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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2월 6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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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5주일 -

 

 

2022년 2월 6일 연중 제5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만군의 주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낼까?” 하시자, 이사야 예언자는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하고 아룁니다.

 

 

✠ 오늘 제2독서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인들에게 그가 이미 전한 복음을 상기시킵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이제부터 사람을 낚을 것이라고 이르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2월 6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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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이사 6장 1-2ㄱ절, 3-8절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1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솟아오른 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분의 옷자락이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분 위로는 사랍들이 있는데, 저마다 날개를 여섯씩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주고받으며 외쳤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하다.” 


그 외치는 소리에 문지방 바닥이 뒤흔들리고 성전은 연기로 가득 찼다. 


나는 말하였다.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 


그러자 사랍들 가운데 하나가 제단에서 타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손에 들고 나에게 날아와, 


그것을 내 입에 대고 말하였다. “자,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죄는 없어지고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 


그때에 나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소리를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내가 아뢰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
천사들 앞에서 찬미 노래
부르나이다.

 

주님, 제 마음 다하여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제 입의 말씀을 들어 주시기에, 천사들 앞에서 찬미 노래 부르나이다. 거룩한 성전 앞에 엎드리나이다. 주님, 천사들 앞에서 찬미 노래 부르나이다.

당신은 자애롭고 진실하시니, 당신 이름 찬송하나이다. 제가 부르짖던 날, 당신이 응답하시고, 저를 당당하게 세우시니, 제 영혼에 힘이 솟았나이다. 주님, 천사들 앞에서 찬미 노래 부르나이다.

주님, 세상 임금들이 당신 말씀 들을 때, 저들이 모두 당신을 찬송하게 하소서. 주님 영광 크시오니, 주님의 길을 노래하게 하소서. 주님, 천사들 앞에서 찬미 노래 부르나이다.

주님은 오른손으로 저를 구하시나이다.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리라! 주님, 당신 자애는 영원하시옵니다. 당신 손수 빚으신 것들 저버리지 마소서. 주님, 천사들 앞에서 찬미 노래 부르나이다.

 

 

매일미사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1코린 15장 1-11절

 

우리 모두
이렇게 선포하고 있으며
여러분도
이렇게 믿게 되었습니다.

 

1
형제 여러분, 내가 이미 전한 복음을 여러분에게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이 복음을 받아들여 그 안에 굳건히 서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이 복음 말씀을 굳게 지킨다면, 또 여러분이 헛되이 믿게 된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10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 

11 
그리하여 나나 그들이나, 우리 모두 이렇게 선포하고 있으며 여러분도 이렇게 믿게 되었습니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5장 1-11절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고, 군중은 그분께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였다. 


그분께서는 호숫가에 대어 놓은 배 두 척을 보셨다. 어부들은 거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두 배 가운데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그에게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사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던 것이다. 

10 
시몬의 동업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하였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11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예수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깊은 데로 배를 저어 나가 그물을 내린 베드로 사도는, 결과를 보고 몹시 놀라 “주님,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하며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립니다. 여러분이 헛되이 믿게 된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

 

하느님, 저희 모두 같은 빵과 같은 잔을 나누어 먹고 마시게 하셨으니 저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어 기꺼이 인류 구원에 앞장서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평만 유스티노 신부 집전

 

 

2022년 2월 6일 (일)
김평만 유스티노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2월 6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과연 나는 누구의 일을 하고 있으며 그 영광을 누구에게 돌리고 있는가?

 

오늘 독서와 복음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보잘것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지만,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으로 선택되어 특별한 소명을 부여받은 사람들입니다. 

제1독서에서 자신을 ‘입술이 더러운 사람’으로 묘사한 이사야는 ‘숯’의 정화로 새로워져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거룩한 입술을 지니게 됩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과거에 교회를 박해하던 자신의 처지가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으로 완전히 뒤바뀌어 이제는 당당히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또한 오늘 복음에서, 어부였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많은 물고기가 잡히는 놀라운 광경을 보고 두려운 나머지 그분께 죄 많은 자신을 떠나 주십사 청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를 사람 낚는 어부로 선택하십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사회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였던 사람들, 별 볼 일 없던 사람들을 당신의 일꾼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명확합니다. 이들을 통하여 드러날 놀라운 업적이 오로지 하느님에게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강조하시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오늘 제2독서에서 이 부분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 

사실 저에게도 모든 것이 은총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사제가 되기에 한없이 부족한 저를 부르시고 당신의 일꾼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지난날들을 떠올려 보면, 저의 사제 직무를 통하여 이루신 그분의 놀라우신 업적이 마치 제게서 비롯된 것인 양 착각했던 때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는 교회 공동체를 위하여 봉사하는 모든 구성원에게도 자주 찾아올 수 있는 유혹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에게 늘 질문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과연 나는 누구의 일을 하고 있으며 그 영광을 누구에게 돌리고 있는가?’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우리도.

