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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1월 28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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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2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2022년 1월 28일 금요일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1225년 무렵 이탈리아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몬테카시노 수도원과 나폴리 대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성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여 대 알베르토 성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1245년부터 파리에서 공부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3년 뒤 독일 쾰른에서 사제품을 받고 그곳 신학교의 교수로 활동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철학과 신학에 관한 훌륭한 저서를 많이 남겼는데, 특히 <신학 대전>은 그의 기념비적인 저술로 꼽힙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1274년에 선종하였으며 1323년에 시성되었습니다.

 

 

✠ 오늘 제1독서

 

다윗은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가장 위험한 곳으로 보내어 죽게 만듭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땅에 뿌려진 씨가 아무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도 자라고 열매를 맺어 수확할 수 있는 것에 비길 수 있다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월 28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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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2사무 11장 1-4ㄱㄷ절, 5-10ㄱ절, 13-17절

 

너는 나를 무시하고,
우리야의 아내를 데려다가
네 아내로 삼았다.

 


해가 바뀌어 임금들이 출전하는 때가 되자, 다윗은 요압과 자기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을 내보냈다. 그들은 암몬 자손들을 무찌르고 라빠를 포위하였다. 그때 다윗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다. 


저녁때에 다윗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왕궁의 옥상을 거닐다가, 한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옥상에서 내려다보게 되었다. 그 여인은 매우 아름다웠다. 


다윗은 사람을 보내어 그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보았는데, 어떤 이가 “그 여자는 엘리암의 딸 밧 세바로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의 아내가 아닙니까?” 하였다. 


다윗은 사람을 보내어 그 여인을 데려왔다. 그 뒤 여인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 여인이 임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다윗에게 사람을 보내어, “제가 임신하였습니다.” 하고 알렸다. 


다윗은 요압에게 사람을 보내어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를 나에게 보내시오.” 하였다. 그래서 요압은 우리야를 다윗에게 보냈다. 


우리야가 다윗에게 오자, 그는 요압의 안부를 묻고 이어 군사들의 안부와 전선의 상황도 물었다. 


그러고 나서 다윗은 우리야에게, “집으로 내려가 그대의 발을 씻어라.” 하고 분부하였다. 우리야가 왕궁에서 나오는데 임금의 선물이 그를 뒤따랐다. 


그러나 우리야는 제 주군의 모든 부하들과 어울려 왕궁 문간에서 자고, 집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10 
사람들이 다윗에게 “우리야가 자기 집으로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하고 보고하자, 

13 
다윗이 그를 다시 불렀다. 우리야는 다윗 앞에서 먹고 마셨는데, 다윗이 그를 취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저녁이 되자 우리야는 밖으로 나가 제 주군의 부하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고, 자기 집으로는 내려가지 않았다. 

14 
다음 날 아침, 다윗은 요압에게 편지를 써서 우리야의 손에 들려 보냈다. 

15 
다윗은 편지에 이렇게 썼다. “우리야를 전투가 가장 심한 곳 정면에 배치했다가, 그만 남겨 두고 후퇴하여 그가 칼에 맞아 죽게 하여라.” 

16 
그리하여 요압은 성읍을 포위하고 있다가, 자기가 보기에 강력한 적군이 있는 곳으로 우리야를 보냈다. 

17 
그러자 그 성읍 사람들이 나와 요압과 싸웠다. 군사들 가운데 다윗의 부하 몇 명이 쓰러지고,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도 죽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 당신께 죄를 지었사오니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느님, 당신 자애로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크신 자비로 저의 죄악을 없애 주소서. 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 잘못을 깨끗이 지워 주소서. 주님, 당신께 죄를 지었사오니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제 죄악을 제가 알고 있사오며, 제 잘못이 언제나 제 앞에 있나이다.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 잘못을 저지르고, 당신 눈앞에서 악한 짓을 하였나이다. 주님, 당신께 죄를 지었사오니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판결을 내리셔도 당신은 의로우시고, 심판을 내리셔도 당신은 떳떳하시리이다. 보소서, 저는 죄 중에 태어났고, 허물 중에 제 어미가 저를 배었나이다. 주님, 당신께 죄를 지었사오니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기쁨과 즐거움을 맛보게 하소서. 당신이 부수신 뼈들이 춤을 추리이다. 저의 허물에서 당신 얼굴을 돌리시고, 저의 모든 죄를 없애 주소서. 주님, 당신께 죄를 지었사오니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르 4장 26-34절

 

씨를 뿌리고
자는 사이에 씨는 자라는데,
그 사람은 모른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26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27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28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29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30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31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32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34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살아 있는 빵이신 그리스도의 성체로 저희의 힘을 북돋아 주시니 복된 토마스를 기리는 저희가 스승이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를 사랑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전진 도미니코 신부 집전

 

 

2022년 1월 28일 (금)
전진 도미니코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1월 28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오늘 복음은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전합니다.

