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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2월 3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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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4주간 목요일 -

 

 

2022년 2월 3일 연중 제4주간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다윗은 주님의 길을 걸으면 성공할 것이며, 주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그대로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더러운 영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그들을 파견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2월 3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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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1열왕 2장 1-4절, 10-12절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간다.
솔로몬아,
너는 사나이답게 힘을 내어라.

 


다윗은 죽을 날이 가까워지자, 자기 아들 솔로몬에게 이렇게 일렀다.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간다. 너는 사나이답게 힘을 내어라. 


주 네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며, 또 모세 법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을 지켜라. 그러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또한 주님께서 나에게 ‘네 자손들이 제 길을 지켜 내 앞에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성실히 걸으면, 네 자손 가운데에서 이스라엘의 왕좌에 오를 사람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신 당신 약속을 그대로 이루어 주실 것이다. 

10 
다윗은 자기 조상들과 함께 잠들어 다윗 성에 묻혔다. 11 다윗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기간은 마흔 해이다. 헤브론에서 일곱 해, 예루살렘에서 서른세 해를 다스렸다. 

12 
솔로몬이 자기 아버지 다윗의 왕좌에 앉자, 그의 왕권이 튼튼해졌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
당신은 만물을 다스리시나이다.

 

주님, 저희 조상 이스라엘의 하느님, 영원에서 영원까지 찬미받으소서. 주님, 당신은 만물을 다스리시나이다.

주님, 위대함과 권능과 영화가, 영예와 위엄이 당신의 것이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옵니다. 주님, 당신은 만물을 다스리시나이다.

주님, 나라도 당신의 것이옵니다. 당신은 온 세상의 으뜸, 그 위에 드높이 계시나이다. 부귀와 영광이 당신에게서 나오나이다. 주님, 당신은 만물을 다스리시나이다.

당신은 만물을 다스리시나이다. 권능과 권세가 당신께 있으니, 당신 손을 통하여 모든 이가 힘과 영예를 얻나이다. 주님, 당신은 만물을 다스리시나이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르 6장 7-13절

 

예수님께서
그들을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10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11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12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13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가 구원의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영원한 생명의 보증인 이 성사의 힘으로 저희 안에 참된 믿음이 자라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우성 비오 신부 집전

 

 

2022년 2월 3일 (목)
김우성 비오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왜 그러셨을까요?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며 내리신 이 명령은 꽤 가혹한 요구로 들립니다. 험한 지형을 걷기 위한 신발과 맹수의 위협에서 자신을 보호할 지팡이를 제외하고는 정말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식량은 물론이고 숙박에 필요한 돈, 심지어 여벌의 옷도 지녀서는 안 됩니다. 나름대로 필수적인 준비물들인데도 말이지요. 왜 그러셨을까요?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파견 여정에 필요한 모든 것이 하느님에게서 주어진다는 사실, 곧 제자들의 선교 임무가 전적으로 하느님의 돌보심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하느님의 특별한 보살핌을 체험합니다. 그들이 먹을 빵을 손수 하늘에서 내려 주셨고, 마실 물이 바위에서 터져 나오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말합니다. 

“그동안 너희 몸에 걸친 옷들이 해진 적이 없고, 너희 발에 신은 신들이 떨어진 적이 없다.” (신명 29,4)

예수님 제자들의 여정도 이와 비슷하게 자급자족이 아니라 하느님의 보살핌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하느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뿐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비단 옛 제자들의 선교 여정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우리네 ‘삶’의 여정에도 하느님의 보살핌은 늘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분을 신뢰하는 법을 잊고서는, 먹고 사는 문제에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느라 정작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사는지도 모릅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마태 6,33)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떠남과 머묾

 

오늘 복음에 비춰볼 때 인생을 참 잘못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라고도 하시고 머물라고도 하십니다.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떠나서 가라고 하시고, 복음 선포를 하러 가서는 한 집에 머물라고 하시지요. 

그러니까 떠나야 할 때는 떠날 줄 알고, 머물러야 할 때는 머물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인데, 그런데 인생을 잘못 사는 사람은 그 반대로 합니다. 

그러니까 떠나야 할 때는 떠나지 못하고 안주하고, 머물러야 할 때는 머물지 못하고 역마살이 낀 사람 마냥 떠나려고 합니다. 

