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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3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4주일 -
2022년 1월 30일 (일) 연중 제4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자신을 민족들의 예언자로 세우시어 온 땅에 맞서게 하셨다고 합니다.
✠ 오늘 제2독서
바오로 사도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되는데,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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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예레 1장 4-5절, 17-19절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
요시야 시대에
4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5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
17
그러므로 이제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그랬다가는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떨게 할 것이다.
18
오늘 내가 너를 요새 성읍으로, 쇠기둥과 청동 벽으로 만들어 온 땅에 맞서게 하고, 유다의 임금들과 대신들과 사제들과 나라 백성에게 맞서게 하겠다.
19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화답송
주님,
제 입은 당신 구원의 행적을
이야기하리이다.
주님, 제가 당신께 피신하오니,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 의로움으로 저를 건져 구하소서. 제게 귀를 기울이소서, 저를 구원하소서. 주님, 제 입은 당신 구원의 행적을 이야기하리이다.
이 몸 보호할 반석 되시고, 저를 구할 산성 되소서. 당신은 저의 바위, 저의 보루시옵니다. 저의 하느님, 악인의 손에서, 저를 구원하소서. 주님, 제 입은 당신 구원의 행적을 이야기하리이다.
주 하느님, 당신은 저의 희망, 어릴 적부터 당신만을 믿었나이다. 저는 태중에서부터 당신께 의지해 왔나이다. 어미 배 속에서부터 당신은 저의 보호자시옵니다. 주님, 제 입은 당신 구원의 행적을 이야기하리이다.
당신 의로움, 당신 구원의 행적을, 저의 입은 온종일 이야기하리이다. 하느님, 당신은 저를 어릴 때부터 가르치셨고, 저는 이제껏 당신의 기적을 전하여 왔나이다. 주님, 제 입은 당신 구원의 행적을 이야기하리이다.
제2독서
코린 12장 31절, 13장 1-13절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형제 여러분,
31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내가 이제 여러분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 주겠습니다.
13,1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3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4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5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6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7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8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 예언도 없어지고 신령한 언어도 그치고 지식도 없어집니다.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10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은 없어집니다.
11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생각하고 아이처럼 헤아렸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 적의 것들을 그만두었습니다.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13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복음
루카 4장 21-30절
예수님께서는 엘리야와 엘리사처럼
유다인들에게만
파견되신 것이 아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21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22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23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할 것이다.”
24
그리고 계속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26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27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28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 소용이 없다며, 뛰어난 길을 가르쳐 주는 바오로 사도의 사랑의 찬가를 새겨 봅시다.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가 구원의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영원한 생명의 보증인 이 성사의 힘으로 저희 안에 참된 믿음이 자라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추성훈 바오로 신부 집전
2022년 1월 30일 (일)
추성훈 바오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1월 30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바로 오늘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
어떤 계획을 세우거나 무엇을 기다릴 때, 자주 함께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내일’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많은 사람이 ‘내일’에 대한 희망을 품고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그 ‘내일’이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의 인격 안에서 ‘오늘’이 됩니다. 가난한 이들과 잡혀간 이들, 눈먼 이들과 억압받는 이들에게 복음이 선포되고, 주님의 은혜로운 해가 시작되었습니다(루카 4,18-19 참조). 오랫동안 기다리고 희망한 메시아께서 우리 가운데에 계십니다.
그러나 모든 이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당신을 의심하고 거부하는 나자렛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구약 성경의 예를 드십니다. 사렙타의 과부도 시리아 사람 나아만도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만 은총을 베푸셨음을 상기시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화가 난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고, 벼랑으로 끌고 가 떨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당당하게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십니다. 오늘 제1독서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벼랑에서 떨어뜨리려는 나자렛 사람들의 행동은 그분의 십자가 죽음을,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그분의 부활을 예고하는 듯합니다.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끝이 아니라 승리임을 보여 주려는 복음사가의 의도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와 함께하시고, ‘오늘’ 우리에게 은총과 기쁨을 주십니다. 이천 년 전 선포된 은총의 시간, 기쁨의 시간이 오늘도 계속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성실하게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바로 ‘오늘’이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선물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하느님의 사람은
잘 아시다시피 예언자란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입니다. 하느님 백성을 위해 보내신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왜 보내시겠습니까? 안 보내셔도 당신 백성이 당신 원하시는 대로 잘살면 굳이 보내실 필요 없겠지요. 당신 백성이 당신 원하는 대로 살지 않으니 그것을 고치게 하려고 보내신 거지요.
그러니 예언자란 본래 환영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지만 고향 사람들에게는 더 환영을 받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본래 그런 것인데다가 주님은 오늘 한술 더 뜨십니다. 당신의 오심이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을 위한 거라고 하시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엘리야와 엘리사도 자기 민족에게는 보내지지 않고 이방인에게 보내졌다고 자극을 하십니다.
