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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5주간 화요일 -
2022년 2월 8일 (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솔로몬은 자신이 지은 성전이 하느님을 모시기에 보잘것없지만, 이곳을 향하여 드리는 당신 종과 백성의 기도를 들어주십사고 하느님께 간청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전통을 어기고 있다며 따지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에게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켜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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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1열왕 8장 22-23절, 27-30절
주님께서
"내 이름이 거기에 머무를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으니
당신 백성 이스라엘의 간청을
들어 주십시오.
그 무렵
22
솔로몬은 이스라엘 온 회중이 보는 가운데 주님의 제단 앞에 서서, 하늘을 향하여 두 손을 펼치고
23
이렇게 기도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위로 하늘이나 아래로 땅 그 어디에도 당신 같은 하느님은 없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당신 앞에서 걷는 종들에게 당신은 계약을 지키시고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27
어찌 하느님께서 땅 위에 계시겠습니까? 저 하늘, 하늘 위의 하늘도 당신을 모시지 못할 터인데, 제가 지은 이 집이야 오죽하겠습니까?
28
그러나 주 저의 하느님, 당신 종의 기도와 간청을 돌아보시어, 오늘 당신 종이 당신 앞에서 드리는 이 부르짖음과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29
그리하여 당신의 눈을 뜨시고 밤낮으로 이 집을, 곧 당신께서 ‘내 이름이 거기에 머무를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이곳을 살피시어, 당신 종이 이곳을 향하여 드리는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30
또한 당신 종과 당신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드리는 간청을 들어 주십시오. 부디 당신께서는 계시는 곳 하늘에서 들어 주십시오. 들으시고 용서해 주십시오.”
화답송
만군의 주님,
당신 계신 곳 사랑하나이다!
주님의 뜨락을 그리워하며, 이 영혼 여위어 가나이다. 살아 계신 하느님을 향하여, 이 몸과 이 마음 환성을 올리나이다. 만군의 주님, 당신 계신 곳 사랑하나이다!
당신 제단 곁에 참새도 집을 짓고, 제비도 둥지를 틀어, 거기에 새끼를 치나이다. 만군의 주님, 저의 임금님, 저의 하느님! 만군의 주님, 당신 계신 곳 사랑하나이다!
행복하옵니다, 당신 집에 사는 이들! 그들은 영원토록 당신을 찬양하리이다. 보소서, 저희 방패이신 하느님. 당신 메시아의 얼굴을 굽어보소서. 만군의 주님, 당신 계신 곳 사랑하나이다!
당신 뜨락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사옵니다. 하느님의 집 문간에 서 있기가, 악인의 천막 안에 살기보다 더 좋사옵니다. 만군의 주님, 당신 계신 곳 사랑하나이다!
복음
마르 7장 1-13절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그때에
1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2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3
본디 바리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4
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은데,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상을 씻는 일들이다.
5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7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8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9
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10
모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11
그런데 너희는 누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제가 드릴 공양은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하고 말하면 된다고 한다.
12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13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하느님, 저희 모두 같은 빵과 같은 잔을 나누어 먹고 마시게 하셨으니 저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어 기꺼이 인류 구원에 앞장서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배청민 미카엘 신부 집전
2022년 2월 8일 (화)
배청민 미카엘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2월 8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어떤 계명이나 규정도 사랑이 없다면 결국 알맹이 없는 껍데기일 뿐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전통과 하느님의 계명을 구분하십니다. 그분께 시비를 건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옹호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관습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철저하게 지키는 것을 마치 자기 목숨처럼 중요하게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사실 그들이 지닌 전통 자체를 문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전통은 오경에 기록된 하느님의 계명(율법)을 어떻게 하면 더 잘 지킬 수 있을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 끝에 생겨난 규정들일 것입니다. 문제는 세세한 규정들의 형식에 지나치게 얽매이고 집착하다 보면, 그 바탕을 이루는 본질과 정신을 쉽게 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질을 잃은 규정은 악용되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로 드신 ‘코르반’은 하느님께 드릴 예물이니 그것을 다른 용도로는 절대 사용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서약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악용한 일부 유다인들이 부모에게 돌아갈 몫이 아까워 그것을 ‘코르반’이라고 선언하였던 모양입니다. 하느님께 맹세를 드린 예물이라는 핑계로 부모를 봉양할 의무를 회피하면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무시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의 본질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본질과 정신이 바로 ‘사랑’이라고 명확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떤 계명이나 규정도 사랑이 없다면 결국 알맹이 없는 껍데기일 뿐입니다. 주일 미사에 다녀왔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미사를 드릴 때 비로소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는 계명을 온전히 지키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향상(向上)을 생각하는 우리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결정을 내립니다. 그런데 이 결정을 과단성있게 잘 내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작은 것 하나도 끙끙대며 결정하는 사람이 있고 심지어 결정 장애 곧 결정을 내리는 데 심리적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기에 나이 현상까지 더하면 결정이 점점 쉽지 않아집니다. 예를 들어 어리거나 젊었을 때는 먹던 것을 또 먹는 것보다 안 먹어본 것을 찾아 먹는 즐거움이 있고 그래서 맛집 기행를 하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뭘 먹을지 결정하는 것이 피곤해 늘 먹던 것 먹거나 숫제 누가 해주거나 정해주는 것 먹는 것을 편해 합니다.
