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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2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7주일 -
2022년 2월 20일 연중 제7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다윗은 사울에게 주님께서 사울을 자기 손에 넘겨주셨지만 자신은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에게 손을 대려 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 오늘 제2독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흙으로 된 첫 인간의 모습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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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1사무 26장 2절, 7-9절, 12-13절, 22-23절
주님께서
임금님을 제 손에 넘겨 주셨지만,
저는
손을 대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무렵
2
사울은 이스라엘에서 뽑은 부하 삼천 명을 거느리고 지프 광야에 있는 다윗을 찾아 그곳으로 내려갔다.
7
다윗은 아비사이를 데리고 밤을 타서 군대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때 사울은 진지 안에서 머리맡 땅바닥에 창을 꽂아 놓고 잠들어 있었다. 아브네르와 그의 군사들도 사울을 둘러싸고 잠들어 있었다.
8
아비사이가 다윗에게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오늘 원수를 장군님 손에 넘기셨으니, 이 창으로 그를 단번에 땅에 박아 놓겠습니다. 두 번 찌를 것도 없습니다.”
9
그러나 다윗이 아비사이를 타일렀다. “그분을 해쳐서는 안 된다. 누가 감히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에게 손을 대고도 벌받지 않을 수 있겠느냐?”
12
다윗은 사울의 머리맡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나왔다. 주님께서 그들 위에 깊은 잠을 쏟으시어 그들이 모두 잠들었기 때문에, 다윗을 본 사람도 알아채거나 잠을 깬 사람도 없었다.
13
다윗은 맞은쪽으로 건너가 상대와 거리를 멀리 두고 산꼭대기에 서서,
22
응답하였다. “여기 임금님의 창이 있습니다. 젊은이 하나가 건너와 가져가게 하십시오.
23
주님은 누구에게나 그 의로움과 진실을 되갚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주님께서 임금님을 제 손에 넘겨주셨지만, 저는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에게 손을 대려 하지 않았습니다.”
화답송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없애시는 분. 네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내시고, 자애와 자비의 관을 씌우시는 분.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네. 우리를 죄대로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잘못대로 갚지 않으시네.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
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가 먼 것처럼, 우리의 허물들을 멀리 치우시네. 아버지가 자식을 가여워하듯, 주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 가여워하시네.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
제2독서
1코린 15장 45-49절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모습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45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인간 아담이 생명체가 되었다.”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46
그러나 먼저 있었던 것은 영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이었습니다. 영적인 것은 그다음입니다.
47
첫 인간은 땅에서 나와 흙으로 된 사람입니다. 둘째 인간은 하늘에서 왔습니다.
48
흙으로 된 그 사람이 그러하면 흙으로 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에 속한 그분께서 그러하시면 하늘에 속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49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모습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
복음
루카 6장 27-38절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29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30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31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32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33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34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 준다.
35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37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38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모습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
땅에서 온 첫 인간 아담과 달리 하늘에서 오신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전능하신 하느님, 이 거룩한 제사에서 구원의 보증을 받았으니 저희가 실제로 그 구원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양명모 루카 신부 집전
2022년 2월 20일 (일)
양명모 루카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2월 20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우리는 아버지를 닮은 사람이고 또 닮아야 하는 사람들
오늘 복음을 듣고 있으면, 이 계명들을 지키며 사는 것이 정말 가능한 일인지 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주하는 자를 축복해 주고, 학대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뺨을 때리면 다른 뺨을 내밀고, 겉옷을 가져가면 속옷까지 내주라고 하십니다. 심지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원수’(怨讐)란 자기나 자기 집안에 어떤 중대한 해를 끼쳐 깊은 원한이 생긴 사람을 뜻할 텐데, 이런 자를 우리가 어떻게 용서까지는 해 볼 수 있다손 치더라도 정말 사랑까지 할 수 있을까요? 이런 비상식적인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근거로 아버지 하느님께서 지니신 자비와 사랑을 제시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곧 하느님께서 그러하시기에 그분의 자녀이기를 바라는 우리도 그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 자체로 정의한 요한 서간의 저자도 이 점을 명확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 4,11).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하느님께서 본디 그러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비와 사랑이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더라도 이는 어쩔 수 없는 그분의 속성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타나는 계명들은 사실 ‘하느님’의 행동에서 그 주체가 ‘우리’로 바뀐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당신께 원수와 다름없는 이를 사랑하시는 분이시고, 당신의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똑같이 인자하신 분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결국 오늘 계명은 당신 자녀들이 당신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이기를 바라시는 아버지의 호소인 셈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신앙인들은 아버지를 닮은 사람이고 또 닮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버지를 닮으려는 자녀의 노력을 보시는 하느님께서는, 겨자씨만큼 작은 우리의 사랑을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는 나무만큼 성장시키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우리의 벗인 원수
연중 제7주일은 사랑이 주제인데 하느님처럼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이 주제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그래서 저는 오늘 도무지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원수 사랑을 왜 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것이 가능한지 보고자 합니다.