저희 수도자들의 경우 선교하러 가라, 복음 선포를 하러 가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라고 하면 옴짝달싹하지 않고 들러붙어 앉아 있고, 고통이 조금만 닥치거나 누구 때문에 조금만 불편하게 되면 같이 살 수 없으니 떠나겠다고, 공동체를 바꿔 달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경우지요. 

그런데 수도자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신앙인들은 무엇을 하든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겠지만 그중에서도 떠남과 머묾에 있어서 하느님 뜻을 따르는 것이 가장 중요하면서도 힘들다 할 것입니다. 

있던 곳을 떠날 때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하고, 떠나는 동시에 모든 것이 다 바뀌기 때문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순종을 우리가 할 수 있겠습니까? 

억지로 하는 것은 순종이 아니라 복종 또는 굴종이고 기꺼이 할 때만 순종이라고 할 때 순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특히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새롭게 가라고 하시는 그 길이 지금 머무는 곳보다 다 나은 곳이기에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나를 그곳으로 보내시는 거라고 믿을 수 있어야 하고,  뒤집어 얘기하면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나를 사지로 밀어 넣기 위해 그곳으로 보내시지 않고, 생명과 행복의 땅으로 보내시는 거라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오늘 제가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선교하기 위해 아프리카로 떠나는 한 수녀님의 파견 미사를 제가 주례하기 때문인데 그곳에 가면 엄청난 고통이 나를 기다리고 있음이 불을 보듯 뻔해도 그곳이 나에게는 더 나은 미래이고 행복이라는 믿음이 있어야지만 길을 떠날 수 있는 것이니 그 믿음이 얼마나 커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새로운 길을 더 힘차게 가기 위해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하느님 사랑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새로운 길을 흔들림 없이 가게 하는 것이라면 사랑은 행복하고 열정적으로 달려가게 하는 것입니다. 

누누이 하는 얘기지만 사랑할 때에야 고통스러워도 그 길이 행복하고, 고통스러울수록 더 행복하기에 그 길을 열정적으로 갈 수 있고, 끝까지 갈 수 있게 되지요. 

오늘 저는 길 묵상을 마치면서 다윗의 마지막 길을 묵상합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다윗이 이제 이 세상 삶을 마감합니다.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간다." 

누구나 이 세상에서의 나그네 길이 끝나면 천국의 나그네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나그네 길은 평안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주님의 길을 흔들림 없이 그리고 열정적으로 걸어온 나라면 아기 예수를 안고 "이제는 주의 종을 평안히 떠나가게 하소서."라고 노래했던 시므온처럼 두려움 없이 평안히 떠나는 것이 이제 마지막 길의 관건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봉사자를 자르지 못하는 사제가 결단력 있는 사제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둘씩 짝지어 파견하시는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안의 한 가족 공동체를 형성하라는 명령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파견하시는 제자들은 성직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주목하고 싶은 내용은 이것입니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마르 6,10)

만약 사제가 한 성당에 발령받아 갔다면 그 사람을 맞이하는 집은 누구를 의미할까요? 함께 사목하는 협조자들로 보입니다. 수녀님이 될 수도 있고 사목회 위원, 단체 봉사자들이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사제가 협조자들을 함부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 됩니다. 

봉사자가 잘못하는데도 사제가 가만히 놔둬야 할까요? 예수님은 그래도 그게 좋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도 배신을 당하면서까지 가리옷 유다를 당신 봉사자로 그대로 두셨습니다. 

왜 한 번 뽑은 봉사자를 끝까지 책임져야 할까요? 봉사자를 자르면 사제의 ‘아버지’로서의 모습을 잃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아버지입니다. 봉사자는 어머니라 할 수 있습니다. 사제가 어머니를 함부로 대한다면, 심지어 바꿀 수도 있는 사람이라면, 신자들은 그 사제를 아버지로 대할 수 있을까요? 그냥 직장 상사처럼 두려운 존재가 됩니다. 그러면 전하는 복음이 모순에 부딪히게 됩니다. 복음은 하느님 안에 우리가 한 가족이 되었다는 것인데, 실제 모습은 직장 상사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KBS ‘안녕하세요’에 부모님이 너무 싸워서 불안에 시달리는 아이들과 그 부모들이 나온 적이 있습니다. 어쩌면 특별한 사연은 아니고 우리 가정의 보통 자주 싸우는 집의 경우입니다. 

