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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3월 6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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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사순 제1주일 -

 

 

2022년 3월 6일 사순 제1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모세는 백성에게 주님께서 주신 땅에서 거둔 수확의 맏물을 바치며, 주 하느님께 경배드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 오늘 제2독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광야로 가시어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3월 6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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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신명 26장 4-10절

 

선택받은 백성의 신앙 고백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사제가 너희 손에서 광주리를 받아 그것을 주 너희 하느님의 제단 앞에 놓으면,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 앞에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저희 조상은 떠돌아다니는 아람인이었습니다. 그는 몇 안 되는 사람들과 이집트로 내려가 이방인으로 살다가, 거기에서 크고 강하고 수가 많은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집트인들이 저희를 학대하고 괴롭히며 저희에게 심한 노역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주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께 부르짖자, 주님께서는 저희의 소리를 들으시고, 저희의 고통과 불행, 그리고 저희가 억압당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강한 손과 뻗은 팔로, 큰 공포와 표징과 기적으로 저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그리고 저희를 이곳으로 데리고 오시어 저희에게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습니다. 

10 
주님, 그래서 이제 저희가 주님께서 저희에게 주신 땅에서 거둔 수확의 맏물을 가져왔습니다.’ 그런 다음에 너희는 그것을 주 너희 하느님 앞에 놓고, 주 너희 하느님께 경배드려야 한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 환난 가운데
저와 함께 계시옵소서.

 

지극히 높으신 분의 보호 아래 사는 이, 전능하신 분의 그늘 안에 머무는 이, 주님께 아뢰어라. “나의 피신처, 나의 산성, 나의 하느님, 나 그분께 의지하네.” 주님, 환난 가운데 저와 함께 계시옵소서.

너에게는 불행이 다가오지 않고, 네 천막에는 재앙이 얼씬도 못하리라. 그분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어, 네가 가는 모든 길을 지켜 주시리라. 주님, 환난 가운데 저와 함께 계시옵소서.

행여 네 발이 돌부리에 차일세라, 천사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너는 독사와 살모사 위를 거닐고, 힘센 사자와 이무기를 짓밟으리라. 주님, 환난 가운데 저와 함께 계시옵소서.

그가 나를 따르기에 나 그를 구하여 주고, 내 이름 알기에 나 그를 들어 높이리라. 그가 나를 부르면 나 그에게 대답하고, 환난 가운데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며, 그를 해방시켜 영예롭게 하리라. 주님, 환난 가운데 저와 함께 계시옵소서.

 

 

매일미사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로마 10장 8-13절

 

그리스도 신자의 신앙 고백

 

형제 여러분, 성경에서 


의로움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 말씀은 너희에게 가까이 있다. 너희 입과 너희 마음에 있다.” 이것이 우리가 선포하는 믿음의 말씀입니다. 


그대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0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11 
성경도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하고 말합니다. 

12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13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4장 1-13절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유혹을 받으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 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그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 그 기간이 끝났을 때에 시장하셨다. 


그런데 악마가 그분께,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한순간에 세계의 모든 나라를 보여 주며, 


그분께 말하였다. “내가 저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내가 받은 것이니 내가 원하는 이에게 주는 것이오. 


당신이 내 앞에 경배하면 모두 당신 차지가 될 것이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10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너를 보호하라고 명령하시리라.’ 

11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12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13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예수님께서는 광야로 가시어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

 

주님, 저희가 받아 모신 천상 양식은 믿음을 기르고 희망을 더하며 사랑을 뜨겁게 하오니 저희가 살아 있는 참된 빵이신 그리스도를 바라고 기다리며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이성구 사도요한 신부 집전

 

 

2022년 3월 6일 (일)
이성구 사도요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3월 6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유혹을 이겨 낼 수 있는 방법.

