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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2월 12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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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1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5주간 토요일 -

 

 

2022년 2월 12일 연중 제5주간 토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우상 숭배는 주님께 죄를 짓는 것이기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금송아지를 만들어 예배하게 한 예로보암 집안은 멸망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를 축복하시어 모든 군중을 먹이시는 기적을 베푸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2월 12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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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1열왕 12장 26-32절, 13장 33-34절

 

예로보암은
금송아지 둘을 만들었다.

 

그 무렵 

26 
예로보암은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였다. ‘어쩌면 나라가 다윗 집안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27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주님의 집에 희생 제물을 바치러 올라갔다가, 자기들의 주군인 유다 임금 르하브암에게 마음이 돌아가면, 나를 죽이고 유다 임금 르하브암에게 돌아갈 것이다.’ 

28 
그래서 임금은 궁리 끝에 금송아지 둘을 만들었다. 그리고 백성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일은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이스라엘이여, 여러분을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여러분의 하느님께서 여기에 계십니다.” 

29 
그러고 나서 금송아지 하나는 베텔에 놓고, 다른 하나는 단에 두었다. 

30 
그런데 이 일이 죄가 되었다. 백성은 금송아지 앞에서 예배하러 베텔과 단까지 갔다. 

31 
임금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의 자손들이 아닌 일반 백성 가운데에서 사제들을 임명하였다. 

32 
예로보암은 여덟째 달 열닷샛날을 유다에서 지내는 축제처럼 축제일로 정하고, 제단 위에서 제물을 바쳤다. 이렇게 그는 베텔에서 자기가 만든 송아지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자기가 만든 산당의 사제들을 베텔에 세웠다. 

13,33 
예로보암은 그의 악한 길에서 돌아서지 않고, 또다시 일반 백성 가운데에서 산당의 사제들을 임명하였다. 그는 원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직무를 맡겨 산당의 사제가 될 수 있게 하였다. 

34 
예로보암 집안은 이런 일로 죄를 지어, 마침내 멸망하여 땅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
당신 백성 돌보시는 호의로
저를 기억하소서.

 

조상들처럼 저희도 죄를 지었나이다. 불의를 저지르고 악한 짓을 하였나이다. 저희 조상들은 이집트에서 당신의 기적들을 깨닫지 못하였나이다. 주님, 당신 백성 돌보시는 호의로 저를 기억하소서.

그들은 호렙에서 송아지를 만들고, 금붙이로 만든 우상에 경배하였네. 풀을 뜯는 소의 형상과 그들의 영광을 맞바꾸었네. 주님, 당신 백성 돌보시는 호의로 저를 기억하소서.

이집트에서 위대한 일을 하신 분, 자기들을 구원하신 하느님을 잊었네. 함족 땅에서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갈대 바다에서 이루신 두려운 일들을 잊었네. 주님, 당신 백성 돌보시는 호의로 저를 기억하소서.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르 8장 1-10절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그 무렵 많은 군중이 모여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셨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 


그러자 제자들이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일곱 개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빵 일곱 개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나누어 주라고 하시니, 그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 제자들이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것도 축복하신 다음에 나누어 주라고 이르셨다.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나 되었다. 


사람들은 사천 명가량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돌려보내시고 나서,

10
곧바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라 달마누타 지방으로 가셨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하느님, 저희 모두 같은 빵과 같은 잔을 나누어 먹고 마시게 하셨으니 저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어 기꺼이 인류 구원에 앞장서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이현섭 요셉 신부 집전

 

 