아빠는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이었습니다. 둘 딸은 아빠가 술 때문에 엄마와 싸우니까 술 좀 그만 마시라고 각서까지 쓰게 했습니다. 아빠는 그저 밖에서의 삶이 쉽지 않아 술을 마시고 장난을 치는 것인데도 아이들은 큰 상처를 받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말합니다. 

“저도 집에서 노는 사람도 아니고 저도 일을 하거든요. 돌아와서는 집안일도 하고 애들도 키워야 합니다. 그러나 남편은 매일 술만 마시고 늦게 들어와서는 술 좀 적당히 마시라는 이야기만 하는데도 지킨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또 술을 먹든 안 먹든 자꾸 이렇게 못생겨서 어디에 내놓겠냐는 둥 외모 지적을 합니다. 딸아이들에게도 그렇게 합니다. 취중 진담이라고 하면서. 또 잘 이야기를 못 알아들으면 땅끝까지 저를 무시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싸움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지 않습니까?”

외모 지적을 왜 하느냐는 말에 남편이 말합니다. 

“아니, 아내가 돼지같이 살찌면 안 좋잖아요.”

아빠는 집에서 무한 권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든 엄마를 갈아치울 수 있다는 느낌을 자녀에게 줍니다. 자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엄마를 언제든 칼로 칠 수 있는 아빠 때문에 어떤 마음으로 크게 될까요? 초등학교 3학년 둘째 딸도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 나빠요. 술 취해서 머리 때리고 못생겼다고 하고. 엄마가 가슴을 치며 ‘숨 좀 쉬자. 안 그러면 힘들어서 죽을 것 같아’라고 말해요. 슬퍼요. 엄마가 이혼하자고 한 적이 많아요. 싫고 무서워요.”

이 집에서 아빠는 무소불위의 권위를 행사하고 자녀들에게 언제든 엄마와 헤어질 수 있다는 마음을 주었습니다. 그러면 아빠는 외로워질 수밖에 없고 자녀들은 어긋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불안한 가정에서 자란 자녀는 어떤 모습이 될까요? 일단 결혼했다면 나에게 맡겨진 사람들은 주님께서 맡겨준 사람이라 여기고 자기 마음대로 바꾸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가끔은 사제는 권위적이어야 한다고 여기며 봉사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만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결단력 있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습은 신자들에게 보기도 안 좋고 결단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결단력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한 집에 들어가 그 한 집에서 머물 줄 아는 사람이 결단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 결단력으로 이런 행동도 보입니다.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마르 6,11)

가족은 ‘피’로 구성됩니다. 당연히 하느님 가족의 피와 같은 성령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은 가족일 수 없지 않습니까? 가족에는 분명한 선이 있어야 합니다. 분명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라는 울타리가 없는 가족은 없습니다. 따라서 가족을 위하는 사람은 가족에게 조금이라도 피해가 가는 상황이 되면 가차 없습니다. 

어떤 자매는 혼기가 차서 주위에서 맞선을 보라는 청이 많았습니다. 몇 번 만난 사람과 결혼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주위 사람들의 청을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맞선을 보았습니다. 볼 때마다 그녀는 남자가 마음에 안 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더는 물러설 수 없는 나이가 되자 괜찮다고 여겨지는 남자와 사귀어보기로 하였습니다. 사귀다 보니 가끔 폭력적이고 괴팍한 성격이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여자는 헤어지자고 했지만, 남자가 무릎 꿇고 사정하는 바람에 남자를 버릴 수 없었습니다. 

결국엔 결혼하여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러자 본격적으로 남자의 성격이 드러났습니다. 아기를 안아주지도 않고 아내를 본 척도 안 했습니다. 아내는 헤어지자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예상했다는 듯이 이미 아내 명의로 되어있는 집을 팔아버린 상태였고 아내는 아이와 함께 어머니 집으로 돌아왔는데 남편에게 양육비 한 푼 받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실제 사례입니다. 

위 자매는 헤어지자는 말을 자주 하고 이혼하자는 말을 자주 하였습니다. 결단력이 있는 사람일까요? 진짜 결단력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에 책임을 질 것입니다. 오히려 결단력이 부족한 사람이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집니다. 

