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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2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
2022년 2월 22일 (화)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시어 당신의 지상 대리자로 삼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고대 로마에서 2월 22일은 가족 가운데 죽은 이를 기억하는 날이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죽은 이를 기억하는 관습에 따라 4세기 무렵부터 이날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무덤을 참배했는데 이것이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의 기원입니다. 그러나 6월 29일이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를 함께 기념하는 새로운 축일로 정해지면서, 2월 22일은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최고 목자로 공경하는 축일로 남게 되었습니다.
✠ 오늘 제1독서
베드로는 같은 원로이자 그리스도 고난의 증인으로서 교회 지도자들에게, 맡겨진 양 떼를 사심 없이 돌보고 양 떼의 모범이 되라고 권고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시어 당신의 교회를 세울 것이라 이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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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제1독서
1베드 5장 1-4절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고난의 증인인 원로
사랑하는 여러분,
1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있는 원로들에게 같은 원로로서, 또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고난의 증인이며 앞으로 나타날 영광에 동참할 사람으로서 권고합니다.
2
여러분 가운데에 있는 하느님의 양 떼를 잘 치십시오. 그들을 돌보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하십시오.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하지 말고 열성으로 하십시오.
3
여러분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에서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4
그러면 으뜸 목자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은 시들지 않는 영광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화답송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 돋우어 주시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당신 이름 위하여, 나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시네.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 저에게 위안이 되나이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원수들 보는 앞에서 제게 상을 차려 주시고, 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시니, 제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제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따르리니,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복음
마태 16장 13-19절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13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4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15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16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18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하느님, 저희가 복된 베드로 사도의 축일을 지내며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셨으니 이 구원의 잔치가 저희에게 일치와 평화의 성사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정민규 도미니코 신부 집전
2022년 2월 22일 (화)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정민규 도미니코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2월 22일 (화)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여러분, 저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을 지내는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에게 부여된 권한에 대한 말씀을 듣게 됩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아람 말 ‘케파’를 그리스 말로 옮긴 ‘베드로’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바위’(반석)를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름을 따로 부여하시면서 그를 새로운 하느님 백성인 교회 공동체의 토대로 삼으신다는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베드로 위에 세워진 이 교회는 죽음의 세력도 결코 무너뜨릴 수 없는 단단한 기반을 지닌 건물로 묘사됩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고 하시며, 그 열쇠로 매고 풀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십니다. 그가 지상에서 매고 푸는 행위는 그리스도의 법에 따라 다스리는 교도권, 특히 어떤 사안을 허용하거나 금지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에서 행사되는 베드로의 권한이 하늘에서도 존중받게 될 것임을 명확히 말씀하십니다.
베드로 사도에게 부여된 이 권한은 그의 후계자들을 거쳐 프란치스코 교황님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많은 우여곡절의 역사 속에서도 이 단단한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는 계속해서 흔들림 없이 구원의 여정을 항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황님께서 그리스도의 대리자에게 주어진 막중한 권한만큼 무거운 책임감까지도 함께 짊어지신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그 직분이 개인에게는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여정일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마주한 다양한 위기와 어려움을 헤쳐 나가고자 늘 애쓰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위하여 진심으로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그분께서 자주 우리에게 부탁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 저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교황과 함께 공동합의성을 잘 살아야하는 우리.
잘 아시다시피 오늘은 성 베드로 축일이 아니라 베드로 사도로부터 시작된 사도좌 축일이며 그래서 현교황인 프란치스코 교황의 축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도좌는 교황 개인의 직무라기보다는 교회를 대표하는 그러니까 교회 구성원 모두를 대표하는 직무이기도 하니 우리도 그 직무의 한몫을 담당하는 자로서 이 축일을 지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저는 오늘 천국의 열쇠를 받은 교황과 우리를 보고자 하는데 주님께서는 왜 천국의 열쇠를 베드로에게 주신 걸까요? 주님 친히 천국의 열쇠를 쥐고 계셔도 되는데 왜 주신 걸까요? 그리고 베드로 자기만 천국문을 열고 들어가라고 주신 걸까요?
결코 그럴 리 없을 겁니다. 천국의 문은 주님과 베드로가 함께, 그리고 베드로뿐 아니라 우리 인간이 당신과 함께 열자고 주신 걸 겁니다.
마태오 복음을 보면 이 synodality(공동 합의성)를 잘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 그러니까 마태오 복음 16장 19절에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그런데 18장 18절에서는 이 푸는 권한을 베드로뿐 아니라 일반에게 확대하십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20절에서는 둘이나 셋이 모인 곳에 당신도 함께 계시겠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들을 통틀어 볼 때 우리는 함축된 몇 가지 뜻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교황권과 교황의 매고 푸는 권한이 공동 합의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공동 합의성에는 인간만 아니라 하느님께서도 함께 계십니다.
