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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2월 9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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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5주간 수요일 -

 

 

2022년 2월 9일 연중 제5주간 수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솔로몬의 모든 지혜를 지켜본 스바 여왕은, 주님께서 그를 사랑하시어 이스라엘의 왕좌에 앉히시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나쁜 것들이 그 사람을 더럽히고 망치는 것임을 깨우쳐 주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2월 9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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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1열왕 10장 1-10절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모든 지혜를 지켜보았다.

 

그 무렵 


스바 여왕이 주님의 이름 덕분에 유명해진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까다로운 문제로 그를 시험해 보려고 찾아왔다. 


여왕은 많은 수행원을 거느리고, 향료와 엄청나게 많은 금과 보석을 낙타에 싣고 예루살렘에 왔다. 여왕은 솔로몬에게 와서 마음속에 품고 있던 것을 모두 물어보았다. 


솔로몬은 여왕의 물음에 다 대답하였다. 그가 몰라서 여왕에게 답변하지 못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모든 지혜를 지켜보고 그가 지은 집을 보았다. 


또 식탁에 오르는 음식과 신하들이 앉은 모습, 시종들이 시중드는 모습과 그들의 복장, 헌작 시종들, 그리고 주님의 집에서 드리는 번제물을 보고 넋을 잃었다. 

여왕이 임금에게 말하였다. “내가 임금님의 업적과 지혜에 관하여 내 나라에서 들은 소문은 과연 사실이군요. 


내가 여기 오기 전까지는 그 소문을 믿지 않았는데, 이제 직접 보니, 내가 들은 이야기는 사실의 절반도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임금님의 지혜와 영화는 내가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납니다. 


임금님의 부하들이야말로 행복합니다. 언제나 임금님 앞에 서서 임금님의 지혜를 듣는 이 신하들이야말로 행복합니다. 


주 임금님의 하느님께서 임금님이 마음에 드시어 임금님을 이스라엘의 왕좌에 올려놓으셨으니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영원히 사랑하셔서, 임금님을 왕으로 세워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게 하셨습니다.” 

10 
그러고 나서 여왕은 금 백이십 탈렌트와 아주 많은 향료와 보석을 임금에게 주었다. 스바 여왕이 솔로몬 임금에게 준 것만큼 많은 향료는 다시 들어온 적이 없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의인의 입은
지혜를 자아낸다.

 

주님께 네 길을 맡기고 신뢰하여라. 그분이 몸소 해 주시리라. 빛처럼 네 정의를 빛내시고, 대낮처럼 네 공정을 밝히시리라. 의인의 입은 지혜를 자아낸다.

의인의 입은 지혜를 자아내고, 그의 혀는 올바른 것을 말한다. 하느님의 가르침 그 마음에 있으니, 걸음걸음 하나도 흔들리지 않는다. 의인의 입은 지혜를 자아낸다.

의인들의 구원은 주님에게서 오고, 그분은 어려울 때 피신처가 되신다. 의인들이 주님께 몸을 숨겼으니, 그분은 그들을 도와 구하시고, 악인에게서 빼내 구원하시리라. 의인의 입은 지혜를 자아낸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르 7장 14-23절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그때에 

14 
예수님께서 군중을 가까이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15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16)·17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에 들어가시자, 제자들이 그 비유의 뜻을 물었다. 

1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도 그토록 깨닫지 못하느냐?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그를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느냐? 

19 
그것이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배 속으로 들어갔다가 뒷간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고 밝히신 것이다. 

20 
또 이어서 말씀하셨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21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22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23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하느님, 저희 모두 같은 빵과 같은 잔을 나누어 먹고 마시게 하셨으니 저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어 기꺼이 인류 구원에 앞장서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문희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2022년 2월 9일 (수)
김문희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2월 9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더러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누구나 깨끗함을 선호합니다. 아무 때도 묻지 않은 하얀 새 운동화와 누렇게 때가 낀 헌 운동화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대부분 새 운동화를 선택할 것입니다. 공용 화장실에서도 기왕이면 깨끗한 칸에 들어가려고 합니다. 물론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는 더러움을 기피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를 더럽히고 병들게 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더러운 것을 피하도록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유다인에게도 ‘정결법’이라는 것이 있어서 깨끗함과 더러움의 구별이 명확하였습니다. 특히 음식과 관련하여 정결한[淨] 짐승과 부정한[不淨] 짐승을 구분하였는데, 부정한 짐승의 고기는 먹지 않을뿐더러 그 주검에 몸이 닿지도 않게 하였습니다(레위 11,1-47; 신명 14,3-21 참조).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정결함과 부정함의 개념을 재정립하십니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다시 말하면 사람 밖에서 인식되는 깨끗함이 사람을 깨끗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고, 사람 밖에서 인식되는 더러움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오히려 사람의 마음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악한 생각들(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등)입니다. 