제가 오산성당에 부임했을 때 이미 사목회가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전 주임 신부님이 새롭게 구성해 놓은 지 얼마 안 된 상태였습니다. 그분들은 단체로 일괄사표를 내며 저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하였습니다. 저는 그분들을 한 분도 빠짐없이 그대로 재임명하였습니다. 전임 신부님이 해 놓으신 것도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람들이라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은 정말 열심히 사목을 도와주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사랑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을 전하는 언제든 나를 자를 수 있는 칼을 들고 있다면 어떨까요? 사랑을 전하고 사랑을 받기는 틀린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 정해진 봉사자는 그 사람이 가리옷 유다처럼 행동한다고 하더라도 끝까지 책임지는 것이 더 좋은 결과를 냅니다. 한 집을 선택하여 머물면 그곳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만 머물러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 하게 하는 주님의 명령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2018년, 69세의 어떤 네덜란드인이 국가를 상대로 소송한 것이 화제입니다. 서류상의 나이를 고쳐 달라는 소송이었습니다. 자기 신체 나이는 훨씬 젊은데 서류상의 나이가 많아서 일과 연애에서 차별받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별것이 다 소송 거리가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젊었을 때는 나이 들기를 원하고 늙어서는 젊어지길 원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즉, 남의 떡이 늘 커다랗게 보이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지금의 나를 왜 인정하지 못할까요? 지금 현재 최고의 ‘나’를 살고 있음을 왜 깨닫지 못할까요? 
 
젊음은 젊은 대로, 늙음은 늙은 대로 받아들이고 그 순간을 사는 최고의 나를 만들어야 합니다. 단순하게 서류상의 나이를 고치는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 최고의 ‘나’를 살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기에 우리는 늘 걱정합니다. 나이를 들어 걱정하고, 돈이 없어 걱정하고, 출세하지 못해 걱정하고, 부모와 자식 걱정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그 밖의 많은 걱정이 지금의 ‘나’를 별 볼 일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늘 지금의 자리에서 최고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렇게 살지 않은 ‘나’의 의지 때문에 주님의 선물을 발견하지 못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하지만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심지어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어도 옷은 두 벌 껴입지 말라고 이르십니다. 우리가 짧게 여행해도 챙겨야 할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중대한 임무를 주시면서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 하게 하는 주님의 명령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아무것도 없이 떠나는 제자들이 걱정되지 않으실까요? 
 
사실은 걱정을 없애기 위한 주님의 명령이 아닐까 싶습니다. 빵, 여행 보따리, 그리고 돈을 가져가다가 혹시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강도를 만나 뺏기지 않겠냐는 걱정 자체를 없애는 말씀이었습니다. 대신 오로지 하느님 일만 생각하라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그 결과는 회개의 선포와 더불어 마귀를 쫓아내고 병을 고쳐 주는 놀라운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공적인 전교 여행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다윗왕도 자기 죽음을 걱정하는 솔로몬 왕에게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간다. 너는 사나이답게 힘을 내어라.”(1열왕 2,2)라고 말하지요. 
 
세상의 걱정보다 하느님의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세상의 것은 가지고 있으면 걱정이 계속되지만, 하느님의 일을 하면 걱정보다 큰 기쁨을 얻게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나는 사랑에 환상을 갖지 말고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완벽하게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 고든 리빙스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마르 6,7)

 

망설임을 치유하는 파견이 있다. 가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수고로움의 신비이다. 파견이 교회의 참된 기초가 된다. 제자들은 비로소 파견하신 주님의 마음을 알게된다. 

떠나보내야 풍요로워지는 복음의 관계이다. 우리또한 실천하는 행동을 통해 우리의 믿음은 점점 깊어진다. 부르심과 파견은 하나이다. 파견을 통해 버려야 할 것을 다시 깨닫게 된다. 

누군가를 돕는 사람은 먼저 자기 것을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이다. 주님께서는 버리고 내려놓음에 동참하도록 제자들을 파견하신다. 복음의 방식은 떠나보내는 은총의 방식이다. 

은총은 제자들이 가야할 길을 일깨워준다. 제자들에겐 제자들의 길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다. 참된 믿음은 참된 행위를 필요로 한다. 날마다 새로워지는 믿음의 여정이다. 

파견된 자리 소임의 자리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주님의 사랑이다. 회개와 복음 부르심과 파견 신앙고백과 실천은 하나의 믿음이다. 주님의 간절한 뜻은 주님을 믿고 우리의 자아를 내려놓는 것이다. 

복음선포는 파견된 제자들을 먼저 변화시키는 가장 큰 은총이 되었다. 합당하신 주님의 계획이다. 주님의 뜻에 진심으로 순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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