 

오늘은 이사야가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고 베드로가 부르심을 받는 얘기입니다. 이는 지금의 우리가 부르심을 받을 때도 이러해야 한다는 모범이겠습니다. 

그러니까 부르심을 받고 그 성소를 살아가려면 이사야나 베드로처럼 하느님 체험을 언젠가 해야 한다는 뜻이고, 그래야 성소가 흔들리지 않고 충실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언젠가 해야 한다는 표현을 제가 썼습니다. 예를 들어 결혼 성소라면 결혼 전에 그 성소를 확고히 느끼고 하면 제일 좋겠지만 처음에는 그것이 성소인 줄 모르고 그저 서로 좋아서 했을지라도 나중에 언젠가는 결혼이 서로 좋아서 하게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짝지어주셔서 하게 된 것이라고 성소를 발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수도 성소도 하느님 체험 없이 수도원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매우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동기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하느님께서 이런 동기를 이용해서 나를 부르셨다는 하느님 체험이 있으면 되고 그래야 성소를 끝까지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하느님 부르심의 체험은 더 근본적인 것까지 가야 합니다. 곧 내가 태어난 것부터 하느님의 부르심이고, 이 부모와 이 자식의 만남도 부부와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그렇게 맺어주신 거라는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내가 태어날 때 내가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부모를 선택해서 네기 태어나지 않았으며, 하느님께서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고 이 부모에게서 태어나게 하셨지요. 

나에게서 태어난 자녀도 내가 이 자식을 낳겠다고 해서 난 것이 아니고 이 자녀가 나에게 주어진 것이지 않습니까? 

이 자식을 여러분이 낳은 것입니까? 주어진 것입니까? 주어진 것이라면 누가 주신 겁니까? 

그런데 성소 체험이랄까 깨달음이 있기 전에는 내가 나의 2세 계획을 세우고, 내가 낳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그러니까 은총으로 하느님 체험과 함께 성소 체험을 하게 되면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부르심이고 섭리였음을 몰랐던 자신을 깨닫게 되는데 이때 우리가 느끼는 것이 오늘 이사야와 베드로가 느끼는 바로 그 죄책감입니다. 

그 죄는 도둑질처럼 나쁜 짓을 한 죄가 아니라 하느님을 몰라뵌 죄, 하느님을 몰라뵈고 내가 다 하고 내가 잘나서 한 것인 줄 알았던 죄, 하느님께 청하고 하느님의 이끄심에 따르지 않고 내 힘으로 다 하려고 한 죄, 나의 한계와 무력함을 깨닫지 못하고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깨닫지 못한 죄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자신이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라고 죄를 고백하고, 베드로는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하는데 그러니 떠나가 달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자기에게서 떠나는 것이 베드로의 진심일까요? 거짓말은 아니지만, 진심이라기보다는 죄인인 자기가 거룩한 주님 앞에 있는 것이 너무나 부당하고 부담스럽다는 표현일 것입니다. 