제 생각에 원수와 내가 1대1로만 있으면 사랑이 불가능하고 시작도 못할 것입니다.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릴만한 사람 아무도 없고 내 앞에 오직 원수만 있어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고 상처와 불행을 과거의 것으로 돌릴 수 없다면 그로 인한 상처와 불행은 현재 진행형이 될 것이고 배가되어 견딜 수 없을 겁니다.
그러므로 원수 사랑을 위해서는 시선을 일단 원수에게서 떼게 해야 하고 원수로 인한 상처와 불행을 과거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 원수에게서 시선을 돌리게 할 존재가 아무라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원수에게서 시선을 떼게 하는 방법으로는 여행을 떠나고, 영화를 보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 등의 방법이 있겠지만, 그건 잠시 시선을 돌리게 하는 것일 뿐 그 이상은 되지 못하기에 시선을 돌린 뒤 우리가 달려갔을 때 나를 치유해주고, 채워주고, 바꿔줄 그런 존재가 필요합니다.
어렸을 때 엄마와 같은 존재입니다. 누군가한테 얻어맞으면 아이는 울며 엄마한테 달려가지요. 그러면 엄마는 우리 애기 누가 때렸냐며 역성을 들어주고, 아픈 데를 '호'하고 불어주고, 우는 아이를 안아 줌으로 서러움을 풀어줍니다.
원수로 인해 상처를 받고 불행한 우리에게 엄마와 같은 존재가 하느님이고, 우리는 하느님께로 시선을 돌리고 하느님께 달려가 안겨야 합니다.
그러면 엄마가 아이의 상처에 '호' 불어주듯 천지 창조 때 아담의 코에 숨을 불어넣어주시고 부활하신 뒤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어주셨듯 하느님은 성령과 성령의 사랑을 우리에게 불어넣어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사랑을 지니게 될 때 우리는 하느님처럼 자비롭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될 때 우리의 시각이 하느님의 시각으로 바뀌어 나의 원수였던 자가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이 되고 그래서 그 불가능할 것 같던 원수 사랑이 가능하게 됩니다.
오늘 열왕기에서 다윗은 부하들이 원수라고 부르는 사울을 하느님의 기름부음받은이라고 하며 복수를 하지 못하게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사울이 자기에게 어떤 사람이냐가 아니라 하느님께 어떤 자인지 그런 관점에서 사울을 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사랑은 우리의 시각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수난의 사랑 곧 Passion이 우리 안에서 타오르게 하고 그래서 수난을 안긴 것 때문에 전엔 원수였던 자를 이제 벗으로 여기며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의 사랑을 본받고자 했고 그래서 오상까지 받은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모든 형제들이여,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어라' 하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우리가 발자취를 따라야 할 주님께서 당신을 넘겨준 사람을 벗이라고 부르시고 또한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에게 기꺼이 자신을 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부당하게 번민과 괴로움.....순교와 죽음을 당하게 하는 모든 이들이 바로 우리의 벗들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끼치는 그것들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기에 우리는 그들을 극진히 사랑해야 합니다."
사실 원수는 우리의 사랑이 하느님의 사랑 차원으로 성장하게 하는 벗들입니다. 우리에게 원수가 없다면 원수를 위해 당신을 바치신 주님 사랑에 우리가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용서하고 싶다면 : 그리스도 없이는 용서도 사랑도 안 되는 이유
오늘 복음은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용서해야 합니다. 분명히 나에게 잘못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말씀만으로는 우리 힘으로 용서와 사랑이 가능한 것처럼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오실 이유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용서와 사랑은 그리스도 없이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루카 6,37) 이것은 진리입니다. 이 말씀은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루카 6,37)와 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것을 잘 압니다. 주님의 기도에서도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기도합니다. 내가 다른 이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나도 용서받지 못함을 우리는 매번 주님의 기도에서 되새깁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남을 심판하지 않나요? 알면서도 남을 심판합니다. 안다고 절대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법은 그 법을 제정한 주체가 언제든 그 법을 어길 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위치에 머물러야 지켜집니다. 인간의 원죄 성향이 그토록 큽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 사제들이 당시 율법을 다 외우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가장 중요한 사랑과 자비는 외면하고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우리 옆에 계신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우선 나의 거울이 되어주셔서 내가 죄인임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루카 6,41)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라는 거울로 내 눈 속의 들보를 보지 못하면 용서할 수 없습니다. 영화 ‘밀양’(2007)에서는 아무리 그리스도를 믿어도 자신도 자기 아들을 죽인 유괴범과 다를 바가 없음을 보지 못한다면 용서할 수 없음을 잘 보여줍니다.
