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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2월 15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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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1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6주간 화요일 -

 

 

2022년 2월 15일 연중 제6주간 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이르십니다. 또한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의 뜻을 이해하고 깨닫기를 촉구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2월 15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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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야고 1장 12-18절

 

하느님께서는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12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13 
유혹을 받을 때에 “나는 하느님께 유혹을 받고 있다.” 하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받으실 분도 아니시고, 또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14 
사람은 저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꼬임에 넘어가는 바람에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15 
그리고 욕망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16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착각하지 마십시오. 

17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옵니다. 빛의 아버지에게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분께는 변화도 없고 변동에 따른 그림자도 없습니다. 

18 
하느님께서는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시어, 우리가 당신의 피조물 가운데 이를테면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
당신이 깨우쳐 주시는 사람은
행복하옵니다.

 

주님, 행복하옵니다, 당신이 깨우쳐 주시고, 당신 법으로 가르치시는 사람! 불행의 날에도 평온을 주시나이다. 주님, 당신이 깨우쳐 주시는 사람은 행복하옵니다.

주님은 당신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당신 소유를 저버리지 않으신다. 재판이 정의로 돌아오리니, 마음 바른 이 모두 그 뒤를 따르리라. 주님, 당신이 깨우쳐 주시는 사람은 행복하옵니다.

“내 다리가 휘청거린다.”생각하였을 때, 주님, 당신 자애로 저를 받쳐 주셨나이다. 수많은 걱정들 제 속에 쌓여 갈 때, 당신의 위로 제 영혼을 기쁘게 하였나이다. 주님, 당신이 깨우쳐 주시는 사람은 행복하옵니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르 8장 14-21절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그때에 

14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밖에 없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하고 분부하셨다. 

16 
그러자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 

17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18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19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열둘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0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는, 빵 조각을 몇 바구니나 가득 거두었느냐?”그들이 “일곱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가 천상 진미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참생명을 주는 이 양식을 언제나 갈망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다슬 안드레아 신부 집전

 

 

2022년 2월 15일 (화)
김다슬 안드레아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2월 15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예수님께 의지하는 법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정말 단단히 화가 나신 모양입니다. 얼마나 답답하셨으면 이렇게까지 심하게 나무라실까 싶습니다. 이전에 예수님께서는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두 번이나 일으키셨습니다(마르 6,30-44; 8,1-10 참조). 

제자들은 이 놀라운 광경을 직접 목격하였을 뿐 아니라 군중에게 그 빵을 나누어 주고 남은 조각을 모으는 역할도 맡았습니다. 예수님의 권능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가장 강렬하게 체험한 이들이었지요.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배에 먹을 빵이 없는 상황이 닥치자 다시 걱정하기 시작합니다. 한 번은 오천 명을, 한 번은 사천 명을 배불리 먹게 해 주신 분을 자기들 앞에 모시고 있으면서도 말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이동하는 장면은 교회의 여정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교회라는 ‘배’ 안에 예수님을 모시고 구원의 나라로 항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여정에서 우리가 대개 염려하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공동체 행사를 준비하는 일이나 필요한 물품, 재원을 확보하는 일에는 많은 신경을 쓰면서도 정작 그 안에 현존하시며 활동하시는 예수님께 의지하는 법을 까맣게 잊고 지내는 것은 아닌지 성찰하게 됩니다. 

제자들은 거센 풍랑에 배가 파선되지 않을까 염려하였고(마르 4,35-41 참조), 오늘은 배 안에 빵이 없다고 걱정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염려가 결국 불필요한 것이었듯이, 우리가 교회 안에서 염려하는 많은 부분도 불필요한 것일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전부이시고, 그분께서 험난한 항해의 여정 속에 늘 함께하심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내가 흔들릴 때.