며칠 전 틱낙한 스님이 열반하셨는데 들리는 말에 의하면 돌아가시며 하신 말씀 중에 자기 조국 베트남이 여전히 가난한 것이 마음에 걸려서 하신 말씀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죽으면 무덤도, 탑도 짓지 말라. 우리 민족은 여전히 가난하다. 베트남인의 땅과 돈이 쓰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 말을 듣고 깊이 생각지 않았을 때는 그 대단하다는 분도 죽을 때가 되니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고, 자기 민족 걱정이나 하는구나,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진실을 믿는다면 그가 자기 민족만 사랑한 분은 아닐 것입니다. 자기 민족을 사랑하듯 모든 민족을 사랑했을 것이고, 적어도 자기 민족만 잘되고 다른 민족은 잘못되기를 바란 분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은 가난한 베트남뿐 아니라 모든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며 당신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틱낫한 스님도 그런 분이라면 예수님은 더더욱 자기 민족을 넘어 모든 민족을 사랑한 분이었고 오늘 예레미아도 하느님께서 자신을 민족들의 예언자로 세우셨다고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
그러나 민족들의 예언자는 자기 민족에게 배척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이 자기 만족만의 하느님이기를 그들이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이스라엘의 하느님이라고 하고 즈카르야의 찬가도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찬미받으소서"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하느님이라는 말이 틀린 말입니까? 맞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만의 하느님이라고 해도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그런데도 모든 민족의 하느님을 자기들만의 하느님이시기를 이스라엘이 바란다면 오늘 주님처럼 말씀하실 것이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분노하여 그런 주님을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질 때 곧 예언자가 주님처럼 예언을 하여 사람들이 죽이려고 들 때 쫄거나 떨지 말라고 오늘 예레미아서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그랬다가는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떨게 할 것이다."
하느님의 사람인 예언자들은 하느님 앞에 있어야지 사람들 앞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로 오늘 제게는 들립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성장이 멈추는 시기 :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이 멈출 때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심지어 죽임을 당할뻔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고 하시며 그들을 떠나가십니다. 이렇게 그들은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되는 자격을 스스로 포기하였습니다.
이들의 잘못은 ‘안다고 착각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교만이 모든 이들의 성장을 막습니다. 아이들은 언제 성장을 멈출까요? 자신들이 끊임없이 배워가야 하는 부모를 안다고 판단하게 될 때입니다.
자신을 그나마 가장 사랑할 수 있는 부모를 안다고 판단하면 다른 사람들은 뻔한 사람들이 됩니다. 이렇게 그들은 부모에게 상처받고 부모를 판단하고 거기서 성장을 멈추게 됩니다. 몸이 크지만 성장이 그 자리에서 멈추었기에 이런 이들을 ‘어른 아이’라고 부릅니다.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이란 프로에서 김창옥 강사가 소개한 어른 아이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김창옥 씨가 강사를 하던 초기에 한번은 매우 경직되어 보이는 한 여성이 찾아와서 사람들 앞에서 말을 잘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분은 매우 도도하면서도 얼어있었고 다 아는 것처럼 잘난 척하는 말투를 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김 강사가 한마디만 하면 울어버릴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분의 직업은 ‘심리치료사’였습니다. 그분이 오히려 심리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았습니다. 몇 주간의 대화 끝에 그 여성은 남편에게도 하지 않은 말을 하겠다고 하고 사람들 앞에서 감정을 억제해가며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사실 저는 제 안에 12살짜리 아이가 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잠실 쪽에 살았습니다. 제가 12살 때 남동생은 9살이었습니다. 꿈에 귀신이 좇아와서 저는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 못 하고 벌떡 일어나서 한강을 향해 뛰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귀신을 피해 한강에 빠졌지만, 허리춤까지 들어갔을 때 어머니가 잡아 끌어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해에 집안 식구들이 물놀이를 갔을 때 9살 남동생이 물에 빠져 익사하였습니다. 집안 분위기는 그 책임이 나 때문이라고 흐르기 시작했고, 저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동생 대신 개가 죽었어야 했는데….’”
이 사건 이후로 그녀의 성장은 12살로 멈추어버렸습니다. 김창옥 강사는 그 여성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지금 울음을 참고 있는데 울어야 합니다. 그리고 꼭 선생님 안에 있는 12살짜리 아이에게 이렇게 말해 주십시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리고 한 번 꼭 안아주십시오.”
며칠 뒤에 기분 좋은 목소리로 전화가 왔습니다. 좋은 일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젠 수영장에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른-아이’로 남아있게 되는 이유는 ‘성장의 기회’를 스스로, 혹은 상황 때문에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성장의 기회란 나보다 큰 사람을 탐험하며 알아가는 것입니다. 특별히 부모는 내가 태어나서 알아가는 가장 큰 세상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세상만 탐험하고 싶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알고 싶지 않습니다. 따라서 부모에 대한 사랑을 멈추게 될 때 아이는 성장도 멈춥니다.