 

루카 복음서의 저자는 예수님의 공생활을 전하기에 앞서 준비 기간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성령의 힘에 이끌려 광야로 가신 예수님께서는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악마는 세 번에 걸쳐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는 유혹, 세상 통치의 힘을 쥘 수 있는 유혹, 그리고 천사들에게 보호받으며 신성을 알릴 수 있는 유혹을 받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기 때문에 그분께서 부여받으신 신적 능력으로 악마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보여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들’로서 지니신 신적 특권을 포기하시고, ‘인간의 길’(배고픔, 고통, 죽음, 약함 등)을 선택하십니다. 인간의 운명을 피하는 것은 예수님께 큰 유혹이었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이며,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악마에게서 유혹을 받으시지만 극복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악마의 유혹을 이겨 내실 수 있었던 힘은 ‘하느님 말씀’에서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시나이 광야를 떠돌던 시기에 하느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어두운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말씀을 통하여 악마의 유혹을 이겨 내시어 당신 스스로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시는 분(신명 8,3; 루카 4,4 참조), 하느님을 경배하시고 섬기시는 분(신명 6,13; 루카 4,8 참조),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내맡기시고 그분을 시험하지 않으시는 분(신명 6,16; 루카 4,12 참조)이심을 증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광야’로 초대하십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유혹을 끊임없이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곳에서 하느님과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의 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같이 유혹을 받으셨지만 물리치심으로써, 우리에게 유혹을 이겨 낼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악마의 반 생태적인 유혹

 

회개를 생각하는 사순 시기인데 올해는 이 사순 시기의 회개를 생태적 회심 차원에서 성찰하면 좋을 것입니다. 그것은 작년 5월 생태적 회심을 위한 7년 여정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맞는 사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순 제1주일은 주님께서 유혹받으시는 얘기인데 이 유혹 얘기도 생태적 회심 차원에서 성찰하면 좋을 것입니다. 

회개란 죄로부터 돌아서는 것이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태적인 회심은 반 생태적으로 지은 죄에서 돌아서는 것이고, 이제부터 하느님 뜻대로 생태적인 삶을 사는 것이겠습니다. 

그렇다면 반 생태적인 죄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잘 돌보라고 우리 인간에게 주신 피조물들 곧 생명들을 파괴한 죄입니다. 

그 첫 번째 파괴이자 대표적인 파괴가 카인이 아벨을 죽인 것이지만 그것으로 생태계가 파괴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서로간의 파괴요 죄이지 생태계에까지 미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 생태계가 무지막지하게 파괴된 것은 언제부터이고 무엇에 의해서입니까? 산업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다음이고 자본주의의 체제와 문화에 의해서입니다. 그 이전까지는 생태계 안에서 자연과 더불어 인간이 살아갔는데 그 이후부터 인간이 생명들 위에 군림하면서 생태계를 파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생태계를 파괴하는 이런 죄는 인간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될 줄 모르고 이런 짓을 저지른 것입니다. 지금 우리 중에 생태계가 이렇게 파괴되길 바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욕심 때문에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고 죄를 지었듯이 인간의 욕심이 이런 결과를 만든 것입니다. 

더 풍요롭고, 더 편리하고, 더 안락한 삶을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이런 결과의 원인이며, 산업화와 기술, 테크노놀로지는 대량생산과 과잉생산을 가능케 하였고, 자본주의가 이 인간의 욕망을 부추김으로써 정신을 타락시키고 소비주의 문화를 조성한 것입니다.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출현 이전에는 필요한 만큼 생산하였는데 산업화와 기술로 대량 생산과 과잉 생산이 가능하게 되면서 기술과 자본을 가진 사람들 곧 자본가들이 기업의 이윤을 위해 소유와 소비를 조장하면서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경계하는 목소리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케인즈 학파가 대표적인데 그 중 한 명인 폴 사무엘슨은 행복=소유/욕망라는 정식을 통하여 소유와 소비를 조장하는 신자유주의를 비판하였습니다. 