 

어제 야고보서는 시련과 시험을 받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오늘은 유혹을 받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얘기하는데 두 공통점은 그것들이 우리를 흔든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시련과 시험이 외부의 무엇이 나를 흔드는 것이라면 유혹은 유혹자가 있긴 하지만 엄밀히 얘기하면 내부의 무엇, 곧 욕망이 있기에 유혹자가 나를 흔드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술을 싫어하면 술친구가 아무리 나를 유혹해도 유혹을 받지 않지요. 배가 이미 불러 식욕이 전혀 없으면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유혹이 되지 않고요. 

물론 견물생심이란 말이 있고 아담과 하와도 뱀이라는 유혹자가 과일을 보라고 하지 않았으면, 또 봤더라도 과일이 탐스럽지 않았다면 따먹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겠지만 그럴지라도 욕구가 아예 없었으면 욕망이나 욕심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고 유혹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유혹을 받을 때 남탓하지 말고 무엇보다도 하느님 탓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유혹을 받을 때에 '나는 하느님께 유혹을 받고 있다.' 하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꼬임에 넘어가는 바람에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어쨋거나 우리 인간은 시련과 시험에 의해 믿음이 흔들리고, 욕망 때문에 유혹에 마음이 흔들리는 존재이고, 저도 지난 주에 말씀드렸듯이 미풍에도 흔들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어제도 아침에 일어나니 마음이 불안해지며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성체가 모셔져있지 않지만 기도방에 들어가 저의 흔들리는 마음을 주님께 그대로 열어보여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흔들리는 저를 붙잡아주신다는 느낌이 들고, 저도 주님을 꽉붙잡고 매달리게 되었고  그래서 기도방을 나올 때는 주님과 제가 더 단단하게 하나된 느낌이 들었습니다. 

사실 흔들리면 더 꽉 붙잡게 되지요. 나무에 올랐는데 밑에서 흔들면 떨어지지 않으려 오히려 더 꽉 붙잡잖아요? 

시험과 시험이 나의 믿음을 흔들 때, 악마가 두려움과 불안을 이용하여 나의 마음을 흔들 때, 그때 우리는 베드로처럼 풍랑을 보다 물에 빠지지 말고 오히려 주님만 보고 주님을 더 꽉 붙잡아야 됨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는 오늘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하느님은 누구에게 먹고살 걱정을 없애시는가?

 

오늘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라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5천 명과 4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하셨을 때 남은 빵의 양을 되새기시며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은 찾는 이는 빵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하게 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리스도를 찾는 이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께 빵을 달라고 청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은 영적인 ‘양식’, 곧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그래도 먹고 사는 게 중요하니 그것부터 해결되면 주님을 따르겠다고 말합니다. 물론 금강산도 식후경입니다. 그러나 금강산을 안내하는 사람이 굶기고 금강산을 구경시키겠습니까? 항상 순서가 바뀌어서 문제입니다. 밥에 대한 욕망은 탐욕을 자아내서 나를 더럽힙니다. 예수님은 그 욕망을 없애주시러 오신 분입니다. 물질적인 것은 갖는다고 욕망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더 배고프게 됩니다. 

아이들은 내일 걱정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부모를 믿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밥걱정한다면 부모들은 서운할 것입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세상에서 사는 법을 가르쳐주기 위해 밥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밥걱정하는 아이는 부모에게 그런 것을 배울 마음이 없습니다. 먼저 밥부터 달라고 합니다. 부모는 가르치려고 하는 것만 받아들이면 밥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합니다. 이런 일들이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서도 일어납니다. 

식탐을 조절 못 하는 아이는 훈육이 힘듭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에 ‘아이의 폭식을 제지 못 하는 엄마’란 사연이 나왔습니다. 아이는 식탐을 절제하지 못하는데 엄마는 그 식탐을 제지하지 못합니다. 항상 웃는 표정으로 아이에게 모든 것을 허락합니다. 