영화 ‘기억의 밤’(2017)에서 이것이 잘 표현됩니다. 재수생 동생은 대학생 형과 매우 사이가 좋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재수생 동생은 어떤 사고 이후로 계속 기억이 지워지는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형은 친형이 아니라 그 동생에게 부모님이 살해되어 원수를 갚으려는 사람입니다. 성장하여 원수를 찾았지만, 원수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억을 되찾아주기 위해 연기자들을 부모님으로 만들고 자신은 형 역할을 하며 동생이 살던 집을 수리하여 기억을 찾아주려 했던 것입니다. 동생은 형을 사랑했지만, 형이 조금씩 보이는 이상한 행동에 위협을 느낍니다. 심지어 부모도 이상합니다. 자꾸 자신을 아들이라 여기는 것 같지 않습니다. 이 불안함 속에 집을 탈출합니다. 그래서 들어간 곳이 경찰서입니다.
경찰서에서 자기 가족이 자기를 죽인다고 말합니다. 경찰인 이 사람이 조금 이상한 것을 알고는 나이를 묻습니다. 그는 재수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40대의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경찰이 거울 좀 똑바로 보라고 말합니다. 거울을 들여다본 그는 깜짝 놀랍니다. 자신이 생각했던 그 모습이 아니라 잊고 싶은 기억을 지워버렸던 살인자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거울이 되어 그 사람이 지은 죄나, 내가 지은 죄가 오십보백보임을 알게 해 주십니다. 자신의 눈의 티를 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더는 다른 사람을 심판할 수 있는 지위에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원수도 용서합니다. 예수님은 음탕한 마음으로 바라보기만 해도 간음하는 것이라 하십니다. 나도 화를 내며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예수님만 동행만이 내가 감춰두었던 내 눈의 들보를 보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내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심판할 수 없는 사람이 되면 사랑할 수 있을까요? 미워하지 않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미운 사람에게 보복하지 않는다고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려면 사랑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이 의지는 원수도 사랑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이 믿음은 내 안에 들어와 계신 그리스도 덕분으로 가질 수 있습니다.
고정원 씨는 연쇄살인범 유영철에게 어머니와 아내, 외아들을 잃었지만, 유영철을 용서하고 자기 양자로 삼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힘은 본인에게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가 자살을 생각하며 아내가 다니던 성당에서 울고 있을 때 한 신자의 선교로 루치아노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아 새로 태어났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는 세례를 받고 성체를 영하며 누구도 할 수 없는 용서의 길을 갈 수 있겠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라면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유영철의 다른 피해자 가족들은 어떻게 그런 인간을 용서할 수 있느냐며 고정원 씨보고 미쳤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에 성체성사의 힘입니다. 내 안에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는데 불가능한 일이 있겠습니까? 고정원 씨는 자기 4대 독자 아들을 죽였으니, 이제 유영철보고 자기 아들이 되어달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옆에서 동행하는 것을 넘어서 이제 내 안에 계신다고 믿어야 용서에서 멀고 먼 사랑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경지가 대단하기는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고정원 씨는 유영철을 위해 사형 폐지 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 사람도 주님을 믿어 나와 함께 천국에 살도록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꽃들에게 희망을』에서 나비가 된 애벌레는 다른 애벌레들도 자신처럼 나비가 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자신처럼 나비가 되도록 목숨을 다해 그들에게 믿음을 전해줄 수 있다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내가 의지적으로 그리스도와 동행함을 믿으려 했고, 또 의지적으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분과 하나임을 믿으려 한 것과 마찬가지로 완전한 사랑에 이르려면 이제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태양이 없는 곳에서 태양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미래에 핵전쟁이 벌어져 온 하늘이 분진으로 검게 닫힌 상태를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태양이 도달하지 않아 땅은 황폐해지고 먹을 것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벽돌 사이로 잡초가 하나 자라고 있는 것을 본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태양이 다시 비치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잡초 안에는 태양의 빛과 열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잡초를 보면 태양이 보입니다. 이는 먼저 내 안에 태양을 바라고 믿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보입니다. 태양을 알지도 못하고 바라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다면 잡초만 보일 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자신 안에 하느님이 계심을 믿는 사람은 이제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든 식물과 동물이 태양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음을 알아서 모든 생물 안에서 태양을 발견하듯, 하느님의 성자와 성령께서 창조하지 않으신 피조물이 존재하지 않기에 당연히 우리는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이 삼위일체 모습을 지닌 인간을 볼 때는 어떠할까요? 그 사람이 원수라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 사람 안에서도 사랑하는 하느님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순간에 이를 수 있는 수준은 아니지만 불가능한 수준도 아닙니다. ‘마리아 고레티’ 성녀는 갓 10살이 넘은 나이에 자신을 수십 차례나 찔러 온몸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면서도 그를 용서하겠느냐는 고해 사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을 용서할 뿐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천국에서 살고 싶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고 더 가까이 계심을 믿을수록, 그 친밀한 정도에 따라 용서와 사랑의 크기가 달라집니다. 우리 사랑은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의 존재와 그분에 대한 사랑으로만 증가합니다. 이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그분을 외부로부터 내 안으로, 또 모든 것 안에서 그분을 보는 것으로 나아가는 믿음의 여정입니다.