그런데 소비에트연방이 붕괴된 후 견제 세력이 없어진 자본주의는 더욱 악마적으로 자본을 소유하고 운영하며 정신과 문화를 소비주의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소비가 미덕이라는 이 말도 안 되는 말을 우리가 문제 의식 없이 쓰고, 소비 심리가 살아나야 한다는 말을 반성 없이 쓰는 것이 다 이런 현상입니다. 

이들은 욕망은 죄가 아니라고 계속 얘기하고 광고를 통해 계속 쇠뇌합니다. 더 좋은 것, 새로운 것을 갖고 싶어하게 하고, 가지라고 하고, 누리라고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유혹자, 마귀, 곧 반 생태적인 유혹자, 반 생태적인 마귀입니다. 악마의 유혹은 항상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게 하고, 본 것이 좋아보이게 하며 탐스러워 보이게 합니다. 창세기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자가 쳐다보니 그 나무 열매는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러웠다." 

나쁘게 보이면 누가 사고, 탐스럽지 않으면 누가 소유하겠습니까? 항상 좋아보이고 탐스러운 것을 보라고 하며, 그것을 소유하는 것이 탐욕 아니라고, 죄가 아니라고 인간의 소유욕과 탐욕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합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아예 보지 말아야 하고 대꾸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주님처럼 말려들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세상을 얘기하면 하늘을 보고, 계속 유혹을 해대면 꺼지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더 명심할 것은 성령으로 무장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차 요르단강에서 돌아오시고 곧바로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가시어 유혹자와 대결하십니다. 우리도 소비주의의 정신과 문화에 성령으로 정신 무장하고 대결해야 합니다. 가난 정신과 우주적 형제애의 정신으로 무장하고 대결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죽이지 못하면 사랑이 아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시는 내용입니다. 정말 잘 알아두어야 할 것은 예수님을 광야에서 악마에게 유혹을 당하도록 이끄신 분은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루카 4,1-2)

다시 말해 성령께서 오지 않으시면 누구도 광야에 나가지도 않고 유혹과 싸우지도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유혹과 싸우게 만드시어 주님께 더 합당한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유혹과 싸우면 그 사람 안에는 반드시 성령께서 함께하십니다. 

자신과 싸운다는 말은 자아의 세속-육신-마귀와 싸운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귀가 세상을 섬기라고 유혹한 것이 세속이요,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라고 한 것이 육신이며, 성전에서 뛰어내려 보라고 한 것이 마귀입니다. 세속-육신-마귀와 싸우고 있음이 성령께서 함께하신다는 뜻입니다. 성령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죽입니다. 죽이지 못하면 사랑이 아닙니다. 

JTBC, ‘내가 키운다’에서 ‘ADHD 솔루션 중단 위기?! - 다시 시작되는 우경이와의 전쟁’이 방영되었습니다. 이지현 씨의 아들 우경이는 정말 숨이 막힐 정도로 엄마를 몰아붙입니다. 전문가들이 여러 해결방법을 알려주고 지현 씨도 노력했지만 잘 먹히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엄마 앞에서 집을 나가겠다고 하고 죽어버리겠다고 합니다. 이에 이도 저도 안 되는 상황 때문에 지현 씨는 주저앉아 눈물을 흘립니다. 

사랑은 분명 상대를 죽이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니 지현 씨 사랑은 우경이를 죽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나 분명 지현 씨가 하는 것은 참으로 사랑이 아닙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령을 부를 때, ‘사랑’(Amore-Persona)이신 한 인격체로 규정합니다. 성령께서 사랑이시기에 사랑과 반대되는 생존 욕구와 싸움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결국엔 죽입니다. 가리옷 유다처럼 다 성장하여 본인 의지로 성령을 거부하면 모를까 아이들은 100% 부모님 사랑이 참사랑이라면 반드시 자아가 죽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엄마가 사랑이 아닌 집착을 하고 있음을 알고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이 얻고 싶은 것을 얻어내려 떼를 쓰는 것입니다.
 