옷도 젊었을 때는 이옷 입어 보고 저옷 입어 보고 난 뒤 입고 그러는 것이 재미있지만, 나이 먹으면 옷 고르는 것도 귀찮아 입던 것 또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옛날 양로원에 있을 때 보면 할머니들이 선물받을 때는 좋아하면서도 새옷을 입지 않고 고이 간직할 뿐 실제 입는 것은 늘 입던 것입니다.
개인도 이러하니 공동체가 결정하는 것은 더 쉽지 않습니다. 여러 의견이 충돌하고 그래서 그것을 조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람 수가 많을수록 같이 결정하는 것이 쉽지 않고 게다가 공동체가 늙을수록 결정하는 것이 귀찮아 새롭게 결정하기보다 전에 하던 것을 또 하는 식으로 합니다.
저희 수도원 예를 들면 젊은 공동체는 명절에 뭘 하며 지낼까 정할 때 매번 새롭게 궁리하고 정하지만 늙은 공동체는 전에 뭐 했는지 보고 전에 윷놀이 하며 지냈으면 올해도 윷놀이하면서 지내자고 결정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결정하는 것이 편하기도 하고 구성원 간에 충돌없이 무난하긴 한데 많은 것을 이렇게 결정하다 보면 공동체가 싱싱하지 않고 죽은 공동체가 됩니다.
그리고 작년에 이것을 했어도 더 나은 것을 할 수 있는데 더 나은 것을 포기한 것이고 그래서 향상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이 향상이라는 것이 참 좋은 말 아닙니까? 향상(向上)이란 위를 향하고 더 나은 것을 향한다는 뜻인데 향상이라는 것이 없다면 더 나은 것을 포기하고 위를 지향하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이것이 우리 신앙인 특히 수도자들에게는 또다른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이상이라는 것이 없는 것이거나 하느님의 뜻을 찾음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상이나 은사에 더 맞는 것을 생각지 않고 뭣을 결정하고, 무엇보다도 저 위 하늘을 지향하지 않고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 위가 우리에게 뭣입니까? 하느님이고 하느님 나라지요.
그래서 늙은 공동체, 전에 결정해 놓은 것이 풍부한 전통적인 공동체는 새로운 결정을 구성원간의 충돌을 무릅쓰며 내리지 않고 전에 결정했던 것, 전통적으로 해오던 것을 반복하게 되고 그 연장선상에서 하느님의 뜻도 찾지 않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지 않는 더 문제적 공동체가 있습니다. 서로를 의식하지 하느님을 우선하지 않는 공동체입니다.
사목자들에게 들은 얘긴데 교우촌이나 전통이 있는 본당 곧 성직자, 수도자를 많이 배출하고 인구 유동이 거의 없는 폐쇄적인 본당에 가면 새로운 시도를 하기 어려운데 그것은 아무리 본당 신부가 사목 회의를 통해 결정을 해도 서로 눈치를 보거나 특히 영향력 있는 사람 눈치 보기 때문이랍니다.
