서 사도세자는 말합니다. 

“당신이 강요한 방식은 숨이 막혀서 도저히 견딜 수 없었소. 사람이 있고 공부와 예법이 있는 것이지 어떻게 공부와 예법이 사람을 옥죄는 국시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나는 임금도 싫고 권력도 싫소. 내가 바란 것은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 한 번, 다정한 말 한마디였소.”

이것을 알면서도 사도세자는 어쩔 수 없이 사랑 대신 술과 폭력과 기행을 그 공갈 젖꼭지로 물고 있었습니다. 미리 뒤주로 들어가서 아버지에게 받지 못했던 따뜻한 눈길과 다정한 말을 다른 누군가에게서 찾아보려 했다면 어땠을까요? 뒤주는 우리가 사순절 때 단식하며 기도하기 위해 우리가 스스로 찾아야 하는 광야와 같습니다. 

전에 야식을 먹으러 한 식당에 갔는데 늦은 시간임에도 한 남성 어르신이 혼자 식사를 하시며 일하고 있는 여주인과 큰 소리로 대화를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약주도 한잔하시고 이미 거나해진 그분은 제 착각일 수는 있지만, 주인아주머니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아주머니는 단골손님이기 때문에 억지로 받아 주고 계신 듯 보였습니다. 그런데 나가시면서 그 아저씨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미친놈이다. 내가 미친놈이여. 허허. 밥을 한 그릇 다 먹었는데도 배가 고프네. 그러니 내가 미친놈이지. 허허.”

이건 누가 봐도 배가 고픈 상황이 아닙니다. 헛헛한 것입니다. 참사랑이 그리운 것인데 세속적 사랑이 채워지지 않아 자신을 배고픈 미친 사람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친 짓입니다. 

진정한 단식을 해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신랑을 잃은 신부처럼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않기 때문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단식이 열어주는 눈입니다. 단식은 그리스도를 향한 희망을 키워줍니다. 내가 고통스러운 진짜 이유는 허기짐이 아닌 헛헛함임을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헛헛함을 보면 단팥과 같은 어머니 품과 같은 하느님의 양식이 보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진정한 단식

 

대기업을 다니다가 정년 퇴임을 하신 형제님이 있습니다. 이 형제님은 퇴임 후의 할 일을 계속 생각하다가 택시 운전을 결정했습니다. 퇴임 후 사업한다고 쫄딱 망하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봤고, 일하지 않으면서 폐인처럼 사는 사람도 많이 봤기 때문입니다. 평소에도 운전을 좋아하고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을 좋아했기에 자기에게 딱 맞는 직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택시 운전을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그를 향해 ‘엄지척!’을 세웠습니다. 대기업에서 높은 자리까지 올랐던 분이 정말 대단하다며 칭찬했습니다. 그런데 동네 창피하게 왜 그런 일을 하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구일까요? 그의 아내와 딸들이었습니다. 
 
새로운 일을 할 때는 가족의 응원이 제일 필요로 할 때입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사회적인 체면을 이야기하며 응원하지 않는 사람은 늘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이 늘 나의 힘이 되어줄 것 같지만, 가장 큰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어쩌면 모든 사람이 다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그래서 주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배신은 늘 나의 몫이었고, 그럼에도 늘 나를 사랑해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누구의 말을 따라야 할까요? 세상의 시선보다 주님의 시선을 봐야 합니다. 
 
바리사이 사람들과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율법 정신의 철저한 실행으로 단식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의 단식은 조금 유별난 점이 있었습니다.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포도주와 물도 마셔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친 삼베옷을 입고 땅바닥에 앉아 옷을 찢고, 먼지나 재를 머리에 뿌리며 통곡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신심 행위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성경 문구를 써넣은 작은 갑을 이마에 달고 다녔고, 재계를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하려고 이맛살을 찌푸리고 사람들 앞에 나섰습니다. 그러면서 단식하지 않는 사람을 신심 없는 사람으로 몰아붙이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 모습을 예언자들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라고 말합니다.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6-7) 
 
주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기쁨이었습니다. 혼인 잔치의 비유를 통해, 기쁨은 인류가 구원되는 기쁨으로 예수님께서 구세주로 오신 이날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구세주로 오신 지금은 기뻐할 혼인 잔치의 때이지, 단식할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단식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 사랑에 보답하는 길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누군가를 몰입해서 사랑하고,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 행복이 찾아온다.

- 빅토르 프랑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신랑을 빼앗길 때에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마태 9,15)

 

잔치의 풍경과 단식의 풍경 모두 하느님을 향해 있는 사람의 풍경들이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을 향한 사람의 일이다. 빼앗긴 그 마음만큼 더 사랑하게 되는 신비이다. 하느님 아닌 다른 것에 너무 마음을 빼앗기며 살았다. 단식이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이다. 

그리스도가 중심이시다. 단식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바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잔치와 단식이 있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삶에 멀리 있지 않다. 치러야 할 마음의 여정이다. 생각을 끊고 마음을 끊어야 할 단식의 때이다. 단식으로 사라진 마음을 다시 만난다. 

작아지게 하는 자아의 단식이다. 영혼에 약(藥)이 되는 우리 소유의 단식이다. 비움과 얻음 사이에 우리가 있다. 오고 가는 시간 속에 우리가 있다. 가장 큰 사랑을 빼앗기며 살고 있다. 하느님 사랑을 되찾는 시간이다. 마음을 더럽히는 것은 마음이다. 올바른 단식은 사랑의 마음을 다시 세우는 것이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도 남는 것은 다시 시작하는 사랑의 마음이다. 하느님 사랑을 먹고 사는 우리들 삶이다. 욕심을 끊고 사랑을 먹는 사순이다. 단식은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사랑이며 참된 기도이다. 단식으로 하느님께 하느님의 자리를 기쁘게 내어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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