세상 임금이 용상에서 결정을 내릴 때도 만조 백관이 모인 자리에서 만조 백관의 소리를 듣고 함께 결정을 내리지만 거기에 하느님은 안 계시지만. 교황이 사도좌에서 결정을 내릴 때에는 하느님께서 반드시 함께 계셔야합니다.
둘째도 같은 맥락인데 하느님께서 열쇠를 주시는 것이니 그 열쇠는 하느님께서 도로 빼앗아가실 수도 있습니다. 당신과 함께 당신 뜻에 따라 맺고 풀 때만 주시지 그렇지 않을 때는 그 권한을 빼앗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권한의 위임이지 양도가 아닌 것이며 이것은 주님께서 드신 집사의 비유에서 잘 드러납니다.
집사에게 주인은 자기 종들을 관리할 책임을 맡기는데 제 때에 정해진 약식을 주지 않고 술이나 퍼먹고 자기 종들을 집사가 때리자 그 권한을 빼앗잖습니까?
셋째로 그러므로 맺고 푸는 것은 권한이기도 하지만 역할입니다. 집사의 권한이 집사가 역할을 잘할 때 주어지는 것처럼 베드로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열쇠의 권한을 주시는 것은 권세를 부리라는 것이 아니라 권한을 가지고 역할을 잘하라고 주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축일을 지내는 우리는 교황이 자기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천국으로 이끌 책임이 주어진 것처럼 우리에게도 같은 책임이 주어졌음을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고, 교황님께서 공동 합의성을 잘 이끌어가시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성당에 안 와도 전화 한 통 없는 공동체가 정상일까?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베드로 사도좌, 곧 교황권에 대해 묵상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교회란 ‘모인다’라는 말에서 온 단어입니다. 베드로가 모임의 구심점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며 하느님 나라 열쇠를 주십니다. 성사를 의미합니다. 성사가 없다면 성당으로 모일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베드로와 성사 중심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는 미사가 성당에 오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게 했습니다.
가족이 그렇습니다. 일반적인 가족은 아버지가 돈을 벌어오고 어머니가 그것을 받아서 자녀를 양육합니다. 그러면 자녀들은 형제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법을 배워 세상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시다면 베드로는 어머니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양식으로 자녀들을 먹이고 자녀들이 서로 사이좋게 지내도록 가르칩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교회가 가족과 같은 공동체의 모습을 지니고 있을까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양식을 먹으러 성당에 오나요? 예비신자가 세례를 받고 성당에 빠지더라도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 시스템이 되었습니다. 새 신자가 5년 이내에 70% 정도가 냉담자가 되는 상황입니다. 이는 부모가 아기를 낳고 5년 이내에 70%의 자녀를 가출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출한 아이를 누구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또 자녀들은 부모의 음식을 먹고 위해 자주 집에 들어올까요? 몇 년 전 통계를 보았을 때 개신교는 주일 예배 참례율이 85% 정도였습니다. 이때 천주교는 30% 이하였습니다. 물론 코로나가 시작되기 직전에도 20%가 안 되는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우리는 주일미사를 빠지면 고해성사를 해야 하고 개신교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왜 개신교 신자들은 주일 예배에 빠지지 않고 천주교 신자는 고해성사의 부담에도 불구하고 미사에 빠질까요? 제 생각은 조직체계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가족공동체의 모습을 잃은 것입니다.
개신교는 예배에 나오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 전화하고 심지어 집까지 찾아갈 그 사람이 속한 소공동체가 명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가 미사에 나오는지, 나오지 않는지 상황파악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개신교 신자들은 자꾸 자신을 귀찮게 하는 사람들이 싫어서 천주교에 온다고 합니다. 천주교는 미사에 빠져도 간섭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간섭하지 않는 게 좋은 것일까요? 혹시 서로에게 무관심한 시스템 안에 사는 것은 아닐까요? 집에 자녀가 들어오지 않으면 가족이라면 적어도 전화라도 걸어보지 않겠습니까?