영화 ‘몽골’(2007)을 보니 세계 절반을 차지했던 칭기즈 칸이 그냥 싸움만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을 지키기 위해 자신과 싸움으로 그토록 강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 부족의 세력 다툼이 끊이지 않았던 12세기 몽골. 훗날 대륙의 지배자로 불리게 될 대 몽골 제국의 창시자, 테무진이 태어납니다. 테무진의 아버지는 자신의 부족을 지키기 위해 아들 테무진을 경쟁 부족과 혼인시키러 갑니다. 그런데 그중에 잠깐 들린 곳에서 테무진은 보르테라는 여자아이에게 한눈에 반해버립니다. 그런데 그 부족은 큰 부족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테무진의 선택을 존중하여 돌아갑니다. 하지만 결국 경쟁 부족에 의해 살해당합니다.

어쩌면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아버지를 잃은 테무진은 그 탓을 자신의 마음을 빼앗은 보르테에게 돌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테무진은 그럴수록 더욱 보르테를 사랑하였습니다. 

아버지를 잃고 집으로 돌아온 테무진은 자기 부족 이인자의 반란으로 자기 목숨까지 위태롭게 됩니다. 수레바퀴보다 키가 작은 아이는 죽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행히 어린 테무진은 살아남게 됩니다. 그러나 항상 쫓겨 다니며 조금씩 성장합니다. 이때 테무진을 도와준 것은 이웃 족장 아들 쟈무카였습니다. 테무진은 쟈무카와 의형제를 맺습니다.  

쟈무카 덕분으로 무사히 어른으로 성장한 테무진은 어렸을 때 결혼을 약속한 보르테를 찾아가 혼인을 청합니다. 하지만 복수의 씨를 없애려는 자신의 아버지를 배신한 이인자에게 보르테를 납치당합니다. 보르테는 화살에 맞은 테무진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대신 납치당한 것입니다. 

테무진은 자신의 의형제이자 이젠 어엿한 한 부족의 수장이 된 쟈무카를 찾아가서 도움을 청합니다. 쟈무카는 한 여자 때문에 전쟁해 달라는 테무진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거의 조롱을 합니다. 그리고 보르테가 아니면 안 된다는 테무진을 도와주기로 합니다. 테무진은 보르테를 위해 자기를 낮추는 수모를 감수합니다. 전쟁에서 승리하여 보르테를 찾은 테무진은 보르테가 원수의 아이를 배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테무진은 그동안의 보르테의 고통을 생각하고 원수의 아이도 자신의 아이로 받아들입니다. 원수의 아이를 키워야 하는 테무진이지만 그냥 보르테가 자신의 아내가 된다는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쟈무카는 테무진을 이인자로 임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보르테는 한 우리에 두 이리가 살 수 없다고 테무진을 설득합니다. 테무진은 쟈무카에게서 벗어나 자신의 세를 늘립니다. 그래서 쟈무카와 이젠 원수지간이 됩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돌봐준 의형제와 갈라지게 했지만 테무진은 여전히 보르테를 사랑합니다. 쟈무카도 점점 세력이 커지는 테무진을 그대로 놓아둘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을 일으켜 테무진을 생포합니다. 테무진은 자신이 잡히는 대신 보르테와 가족들을 피신시켰습니다. 테무진에게 영예로운 죽음을 선사할 수 없었던 쟈무카는 테무진을 누구도 찾기 힘든 아주 먼 곳의 노예로 팔아버립니다. 

