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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1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
2022년 2월 10일 (목)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Memorial of Saint Scholastica, Virgin)
스콜라스티카 성녀(Saint Scholastica)는 480년 무렵 이탈리아 움브리아의 누르시아에서 태어났습니다. 성 베네딕토 아빠스의 누이동생인 스콜라스티카는 베네딕토 성인이 세운 여자 수도원의 첫 번째 수녀이자 원장으로 활동했습니다. 스콜라스티카 성녀는 베네딕토 성인과의 영적 담화를 통하여 수도 생활에 대한 많은 격려와 도움을 받았습니다.
✠ 오늘 제1독서
솔로몬이 우상 숭배를 허락하자 주님께서는 진노하시며 나라가 분열될 것이라고 이르십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자녀가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주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으로 이교도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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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제1독서
1열왕 11장 4-13절
네가 계약을 지키지 않았으니,
이 나라를 떼어 내겠다.
그러나 다윗을 생각하여
한 지파만은 네 아들에게 주겠다.
솔로몬 임금이
4
늙자 그 아내들이 그의 마음을 다른 신들에게 돌려놓았다. 그의 마음은 아버지 다윗의 마음만큼 주 그의 하느님께 한결같지는 못하였다.
5
솔로몬은 시돈인들의 신 아스타롯과 암몬인들의 혐오스러운 우상 밀콤을 따랐다.
6
이처럼 솔로몬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르고, 자기 아버지 다윗만큼 주님을 온전히 추종하지는 않았다.
7
그때에 솔로몬은 예루살렘 동쪽 산 위에 모압의 혐오스러운 우상 크모스를 위하여 산당을 짓고, 암몬인들의 혐오스러운 우상 몰록을 위해서도 산당을 지었다.
8
이렇게 하여 솔로몬은 자신의 모든 외국인 아내를 위하여 그들의 신들에게 향을 피우고 제물을 바쳤다.
9
주님께서 솔로몬에게 진노하셨다. 그의 마음이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에게서 돌아섰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그에게 두 번이나 나타나시어,
10
이런 일, 곧 다른 신들을 따르는 일을 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는데도, 임금은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11
그리하여 주님께서 솔로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뜻을 품고, 내 계약과 내가 너에게 명령한 규정들을 지키지 않았으니, 내가 반드시 이 나라를 너에게서 떼어 내어 너의 신하에게 주겠다.
12
다만 네 아버지 다윗을 보아서 네 생전에는 그렇게 하지 않고, 네 아들의 손에서 이 나라를 떼어 내겠다.
13
그러나 이 나라 전체를 떼어 내지는 않고, 나의 종 다윗과 내가 뽑은 예루살렘을 생각하여 한 지파만은 네 아들에게 주겠다.”
화답송
주님,
당신 백성 돌보시는 호의로
저를 기억하소서.
행복하여라, 공정하게 사는 이들, 언제나 정의를 실천하는 이들! 주님, 당신 백성 돌보시는 호의로 저를 기억하시고, 저를 찾아오시어 구원을 베푸소서. 주님, 당신 백성 돌보시는 호의로 저를 기억하소서.
백성들이 이민족들과 어울리면서 그 행실을 따라 배우고, 그 우상들을 섬기니, 제 스스로 덫에 걸렸네. 주님, 당신 백성 돌보시는 호의로 저를 기억하소서.
백성들은 자기네 아들딸을 마귀에게 바쳤네. 주님은 당신 백성을 향하여 분노를 태우시고, 당신 소유를 역겨워하셨네. 주님, 당신 백성 돌보시는 호의로 저를 기억하소서.
복음
마르 7장 24-30절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그때에
24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으로 들어가셨는데,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25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곧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렸다.
26
그 부인은 이교도로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그분께 청하였다.