일본 영화 ‘서바이벌 패밀리’(2018)의 내용을 한 번 볼까요? 가족이 진정한 공동체가 되어가는 과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도쿄에 거주하는 평범한 스즈키 가족이 있습니다. 수다쟁이 엄마 미츠에는 생선도 무서워서 자르지 못합니다. 항상 불만 불평을 달고 사는 아빠 요시유키는 게을러서 가족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아들 겐지는 가족과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딸 유이는 외모와 친구가 최우선입니다. 가족을 위해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 완전히 개인주의 가족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정전이 일어납니다. 스즈키 가족이 사는 아파트만이 아니라 도쿄 전체, 일본 전체에 벌어지는 대규모 정전사태입니다. 원인은 알 수 없습니다. 도심은 혼란에 빠집니다. 더는 먹을거리도 물도 없는 도쿄를 벗어나야 하는 상황입니다. 결국, 도쿄를 탈출해서 할외할아버지가 계신 가고시마로 향하기로 합니다. 그러나 비행기를 타는 것은 불가능하여, 결국 자전거를 타고 먼 여행을 시작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식수와 식량이 점점 부족해집니다. 이때 생선도 못 썰던 어머니가 나서서 비싼 생수의 값을 흥정하며 어머니의 역할을 해나갑니다. 이때 고양이 통조림과 같은 것을 먹으며 연명하는 자신들과는 달리 캠핑 나온듯한 가족을 만납니다. 아버지의 엄청난 지식으로 생수를 얻고 음식까지도 맛있게 해 먹으며 다닙니다. 가족들은 이 가족과 비교되는 자기 가족의 아버지를 원망합니다.
아버지는 자기 가족들의 배를 불리지 못하는 자신을 한탄하며 음식을 먹기 위해 자존심을 버리고 사람들 앞에서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뗏목을 만들어 가족들이 강을 건너게 하며 자신은 물속으로 가라앉습니다. 아버지가 없는 가족들은 들개들에게 쫓기며 죽을 신세가 됩니다. 다행히 증기 기관차에 올라탈 수 있었고 길에 쓰러져있는 아버지를 발견합니다. 그들은 지친 아버지를 자신들의 무릎에 뉘고 쉬게 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가고시마에 도착해 외할아버지와 농사를 짓고 물고기를 잡으며 잘 살아갑니다. 아이들도 성장하며 부모님을 돕습니다.
몇 년 뒤 다시 전기가 들어오고 가족들은 이전의 생활로 돌아옵니다. 아이들은 더는 인스턴트 식품을 먹지 않고 어머니가 해 주시는 고등어 조림을 먹습니다. 아버지도 일을 열심히 하여 부지런히 가족을 부양합니다. 진정한 가족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그들이 여행하면서 자기 일을 도와주며 살자고 한 혼자 사는 할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가족이 그리웠던 것입니다. 가족을 위해 자기의 역할을 하는 것이 힘들지만 가족이라는 공동체에서 오는 행복이 얼마나 큰지 알게 해 준 외로운 할아버지였습니다.
공동체는 사회와는 다르게 이익집단이 아닙니다. 그 공동체가 이루는 하나의 유기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유기체는 각자의 지체들이 한 몸을 살리기 위해 각자의 역할을 담당합니다. 물론 각 지체는 한 유기체에서 영양분을 얻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교회 공동체를 이런 형태로 이해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1코린 12,27)라고 말합니다. 또 “우리가 한 몸 안에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지만 그 지체가 모두 같은 기능을 하고 있지 않듯이, 우리도 수가 많지만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을 이루면서 서로서로 지체가 됩니다”(로마 12,4-5)라고 합니다. 지체는 몸을 유지하기 위한 각자의 역할을 해야합니다. 손과 발, 위와 심장, 뇌는 한 몸에서 영양분을 공급받고 그 몸을 위해 자신의 역할을 다합니다.
그러나 그 역할을 하는 것은 귀찮은 일입니다. 우리 안에 그 역할을 하기를 거부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교회는 전기를 끊어줌으로써 각자가 역할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마음에서 돌아서게 합니다. 교회는 위 영화에서처럼 모든 신자를 회개시켜 각자의 위치에서 그 역할을 충실히 하도록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형성되는 것이 작은 공동체들입니다. 이러한 공동체를 ‘기초공동체’라 불러왔습니다. 친교 모임은 어울리고 싶어서 원하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공동체입니다. 반면 기초공동체는 한 거대한 유기체를 구성하는 몸의 지체와 같은 공동체입니다. 한 몸을 위해 각자의 역할을 하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손이나 발, 눈이나 간과 같은 기관들이 이러한 기초공동체입니다. 그런데 그 기초공동체는 세포라는 단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다 같은 세포지만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역할을 하는 공동체에 속한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이런 기초공동체를 ‘소공동체’라는 시스템으로 운영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소공동체는 기초공동체의 모습을 잃었습니다. 친교 모임에 가깝습니다. 나오고 싶은 사람은 나오고 나오기 싫은 사람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아무리 소공동체를 잘해보려 노력한들 이 공동체가 본래 추구하는 모습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교회 자체가 소공동체를 기초공동체로 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소공동체를 다시 살리려면 마치 레지오의 주회합처럼 여기는 시각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주회합에 들지 않으면 레지오 단원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소공동체에 참여하지 않으면 교회의 일원에서 제외하기 위한 선을 확실히 그을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세포도 몸을 이루는 한 부분의 조직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혼자 떨어진 세포는 죽은 세포입니다. 피부로 보자면 때와 같습니다. 신체 내부에서도 한 조직의 세포 단위에 속하지 않으려는 세포가 존재합니다. 영양분과 산소와 같은 것들은 빨아들이지만 기초공동체에는 속하지 않는 세포를 우리는 암세포라 부릅니다. 이런 세포들을 많이 버려두면 결국 커다란 몸도 무너지는 날이 옵니다. 우리가 교회 내에서 암세포가 되지 않으려면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기초공동체에 반드시 속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베드로를 통해 단순히 양식을 제공하는 일만을 시킨 것이 아니라 그 양식을 제공함을 통해 교회라는 모이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한 유기체에서 주어지는 양식을 먹으려면 그 유기체의 생존을 위해 일하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야 합니다. 양식만 먹으며 일하지 않으면 몸으로 치면 암세포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교회 내의 작은 공동체에 꼭 속해야만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교회라는 유기체에서 제공하는 양식이 곧 베드로에게 주어진 하느님 나라의 열쇠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하느님의 뜻을 늘 찾아야 해.