감옥에 갇힌 테무진이 미래 세상을 통치할 인물이 될 것을 알아본 한 스님이 있었습니다. 테무진은 그 스님에게 보르테를 찾아가게 합니다. 멀리 달려온 스님은 보르테에게 테무진이 살아있음을 알리고 지쳐 죽습니다. 한 여자가 아이를 데리고 그 먼 길을 혼자 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이에 보르테는 테무진이 살아있는 곳으로 가는 상인 대열에 끼여 그들에게 몸을 팝니다. 덕분에 보르테는 또 테무진의 아이가 아닌 상인의 아이를 낳습니다. 테무진은 보르테의 기략 덕분으로 감옥에서 탈출합니다. 그리고 상인의 아이를 보며 보르테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생각합니다. 보르테도 테무진 때문에 순결을 잃고 남의 아이를 여러 차례 낳아야 했지만 불평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몽골의 통일을 두고 이제 테무진은 쟈무카와 격돌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쟈무카의 군대가 더 강력하였습니다. 그러나 때마침 천둥과 번개가 쳤습니다. 몽골인들은 번개를 무서워하여 번개가 치면 땅에 주저앉습니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던 테무진은 덕분에 땅에 웅크린 쟈무카의 군대를 일망타진합니다. 그렇게 몽골을 통일시키고 이제 세상을 정복하는 칭기즈 칸이 됩니다. 그는 끝까지 보르테를 존중했고 가장 사랑하고 아꼈으며 그녀의 조언을 귀담아들었다고 합니다. 

사랑은 이토록 자신의 모든 것을 잃게 만듭니다. 우리 안에 들어오신 성령께서도 그러하십니다. 성령은 “가난해져도, 먹을 것이 없어도, 멸시를 당해도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사순 때 이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내 모든 것을 잃어도 상대의 존재만으로 행복할 수 있어야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17살 고등학생이 된 홍원기는 소아조로증을 앓고 있습니다. 국내에 유일한 프로제리아라는 이 조로증은 어린이에게 조기 노화 현상이 발생하는 유전질환입니다. 분명 그렇게 태어난 데 부모의 영향이 있습니다. 아빠는 강연과 글로 돈을 벌었는데, 코로나로 이것이 잘 안 돼서 “원기야, 아빠 이제 뭐 하지?”라고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원기는 아빠에게 “오늘도 최고의 하루를 사는 거야. 한 번뿐인 인생 후회하지 않도록”이라고 말해줍니다. 

원기의 시간은 남들보다 7배나 빠르게 흐릅니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만으로 ‘최고의 하루를 살겠다’라고 말하는 원기가 참 대단해 보입니다. 그리고 사순을 지내는 의미가 원기처럼 주님만 있으면 상황이 어떻든 오늘 하루를 최고로 행복하게 보낼 수 있다는 믿음을 키우는 것임을 되새기게 합니다. 그의 부모가 준 사랑은 분명 원기의 자아를 죽였기 때문에 진짜입니다. 하느님은 사탄을 시켜 의로운 욥의 재산, 자녀, 자신의 건강과 명예까지 다 빼앗으십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게 하십니다. 

“벌거벗고 세상에 태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가리라. 주께서 주셨던 것, 주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지라.”(욥 1,20)

우리 안에 들어오신 성령은 돈이 없어도, 먹을 게 없어도, 멸시받아도 최고로 행복한 하루를 살 수 있음을 매일 우리에게 일깨워주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창조해주신 분을 향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유혹의 궁극적인 목적은 불만으로 내일을 희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지금, 이 순간 충분히 감사하고 행복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기도, 자선, 단식하며 고통을 받는 것이 사순이 아닌, 그런 것을 통해 고통 가운데서도 행복할 수 있는 훈련하는 것이 사순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우리 자아를 죽이는 하느님이 보내신 불칼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세상의 눈으로 단정 짓지 마십시오.

 

2019년 한국직업사전에 등재된 우리나라 직업의 수는 1만 6,891개였습니다. 정말로 다양한 직업이 있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도 ‘일할 곳이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실제 우리나라 실업률은 3.10%(경제활동인구 중에서 실업자가 차지하는 비율)으로 전 세계 실업률 평균보다는 낮지만,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며 ‘일할 곳이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아 보입니다. 
 