이렇게 해서 사람의 규정과 사람의 전통이 하느님의 계명보다 위에 있게 되는데 향상을 생각하는 우리 공동체는 위가 하늘인지 땅인지, 하느님인지 우리인지 돌아보는 오늘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피’가 섞이지 않은 가르침은 ‘마음’까지 이르지 못한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그들이 따르는 율법 때문에 예수님께 질책을 당합니다. 그들이 먼저 손을 씻지 않고 식사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마음’이 없으면서 겉으로만 율법을 지킨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이란 그 율법을 주신 이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들은 돈이 있어도 부모를 봉양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이라 말하면 그만이었습니다. 하느님께 예물을 바치기 위해 부모를 공경하라는 율법을 어긴 것입니다. 율법은 정신은 ‘사랑’입니다. 이들은 마치 코끼리인 줄 모르고 각자가 원하는 부분을 만지는 소경과 같습니다. 각자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석하여 자신을 위해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에 대한 사랑이 없으니 그 율법은 자기 이익을 위해 쓰입니다. 예수님은 그 율법을 주신 분을 사랑하게 만들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오는 피를 받지 않으면 그들은 율법을 지킬 능력을 갖추지 못합니다.
자우림의 보컬 김윤아가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에 나와 자신의 민감한 성격에 대해 말했습니다. 몸과 정신이 피폐해져 자주 병원에 입원하고 잠을 자도 15분마다 깨기도 하는 고통스러운 나날을 살았습니다. 위도 일을 하지 않아 계속 마르는 상태입니다. 극초 민감함의 소유자가 되어 소위 번아웃이 온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시작된 동기는 2014년이었습니다. 아마 세월호 사건이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그때의 아이들이 마치 자기 자신처럼 느껴졌을 수 있습니다. 아무 일에도 의미가 없고 음악 하는 것도 쓸데없는 일처럼 느껴진다면 두려움을 고백했습니다.
그녀는 이런 증상이 있게 된 원인이 아버지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밖에서는 너무나 좋은 가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집안에서는 굉장히 폭력적인 분이어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신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폭력을 가했습니다. 본인이 모든 것을 통제하지 않으면 불안했던 것입니다. 대학 때도 통금 시간이 8시였다고 합니다. 심지어 목공소에 각종 크기의 매를 맞추기도 하였다는 것입니다.
김윤아 씨는 이런 아버지의 이중적인 모습에 굉장한 분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불안하기 때문에 모든 감각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초식동물은 소리에 매우 민감합니다.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에 모든 에너지를 빼앗겨 민감해지고 몸과 마음에 병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녀에게 유일한 위안은 그 분노와 두려움을 내뱉는 음악이었는데, 2014년 이후 그런 것까지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무리 자녀가 잘되도록 매를 들고 가르쳐도 그 가르침에는 피가 섞이기보다 아이들의 피를 내는 폭력이 있기에 그 가르침은 사람을 피폐하고 만들었습니다. 쓸데없는 가르침을 넘어 피해를 주는 가르침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녀는 ‘증오는 나의 힘’이라는 노래에서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노래합니다.
“고맙고 고마운 내 아버지, 당신을 죽도록 이토록 증오한 덕에 난 아직 살아있고….”
누군가의 가르침은 그 사람에게 고마울 때 따라주고 싶은 것입니다. 범법자들이 법을 지키지 않는 이유는 먼저 자신이 사는 세상에 불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나라에 감사하면 법을 지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셔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주신 율법은 인간이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 안에 피가 섞여야 그 피가 그 사람의 자아를 죽이고 그 율법이 그를 이끌게 만듭니다. 부모에게 감사하지 못하는 아이는 그 부모의 가르침을 절대 있는 그대로 따르지 않습니다.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따르는 척하지만 결국 자기를 망칩니다.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그들에게 율법을 잘 지키게 해줄 그리스도를 보내주시어 당신을 더 사랑하도록 하신 것인데, 이것을 원치 않고 하느님을 실제로는 미워하면서도 그저 그 율법을 자기 자신들을 위해 사용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법은 세 종류가 있습니다. 육체를 규정하는 법과 생각을 규정하는 법, 그리고 마음을 규정하는 법입니다. 육체를 규정하는 법은 무력을 쓰면 가능하고, 생각을 규정하는 법은 논리가 맞으면 됩니다. 그러나 마음을 규정하는 법은 ‘피’가 필요합니다. 이 피가 없으면 마음을 바꾸려 하면 안 됩니다.