2022년 2월 12일 (토)
이현섭 요셉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2월 12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신 이유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빵을 먹이시는 이야기는 마르코 복음서에 두 번 등장합니다. 한 번은 마르코 복음 6장 30-44절에, 다른 한 번은 오늘 복음인 마르코 복음 8장 1-10절에 나옵니다. 거의 동일한 구성의 이야기지만 차이가 있다면, 첫 번째 이야기에서 빵을 먹은 군중은 유다인들이고, 두 번째 이야기의 군중은 이방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푸셨던 은혜로운 기적을 이방인들에게도 똑같이 베푸셨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자비는 어느 특정한 이들이 독차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는 마르코 복음사가의 신학 사상을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신 이유입니다. 보통은 누군가의 요청으로 기적을 베푸시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당신 스스로 먼저 무엇인가를 해 주시고자 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늘 우리를 지켜보시며 우리의 안위를 걱정하고 계십니다. 특히 우리의 험난한 신앙 여정에 대한 염려가 가장 크십니다.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걷는 길에서 겪게 될 유혹들 때문에 지치지는 않을까, 혹여나 그 길에서 쓰러지지는 않을까, 늘 노심초사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위하여 영적 음식을 마련하시는데 그것은 놀랍게도 당신 자신입니다. 스스로 빵이 되시어 이를 먹는 모든 이의 여정에 함께하시며 힘이 되어 주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미사를 통하여 받아 모시는 성체는 그분의 한없는 자비와 동정, 사랑의 마음에서 비롯된 최고의 선물이자 가장 풍요로운 양식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광야에 있다고 느낄 때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4천 명을 먹이신 얘기입니다. 아시다시피 얼마 전에 5천 명을 먹이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수많은 군중이 다시 주님께 모여든 것입니다. 

그런데 5천 명을 처음 먹이실 때는 굶주린 군중의 상태를 염려한 제자들이 주님께 와서 어떻게 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씀을 드려 기적을 일으키셨지요. 

그러던 제자들이 이번에는 굶주린 군중을 수수방관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나서서 어떻게 해야 하지 않냐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 이에 제자들은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 불릴 수 있겠습니까?"하고 되묻는데 할 것이 없다는 태도지요. 

이에 우리는 불과 얼마 전에 같은 기적을 직접 목격하고서 어찌 이런 태도를  제자들이 취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운데 그들이 망각의 늪에 빠지기라도 한 걸까요? 

더 기가 막힌 것은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라는 표현입니다. 5천 명을 먹이실 때 마을 빵 가게 옆에서 기적을 일으키신 것이 아니고, 또 주님께서 친히 빵을 먹이신 것을 보고도 누가 먹이겠냐고 하니 말입니다. 

광야는 모세 때부터 하느님께서 빵을 주시는 장소입니다. 광야가 아니라면 하느님께서 빵을 주실 리도 없고, 사람들도 스스로 빵을 구하지 하느님께 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제자들과 같은 잘못, 다시 말해서 광야에서 빵을 주시는 하느님 체험을 하고도 또다시 어디서 누구에게 구할지 묻는 잘못을 범하지 말 것이고, 반대로 신앙인인 우리는 다른 곳이 아닌 광야에서 다른 누구가 아닌 주님께 청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다른 어디서 구할 곳이 있다면, 다른 누구에게 구할 수 있다면 왜 주님께 청하겠습니까? 

광야, 그곳은 아무것도 없고 아무도 없는 곳이며 그렇지만 우리가 주님을 찾는 곳, 그러니 광야에 있다고 느낄 때 우리는 주님께 구하고 주님께 얻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지금 우리 학교는?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4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입니다. ‘5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무엇이 다를까요? 전반적인 내용은 같습니다. 그러나 마르코 복음에서는 분명 5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4천 명을 먹이신 기적, 두 개를 별개의 기적으로 여깁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실 때 제자들은 빵이 없다고 걱정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열둘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는, 빵 조각을 몇 바구니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일곱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마르 8,17-21)