직업의 수는 일본의 경우 2만 5,000개로 우리보다 훨씬 많고, 미국은 3만 654개가 된다고 합니다. 선진국으로 갈수록 직업의 숫자도 늘어납니다. 계속 발전해나가는 우리나라이기에 직업의 숫자도 계속 늘어나겠지요. 따라서 ‘일할 곳이 없다’라고 말하기보다 새로움을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에 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단정을 짓는 순간, 미래로 나아가는 길이 닫혀버립니다. 열린 가능성을 보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주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다.’라고 단정 지으면, 전지전능하신 주님의 다양한 활동을 볼 수가 없게 됩니다. 
 
악마의 유혹도 그런 것이 아닐까요? 세상의 눈으로 단정 짓게 만들어서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못하게 합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을 유혹하는 악마도 이 방식을 썼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을 보내십니다. 광야란 세속과 완전히 분리된 곳으로, 사람을 만나기도 힘들고 먹을 것을 찾기도 힘든 곳입니다. 따라서 이곳은 오로지 하느님만을 떠올리며 하느님과 함께하는 공간이지요. 하느님과 함께하기에 정신적으로는 풍요롭겠지만, 육체적으로 아주 힘든 상태였을 것입니다. 하루만 굶어도 힘든데, 자그마치 40일을 굶은 상태였으니 말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악마의 유혹을 받으십니다. 
 
첫 번째 유혹은 40일 동안 굶은 상태에서 먹을 것을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허기진 사람이 먹을 것을 찾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말로 자격 운운하며 기적을 하라는 유혹합니다. 
 
두 번째 유혹은 자기 앞에 경배하면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이 땅에 이루시려는 예수님의 일을 더 수월하게 할 수 있는 유혹입니다. 솔깃합니다. 
 
마지막 유혹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당시 모든 사람의 눈이 바라보는 구원의 장소로, 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곳입니다. 이제 공생활을 시작해야 하는데, 이곳에서 멀쩡하게 뛰어내릴 수 있다면 사람들의 관심은 엄청날 것입니다. 
 
이 모든 유혹을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느님 말씀을 통해 이겨내십니다. 우리가 받을 유혹 역시 하느님 말씀을 통해 이겨낼 수 있음을 직접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단정 짓지 마십시오. 하느님 말씀만이 모든 유혹을 이겨내게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무릇 훌륭한 것은 오직 노력으로서만 얻을 수 있다.

- 톨스토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광야로 가시어,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루카 4,1-2)

 

우리가 살아있으니 삶의 광야가 있다. 삶이란 안전지대를 찾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광야를 은총으로 받아들이는 복음의 삶이다. 고향 산천에 붉은 화마가 또 아프게 지나갔다. 아직도 광야처럼 산불은 현재 진행중이다. 예수님께서도 광야를 향하신다. 광야에서 하느님의 일을 시작하신다. 

광야가 사람을 만든다. 사랑과 유혹을 깨닫게 하는 사람의 광야이다. 광야가 우리의 욕망을 비추어준다. 회개로 정화되어야 할 우리들 욕망이다. 광야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자신을 파괴하지 않는다. 광야안에도 사랑이 있고 광야밖에도 사랑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멈추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이다. 

빵만 있고 말씀이 없다면 소유만 있고 나눔이 없다면 기도만 있고 실천이 없으면 삶은 선물일 수 없다. 사순은 광야가 가리키고 있는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이다. 하느님과의 만남으로 살아있는 사랑의 시간이 된다. 사랑은 사랑으로 우리자신을 사랑이 되게한다. 삶 안에 광야가 있고 사랑 안에 고통이 있다. 광야에서 삶의 길을 만난다. 

말씀 안에 유혹을 봉헌하는 시간이다. 말씀과 유혹 사이에 사람의 삶이 있다. 유혹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먼저 받아들이시는 예수님이시다. 오직 하느님만을 만나게 되는 우리자신의 광야이다. 유혹은 하느님 사랑을 이길 수 없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광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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