씨는 사람이 뿌리지만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싹이 트고 자라서 저절로 열매를 맺습니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는 온전히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고 완성됩니다. 그렇다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시작과 완성이 전적으로 하느님께 달려 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겨자씨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가 작고 하찮은 것에서 시작하지만, 놀랍고 풍요로운 결과로 완성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인다는 말씀은 온 백성이 하느님 나라에서 평화롭게 지내는 모습을 표현합니다.

씨앗을 뿌리고 수확해 본 사람은 작은 씨앗 안에 깃든 가능성과 생명의 신비를 잘 압니다. 우리의 믿음이 지금은 부족해 보일지라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커다란 나무로 자랄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작은 씨앗인 우리를 싹트게 하시고, 가지를 뻗게 하시고, 열매를 맺게 하시는 그분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뿌리신 소중한 씨앗입니다. 흔들리는 믿음을 가진 나약한 존재이지만, 하느님 눈에는 큰 나무로 성장할 가능성을 지닌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 소중합니다.

“당신께서 원하지 않으셨다면 무엇이 존속할 수 있었으며 당신께서 부르지 않으셨다면 무엇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겠습니까?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기에 당신께서는 모두 소중히 여기십니다.” (지혜 11,25-26)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씨앗은 뿌려야지.

 

오늘은 독서와 복음을 조금씩 묵상하고 나누는 것으로 나눔을 대신하겠습니다. 오늘 독서은 다윗이 간음하고 살인죄까지 저지르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올해는 다른 얘기는 눈에 안 들어오고 다음 구절만 눈에 들어왔습니다. 

"해가 바뀌어 임금들이 출전하는 때가 되자, 다윗은 사람을 보내어 그 여인을 데려왔다. 그런데 그 여인이 임신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부하들은 전쟁에 나가 싸우고 죽고 하는데 왕이라는 자는 마음 편히 있고 간음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제게는 이렇게 아프게 다가옵니다. 제 주변에 많은 분이 참으로 아프고 고통스러운데 저는 아프지도 않고 행복하고 더 나아가 천역덕스럽게 먹고 즐기는지. 그러면서 기도 조금 해주는 것으로 할 바 다했다고 하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인간은 결국 이런 것인지. 인간의 사랑이라는 것도 고작 이 정도인지. 이러고도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인지. 

다음으로 복음을 묵상했는데 복음도 다른 구절은 안 들어오고 다음 구절만 눈에 들어왔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이 말씀 중에서도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리면'이라는 말과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는 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사람이 씨를 뿌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되고, 씨를 뿌리지 않는다면 시작부터 되지 않는 것인데 어떤 사람이 씨를 뿌리고 어떤 사람이 뿌리지 않을까요? 

그리고 더 중요한 문제 '나는 씨를 뿌리는 사람인가?‘ 씨를 뿌리긴 하는데 그것이 하느님 나라의 씨인가 다른 나라의 씨인가?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씨앗과 다른 나라의 씨앗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제 생각에 씨앗에는 선과 사랑의 씨앗과 악과 미움의 씨앗이 있는데 하느님 나라의 씨앗이란 말할 것도 없이 사랑과 선의 씨앗이며 우리가 뿌려야 할 씨앗은 선과 사랑의 씨앗입니다. 

다음으로 제가 묵상한 것은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앞의 말과 연결하면 내가 비록 사랑의 결실을 거둘 자신도 없고, 어떻게 거두는지 모를지라도 사랑의 의도만 가지고 씨를 뿌려도 된다는 뜻입니다. 참 위안이 되는 말씀이고 그래서 우리는 사랑의 용기를 내고 씨를 뿌려도 됩니다. 

그렇지만 조심스러워지는 것은 선과 사랑의 씨앗을 뿌린다고 하는데 밀밭에 가라지가 자라듯 우리는 의도하지 않게 다른 씨를 뿌리곤 하는 점입니다. 