박보영 목사가 초기에 사목할 때 길거리에서 방황하던 가출 청소년들을 데려다 키웠습니다. 그들은 불량배들이었고 전과자들이었습니다. 처음엔 박 목사를 칼로 찌르려고 했는데 “조금 있다 찌르고 내 말 좀 들어봐라!”라며 복음을 전해 거둬들인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먹을 것이 너무 없어, 라면 하나를 끓여 7~8명이 나누어 먹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배고픔을 못 이겨 도둑질하였습니다. 이것을 알게 된 이유는 그들이 도둑질하고 온 돈을 십일조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인에게 발각이 되었을 때는 목사님이 직접 가서 아이들이 감옥에 가지 않도록 싹싹 빌었습니다. 어떤 때는 술에 취한 주인에게 매 맞은 적도 있었습니다. 아이들을 이용해 돈을 버는 목사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때뿐이었고 배고프면 또 도둑질하러 갔습니다.
왜 아이들은 십일조는 지키면서 실제로는 변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 율법을 준 박보영 목사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 박 목사에게 얼마나 큰 아픔을 주는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날도 주인에게 발길질을 당하고 나오는데 아이들은 심각하지 않은 듯 자기들끼리 웃고 농담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안 되겠다 싶어 박 목사는 교회에서 한 아이를 세워놓고 쇠파이프 막대기로 힘껏 때렸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막대기를 들려주며 “너희들이 나를 10대씩 때려라. 대신 9대 때렸다가 마지막 1대라도 살살 때리면 다시 때리게 할 테니 힘껏 때려라”라고 말했습니다. 두 아이에게 20대를 맞았는데 박 목사는 너무 아파서 마음속으로 주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너무 아파요. 더 못 맞겠어요.”
박 목사는 세 번째 아이가 죄송하다며 때린 매에 허리 밑 꼬리뼈를 맞고 쓰러져 정신을 잃고 소리를 지르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매를 맞았고 그렇게 80대를 맞았습니다. 박 목사는 그 일로 거의 한 달 동안을 누워서 지내야만 했습니다. 지금도 그 후유증으로 허리가 안 좋아 항상 뜨거운 팩을 붙이고 다녀야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변화되지 않던 아이들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더는 도둑질하지 않았습니다. 박 목사가 아이들에게 “왜 나를 때리고 나서 너희들이 변화되었느냐?”라고 물으니, “세상이 다 가짜인 줄 알았는데 매를 맞고 뒹구는 목사님 모습을 보고 깨닫게 되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전에 JTBC ‘유자식 상팔자’에서 ‘부모님의 잔소리에 대처하는 나만의 방법은?’이라는 질문에 ‘반응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사춘기 아이가 있었습니다. 분명 아이는 자기만 100% 잘못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엄마는 아이에게 버릇없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야단을 맞는 건데 엄마가 잘못했다는 건 잘못 생각하는 거지. 엄마랑 너랑 싸우는 관계가 아닌 거야. 난 부모고 넌 자식이야! 네가 엄마에게 야단을 맞는 관계지.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엄마를 무시하는 거야, 네가.”
아이에게 아이는 엄마에게 당연히 순종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는 가르침과 함께 피를 원하는 것입니다. 고맙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말을 안 들으면 “피가 모자라는구나!”라고 생각해야지, “난 부모고 넌 자식이야!”로는 안 됩니다. 율법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 율법을 주는 이가 ‘고마워서’ 율법을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피’가 빠진 말은 그저 폭언이 되고 잔소리가 될 뿐입니다. 나의 가르침에 항상 나의 피가 섞여 있는지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이가 사춘기가 넘으면 이 일을 주님께 돌려야 합니다.
클래어 크로켓 수녀님은 어렸을 때 방탕한 삶으로 빠졌었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입 맞추다가 그 고통이 나의 죄 때문이었음을 깨닫고 그분의 계명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주님 사랑의 불화살로 당신 심장이 찔리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야 그분 뜻이 내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모습으로 변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매일 하느님을 더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외롭지 않으세요?
누구랑 같이 여행 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휴가를 갈 때면 늘 혼자 떠나는 여행을 선택합니다. 또 밤에는 누구를 만나서 보내는 것보다는 제 방에서 조용히 책 읽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런 저를 아는 사람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외롭지 않으세요?”