깔끔하거나 정돈된 것을 좋아하는 성향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외적인 깨끗함에는 신경을 쓰면서 정작 우리 내면을 정돈하는 일에는 소홀한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 집, 내 방, 내 화장실 같은 바깥 공간뿐 아니라 ‘내 마음속 공간’도 매일 깨끗하게 청소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마음 청소

 

오늘 저는 주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짜깁기해보았습니다.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그를 더럽힐 수 없다. 그것이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뒷간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악한 것들이 모두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요점인 즉 마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통과하고 나오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을 제가 감히 반박하는 것은 아니고 마음이 다 문제인가? 나쁜 마음이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지금 연수회 때문에 산청 성심원에 와 있는데 꼭두새벽에 경호강 가를 매일 걸었습니다. 어제도 걷는데 맑고 추운 날씨 덕분에 하늘의 별이 초롱초롱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초롱초롱한 별이 제 눈에 들어오더니 이내 제 마음에 박혔고 그랬더니 제 마음이 별로 가득 차며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었습니다. 

별을 제가 소유한 것이 아니고, 별이 제 안으로 들어와 자리한 것입니다.  저는 별을 소유한 것이 아니고 별에게 제 마음을 열어준 것입니다. 별은 제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제가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것은 좋아하면 소유하는데 별은 제가 좋아하는데도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별이 하느님이었나 봅니다. 하느님도 좋아하면 사랑하지 소유하지 않지요. 

아닙니다. 내가 소유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소유할 수 없었고, 그것은 하느님이 소유당하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별도 내가 좋아하지만 결코 소유할 수 없고 그저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좋아하지만 소유하지 않고 사랑하는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우리가 맛보고 깨달으면 프란치스코가 얘기하듯 충만한 선이신 하느님이 내 마음을 채우고 다른 것들을 몰아낼 것입니다. 

내 마음 안에 똥처럼 가득 차 있던 똥들 곧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을 마치 장 청소하듯 마음 청소를 해주실 겁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믿음이 사람을 정화하는 방식 : “지금 죽어도 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이 어떻게 더럽혀지는지 말씀하십니다. 더럽게 된다는 말은 하느님 나라에 살지 못하게 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다 깨끗한데 혼자만 더러우면 차라리 지옥이 편해서 스스로 지옥을 찾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우리를 정화할 수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더럽혀지는 방식은 밖에서 들어오는 것 때문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먹든, 어떤 소리를 듣든, 어떤 오물에 더럽혀지든 그건 사람을 더럽힐 수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 그 사람을 더럽힙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20-23)

마음에서 왜 이런 더러운 것들이 나올까요?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게임과 스마트폰에 중독되는 이유는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이 돈에 집착하는 이유도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쾌락에 집착하는 이유도, 또 누군가의 명성을 깎아내리는 것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 불안은 어디서 올까요? ‘생존하려는 마음’에서 옵니다. 생존하려는 마음이 탐욕, 성욕, 명예욕을 자극하여 사람을 더럽힙니다. 따라서 생존하려는 마음이 사라지기 전에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더럽힐 수밖에 없습니다. 

죽기 직전의 사람을 봅시다. 대부분은 죽기 직전에 아무런 욕심이 없습니다. 나쁜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생존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욕망이 사그라든 것입니다. 모든 욕망은 나의 육체가 내일도 산다는 가정하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죽는데 음식을 많이 먹으면 뭐할 것이고, 자녀를 낳으면 뭐할 것이며, 대통령이 되면 뭐할 것입니까? 우리가 깨끗하게 살기 위해서는 죽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없으면 죽음 앞에서도 불안합니다. 죽음 뒤에 심판이 있음을 직감하고, 또는 죽은 뒤에 뭐가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죽기 전에도 죽으려 하지 않습니다. 사형수들은 일부러 어린이처럼 보폭을 좁게 하여 늦게 걷는다고 합니다. 또 일부러 신발을 흘려서 다시 뒤로 돌아 신발을 신으려 합니다. 그 잠깐이라도 더 살기 위해 머리를 쓰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음 직전에도 죽지 않으려 하면 깨끗해질 기회를 잃습니다. 

박효진 장로는 교도관을 하면서 서른 명에 가까운 사형수들이 사형 집행을 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모습은 극명하게 다르다고 합니다. 책에 이런 내용을 다 썼습니다. 많은 사람이 지켜본 것이라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박 장로가 본 그리스도를 안 믿는 사형수의 대표자는 바로 이 사람입니다. 공직자로 있다가 퇴직해서 돈이 없고 막장으로 밀리니 자기 먼 친척을 생명보험에 가입시켜놓고 그 보험을 자기가 타 먹도록 계약을 해놓고 그 집을 불태운 것입니다. 