며칠 전에 동장님과 동사무소 직원들을 콩나물 밥집에 초대하여 저희가 하고 있는 사업을 소개도 하고 어떻게 하면 지역 사회의 어려운 분들을 도울까 의논을 하였는데 그분들이 어려움에 대해 얘기할 때 또 제 특기인 교만한 말을 훈수 두듯이 하였습니다. 

일을 하는 과정에 내가 겪는 어려움이 그분들이 처한 어려움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그분들의 어려움보다 나의 어려움을 더 생각하기에 주저하게 되지요. 그래서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사랑 실천을 멈추지 말자고 한 말이지만 뼛속까지 배어있는 교만이 또 튀어나온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사막이 에덴이 되려면 믿음의 나무 한 그루부터 심기 시작하는 수밖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는 우리 안에서 저절로 자라난다는 뜻으로 씨가 땅에 떨어져 나무가 되고 열매를 맺는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씨 뿌리는 농부의 비유’와 이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뜻이 그 땅에 떨어져 죽을 수도 있고 자라나 열매를 맺을 수도 있습니다. 이 선택은 땅에 달려있습니다. 땅이 그 뜻을 받아들인다면 저절로 열매를 맺어 마치 작은 겨자씨가 자라나 큰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깃들일 수 있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 뜻이란 “서로 사랑하라”라는 하느님의 계명입니다. 

이렇게 그 뜻을 따르기만 하면 분명 좋은 사람들과 사귐이 일어나 행복한 하느님 나라가 이뤄지는데도, 세상 사람 대부분은 왜 이것을 믿지 않고 서로 미워하고 불목할까요? 왜 단 한 번이라도 이 계명을 끝까지 믿어보지 못할까요? 그것은 그 사람들 안에 ‘그걸 믿어서 뭐가 좋은데?’라는 의문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장 경쟁에서 이기고 원한을 갚고 보복하는 것이 즐겁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이 맞는다면 용서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그 땅은 나무가 하나도 없는 사막처럼 됩니다. 새들도 없고 짐승도 없습니다. 외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삶은 지옥입니다. 

‘악마를 보았다’(2001)라는 영화는 매우 잔인해서 보시라고 추천해 드릴 수는 없는 요즘 같으면 절대 안 볼 그런 영화입니다. 줄거리는 자신의 약혼녀가 살해된 것을 알게 된 수현이 살인자 장경철을 어떻게 하면 가장 고통스럽고 잔인하게 복수할까만을 생각하며 둘이 대결하는 내용입니다. 수현의 이 복수심 때문에 애꿎은 많은 사람이 희생당합니다. 결국에 가장 잔혹하게 복수는 하지만 장경철은 고통을 모르는 사이코패스였습니다. 고통스럽게 보복을 하려 했는데 하나도 고통스러워하지 않는 그 모습을 보며 복수를 한 수현은 복수의 쾌감이 아니라 뭔지 모를 공허감으로 울부짖습니다. 이것이 끝입니다. 

복수해서 누군가를 죽이면 속이 후련할까요? 나도 살인자가 되는 것일 뿐 나의 고통이 그 사람에게 복수하지 못해서 오는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새로운 고통이 시작됩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말은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악마와 같은 존재들을 어떻게 용서하고 사랑하느냐고 할 수 있지만 분명 그런 길을 택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유영철 연쇄살인범에게 가족을 잃은 고정원 루치아노 씨입니다. 이분은 유영철에게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아들까지 잃었지만 그를 용서했고 그를 양자로 받아들였습니다. 이 말을 듣자 유영철의 피해자 가족들은 들고일어났습니다. 어떻게 그런 인간을 용서하느냐고 합니다. 하지만 용서하지 못한 그들은 대부분 자살을 하거나, 알코올 중독, 혹은 우울증 등으로 가정이 파탄 났습니다. 

사람들은 왜 믿느냐고 말합니다. 왜 믿는지에 대한 증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아서 행복한 사람들, 곧 용서하고 복수해서 행복한 사람, 단 한 사람만 있다면 저의 믿음은 흔들릴 것입니다.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막에 나무를 심어서 그 사막이 정원이 되게 하는 행복을 누리는 이들은 많습니다. 

“모래밖에 없던 사막에, 스무 살 처녀가 가서,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막에는 이제 숲이 생겼습니다.”