그 이유는 엄마가 엄마 없이 자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얼굴을 밝게 해야 했습니다. 자신을 키워주는 이들과 친구들마저 자신을 버리는 것이 두렵기에 항상 얼굴을 밝게 꾸미며 그들의 애정을 붙잡으려고 하였습니다. 엄마는 아이가 자신을 미워할까 봐 모든 것을 허락했던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는 아이에게 아무것도 가르칠 수 없습니다. 아이의 식탐을 먼저 없애주어야 무슨 가르침이라도 줄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식탐을 없애주어야 하는데 엄마는 이를 위해 미움받을 용기를 내야 합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 아이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세상에서 잘 살 수 있도록 키우는 것입니다. 아이의 배고픔은 엄마의 배고픔입니다. 

식탐은 왜 오는 것일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사제이기에 모든 것을 ‘사랑의 부재에서 오는 헛헛함’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사랑으로 채워야 하는 것을 음식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tvN ‘엑소시스트’에 ‘식탐 폭발 어린아이가 된 우리 엄마’로 유튜브에 짧게 올라온 한 38세 어머니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물론 극단적인 예를 일반화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사랑의 부재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는 생각해 볼 수 있는 예일 것입니다. 그녀는 시도 때도 없이 두 살배기 아이처럼 응석을 부리고 먹는 것에 집착합니다. 그만 먹으라고 하는 제작진에게 주먹을 휘두르기까지 합니다. 

그녀도 자신이 이렇게 된 이유를 압니다. 그 이유는 결혼한 첫날부터 아이 셋을 낳으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남편에게 구타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도 분명 무슨 상처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당연히 받아야 하는 사랑을 받지 못했을 때 오는 것은 헛헛함입니다. 그 이유는 사랑은 밥에 담겨오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부족하면 밥이 땅기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사랑을 찾지만 없습니다. 그래서 더 먹어보는 것입니다. 저는 식탐이 그래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당신의 아드님을 세상에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양식이신데 ‘영’(靈)이십니다. 하느님은 영이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우리 몸을 살게 하실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 말씀이신 성자를 육체와 결합하시어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육체를 입어 우리에게 오셨다는 말은 육체까지도 책임지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는 방식은 항상 그렇습니다. 

따라서 영적인 양식을 바라는 이들이 육체까지 걱정할 필요 없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밀떡과 포도주 안에 담겨 우리에게 오십니다. 절대 영으로만 오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육체가 먼저 만족하지 않으면 영적인 것은 배우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식탐에 찌든 아이처럼 육체적인 것만 걱정한다면 그 안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어떻게 깨우칠 수 있겠습니까? 위 예에서 아이는 엄마를 육체적으로만 배를 불려 줄 수 있는 대상으로 여깁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영적인 양식을 먹어 영혼을 건강하게 하려고 물질적인 것은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신 다음 수천 명을 먹이신 것입니다. 세상 걱정하는 사람에게 말씀은 스며들지 못합니다. 

켈커타의 사랑의 선교회 모원에 사는 300여 명의 수련 수녀들이 음식이 없어 모두 굶게 생긴 일이 있었습니다. 주방 담당 수녀는 마더 데레사에게 사정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는 마더 데레사가 몇몇 후원자들에게 전화해서 도와달라고 할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더 데레사는 여러 사람을 만나는 중이었으며 그 어린 수녀에게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자매가 이번 주 주방 담당인가요? 그렇다면 경당에 들어가서 예수님께 먹을 것이 없다고 말씀드리세요. 그 문제는 해결됐군요.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지요.”

그리고 십 분 후 현관 초인종이 울렸고, 처음 보는 어떤 남자가 서류철을 들고 마더 데레사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수녀님을 보자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데레사 수녀님, 공립학교 교사들이 파업에 돌입했다는 소식이 지금 막 들어왔습니다. 수업이 취소되어서 7,000개의 점심 도시락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도시락을 처리하게 도와주시겠습니까?”

