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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2월 17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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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1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6주간 목요일 -

 

 

2022년 2월 17일 연중 제6주간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사회적 지위가 어떠하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신앙인의 참된 자세입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 부활이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라고 밝히시자 제자들은 큰 충격에 빠집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2월 17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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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야고 2장 1-9절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고르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겼습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가령 여러분의 모임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누추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온다고 합시다. 


여러분이 화려한 옷을 걸친 사람을 쳐다보고서는 “선생님은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저기 서 있으시오.” 하거나 “내 발판 밑에 앉으시오.”한다면, 


여러분은 서로 차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악한 생각을 가진 심판자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겼습니다. 여러분을 억누르는 사람들이 바로 부자가 아닙니까? 여러분을 법정으로 끌고 가는 자들도 그들이 아닙니까? 


여러분이 받드는 그 존귀한 이름을 모독하는 자들도 그들이 아닙니까? 


여러분이 참으로 성경에 따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지고한 법을 이행하면, 그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차별하면 죄를 짓는 것으로, 여러분은 율법에 따라 범법자로 선고를 받습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어 주셨네.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 내 영혼 주님을 자랑하리니, 가난한 이는 듣고 기뻐하여라.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어 주셨네.

나와 함께 주님을 칭송하여라. 우리 모두 그 이름 높이 기리자. 주님을 찾았더니 응답하시고, 온갖 두려움에서 나를 구하셨네.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어 주셨네.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으시어, 그 모든 곤경에서 구원해 주셨네.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어 주셨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르 8장 27-33절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그때에 

2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그리고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28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29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0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31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3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가 천상 진미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참생명을 주는 이 양식을 언제나 갈망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다슬 안드레아 신부 집전

 

 

2022년 2월 17일 (목)
김다슬 안드레아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https://youtu.be/IQYbdM84ak4?t=460

 

2022년 2월 17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오늘 우리는 ‘베드로의 고백’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마르코 복음 전반부가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바탕으로 그분의 정체를 알아 가는 여정이었다면 이제 그 종착지에 다다른 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제자들은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알아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칭찬은커녕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씀을 듣게 됩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 

제자들은 아마도 승리와 영광의 빛으로 둘러싸인 메시아, 곧 놀라운 권능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영원한 해방을 안겨 줄 그러한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와 전혀 다른 메시아의 모습을 소개해 주십니다. 그는 강력한 힘을 통하여 ‘정복함으로써’ 구원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오히려 ‘정복당함으로써’, 다시 말하면 ‘십자가의 무력함’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는 메시아입니다.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가는 여정은 이렇게 다시 시작되고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의 후반부는 ‘그분은 어떤 메시아이신가?’를 알아 가는 여정으로 꾸며집니다. 이는 우리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성자이신 분의 호칭으로 사용되는 “예수 그리스도”는 사실 하나의 짧은 ‘신앙 고백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습관처럼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고백하면서, 정작 그분이 어떤 그리스도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는지는 까맣게 잊고 지낼 때가 많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다시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세상의 부자와 믿음의 부자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겼습니다." 

오늘 야고보서는 믿음의 부자인 신앙인이라면 가난한 사람과 부자 사이에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세상의 부자와 믿음의 부자를 비교하며 얘기를 할까 합니다. 

야고보서는 세상의 부자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으로 얘기합니다. 모든 부자가 다 그런 것은 아닌데 말입니다. 

세상의 부자란 이 세상살이에 필요한 돈이 많은 사람으로서 그들은 보통 돈으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사람입니다. 돈이 많으면 존중하고 돈이 없으면 무시하는 사람입니다. 

또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기에 돈을 위해서는 뭐든지 하고 돈만 있으면 자기 마음대로 다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먼저 돈의 노예가 되고 남도 돈으로 억누릅니다. 

그러나 믿음의 부자는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지 않기에 그들에게 돈은 필요한 정도의 것이지 그 이상이 아니며 그의 우상이나 주인이 되는 것을 결코 허락지 않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부자가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고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러면 무엇이 많은 것이고 무엇을 최고의 가치로 여길까요? 덕이 많은 사람이고 덕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람일까요? 

그럴 것입니다. 

믿음의 부자는 틀림없이 돈보다 덕이 많은 사람 곧 후덕한 사람이고 돈보다 선을 더 중시하여 자선을 통해서 적선을 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니 돈이 많다고 우대하고 없다고 차별하겠습니까? 그는 돈의 그으름을 전혀 타지 않고 그을음이 비켜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관건은 어떻게 후덕한 사람이 될 수 있느냐인데 믿음의 부자는 그 덕을 자기 수행을 통해 쌓은 것이 아니라 프란치스코가 하느님을 덕의 원천이라고 하듯 덕의 원천이신 하느님 덕분에 지니게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한자말에서 덕분(德分)이란 덕을 나눈다는 뜻이잖아요? 그래서 원님 덕분이라고 하면 원님 덕에 내가 덕을 보는 것이고, 하느님 덕분이라면 하느님의 덕을 우리가 나누어 지니는 거지요. 