동화에나 나올 듯한 이 이야기는 중국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사건입니다. 황사의 진원지라고 알려진 중국 네이멍구의 마오우쑤 사막. 그곳에서 20년 넘게 나무를 심어 거대한 숲을 일군 여인 인위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때 푸른 초원이었던 마오우쑤는 무차별 벌목과 양 떼로 인해 사막으로 변했습니다. 거기다 기온 상승까지 겹쳐 사막화는 더욱 빠르게 진행됐습니다. 

때때로 불어오는 모래바람에 숨이 막혀 사람이 살기조차 힘들어 보이는 이곳에서 1985년 당시 20대 청년 바이완샹은 혼자 살고 있었습니다. 친구와 친척들이 사막에 지쳐 떠나갈 때도 겁 많던 그는 외지에서 먹고 살길이 막막하다는 이유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때 갓 스무살이던 인위쩐은 그런 바이완샹에게 시집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우연히 알게 된 바이완샹의 부모에게 “딸을 시집보내겠노라”라고 약속을 했다는 사실은 이미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사막에 온 지 한참이 지나서였습니다.

사방에는 모래뿐이고 길조차 없는 사막에서 몇 날 며칠을 통곡으로 보낸 인위쩐은 그를 지켜보던 바이완샹이 따라 우는 모습을 보고 점차 원망이 연민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희망의 말을 먼저 건넨 쪽은 인위쩐이었습니다. 

“여기에 꽃을 심으면 안 될까요? 꽃이나 나무가 자라면 여기도 사람 사는 곳 같지 않을까요?”

그녀는 생각했습니다. 

‘그래, 내가 빠져나갈 수 없다면 차라리 이곳을 살 만한 땅으로 만들자. 모래를 퍼먹고 살 수는 없잖아?’

그때부터 인위쩐의 눈물겨운 노력이 시작됐습니다. 새벽 3시에 집을 나서 70리 길을 걸어가 도착한 묘목상에서 종일 일한 대가로 얻은 백양나무 묘목 30그루를 삽니다. 그 묘목을 업고 다시 돌아와 나무를 심었습니다. 나무에 준 물이 단 한 방울이라도 옆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모래를 쓸어 올려 둥그렇게 둑을 만드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모래 위에서 버티던 나무들은 며칠 뒤 모래바람에 전멸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인위쩐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임업국에 약간의 임차료를 내고 얻은 넓은 사막 땅에 그녀는 다시 600그루를 심었고 그중 200그루가 살아났습니다. 두 사람의 손으로 직접 만든 4㎞의 울타리와 7㎞의 용수로가 나무를 살린 것입니다. 

자신감을 얻은 인위쩐은 이후 죽기 살기로 나무 심기에 매달렸습니다. 과도한 작업량으로 인해 첫 아이를 조산하고, 둘째 아이를 유산하기까지 했지만 인위쩐은 “10년 안에 눈앞의 모든 모래 언덕을 숲으로 만들겠다”라는 집념 하나로 나무 심기를 계속했습니다.

실패를 반복하기를 7여 년. 마침내 인위쩐은 사막에 나무를 심는 방법을 알아냈습니다. 그것은 바람의 방향을 읽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로 사막을 살리는 속도가 훨씬 빨라지고 조림 성공률도 80~90%까지 높아졌습니다. 나무가 살 수 있는 토양을 만들기 위해 지문이 닳도록 풀씨를 털어내 자루에 담아 모아 모래에 풀씨를 흩뿌리기도 했습니다. 풀씨가 뿌리를 내리고 살아날 확률은 만분의 일, 10만분의 일에 가까웠지만, 군데군데서 가는 싹들이 돋아났습니다.

살림도 조금씩 불어났습니다. 학교도 다니지 않았던 인위쩐은 “나무가 살 수 있으면 채소도 살 수 있다. 채소가 살면 사람도 산다”라는 생활의 철학으로 밭을 일구고 채소도 가꿨으며 닭, 돼지, 양도 한 마리씩 불려갔습니다. 

버려졌던 땅에 숲이 생기고, 길이 뚫리고, 우물이 생기고, 전기가 들어오는 것을 본 인위쩐과 바이완샹의 친척들도 하나둘 그녀를 도우러 사막으로 들어왔습니다. 풀조차 살기 힘들던 징베이탕에서 80여 명이 일하여 2012년 한 해 옥수수를 재배한 면적이 4000평이었으며 같은 해 참마 5000㎏, 메밀 1500㎏, 녹두 3000㎏을 거둬들였습니다.