27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8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
29
이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30
그 여자가 집에 가서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 하느님, 천상 선물을 나누어 받고 비오니 저희가 복된 스콜라스티카를 본받아 예수님의 수난을 깊이 새기며 오로지 주님의 뜻만을 충실히 따르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배청민 미카엘 신부 집전
2022년 2월 10일 (목)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배청민 미카엘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2월 10일 (목)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매정한 모습에 놀라게 됩니다. 어떤 이방인 여인이 예수님께 다가와 마귀 들린 자기 딸을 치유해 달라고 애원합니다. 평소의 예수님 같아서는 여인의 청을 흔쾌히 들어주실 법도 한데, 오늘 이야기에서는 이상하게도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그 청을 거절하십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여기서 ‘자녀’가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강아지’는 이방인을 의미합니다. 오늘날같이 반려동물을 사랑하는 시대라면 강아지라는 표현에 큰 거부감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당대사람들은 ‘개’를 매우 부정적인 동물로 여겼기 때문에 누군가를 개나 강아지에 비유하는 것은 굉장한 모욕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꽤 무례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숨은 의도는 여인이 지닌 믿음이 드러나도록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다소 거칠었던 표현은 사실 그를 자극하기 위한 예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이렇게 믿음의 시험대에 오른 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자녀와 강아지의 비유’를 그대로 이어받아 자신의 굳건한 믿음을 드러내 보입니다.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님께서 꼭 들어주셨으면 하는 간절한 청들이 있습니다. 또 이를 들어주시지 않는 예수님을 원망한 경험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도 오늘 복음의 여인처럼 믿음의 시험대에서 매일 그분과 설전을 벌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청을 들어주실 것이라는 강한 믿음 속에서 인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굳건한 믿음을 보시고 절대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실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몸과 마음이 약해질 때
그제 저녁 연수중인 형제들과 저녁을 하며 이 얘기 저 얘기 하던 중 한 형제가 좀 센 농담을 제게 했습니다. 이에 제가 기분이 나빠지는 것을 느꼈고 상대도 그것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그때보다 그러고 나서 기분이 더 나빠졌습니다. 그런 말에 기분이 상하는 제가 한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까지도 이런 저를 생각하며 성찰을 했는데 마침 오늘 복음의 여인이 주님으로부터 엄청난 모욕을 당하고서도 주님께 대한 믿음을 보이는 것을 보면서 저의 문제가 얼마나 큰지 다시 보게 되었고 그것을 보는 것이 너무도 쓰라렸던 겁니다.
아무튼, 저를 성찰한 결과 첫 번째 저의 문제는 그 정도의 말에 제가 아직도 영향을 받는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제가 '아직도'라는 말을 썼는데 이것이 제게 큰 실망입니다. 왜냐면 저는 자주 '준다고 다 받냐?' '상처를 준다고 상처를 받느냐? 싫으면 안 받으면 되지 왜 받느냐?' 뭐 이런 얘기를 자주 떠들고 다닌 저였는데 그런 제가 아직도 그런 말 하나에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 정도의 말로도 제가 영향을 받는다면 진짜 저를 무시하고 모욕하고, 그것도 저를 무너뜨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러한다면 저는 영향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존재가 무너질 것입니다.
성찰을 통해 발견한 저의 두 번째 문제는 저의 믿음 정도입니다. 그 형제의 농담이 아무리 셀지라도 저는 그것이 그 형제의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믿을 수 있었어야 했는데 순간이나마 그것이 진담이 아닌 것을 믿지 못한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여인은 개에 비유되는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주님의 사랑과 선을 믿었지 않습니까?
사실 오늘 복음의 여인은 그런 말을 겸손하게 받아들인 사람이라기보다는 그런 말을 듣고도 주님의 사랑과 선을 아주 굳게 믿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물론 너무도 큰 겸손이 큰 믿음을 가능게 했을 테지만요.
아무튼, 저는 아무것도 아닌 농담 한 마디에 영향을 받았는데 전 같으면 허허 하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을 이번에는 왜 영향을 받았을까요?
미풍에도 흔들리는 것은 미풍에도 흔들릴 만큼 허약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영향을 받은 것은 그만큼 저의 정신이랄까 마음이 허약해진 겁니다.
이것을 저는 오늘 솔로몬의 예에 비춰 보겠습니다. 오늘 독서를 보면 그 지혜로운 솔로몬이 말년에 지혜를 잃고 우상을 믿게 됩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믿은 것이 사실은 우상이 아니고 이방 여인들이었습니다. 오늘 열왕기가 이렇게 얘기하지 않습니까?