이런 그들을 하느님은 예언자로 파견하시고 사람 낚는 어부로 삼으십니다. 부르시어 당신의 사람으로 삼으시고 당신 대신 사람들에게 보내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들과 다르지 않은 하느님의 사람들이고 파견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망각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요 그것은 파견되기 위한 것임을.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사제나 수도자가 되는 것이 결혼하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해도 될까?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어부였던 첫 네 명의 제자들을 부르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그들에게 물고기가 많이 잡히게 만드는 기적을 보여주시고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드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여기에서 ‘모든 것’은 재물은 물론이요, 세속적인 인간관계까지 포함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라 사람 낚는 어부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재물에 대한 욕심뿐만 아니라 가족과 사람들에 대한 애정도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신앙체험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수도자들의 입회가 줄어든 지는 꽤 되었습니다. 거의 젊은 사람들이 수도자가 되려 하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나마 사제가 되는 성소자는 좀 있었지만 이마저도 급감하고 있습니다. 올해 수원교구가 신입생이 간신히 10명을 넘겼고 서울 대교구를 포함한 다른 교구에서는 없거나 10명 이하입니다. 신학교를 없애는 교구도 있습니다. 운영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사제 성소, 수도자 성소가 주는 이유는 단순히 젊은 사람이 부족해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매력’을 잃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런 삶이 더는 ‘행복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 와중에 저는 “사제나 수도자가 되는 삶이 결혼하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결혼한 분 중에 싫어하는 사람이 생기고 사제 중에도 자신이 결혼생활을 포기한 고통이 얼마나 큰 희생인지 알아주는 것 같지 않아서 이런 말에 반대합니다. 하지만 사제와 수도자, 부모들조차 사제나 수도자가 되는 삶이 결혼하는 것보다 행복하다는 생각을 갖지 않으면 어떻게 자녀들이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우선 ‘행복’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행복은 크게 ‘존재적 행복’과 ‘소유적 행복’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존재적 행복이란 아이가 태어나서 엄마 품에 안기는 것이고, 소유적 행복이란 엄마가 주는 음식을 먹을 때 느끼는 행복입니다. 둘 다 ‘생존’에 관계됨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생존이 위협받을 때 느끼는 감정을 ‘불안’(不安)이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이 불안을 해결하는 데 집중됩니다. 생존을 위해 소유를 늘려 불안을 해소하려 하고, 또 나의 생존을 책임져 줄 누군가의 마음에 들어 행복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세상에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지고 명예를 가졌더라도 자살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근본적으로 존재적 불안을 해소하지 않으면 사람은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엄마가 어린아이에게 먹을 것과 장난감을 충분히 주고 아이를 혼자 집에 둔다면 아이는 소유적 행복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요? 그런 것도 어머니의 존재가 옆에서 있을 때 즐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참 행복은 어린이처럼 나의 생존을 책임져 줄 자신의 창조자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느낄 때 옵니다. 

그런데 부모가 나의 생존을 끝까지 책임져 줄 수 있을까요? 부모도 죽습니다. 결국, 죽음은 누구도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이때 죽지 않으려고 더 가지려 하는 게 옳을까요, 아니면 창조자를 찾음이 옳을까요? 창조자를 찾으면 죽음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더 이상 생존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처럼 그 하느님께 양심적으로 나아갈 수 없는 죄를 짓고 산다면 어떨까요? 스스로 죽음까지 걱정할 필요가 없게 만드는 부모를 거부하는 사람이 됩니다. 따라서 부모와 함께하고 싶으면 부모 뜻을 따르고 있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마음에 들기 위해 목숨까지 바칠 태세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할 때 주님께서 나를 사랑해주셔서 다 책임져주신다는 참 평화를 누립니다. 오늘 예수님은 어부들을 이 평화로 부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목숨을 바쳐 선교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일수록 주님께 더 사랑받고 있다는 믿음 때문에 더 행복합니다. 

문제는 그 뜻을 따르기 위해서는 소유의 행복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진 재산도 포기해야 하고 심지어 결혼생활도 포기해야 합니다. 결혼생활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지만, 더 큰 행복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결혼의 삶이 오히려 방해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일을 위해 결혼하지 않는 편을 선택하라고 합니다. 괜한 고통을 겪으며 참 행복을 위해 에너지를 빼앗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소록도에 불교를 전하러 갔던 스님이 신도들의 믿음 때문에 오히려 성령을 받아서 개신교 선교사가 된 이민교 선교사가 있습니다. 본래 죽음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열망이 강한 상태로 성장하였습니다. 골수 원불교 가정에서 원불교 교무(교역자)가 되기로 예정된 코스를 밟아야 하는 것이 그의 숙명이었습니다.
고3 때 죽음에 대해 체험을 하고 싶어서 소록도에서 봉사합니다. 소록도병원 한 간호사가 성탄 행사에 간다면서 그에게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그렇게 따라간 곳이 가톨릭 성당이었다. 미사를 드리는 중에 갑자기 환자들이 죽 일어서 뭘 하나 받아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도 한센병약이나 되는 줄 알고 얼떨결에 일어서 눈을 질끈 감고 성체를 받아먹었습니다. 나중에서야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된 그는 말합니다. 

“그게 예수님의 살을 상징하는 성체였다니…. 저도 모르게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예식에 처음으로 참여한 셈입니다. 아마 저를 예수님께로 이끄시려는 하느님의 오묘한 물밑작업이 시작되지 않았나 합니다.”