내 안에 있는 것으로 외부에 있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개는 자신 안에 아름다움을 가지지 못해, 꽃을 보아도 예쁜 것을 모릅니다. 꽃으로 자기 집을 장식하는 개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이시고 선이시며 아름다움이신 사랑 자체인 분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니 세상을 볼 때 그분에게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고 또 그분 사랑이 묻어있지 않은 것이 없음을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나비가 된 애벌레가 비로소 다른 애벌레도 나비로 보일 때 그것들을 나비로 만드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되는 것처럼, 우리도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을 모든 것 안에서 발견하려는 노력을 의지적으로 해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증오와 분노를 없애는 방법은 사랑뿐이다.
“첫눈에 반한다.”
맞는 말일까요? 이런 운명적인 만남이 있다고 사람들은 믿습니다. 그런데 사실 사람들이 그 시작을 미화하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그로닝겐대학교의 플로리안촉 교수는 많은 연인이 서로에게 첫눈에 반하는 현상에 관해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연인들은 실제로는 서로 첫눈에 반하지 않았음에도 그랬다고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대화를 나누고 함께 시간을 보내며 서로의 마음에 온기를 더해가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그렇게 멋지거나 예뻐 보이지 않았음에도, 이내 현재의 좋은 감정을 기억의 빈틈에 채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를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첫눈에 반하는 운명적 만남만을 찾으려고 하다가 결국 아무런 만남도 만들지 못합니다. 대신 서로 오랫동안 마음을 나눌 수 있는지, 서로 진심으로 사랑해 줄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그래야 진짜 운명적인 만남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계속 사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정적 마음으로 사랑을 멈추게 되면 부족하고 아쉬운 부분만이 더 크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계속 사랑하면서 우리는 운명적인 만남을 만들어야 합니다.
주님과의 운명적인 만남도 주님께서 계속 사랑해주시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계속된 사랑을 특히 완벽한 사랑을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여라.”(루카 6,27)라고 하십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구약시대의 명령이었습니다. 여기서 이웃은 이스라엘 민족의 동족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이웃인 이스라엘 민족을 공격하는 원수들은 어떨까요?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이라 생각했기에,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이 곧 하느님을 공격하는 것으로 봤습니다. 그래서 사랑할 수 없는 원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 원수를 미워하라는 명령은 단 한 줄도 없습니다. 사실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지 않는 민족들도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웃과 원수의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어느 누구만 사랑하는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이 아님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증오와 분노를 없애는 방편은 사랑뿐입니다. 증오와 분노는 또 다른 증오와 분노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제1독서에서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왕을 제거할 기회를 얻었지만, 주님의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기에 손을 대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연관된 사람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혹시 내가 미워하고 싫어하는, 그래서 원수 같다는 그 사람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행복은 무엇이 당신의 영혼을 노래하게 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 낸시 설리번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루카 6,38)
사랑은 기쁘면서도 무척이나 힘이 든다. 사랑의 거울을 깨끗하게 다시 닦는다. 상대방과 나 자신에게 무엇을 주고 있는지를 스스로 묻게 된다. 우리의 사랑을 이끌어 가시는 주님이시다.
미움과 사랑은 결국 하나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사랑은 우리의 일상(日常)으로 내려앉는다. 사랑하지 않는 우리자신을 아프게 만나며 인정하게 된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 사랑을 반성하는 주일이다.
내가 먼저 주어야 할 것은 분명 사랑이다. 모든 것은 사랑에서 시작된다. 예수님에게서 참사랑을 배운다. 심판하지 않는 사랑이며 단죄하지 않는 사랑이다. 주지 않고서는 받을 수 없는 사랑의 주고받음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자유롭기를 바라신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자기를 버리는 것이 원수를 사랑하는 길이다. 모순덩어리인 우리들에게 사랑은 주는 것이라 다시금 가르쳐주신다.
이와같이 사랑의 근원은 사랑이신 하느님이시다. 사랑을 나누지 않고서는 하느님을 알 턱이 없다. 올바른 사랑은 아름답다. 우리는 서로 적이 아니다. 함께 살아가는 사랑의 사람들이다. 사랑하는 거기에 최선의 길을 가르쳐주시는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
인간해방은 인간의 사랑이다. 사랑을 주고 받는 은총 넘치는 주일이다. 주고 받고 나누고 되돌아오는 놀라운 사랑의 힘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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