"솔로몬 임금이 늙자 그 아내들이 그의 마음을 다른 신들에게 돌려놓았다. 그의 마음은 아버지 다윗의 마음만큼 주 그의 하느님께 한결같지는 못하였다."
솔로몬이 나이를 먹으면서 약해지고 이제 젊은 아내들에게 의지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의지하게 되면서 자연스레이 여인들의 말을 믿고 따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약해질 때의 현상 중 하나가 의지하게 되고 그의 말을 믿고 따르는 거라면 그의 말 하나에 일희일비하게 되는 것이 또 다른 현상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힘이 있고 자식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때는 자식이 더 심한 말을 해도 용서하고 품어줬는데 나이를 먹어 이제 자식에게 의지하게 되면 자식 눈치를 보고 자식의 말 하나에 쉽게 서운해하고 어린 손자의 말에도 노여워하게 되지요.
저도 그제 그랬던 것 아닐까요? 그 형제의 말이 센 것이 아니라 제가 약해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멘탈이 무너지면 안 된다는 말이 있지요?
비록 몸이 약해지고 건강이 나빠져도 정신까지 무너지지 않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더욱 믿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제가 되어야겠지요.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희망을 포기하지 않을 때 믿음이 생긴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이방인들과 유대인이 섞여 사는 접경지역 티로 지방으로 가십니다. 그곳에서 조용히 지내려고 하셨으나, 그분이 오신 것을 어찌 알았는지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예수님을 찾아와 엎드려 딸의 치유를 청합니다.
그 여인은 그리스인, 곧 이방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당신 나라인 유대인들에게도 다 복음을 전하지 못하셨는데 이방인이 와서 청하니 순서상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 7,27)
그러자 그녀도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이렇게 응답합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과 희망의 크기를 보시고 유대인들에게도 충분히 주지 못하신 치유의 은총을 그 여인에게 주십니다. 예수님은 믿고 원하기만 한다면 이방 신을 믿는 사람에게라도 언제든 당신 은총을 주실 준비가 되어계십니다.
이 이방 여인은 어떻게 예수님께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일까요? 분명 자신이 믿는 신들에게 악령을 쫓아달라고 빌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안 되니 이스라엘의 예언자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녀에겐 출구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녀는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힘은 희망에서 나옵니다. 완전히 행복해지려는 희망은 한 사람을 유일한 희망이신 그리스도께로 이끕니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는 1940년부터 1945년까지 하루 평균 3,000여 명의 유대인을 가스실에서 죽여 화장했습니다. 탈출을 시도하는 유대인도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총살을 당했습니다. 탈출할 수 없어지자 유대인들은 낙망하여 무기력하게 자기 죽음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레히’라는 사람은 이대로 죽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같은 유대인들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 끔찍한 곳을 탈출할 수 있을까요?”
그들의 대답은 절망적이었습니다.
“소용없는 일이야. 여기서 탈출할 수 있는 길은 없어. 다들 총살된 거 보면 몰라? 우리에게 희망은 없어.”
하지만 레리는 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합니다. 분명히 탈출할 방법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해답은 찾으면 보입니다. 그가 일하는 작업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가스실에서 죽임을 당한 수많은 시체가 트럭으로 던져지고 있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레리는 이 광경에서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레리는 일과가 끝나고 작업자들이 막사로 돌아갈 때 감시가 소홀한 틈을 이용하여 재빨리 트럭으로 올라가서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어 던지고 시체 속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그는 시체들과 한 덩어리가 되어 꼼짝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시체 썩는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고 차갑게 굳은 시체들이 몸을 덮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트럭이 출발하여 덜컹거리며 수용소 담장 밖으로 나가서 엄청난 크기의 구덩이 안으로 시체들을 쏟아부었습니다. 레히는 밤이 될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주위에 인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시쳇더미 속에서 빠져나와 알몸으로 40㎞를 달린 끝에 나치의 만행이 없는 자유의 땅에서 빛나는 불빛을 볼 수 있었습니다.