이 사람은 사형선고를 받으며 힌두교에 몰입하였습니다. 그러다 조로아스터교까지 받아들여 죽음을 준비하였습니다. 불교 경전, 힌두교 경전을 비롯하여 많은 경전으로 죽음을 준비하였습니다. 90일 동안 눕지도 않고 벽만 보고 좌선하며 많은 죄수에게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영치금도 모아놓았다고 죄수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교도관들도 그 사람 앞에서 작아질 정도로 큰 성덕을 보여, 교도소 소장 못지않을 정도의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사형받는 날이 되자 상황이 급변하였습니다. 사형장 계단을 오르지 못하여 교도관 두 사람이 팔짱을 끼고 질질 끌어올려야 했습니다. 밧줄을 보자 ‘헉’ 하며 오줌을 쌌습니다. 이름을 대라니까 이름을 대고, 주소와 본적을 대라니까 고개를 숙여서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입으로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본적을 대라니까 머리를 들고 쌍욕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날 죽이고 너희들이 잘되나 보자. 어쩌고…. 저쩌고….”

사람들은 죽음을 초월했을 것 같이 보였던 그 사람이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에 깜짝 놀랐습니다. 절차를 진행할 수 없자 소장은 바로 사형을 집행하라고 하였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아니시면 어떤 신도 우리에게 부활에 대한 확신을 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 안에 성체로 오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고 있기에 우리는 그분만을 참 구원자로 여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부활이요 생명이신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해주신다는 믿음이 있다면 나는 죽을 수 있습니다. 오늘 당장 죽음을 기꺼이 맞이할 수 있습니다. 성체로 내 안에 들어오시는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부모의 따듯한 밥을 먹으며 생존의 걱정을 내려놓듯이, 우리도 하느님의 그 따듯한 사랑으로 나의 생존문제를 그분께 맡길 수 있습니다. 

박효진 장로가 정말 놀란 두 사형수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한 사형수는 윤도형이란 사형수입니다. 사람도 많이 죽였고 악질인 망가진 인생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박 장로는 일부러 “야, 너 죽을 준비됐나? 죽을 준비해라!”라고 말했습니다. 사형수들에게는 가장 듣기 싫은 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화내지 말라. 나도 사형수야. 그러니까 우리 모두 죽을 준비해야 해”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지지고 볶고 울고 웃는 동안 가랑비에 옷 젖듯 윤도형은 조금씩 주님을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윤도형이 울고 있었습니다. 왜 우느냐고 했더니 주님께서 자신을 꼭 껴안고 계신 것이 느껴져서 정말 감사해서 운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냥 자기 생각일 것이라 여겼지만 막 신앙을 가지려 할 때 사형 집행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조금만 더 교리를 배웠으면 좋았겠는데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박 장로는 윤도형을 데리고 오라고 신앙인들에게 맡겼습니다. 오면서 찬송가를 불러주라 한 것입니다. 정말 지하에서부터 계단으로 올라오는데 “할렐루야! 할렐루야!”란 소리가 들립니다. 그 할렐루야가 윤도형이 하는 것입니다. 밧줄 앞에서도 편안하고 할렐루야를 하는 그 모습에 모든 사람이 얼어붙었습니다. 부끄러워서입니다. 죄에 대해서 읽어주는 시간이 있는데 그는 손을 들고 이렇게 말합니다. 

“소장님, 죄송합니다. 저는 그 죄를 지었습니다.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죄는 하느님을 알기 전에 지었던 죄입니다. 제가 주님을 믿었다면 그 죄를 짓지 않았을 것입니다. 비록 저 때문에 많으신 분들에게 고통을 드렸지만, 주님은 그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 앞에 가는데 그 더러운 죄를 마지막으로 다시 듣고 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발 그 죄를 읽지 말아 주십시오.”

소장님도 이 말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윤도형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절대 저런 고백을 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목에 밧줄을 매고도 그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렇게 주님께 갔습니다. 