‘안나의 집’을 운영하며 매일 수백 개의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 김하종 신부는 하루하루가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돈도 그렇지만 짜놓지도 않았는데 그때그때 적절하게 봉사자들이 와 주는 것을 보는 것이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일단 우리가 먹을 걱정이 해결되지 않으면 가르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당신 가르침과 함께 항상 먹을 것도 주십니다. 먹고살 것은 주님 뜻에 맡깁시다. 그리고 말씀을 배우고 하느님 나라에 사는 법을 익히기 위해서만 노력합시다. 그러면 먹을 것은 항상 그 말씀과 함께 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을 밥과 함께 옵니다. 그러니 밥을 먼저 찾지 맙시다. 사랑이 고픈 것입니다. 사랑을 찾으면 밥도 따라옵니다.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으로 사는데 말씀은 빵에 담겨 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달력에 일정이 빽빽하게 적혀 있는 사람과 아무런 일정이 없는 사람 중에 누가 더 행복할까요?

 

달력에 일정이 빽빽하게 적혀 있는 사람과 아무런 일정이 없는 사람 중에 누가 더 행복할까요? 일의 많고 적음으로는 행복도를 측정할 수 없습니다. 그보다 지금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느냐에 따라 행복이 결정됩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전에 저의 일정표는 늘 가득했습니다. 저의 일정을 우연히 본 사람들은 “이렇게 바빠서 어떻게 살 수 있어요?”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바쁘면 좋은 거잖아요. 그만큼 저의 쓸모가 있다는 것이니까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제 일정은 빈칸만 있습니다. 일정이 몇 개 되지 않아서 굳이 일정표를 확인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이렇게 말합니다. 
 
“계속 바빴으니 이제 조금 쉬라고 그러나 봐요. 이 시간 동안 책도 많이 읽고, 글도 많이 쓰면서 바쁜 시간을 미리 준비해야지요.” 
 
바쁘거나 한가하거나 상관없이 모두 다 행복할 수 있습니다. 돈이 많고 높은 지위에 올라야 무조건 행복할까요? 아닙니다. 그 순간을 누릴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남자들끼리의 여행이라 아무도 식사를 준비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마르 8,15)라고 분부하십니다. 제자들은 이 말을 바리사이와 사두가이에게 가서 빵을 구걸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알아들었습니다. 빵이 없다는 걱정이 잘못된 이해를 가져왔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뜻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들은 표징을 요구하며 불신앙을 표시하고, 헤로데 임금의 부도덕함을 눈감아주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이 밖에도 많은 그들의 위선을 조심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먹을 것을 준비하지 못함을 꾸짖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실 빵의 기적을 직접 본 제자들이 아닙니까? 따라서 예수님만 있으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걱정해야 할 것은 주님 뜻에 따라 살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뜻을 찾고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어떤 상황이 찾아와도 걱정 없이 지금 이 순간을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믿기 힘든 진실은 우리는 ‘시간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단지 ‘시간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 라이더 캐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 (마르 8,25)

 

지금껏 제대로 볼 수 없었음을 겸손히 주님 앞에서 인정하며 고백한다. 다시 볼 수 있도록 간절히 주님께 기도드린다. 회복되어야 할 것은 바로 나의 시력이다. 마음이 있는 곳에 사람이 다시 보이고 마음이 있는 곳에 함께 있는 사람이 있다. 정체불명의 사람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회복되어야 할 마음의 따뜻한 시선이다. 

진실로 사랑하지 않고서는 회복될 수 없는 우리들 마음이다. 사랑으로 견디어내고 사랑으로 다시 보이는 삶의 기쁨이다. 가면을 벗겨주시고 다시 보게하시는 주님이시다. 사랑의 마음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변화이다. 새롭게 바라보지 않고서는 새롭게 만날 수 없다. 서로 바라보는 거기에 주님께서 계신다. 

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다시 보게하여 주신다. 주님을 회복하는 것이 영혼의 시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니 모든 것이 뚜렷이 회복된다. 마음이 있는 곳에 마음의 시력도 회복된다. 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보는 것이 복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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