[출처: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고 내일 죽을 것처럼 살아라』, 마빈 토케이어, 함께북스]
레히는 어떻게 남들이 절망할 때 희망을 볼 수 있었을까요? 그러기를 원치 않았을 뿐입니다. 절망에 속하지 않고 희망이 있음을 믿고 싶었습니다.
믿음은 이처럼 선택입니다. 이 선택을 할 때 항상 자기 자신에게 묻습니다.
‘내가 믿지 않아서 좋은 건 뭔데?’
우리는 믿음이 증거가 있어서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처음에 믿음과 희망은 어쩔 수 없는 환경에서 그대로 멈추는 것보다 더 나은 길이 분명히 있음을 ‘선택’하는 행위입니다. 도대체 믿지 않으면 뭐가 좋을까요?
한 봉쇄 수도원에 무신론자가 왔습니다. 무신론자는 신이 없다고 믿는 것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그는 수도원장에게 만약 신이 없다면 당신들이 하는 고생은 다 헛수고가 될 것이라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수도원장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는 지금 수도 생활을 하고 있지만, 하느님을 믿기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느님 뜻대로 서로 사랑하며 행복한 공동체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 하느님이 안 계셔도 이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으로 산 것에 대해 후회할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지상에서부터의 행복을 선택했기에 믿는 것입니다. 믿지도 희망하지도 않고 하느님 뜻대로 사랑하지도 않는 삶이 참으로 행복합니까? 믿지 않으면 그저 자기 자신을 주님으로 모시며 허무함만 남기는 탐욕과 쾌락과 헛된 명예만을 추구하는 집착의 삶만 남습니다. 당신은 조금이라도 더 생존하기 위해 현세의 고통을 감당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죽어도 상관없는 삶을 삽니다. 그리고 만약 그렇게 살다가 하느님이 계시면 정말 후회할 사람은 당신일 것입니다.”
도대체 믿지도 않고 희망하지도 않으며 사랑하지도 않는 삶이 뭐가 좋아서 선택하는 것일까요? 오히려 죽음의 두려움도 없이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만들어주는 편을 선택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단 두 개의 선택밖에 없는 것입니다. 희망하든지 절망하든지.
어느 유명 박물관 벽면에 사람과 악마가 장기를 두고 있는 아주 특이한 그림이 한 폭 걸려있었습니다. 그 그림에는 악마가 사람을 상대로 ‘체크’(장기에서 ‘장군!’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 체스게임 용어)라는 제목이 붙어있었습니다. 인간은 도저히 이 상황을 모면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그런데 한 젊은이가 이 그림을 오랫동안 뚫어지라 바라보더니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악마가 인간에게 ‘장군’을 외치다니 어디 될 법이나 한 말인가?”
그리고 또 한참을 바라보았습니다. 갑자기 그 젊은이는 펄쩍펄쩍 뛰며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거짓말이다. 거짓말이야!”
박물관에서는 큰 소리를 내면 안 되었기에 경비원들 그들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그러자 얼마 후 젊은이는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와 또 큰 소리로 “이건 거짓말이야!”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또 쫓겨났습니다.
이제는 아예 경비원이 그를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켰습니다. 그가 박물관 문 앞에서 소리 지르자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거짓말이야! 저 그림은 거짓이야. 끝장이 아니라 희망은 남아 있어. 아직 한 수가 남아 있단 말이야!”
이 말을 듣고는 사람들이 그 그림 앞으로 가서 그림을 자세히 뜯어보았습니다. 얼핏 악마가 인간을 완전히 이긴 것으로 보이나 그 젊은이에게는 완전한 ‘체크’(장군!)를 당한 것이 아니라 아직 위기를 벗어날 방법이 남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희망은 내가 죽지 않는 한, 내가 포기하기로 하지 않는 한 언제나 우리 곁에 있습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그저 양자택일일 뿐이고 내가 그 길을 선택할 때 비로소 그 증거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 그림 정 중앙에는 인간에게 한 수를 알려주기 위해 안타깝게 훈수를 두려 하는 천사가 그려져 있습니다. 악마는 그냥 체념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선택권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믿음은 증거를 따름이 아니라 나의 선택입니다.