이것이 다 하느님께서 당신 덕을 나누어주시는 덕분인데 그것이 사랑이고 그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 덕을 보는 사람인 거지요. 

우리 모두 하느님 덕분에 믿음의 부자들이 되는 오늘이 되시길 빕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신앙고백도 자격이 필요하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신앙을 조사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고 엘리야, 어떤 이들은 그냥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합니다. 확실히 성령을 통해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이르십니다. 제자들은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뭐하러 제자들을 뽑으신 것입니까? 

예수님은 곧이어 당신이 많은 고난을 받고 유다 지도자들에게 배척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함을 선포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말하지 말라고 한 거야!”란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저에게 “신부님, 사랑해요!”라고 말할 때 이 말은 진실일까요?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저도 어떤 분들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이제 저를 가르치려고 합니다. 자기 뜻대로 좌지우지하여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일의 도구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사랑한다고 할 수 있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는 사랑이 사랑이 아니게 됩니다. 

똥파리의 양익준 감독이자 배우가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에 나와 공황장애 13년 차의 괴로움을 상담받았습니다. 그는 초등학생에게까지 극존칭을 쓰며 사람들을 만날 때는 “저는  X 밥이에요”라고 자신을 소개할 만큼 사람들 앞에서 한없이 자신을 낮추는 사람입니다. 이것도 하나의 신앙고백입니다. “저는 아주 작은 사람이고, 그래서 당신을 높여드립니다”라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에게 양익준 감독이 그렇게 자신을 낮추면 그 모습이 진실하게 보일까요? 양익준 감독은 그러면서도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너무 만만하게 보는 것에 대한 불만이 있습니다. 학생 때는 다른 사람과 싸우던 아이가 조용히 앉아있던 자신의 머리를 의자로 내려치는가 하면, 아무 잘못도 없는데 사람들이 다가와 자신에게 심한 욕설을 퍼부은 적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저런 상황으로 공황장애가 오고 7년간 약 안 먹고 버티다가 이러다 죽을 것 같아서 6년째 약을 먹고 있는 것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사람이 나무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지금 양익준 감독은 사람이 나무로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을 해칠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살기 위해서는 내가 고개를 숙여야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에게 무시당하는 것은 싫은 사람입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입니다. 곧 사랑입니다. 
영화 ‘똥파리’에는 그의 가정사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방 두 칸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를 포함하여 일곱 식구가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심하게 구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유일한 아들이지만 어머니를 보호하지 못하는 죄책감과 아버지에 대한 미움, 어머니의 무기력함에 대한 분노 등이 가슴 깊이 자리했던 것 같습니다. 

양익준 감독은 아버지와 같은 폭군이 되기보다는 어머니와 같이 온순한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갈 것을 결심한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곧 세상입니다. 자녀가 아버지를 보는 모습이 곧 세상을 보는 모습입니다. 양 감독에게 세상은 언제든 자신에게 폭력을 가할 존재입니다. 자신은 어머니처럼 더 작아지고 불쌍해지면 세상이 자신을 불쌍히 여겨줄 것 같아서 그런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더 작아지려는 이를 더 잔인하게 짓밟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나무처럼 만만하게 보아야 합니다. 

양 감독이 우선하여서 해야 하는 일은 아버지에 관한 판단을 멈추는 일입니다. 부모를 판단하게 되면 세상 모든 사람을 판단하게 됩니다. 판단하게 된다는 말은 그 사람 위에 올라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고개를 숙인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런 것과 같습니다. 

“신부님, 당신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그런데 조금만 잘못하면 난 언제든 당신을 심판하고 내쫓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이미 하느님보다 높은 위치에 올라선 사람입니다. 그렇게 보이지 않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분명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라 고백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그리스도를 판단합니다. 하느님을 심판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아담도 죄를 이은 이유를 하느님께서 하와를 만들어주셨기 때문이라고 하느님 탓을 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부르더라도 그것은 올바른 신앙고백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고백하기 이전에 내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면 하느님 위에 서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 합니다. 

양익준 감독은 자신의 분노를 똥파리라는 영화에 토해냈고 그렇게 아버지가 그런 사회 환경에서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조금씩 초등학생에게도 극존칭으로 말하는 것을 그만두고 조금씩 세상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완벽한 부모가 있을 수 있을까요? 완벽한 부모는 없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완전하게 사랑한 것입니다. 그러니 과거의 일은 과거의 일로 묻어두고 지금 내가 나아가야 할 바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 기억에 묶여있으면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고백은 다 헛것이 됩니다. 