그는 한 가톨릭 신자의 초대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게 하시기 위해 당신 생명을 우리 안에 넣어주신 체험이었습니다. 스님이 된 이후에도 그는 소록도에도 자주 갔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전교를 당했습니다. 

“우리가 문둥이가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을 수 있었어. 문둥이가 아니었다면 한평생 멋모르고 살다가 지옥에 갈 수도 있었을 텐데…. 하나님은 우리를 문둥이로 만들어주셔서 이제는 예수 믿고 영생을 얻었으니 살아도 천국에 살고, 죽어서도 천국에 갈 수 있어. 그러니 우리는 지금 행복해.”

불교 교리에 의하면 ‘전생에 당신들이 지은 죄로 인해 이생에 문둥이라는 과보를 받았다’라고 보는 게 맞는데, 그들이 자신을 더 불쌍히 여기는 것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인과응보가 아닌 축제의 장이었습니다. 이렇게 죽음의 문제로 혼란스러워할 때, 어느 날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1988년 3월 2일 그날은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입니다. 틈만 나면 소록도로 가던 저는 그날도 소록도 법당에 있었습니다. 그날도 평소처럼 새벽 4시에 일어났습니다. 법당에 가서 가부좌를 틀고 30분간 좌선을 한 다음 목탁을 치며 염불을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가 염불이 되지 않고, 엉뚱한 말이 입안을 맴돌았습니다. ‘
며칠 후 며칠 후... (딱딱딱) 며칠 후 며칠 후... (딱딱따) 요단강 건너가…. (딱딱딱)’. 화들짝 놀랐습니다. 처음엔 ‘내가 멸치가 먹고 싶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만하려고 해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소리를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이 없습니다. 그것은 장의사 아르바이트할 때 개신교인 장례식에서 들었던 찬송가 가사였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염불을 해야 하는 법당에서 아무리 땡중이지만 입에서 찬송가를 부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 그런데 혀가 멈추지를 않아요. 혀가 제멋대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며칠 후 며칠 후’ 하다가 뜻 모를 소리까지 외쳐댔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때 방언이 터졌던 것 같습니다. 굉장한 쇼크였습니다.” 

그는 개종하여 목사가 되기로 합니다. 이때부터 영적인 시련과 부딪혀야 했습니다. 귀신이 차 뒷자리에 앉았다고 옆자리에 앉아서 큰 사고가 났습니다. 얼마 동안 잠자는데 오줌을 싸거나 대변이 나오는 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그 모든 두려움을 끊어내고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아내도 생기고 어린 자녀도 둘이나 생겼습니다. 아내는 약사였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를 우즈베키스탄이란 나라로 부르십니다. 이민교 선교사는 약국을 팔고 아이들을 데리고 자신을 따라올 것을 아내에게 권고합니다. 그러나 아내는 이혼하자고 합니다. 그래서 이 선교사는 혼자 떠납니다. 

나중에 아내는 마음을 바꾸어 약국을 정리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우즈베키스탄이란 나라로 남편을 따라갑니다. 그러나 아내는 갑상선 질환으로, 첫째 아이는 급성 신우신염으로, 둘째 아이는 결핵으로 크게 고생합니다. 그리고 그쪽 동네 청년들은 “저녁 8시까지 옥상에 돈과 담배를 갖다 놓지 않으면 너희 애들을 가만두지 않겠다’라고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농아 축구단 감독을 병행하며 선교를 하고, 많은 것이 정리되었지만 그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일단 하느님을 체험하고 알게 되었으니 너무나 행복하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고민하던 죽음의 불안이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이때 장애가 되는 것은 역시 가족들입니다. 진정으로 주님의 뜻을 따르려면 부모도, 아내도, 자녀들도 미워해야 하는 상황이 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물고기를 많이 잡게 하신 다음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이렇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물고기 잡는 게 행복하겠니, 사람 영혼을 구하는 일을 하는 게 행복하겠니?”

물고기를 잡는 것은 소유의 행복을 말합니다. 그러나 영혼을 구하는 일을 하면 존재의 행복을 누립니다. 하지만 그 존재적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결혼도 가족을 구원하고 자녀에게 신앙을 물려주는 등, 엄청난 선교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소유의 행복을 포기하기 어려운 환경입니다. 이에 저는 참 행복을 위해서는 사제나 수도자가 되어 영혼 구원에 투신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결혼하는 것보다 더 행복한 삶이라 말합니다. 