사형 집행 때 믿는 사람은 100% 행복하게 죽음으로 나아가고, 믿지 않는 사람은 죽지 않으려고 끝까지 발버둥 친다고 합니다.
믿지 말라는 사람에게 이렇게 물어보십시오.
“좋아요. 그런데 안 믿어서 좋은 건 뭔데요?”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느 정도 어두움이 있어야 행복한 삶을 볼 수 있다.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해 주셨던 음식이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저녁으로 이것을 먹기 위해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만들기는 너무 쉽습니다. 간장 한 종지에 깨와 참기름을 넣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계란 후라이 반숙을 만들면 끝입니다. 이를 밥에 넣어 비벼 먹으면 됩니다.
특별한 레시피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쉽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의 맛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를 식사 대용으로는 먹을 수 없을 것만 같습니다.
분명 어렸을 때, 많은 음식을 먹었을 텐데 왜 이 간장밥이 기억났을까요? 그리고 이를 최고의 음식으로까지 생각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풍요로움에서 먹는 간장밥과 어려울 때 먹는 간장밥의 차이였습니다. 그리고 장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 만든 사랑이 듬뿍 담긴 음식이기에 최고의 맛으로 기억나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어느 정도 어두움이 있어야 행복한 삶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어두움은 곧 불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단정이 행복한 삶 자체를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교도로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인 여인이 마귀들린 딸을 고쳐달라는 청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어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라는 매정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여인은 이 말씀을 그대로 인정하며 대답하지요.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마르 7,28)
여인이 표현한 ‘주님’이라는 호칭은 이스라엘 사람이 구약성경의 정신을 따라 하느님의 파견과 메시아를 부르는 전통적인 명칭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이방인이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적대시하던 민족 출신이며, 그래서 하느님의 구원 영역 밖에 있다고 생각되던 민족이었습니다. 이런 민족의 여성이 ‘주님’이라고 부른 것 자체가 놀랄 일입니다. 이렇게 고백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딸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서로 적대시하는 관계임에도 예수님을 찾아갔고, 예수님을 만나면서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딸은 치유되었습니다.
사랑 때문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사랑을 간직해야만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일상 삶 안에서 볼 수 있는 사랑으로 우리는 더 힘차게 지금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서두르지도 멈추지도 않고 한 번에 한 걸음씩만 내딛기로 합니다. 작은 약속들을 하나하나 지켰을 때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 A.J.슈발리에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마르 7,28)
빵과 부스러기는 결국 하나이다. 오늘도 부스러기를 선물로 받는다. 내려올 수 없다면 올라갈 수도 없다. 바닥까지 내려온 신앙의 절규를 끝까지 외면하지 않으시는 사랑의 주님이시다.
바닥까지 내려온 부스러기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사랑처럼 간절함과 절박함이다. 바닥에서 피어나는 애절한 복음이며 부스러기에서 다시 깨닫게되는 복음의 힘찬 기쁨이다. 작디 작은 부스러기에서 다시 시작하는 새로운 감사이다.
참된 믿음은 감사하는 삶으로 우리모두를 변화시킨다. 부스러기의 눈물도 가볍게 넘기지 않으시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믿음이란 조각 조각으로 부서지는 부스러기의 참된 부활이다.
깨어지는 것 부서지는 것 쪼개지는 것이 성장하는 믿음이었다. 내 삶의 모든 부스러기까지 주님께 내어드린다. 보잘 것 없다고 여긴 부스러기에서 길을 다시 만나는 감동이다. 부스러기는 욕심처럼 무겁지 않다.
진짜 사랑은 너를 위해 기꺼이 부스러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부스러기가 은총처럼 우리에게 오고 있다. 부스러기를 모으니 충만한 오늘이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부스러기의 은총에 다시 눈 뜨게 하는 삶의 새로운 감사이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감사 감사드리며 십자가에서 쏟아져내리는 부스러기의 탄생 앞에 무릎을 꿇는 새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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