오은영 박사에게 이런 엄마가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 엄마는 아이였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아빠의 죽음을 “너 때문에 아빠가 돌아가셨다”라고 아이 탓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녀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 엄마였던 것입니다. 그런 엄마 밑에서 자라서인지 자신의 아이만 보면 그렇게 화가 난다는 것입니다. 자신도 엄마처럼 아이를 학대하게 될 것 같다는 것입니다. 

오은영 박사는 아이들에게 체벌을 가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저도 이것에 동의합니다. 체벌은 아이에게 “너의 영역은 없어!”라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살은 나의 영역입니다. 그것이 부모일지라도 누군가가 내 영역에 침범하여 나를 아프게 할 수 있다면, 나는 마치 장난감이라도 된 것처럼 한 인격체로서의 자존감을 상실하고 내가 그런 장난감과 같은 존재이니 다른 이들도 장난감처럼 여겨 다리를 부러뜨려도 된다고 여기게 됩니다. 오은영 박사는 그 엄마에게 뼈를 깎는 아픔으로 체벌하고 싶은 마음을 이겨내라고 하였습니다. 

9년 뒤에 그 엄마가 찾아왔다고 합니다. 9년 동안 아이에게 체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분노가 끓어오를 때가 많았지만 정말 뼈를 깎는 아픔을 참아내었습니다. 그렇게 아이를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내 안에 사랑이 증가합니다. 또 그렇게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어머니를 용서할 힘을 얻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그래서 누구도 심판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면 그제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유다를 많이 판단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가 한 번 예수님을 배신한 그 밤에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심판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유다를 받아들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나 유다나 별반 다를 게 없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누구도 심판할 수 없는 수준으로 내려왔을 때 내가 그분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자격이 생깁니다. 내가 누군가를 아직 용서하지 못하고 사람을 심판하는 버릇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하느님까지도 심판할 수 있는 사람임을 알고 그런 상태로 신앙고백을 하며 믿음이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됨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의 삶은 주님 보시기에 만족스러운 삶일까요?

 

텔레비전을 보면 많은 광고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광고에 출연하는 사람은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유명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저 사람이 광고하는 것이라면 믿을만하다’라고 생각하고, 그 유명인을 닮고 싶은 생각에 광고 상품을 산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제품과 유명인의 연관성은 거의 없습니다. 
 
회사의 입장에서도 누가 광고를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광고에 출연한 유명인이 나쁜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면, 손해배상을 청구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세상 끝까지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무대의 출연진은 누구입니까? 바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모두입니다. 내 삶 자체가 중요합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나의 모습이 부정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삶이라면 사람들은 주님을 절대로 따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멀리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라면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등 공신이 됩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야 세상에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7)라면서 세상 사람들의 자기 이해를 물으십니다. 
 
우선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통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헤로데 임금이 죽인 세례자요 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구약성경의 기름을 바르고 메시아를 세운 엘리야로, 또 마카베오서에 나오는 유다의 꿈에서 황금검을 주었던 예레미야로, 그 밖의 위대한 예언자 중의 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최대의 평가이기에 제자들도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과 그동안 함께 했던 제자들의 이해도를 묻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마르 8,29)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환호 속에 나타나는 메시아가 아니라 사람들이 눈치를 채지 못하는 가운데 오직 믿음 있는 자만이 알아볼 수 있는 메시아를 제자들이 알아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성령의 영감을 받아 이렇게 대답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수난과 죽음 예고에 붙들고 반박하지요.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이라는 말까지 듣게 됩니다. 사탄은 광야에서 40일 동안 유혹을 받으실 때, 그 유혹자를 사탄이라고 하셨지요. 즉, 사탄은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며 유혹하는 자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고 유혹하는 사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 뜻을 따르며, 주님을 제대로 알리는 주님의 참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주님을 어떻게 알리고 있습니까? 나의 삶은 주님 보시기에 만족스러운 삶일까요?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타인에게 충고하는 일이며,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자기를 아는 일이다.

- 탈레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마르 8, 33)

 

봄꽃또한 십자가를 지고 우리에게 온다. 비교할 수 없는 하느님의 일이다. 하느님께서는 꽃을 피우시고 사람은 꽃에 집착한다. 하느님의 일로 시작하지만 사람의 일로 끝나는 우리들 욕심이다. 

만남은 하느님의 일이다. 하느님의 일은 내어맡기는 믿음으로 족하다. 하느님께서는 만남을 완성하시고 사람은 만남을 욕망으로 깨뜨린다. 소중한 것을 사람은 쉬이 잊어버리고 하느님께서는 소중한 것을 끝까지 기억하신다. 

하느님 앞에서 아무 것도 감출 수 없는 우리들 삶이다. 하느님의 일은 욕심과 욕망을 내려놓고 십자가를 지는 일이다. 하느님의 일은 십자가를 피하지 않는다. 저마다의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의 일을 가로막는 우리의 자아가 죽고 하느님 중심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이 꽃샘추위 속에서도 봄꽃을 피우시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십자가로 하느님의 일을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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