어느 여성 사형수도 그러했습니다. 남편을 죽이고 시어머니까지 죽이려던 악랄한 사형수였습니다. 성경을 읽고 믿음을 받아들여 믿음으로 살다가 이 땅을 떠났습니다. 그녀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 ” 찬송을 부르며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그의 얼굴에서는 죽음에 대한 공포나 두려움이 전혀 없었고 아름답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녀는 또박또박 모든 절차를 다 마치고 마지막 변론을 이렇게 하였습니다.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속히 임하셔서 두 번 다시 저와 같은 악한 죄인도 사라지고 오늘 같은 무서운 형벌도 사라지도록 하느님 나라에 가서도 쉬지 않고 기도하겠습니다. 이제 아버지 죽고 나마저 땅을 떠나고 나면 남겨진 남매들은 이 땅의 천애의 고아가 되겠지요. 그러나 나 같은 악한 죄인도 이렇게 거두신 하느님께서 내 어린 남매들을 누구보다 잘 키워주실 줄 믿고 안심하고 천국으로 갑니다. 한 많은 죄인이 예수님을 믿고 과분한 사랑을 받다가 천국을 갑니다.”

그리고 또 인사합니다. 소장은 또 웁니다. 그녀도 주님 은혜 찬양하다가 주님께 나아갑니다. 이것을 보는 신앙인들은 저들의 믿음에 부끄러워 자신의 삶을 되돌아봅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형수도 죽음으로 나아가며 “신부님, 담배 끊으세요. 건강에 안 좋아요”라고 말하고, “수녀님, 건강 조심하세요”라며 기쁘게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이것이 믿음이 있고 없고를 판가름합니다. 또 이 믿음이 나를 깨끗이 정화하거나 더럽히거나 합니다. 우리도 믿음이 있다면 오늘 당장 정화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을 기쁘게 마지막 날로 삶으로써.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일은, 혼잣말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은 대부분 징조를 미리 남긴다고 합니다. ‘힘들다’, ‘죽고 싶다’, ‘외롭다’ 등의 표현으로 자기 상태를 주변에 알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을 때, 사람은 고립감을 느끼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자살방조 미수 사건을 다룬 판결문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일은, 혼잣말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혼잣말하는 상태, 바로 고립된 상태를 말합니다. 이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입으로만 사랑한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또 생각만으로 사랑한다고 해서도 안 됩니다. 말과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사랑, 진정으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잔인성에서 벗어나 함께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요? 잔인한 인간의 속성이 어쩔 수 없다고 하지 맙시다. 충분히 고칠 수 있기에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유다인에게는 십계명을 충실히 지키기 위한 실증적인 규정들이 있었고 이를 레위법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 법을 하느님이 명하신 실증법으로 간주하여 선조 때부터 성경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이 법에 사람을 부정케 하는 모든 음식물의 목록이 있었습니다). 이 전통에 의하면 어떤 음식이든 손 씻는 예절을 거치지 않고 먹으면 부정을 탄다는 내용이 있었지요. 그러나 위생적인 견지의 법이 아니었고 형식적으로 예식을 거치는 종교 예절일 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정결과 부정의 새로운 가르침을 내리십니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15) 
 
외적인 형식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하다는 이 말씀은 부정 타는 동물과 먹어서는 안 될 음식의 목록을 조상 때부터 물려받아 내려온 유다인들에게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마음의 깨끗함보다 외적인 형식 준수가 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훨씬 중요함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외적인 형식 준수만을 강조해서 외로움을 당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마음은 보지 않고 외적인 모습만 봐서는 홀로 남겨지게 됩니다. 단순히 잔인한 인간의 속성으로만 봐야 할까요? 
 
점점 외로운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사랑이 점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형식보다 사랑의 마음이 커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누군가를 정말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는 거야. 말하자면 그 사람 살갗 안으로 들어가 그가 되어서 걸어 다니는 거지.

- 하퍼 21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마르 7,15)

 

끝없이 내달리는 욕심의 욕된 여정이다. 욕심으로 시작하여 욕심으로 끝난다. 욕심에 비친 우리 얼굴또한 욕심이다. 하느님께서 빚어 만드신 사람을 사람이 마음껏 욕심대로 더럽힌다. 참담한 우리 마음을 바라보는 아픔이다. 

사람 사는 곳에서 다시 마음을 되찾아주시는 주님이시다. 욕심은 진리가 아니다. 사람이 사람을 구원하는 방식은 욕심이 아니라 참된 사랑이다. 사랑마저 욕심 속에 숨기고 산다. 사랑을 가리고 있는 욕심의 실체를 벗겨주신다. 

오랫동안 욕심에 갇혀 살았던 우리들에게 깨끗한 본래의 우리로 되돌려 놓으신다. 마음도 진실한 사랑을 먹어야 살 수 있다. 마음이 죽어 있으면 욕심만 남는다. 깨끗한 사람의 본모습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다. 

좋은 사람이 되게하는 좋은 마음이다. 욕심과 욕망의 병을 치유하여 마음을 철들게 하시는 행복이시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감사와 행복이길 기도드린다. 바뀌어야 할 마음의 사람은 바로 우리자신이다. 그 마음의 여정이 다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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