분명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나 4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빵에 대한 걱정을 없애라’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생존 욕구’에 치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책임져주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5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4천 명을 먹이신 기적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탈출기의 광야 생활’을 상징하고, 4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에덴 동산의 삶’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오는 숫자들의 상징이 그렇습니다. 5천 명을 먹이실 때 빵 5개 물고기 2마리를 사용하였습니다. 숫자 ‘5’는 우리 몸에 오감이 있는 것처럼, 인간의 몸, 혹은 사람을 상징합니다. 물고기 두 마리는 몸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총과 진리’입니다. 모세가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면 주님께서 그를 통해 주시는 만나와 물이 진리와 은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남은 빵이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고 하는 것은 12지파, 곧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4천 명을 먹이실 때, 숫자 ‘4’는 ‘땅’을 상징합니다. 에덴동산에서 물이 한줄기 흘렀는데 모든 땅을 적셨다고 할 때 그 하나의 물줄기는 ‘네’ 개로 갈라집니다. 동서남북의 네 방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땅은 7일 동안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물고기 숫자보다는 빵의 숫자가 중요합니다. 일곱 광주리에 가득 찼다고 하는 것은 먹을 것이 풍부한 에덴동산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먹을 것이 없다고 하느님께 원망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물과 만나를 주시며 그들이 가진 것들을 감사히 봉헌하여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거기에 당신이 머무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에게 무언가 요구하는 하느님보다는 자신들에게 무언가 해 줄 수 있는 소를 섬기는 것으로 선택하였습니다. 또 에덴동산에서 하느님은 선악과를 봉헌하라 하셨지만, 그들은 자신들에게 더 많은 소유를 줄 것 같은 뱀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3천 명이 죽고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이 모든 것은 ‘생존 문제를 주님께 맡기지 못한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 안의 자아는 오로지 육체의 생존밖에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육체가 죽으면 자신도 필요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생존을 다 책임져 줄 테니까 그것을 믿는 증거로 십일조를 봉헌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하느님을 충분히 믿지는 못합니다. 교회는 생존의 문제를 주님께 맡기는 연습을 하는 학교와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에덴동산에서처럼 또 쫓겨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넷플릭스 좀비 드라마 ‘지금 우리 학교는’이 인기입니다. 우리 세상이 이 학교와 같습니다. 여기서 사람은 정확히 ‘네’ 부류로 나뉩니다. 

첫 번째 부류는 이미 좀비가 된 인간입니다. 그들은 항상 배가 고픕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남을 해치면서도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다고 그냥 좀비가 되어버린 인간을 상징합니다. 

두 번째는 그 좀비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살아가는 아직 좀비가 되지 않은 인간입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살아가는 목적은 죽지 않기 위함입니다. 남을 해치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좀비가 될 가능성이 있는 존재입니다. 

세 번째 부류는 좀비가 되었는데 의식이 있는 좀비가 된 존재입니다. 그들은 분노에 차서 누군가를 지독히 미워합니다. 이제 죽을 걱정이 없어서 다만 자신의 미움과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살아갑니다. 귀남과 같은 존재입니다. 

네 번째 부류는 역시 좀비가 되었지만 사랑 때문에 좀비가 되어서도 의식을 가진 존재입니다. 이 좀비들은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죽음도 불사합니다. 왜냐하면, 이들도 세 번째 부류처럼 죽음에 대한 걱정이 별로 없습니다. 반장의 경우입니다. 

2차 세계 대전을 생각해 볼까요? 독일 군인들은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일을 하는 첫 번째 좀비와 같은 부류입니다. 이들은 생존을 위해 누군가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이히만도 자신은 살아야 했기에 나라에서 시키는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모기가 피를 빨아먹는 게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다만 자신이 모기인 줄 모르고 평생을 산 어리석음이 죄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살 가능성도 있고 죽을 가능성도 있는 두 번째 부류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생존을 위해 좀비와 같은 독일 군인들을 피해 다닙니다. 그러다가 잡히기라도 하면 이들도 똑같은 신세가 됩니다. 여전히 죽음에 대해 걱정하며 살아가는 우리 대부분의 모습입니다. 두 번째 부류입니다. 

그런데 별로 죽을 것 같지 않아서 자신의 꿈을 펼치는데 그 꿈이 누군가의 생명을 앗아가게 만드는 부류입니다. 히틀러의 경우입니다. 그는 굶어 죽을 걱정은 없습니다. 하지만 좀비들을 이용해 자신의 분노를 표출할 수는 있습니다. 보통 사람을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지시에 좀비가 되어버리게 만드는 좀비 우두머리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세 번째 부류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 부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약한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좀비들과 좀비 마왕들에 맞서는 이들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를 위해 대신 죽음을 선택한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님과 같은 분들입니다. 또 유대인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수많은 의인들입니다. 