기분이 나빠도 어쩔 수 없습니다. 똑같이 행복한 것이라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 길을 가고 있는 사람까지 그러면 누구도 이런 행복을 추구할 꿈도 꾸지 못하는 환경이 될 것입니다. 아주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주님 뜻을 따르는 수월함에 있어서 사제나 수도자가 되는 삶이 더 행복한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변화의 주체는 외부가 아닌, 바로 ‘나’입니다.

 

“신부님께서 열심히 책 읽으면 큰 변화를 이룰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그 말 듣고 몇 년 동안 열심히 책을 읽었지만, 도대체 변하는 것이 없습니다.” 
 
예전에 저 스스로 책을 읽으면서 많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다는 내용의 강의를 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 강의를 들었던 분의 하소연입니다. 그래서 “책을 얼마나 읽고 계시는데요?”라고 묻자, “1년에 50권 정도 읽습니다.”라고 답하시는 것입니다. 
 
저의 경우, 2021년에 320권 정도의 책을 읽었습니다. 따라서 제가 보기에 50권은 한참 부족한 양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분에게 50권은 너무나 많은 양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아예 읽지 않는 것보다는 분명히 변화가 있었겠지만, 더 큰 변화를 원하셨는지 변화가 없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저 역시 320권의 책을 읽었다고 하느님의 뜻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느님께 저의 지식은 얼마나 보잘것없어 보이겠습니까? 종종 자신이 최고의 노력을 하는데도 성과가 없다는 분을 만납니다. 자기 관점에서는 최고의 노력이겠지만, 정말로 그럴까요? 더 할 수는 없었을까요? 
 
이런 식으로 자신을 합리화시키고 외부에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됩니다. 변화의 주체는 외부가 아닌, 바로 ‘나’입니다. 
 
사람들에게 더 많이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주기 위해서는 함께 할 일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당신이 직접 제자들을 뽑으셔야 했기에,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베드로와 그 동업자를 부르십니다. 여기서 시몬 베드로는 놀라운 체험을 합니다.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했던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전문 어부이기에 이미 깊은 데에서 그물을 내리지 않았었을까요? 더군다나 밤새 고기를 잡기 위해 얼마나 많이 노력했을까요? 그러나 예수님 말씀에 순명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잡게 되었지요. 예수님을 통해 자기 자신을 깨닫습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제2독서에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해서 자격조차 없는 몸이었지만 사도가 되었다고 하면서, 자격 운운하는 것이 아닌 무조건 선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우리에게 전합니다. 베드로도 죄 많은 사람임을 알고 있지만, 부르심에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떠납니다. 
 
자격 운운한다는 것, 능력과 재주가 없다는 것, 주변 상황에 대한 불평불만을 하는 것 등의 말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 뜻에 맞게 사는 노력만이 제대로 응답하며 사는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커다란 것을 기다리는 사람은 작은 것은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루카 5,5)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우리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두려움과 무력함으로 또 다시 곤두박질치는 은총의 시간이다. 진짜 삶은 먼저 우리자신과 마주하는 것이다. 우리자신과 마주하는 것이 내면의 성장 그 첫걸음이다. 기존의 삶을 바꾸려는 우리의 정직성과 용기가 필요하다. 

변화는 또 다른 파괴이다. 과거의 방식을 파괴하는 것이 새로운 창조이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시도를 원하신다. 새로운 시도란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음을 우리가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자기인정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예수님께서는 삶의 방향전환 그 자체이시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다시 내려 고기를 잡게 하시는 새로운 변화의 주님이시다. 깊은 곳이란 먼저 주님을 만나야 할 우리들 마음이다. 우리 마음을 다시 환하게 만드신다. 더 나은 삶을 살고싶은 우리들이다. 

예수님께서는 간결한 부르심을 통해 새로운 삶을 우리들어게 보여주신다. 새로운 방향 전환이 새로운 삶이다. 매순간 우리 삶에 채워야 할 주님의 선물이다. 그 선물을 받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는 새로운 변화 새로운 삶이 간절히 필요한 시간이다. 

하느님께서는 새로워지는 삶을 원하신다. 살고싶은 삶이란 깨어나는 삶이다. 더 행복하고 더 건강해지고 더 가치있는 복음의 삶을 믿는다. 먼저 나의 내면을 향하여 복음의 그물을 힘껏 던지는 은총의 주일이다. 새로워지는 첫걸음은 어제의 것을 버리고 내려놓는 오늘의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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