혼자 여행을 떠나도, 또 홀로이 책을 읽고 있어도 외롭다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조금 외로움을 느낍니다. 부모님 두 분 모두 하늘나라에 가신 뒤에 느끼게 된 감정입니다. 내 편이 사라졌다는 생각에 외로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혼자 있는 것을 원래부터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단지 나를 믿어주는 내 편이 있기에 혼자 있는 것도 괜찮은 것뿐이랍니다.
다른 이들과 수많은 관계 속에서, 즉 ‘우리’로서 이 세상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시작은 ‘나’입니다. 상대방이 밉다고 혼자서 살기 시작하면, ‘나’는 더 힘든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사랑이 필요합니다. 믿음을 주는 사랑이 나에게서 나올 때, 사람들 역시 나와 함께 하려 할 것입니다.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함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복음에 나옵니다. 바로 주님으로부터 위선자라는 말을 들었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입니다. 그들은 자기 편과 자기 편이 아닌 사람으로 구분했습니다. 자기들도 지키지 못하는 자세한 규율을 엄격히 적용하면서 사람들을 분리했습니다. 실상 그들이 말하는 ‘조상들의 전통’은 십계명이 아닌 인위적인 규율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손 씻는 예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교도들이 많이 모이는 시장이 갔다 오면 부정 탔다고 해서 몸을 예식으로 정결해야 했습니다. 위생절차가 아니라 손을 물에 담그거나 몸에 물을 뿌리는 종교예식일 뿐입니다. 내부적인 부정을 벗겨낼 수 있다며 외적인 행동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손 씻는 예식은 식사 전과 후, 때에 따라서는 식사 도중에도 행해졌습니다. 그러나 이는 제관들이 종교적인 예절을 행하기 전에 했던 것인데, 이를 일반 백성에게도 예절적으로 행하도록 부과한 것이었습니다. 원래의 뜻은 무시하고 그냥 자기 편과 아닌 편으로 나누면서 자기 편이 아니면 죄인으로 취급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이렇게 ‘함께’가 아닌 ‘자기 편’만 생각하는 그들을 주님께서는 인정하실 수 없었습니다.
외로움이 많은 세상입니다. 내 뜻과 다르다면서 단죄해버리는 못된 습관이 외로움을 더하고 있습니다. 사랑에 더 깊이 머물러야 합니다. 바로 나부터 그 사랑을 시작해야 합니다. 함께하는 사람이 늘어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늘 가까이에 근심이 있다.
- 공자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 (마르 7,13)
올바른 삶의 변화가 가장 큰 은총이다. 아는 것보다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우리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은총의 말씀이다. 우리의 욕심으로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사는 우리들이다. 복음의 방식은 겉과 속이 다르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이중성을 아프게 지적하신다.
하느님을 위한 삶은 결코 이중적이지 않다. 그래서 신앙은 위선이 아니다. 위선을 내려놓고 교만을 내려놓고 겸손과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다. 신앙은 참된 복음이다. 참된 복음은 먼저 마음을 살리고 서로를 살린다. 믿는 것을 살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우리 마음에 있어야 할 것은 하느님 마음이다.
하느님 마음은 규칙과 전통을 뛰어넘는 참된 사랑이다. 참된 사랑은 자신만이 옳다는 독선을 경계한다. 비겁한 핑계가 아닌 계속 되풀이되는 판단과 단죄가 아닌 자기성찰이 필요한 시간이다.
겉만 번지르르한 삶에 벗어나 참된 겸손과 감사로 주님을 만나야 할 오늘의 시간이다. 교만과 독선의 거짓 이중성을 아프게 회개하는 것이 참된 신앙이다. 신앙은 겉과 속이 일치하는 인격이다. 인격은 아프게 돌아보는 성찰 없이는 결코 성장하지 않는다.
깨어있는 삶이 구원의 삶이다. 하느님과의 관계는 결코 이중적인 위선의 관계일 수 없다. 거짓이 아닌 참된 관계가 신앙이고 복음이다. 하느님 모상을 닮은 참된 인격이다. 거짓이 아닌 참된 사랑의 예수님이시다. 참된 방향으로 이끄시는 주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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