우리는 어느 세상에 속해있건 이 네 부류에 반드시 속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으려고 하는 자는 살 것이고 살려는 자는 죽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심판의 기준에 따르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사람들은 네 번째 부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가장 닮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5천 명을 먹이시고 4천 명을 먹이시며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요? 생존 걱정하지 말고 네 번째 부류의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닐까요? 살기를 원한다면 절대 네 번째 부류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유대인 어린 고아들이 무서워하자 자신은 유대인이 아니면서도 92명 아이의 손을 잡고 함께 가스실로 들어간 야노쉬 코르착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사람들을 만드는 학교가 바로 세상입니다. 우리는 이 학교에서 어느 부류가 될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네 번째 부류의 특징은 예수님처럼 작은 것으로 ‘감사의 기도와 봉헌’을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나의 생존을 책임져주신다는 증거로 감사의 십일조를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모범을 보여주신 것이 오늘 기적의 핵심 내용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느님을 믿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일하는 것을 싫어하고 단지 놀면서 먹고 마시기에만 관심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며, 삶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새기고 열심히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 둘 중에서 누가 로또복권에 당첨될 확률이 높을까요? 
 
많은 이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의 당첨 확률이 더 높으리라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노는 것만 좋아하는 사람이 로또복권에 당첨될 확률이 훨씬 높습니다. 왜냐하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요행을 바라는 복권을 절대 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놀기 좋아하는 사람은 일확천금을 노리는 경우가 많아 복권을 살 확률도 높아집니다. 
 
놀기 좋아하면서 복권만을 열심히 사라는 것이 아닙니다. 당첨된다고 행복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점은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복권을 사야 당첨된 확률이 조금이라도 생기는 것처럼, 우리 삶 안에서도 스스로 시도해야 하는 노력이 꼭 필요합니다. 그런데 본인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으면 하느님께만 해결해달라고 청하기만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너무나 큰 억지입니다(복권을 사서 무조건 당첨시켜 달라는 것도 억지입니다. 하느님은 요행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프랑스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인 엑토르 베를리오스는 “재능을 타고났다는 정도의 운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운이 따르는 재능도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재능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노력이며 정성입니다. 무조건 하느님께 해달라는 억지는 이제 그만해야 합니다. 
 
사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는 빵의 기적을 행하십니다. 군중이 예수님과 사흘 동안 함께 있으면서 먹을 것이 떨어져 난처한 상황입니다. 먼 곳에서 온 사람이 집으로 돌아가다가 길에서 쓰러질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자, 제자들은 눈치를 채고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 불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답합니다. 그들 모두를 배불리 먹을 수 없다는 불가능의 이유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때 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라고 하셨고, 제자들은 빵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져옵니다. 
 
아무것이 없음에도 그들 모두를 배불리 먹일 수 있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노력을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그 노력은 모두 배불리 먹고도 일곱 바구니가 남는 기적을 가져왔습니다. 
 
무조건 하느님께 해달라는 억지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먼저 기울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노력도 아주 크게 쓰시는 분이십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랑받고 싶다면 사랑하라. 그리고 사랑스럽게 행동하라.

- 벤저민 프랭클린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마르 8,8)

 

모든 것이 감사이다. 이런 광야에서도 감사를 드릴 수 있다. 감사에서 사랑이 자란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빵이 될 수 없다. 사랑으로 가는 길은 성체성사를 닮았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결합체가 바로 성체성사이다. 

사랑과 동행하는 우리들 삶이다. 붙잡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나누는 것이 사랑이다. 나눔을 잊어버린 우리들이다. 삶의 허기짐을 채우는 것은 분명 나눔이다. 나눌수록 더 깊어지는 사랑이다. 

나눔은 생명의 신비이며 하늘 나라의 신비이다. 나누는 곳이 하늘 나라이다. 당신의 나눔으로 감사를 버린 우리들에게 감사를 되찾아 주시는 주님이시다. 오늘도 사랑을 내미시는 주님께 감사를 올려 드린다. 

모든 것이 나눔이다. 나누니 너가 배 부르고 나또한 배 부르다. 우리모두 배 부르게 하시는 광야의 성체성사이다. 성체성사의 사랑을 믿는다. 사람들을 살리는 것이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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