위 여성은 결국 ‘부모나 모든 사람이 나를 안 좋은 아이로 판단하고 있어!’라고 판단해버린 것입니다. 내가 판단해버린다는 말은 그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미 규정하여 아는 것에 호기심을 갖고 탐험하며 알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때 부모는 끊임없이 아이를 사랑하여 ‘부모의 사랑은 어디까지일까?’라는 생각을 가지게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자신을 판단하는 것을 내버려 뒀고 아이는 더는 사랑하고 탐험할 미지의 세계가 남아 있지 않기에 성장을 멈춘 것입니다.
내가 판단하는 사람은 내와 아무리 오래 머물러도 나의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꾸준히 성장하는 사람은 매일 만나는 사람일지라도 절대 판단하거나 규정하지 않고 탐험할 미지의 세상으로 남겨놓습니다. 만약 사람이 판단이 된다면 사람이 되신 하느님, 곧 예수 그리스도는 미지의 세상으로 남겨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분의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그분을 탐험하며 배워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성장을 멈추게 하지 않습니다. 가리옷 유다가 성장하지 않기 위해 그리스도를 매일 이러저러한 사람이라고 자기 틀에 맞추어 규정했을 것을 생각하면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은 책과 같습니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그 책을 사는 것과 같습니다. 그 책이 내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쉽게 끝나는 사람들은 그 책의 내용을 다 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탐험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하지만 사랑이 오래가는 사람들은 상대를 끊임없이 탐험합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사람은 소우주이기 때문에 아무리 탐험해도 끝이 날 수 없습니다. 이 호기심이 나를 성장시킵니다.
영화 ‘이너스페이스’(1987)는 ‘정말 우리가 서로 잘 아는 걸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듭니다. 이 영화에서 조종사 터크는 열등아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의 여진 리디아는 찌질이 터크를 떠납니다.
터크가 참여하는 연구는 사람을 작게 만들어서 토끼 안에 들어가 그 안을 탐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기술을 노리는 사람들 때문에 작아진 우주선을 탄 터크는 자신보다 더 찌질이인 잭이라는 한 남자 안에 들어갑니다.
잭은 자신의 몸 안에서 우주선을 빼내려는 나쁜 무리에게 쫓기게 되고 여기서 리디아가 그를 도와줍니다. 리디아는 잭의 몸 안에 터크가 있음을 믿게 되고 키스합니다. 그런데 그 키스로 터크는 리디아의 몸 안으로 들어오게 되고, 그 안에서 자신과 리디아의 아이가 자라고 있음을 봅니다.
터크는 다시 잭의 몸 안에 들어와 그 안에 주입된 다른 악당을 물리치고 나와 커져서 리디아와 화해합니다. 리디아도 잭의 마음을 알고 둘은 결혼에 골인합니다. 찌질이 잭은 이 일로 자신도 무언가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음을 깨닫고는 탐정이 되어 자신 있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 간의 관계 안에서 성장합니다. 이 성장이 멈추는 순간은 내가 상대를 안다고 느낄 때입니다. 그러면 탐험을 하지 못하고 알아가지 못하고 선장이 멈춥니다. 적어도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에게는 그러지 말아야 합니다.
성장하고 싶다면 누구도 안다고 하지 맙시다. 나 자신도 다 모르는데 우리가 어떻게 남을 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오래 사귄 사람을 만나도 항상 탐험할 수 있는 미지의 대륙으로 여기고 알아간다는 마음으로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성장합니다.
나자렛 사람처럼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로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하느님의 걸작입니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면 세상 누구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을 완전히 알 수는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는 결국 부모를 알아가는 과정으로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아기를 잉태하였을 때 나를 잉태한 부모를 아는 순간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힘은 부모를 알아가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부모를 알고 싶지 않고 그러면 세상이 재미가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부모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을 더 알아갑니다. 상대 안에 있는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공기가 상대 안에도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빛이 상대 안에도 있습니다. 그것들을 발견하며 하느님을 더 알아갑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볼 수 있는 눈이 더 열릴 때 그분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우리 앞에 나타나십니다.
성장은 사람을 알려고 하는 마음이 멈출 때 멈춥니다. 그런데 사람을 알려고 하는 마음은 하느님을 알려고 하는 마음이 멈출 때 멈춥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신부님이 지난번 강론 때 해주신 말씀에 큰 힘이 되었어요..
“신부님이 지난번 강론 때 해주신 말씀에 큰 힘이 되었어요.”