작년 12월에 코로나바이러스 백신 3차 접종을 마쳤습니다. 접종해주시는 의사 선생님께서는 독감 백신을 아직 맞지 않았으니 같이 맞으라고 하시더군요. 워낙 1, 2차 코로나바이러스 백신 접종 후에 아무런 증상이 없었기에, ‘3차 역시 별 증상이 없겠지!’라는 마음으로 독감 백신도 같이 맞았습니다.
그러나 저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주사 맞은 곳의 통증뿐만 아니라, 온몸이 몸살 걸린 것처럼 쑤시고 아팠습니다. 두통도 생겨서 생활 자체가 힘들 정도였습니다. 더군다나 성지에 미사 오신 분 중에 확진자가 있어서 코로나바이러스 PCR 검사까지 해야 했습니다. 제 예상과 다르게 돌아가는 모든 일이 저를 당황하게 했습니다.
예상대로 된다면야 좋겠지만, 이 세상은 당연한 예상도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곳입니다. 그래서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인 인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예상대로 되지 않기에 재미있는 세상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을 맞이해서 읽게 되는 오늘 복음은 하늘 나라의 열쇠를 받는 베드로 사도를 보여줍니다. 하늘 나라의 열쇠는 베드로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예수님 질문에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는 정답을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정답은 사실 마귀들이 외쳤던 호칭이었습니다(마르 3,11; 5,7 참조). 마귀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미리 알려서 구원 사업을 망가뜨리려는 속셈이었고, 이와 반대로 베드로는 굳은 믿음에서 깨닫게 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똑같은 정답이었지만 누가 이야기했는지 또 어떤 마음으로 했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베드로로서는 뜻밖의 말씀이며 생각하지 못한 지위였을 것입니다. 갈릴래아 어부 출신으로 이런 영광을 얻으리라 예상했을까요? 예수님을 모른다고 3번이나 부정했었던 의지가 약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이 점을 예수님께서 모르실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영광을 주시는 것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주셨기 때문”(마태 16,17)입니다. 우리의 능력과 재주에 따라 주어지는 영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은총과 섭리는 그분의 몫입니다.
종종 ‘이렇게 열심히 기도했는데….’, ‘얼마나 노력했는데….’ 등의 말로 하느님의 영광을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하느님의 사랑에 주어지는 선물일 뿐, 우리의 예상대로 흘러가야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늘 찾아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좋은 사람은 자기 안에 남을 살게 하는 사람이야.
- 하이타니 겐지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는 베드로이다. (마태 16,18)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하느님의 사랑이다. 하느님의 올바른 가르침은 구심점이 되는 사도좌를 통해 전달된다. 굽히지 않고 앞장서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시는 프란치스코 교종을 위해 기도드린다. 가장 아픈 곳을 찾아나서는 사랑의 나눔이다.
사도좌의 핵심은 나눔이다. 나약함 위에 쏟아지는 하느님의 은총이다. 나약하기에 더더욱 명확한 방향 제시가 필요한 우리들 여정이다. 사도좌는 복음의 소통이며 복음의 만남이다. 현장을 찾아가는 가톨릭 정신은 비판과 반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물질화 기계화 되어가는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은 영적 회복이다. 하느님의 복음을 바로 보게 하는 은총의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이다. 복음의 흐름을 따라 신앙의 진리를 따라 걸어가는 것이 중요함을 다시금 일깨워 주고 있다.
어둠 속에서도 드러나는 십자가의 빛은 바로 신앙인들의 삶임을 진실로 믿는다. 사도좌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드리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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