어떤 자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계속 이야기하시는데, 무슨 말씀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어떤 말을 했다고 하는데, 처음 듣는 말처럼 낯설기만 한 것입니다. 이번 딱 한 번만 그랬을까요? 이런 경우가 너무 많아서 이제는 “그렇군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드립니다. 기억도 하지 못하면서 말이지요. 그런데 저만 그런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선배 신부님과 대화를 나누다가, 신학교에 함께 다닐 때의 선배님 모습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모습이 너무 멋있었다면서, 앞으로도 그런 멋진 모습을 보여달라고 했지요. 하지만 선배 신부님은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진짜로 그랬어?”라면서 남 이야기하듯 말씀하십니다.
과거는 낯선 나라입니다. 내가 살았던 과거이지만 분명히 낯설 수밖에 없습니다. 100% 기억하지 못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에 따라 진실이 왜곡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낯선 나라에 연연할 필요가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제는 나의 나라가 아니기에, 이 나라에서 벗어나 진짜 지금의 내 나라에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과거라는 낯선 나라만을 떠올리면서 지금의 나의 나라라고 착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다른 이에게도 과거라는 낯선 나라를 들이대면서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 등지에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시며 많은 기적을 나타내 보이신 다음, 고향 땅 나자렛으로 가십니다. 그런데 고향 사람들의 반응이 그렇게 좋지 않습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라면서 시기심에서 나오는 언짢은 반응을 보입니다.
이런 반대 기운을 알아차리신 예수님께서는 악의에 찬 불신자들은 구원받지 못하고 오히려 믿는 이방인들이 구원의 은혜를 받을 것임을 선언하십니다. 이 점을 알리려고 구약시대에 예언자 엘리야와 엘리사가 박해하는 이스라엘을 버려두고 이방인의 땅에서 고생하는 사렙타의 과부를 찾아가 기적으로 도와준 일과, 예언자 엘리사도 이방인 나병 환자 나아만을 고쳐 준 사실을 예로 듭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사람들에게 기적을 베푸실 수 없었던 것은 믿지 않는 그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 수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과거의 모습에만 매여 있기에 예수님께 믿음을 두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구원의 손은 온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뻗쳐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과거라는 낯선 나라에 속해있는 사람이 아니라, 희망이라는 미래를 향하는 ‘지금’이라는 나라에 충실한 사람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만의 거울을 갖고 있다. 그 거울은 타인 속에 있어서 자신의 죄악과 결점을 똑똑히 비춰준다. 그런데 우리는 대개 이 거울에 개처럼 반응한다. 거울에 비친 것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사납게 짖어대는 것이다.
- 쇼펜하우어
당신은 겸손하십니까?
어느 이혼 전문 변호사의 말입니다.
“이혼하는 부부들은 서로가 사실을 얘기한다고 하지만, 같은 사실을 두고도 해석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결국 진실을 알 수가 없어요.”
실제로도 그런 체험을 자주 하지 않습니까?
정년 퇴임 후 아내와 좋은 시간을 많이 만들려고 했지만, 아내가 자신과 함께하려 하지 않는다며 불평하는 형제님의 하소연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내인 자매님 역시 불평이 많았습니다. 남편이 집에만 있으면서 계속 잔소리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할 수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누구의 문제일까요? 서로가 자신을 상대방이 이해해줘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 한 문제의 해결은 있을 수 없습니다. 같은 사실을 두고 각자 자기 뜻과 관점에서만 생각하기 때문에 전혀 다른 진실을 볼 뿐입니다.
자의적 판단 자체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겸손의 시작입니다. 당신은 겸손하십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루카 4, 22)
고정관념의 반대쪽에 있는 사람의 아들 예수이다. 하나밖에 없는 목수의 아들 그 예수이다. 소중한 인격이 돌아가야 할 곳은 고정관념의 고향이 아니라 활짝 열려있는 복음의 고향이다. 사랑하고 존중받아야 할 저마다의 고유하고 소중한 역사이다.
사람은 고정관념을 먹고 살지 않는다. 사랑과 존중을 먹고 산다. 하느님 중심의 삶은 고정관념에 갇혀있지 않다. 넘어서야 할 선입견의 시각이다.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가능성의 미래이다. 차가운 고정관념은 가능성의 내일(來日)까지 얼게만든다.
사람을 침범하는 것은 사람이다. 하느님의 소중한 딸들이며 소중한 아들들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음을 건네신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복음이다. 복음을 벗어나면 고정관념으로 어두워진다.
고정관념에는 더이상 희망이 없다. 고정관념 그 차가운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는 것이 희망이다. 사람의 아들 예수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길을 걸어가신다. 길을 막지 말자.
고정관념의 중독을 치유하는 예수님의 희망, 복음이다. 복음을 기쁘게 선포하는 희망가득한 주님의 날 사랑이다. 사랑은 고정관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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