20년 전 사막에 남겨진 뒤 1주일간 먹지도 않고 펑펑 울었던 여자. 그리고 정부의 지원금 한 푼 없이 사막 1400만 평을 오아시스로 만든 질기고도 강한 여자 인위쩐. 그리고 그는 오늘도 풀씨자루를 들고 아직도 모래로 덮여 있는 사막을 찾아가 풀씨를 뿌린다. 이제 사막은 그에게 황금빛 미래를 약속하는 기회의 땅이다.

[출처: ‘사막을 숲으로 바꾼 질긴 여자’, 강미현 기자, 프레시안, 2006.10.20]

‘사랑하지 않으면 죽는다’라는 진리를 안 믿어도 행복한 사람 한 사람만 보여주십시오. 이것은 마치 사막에 나무를 심지 않아도 정원이 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사막이 정원이 되려면 나무를 한 그루 심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지금 사막이고 씨앗이 주어졌습니다. 이제 물을 주고 벌레를 잡아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내 마음이 정원이 되어 많은 이들이 쉴 수 있는 곳이 됩니다. 용서와 사랑의 나무를 한 그루, 한 그루 심읍시다. 그러면 모든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그 상처를 기억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미 내가 사막에서 정원으로 바뀌었기 때문이고, 많은 이들이 내 안에 살아서 그저 행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하느님 말씀이 열매 맺기를 기다리는 사람이라면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정년 퇴임을 한 어떤 형제님의 말씀입니다. 직장생활하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온종일 집에 있다 보니 아내의 잔소리에 너무나 힘들다는 것입니다. 집에서 아내와의 행복한 일상을 꿈꿨는데, 아내는 자신을 짐짝 취급하는 것 같다고 하소연하십니다. 
 
하루의 많은 시간을 직장에 있다가 집에 오는 남편을 맞이했던 아내였지요. 그렇게 거의 30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온종일 남편과 함께 있으니 얼마나 혼란스럽고 힘들겠습니까? 하지만 남편은 전과 다른 모습만 바라보면서 아내에 대한 원망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이 형제님께서 얼마 뒤에 저를 찾아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신부님, 어느 책에서 보았는데 부인에게 잔소리를 많이 듣는 남편일수록 당뇨 발병 위험이 낮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부인의 잔소리가 남편을 돌보는 역할도 한데요. 아내의 잔소리를 저의 건강을 위한 영양제로 생각하니까 이제는 그렇게 힘들지 않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상황 자체가 달라집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좋은 쪽이 아닌, 나쁜 쪽으로 생각합니다. 내 탓이 아닌, 남 탓을 말합니다. 긍정적인 마음이 아닌 부정적인 마음을 채우는데 너무나 많은 시간을 소비합니다. 그런데 좋은 마음, 긍정적인 마음을 갑작스럽게 바꿀 수가 있을까요? 이는 단 한 번의 노력이 아닌, 계속된 노력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자라는 씨의 비유를 이야기해 주십니다. 농부가 밤에는 자고 낮이 되면 일어나고 하는 일상생활을 하는 동안 씨앗은 싹이 트고 자랍니다. 농부는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는지 모르지요. 그러나 땅은 저 혼자서 줄기를 자라게 하고 이삭을 패게 하며 낟알을 맺게 합니다. 결국 곡식이 익으면 농부는 바로 낫을 댑니다. 추수할 것이 무르익었기 때문입니다. 
 
농부는 씨를 뿌려 놓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다가 곡식이 무르익었을 때 추수를 거둬들이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실 조금 당황스럽습니다. 씨를 뿌려 놓고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농부가 있을까요? 그러나 주님께 실제의 모습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는 부분에 초점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하느님의 말씀을 키우는 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말씀이 열매를 맺을 때까지는 기다려야 합니다. 물을 막 퍼주고 햇볕만 쬔다고 열매가 빨리 열리지 않습니다. 법석을 떨면서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열매가 맺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성령의 움직임에 인간의 노력이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단 한 번의 노력보다 계속된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느님 말씀이 열매 맺기를 기다리는 사람이라면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새로운 시간 속에서 새로운 마음을 담아야 한다.

- 아우구스티누스

 

 

시간

 

18세기 프랑스 계몽사상가 볼테르는 사람들에게 이런 수수께끼를 냈습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도 답을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길지만 짧고, 가장 빠르지만 느리고, 나뉘어 있지만 가장 크며, 가장 무시당하지만 가장 사람을 안타깝게 만들며, 이것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모든 작은 것들을 사라지게 하고, 모든 위대한 것들이 계속 살아있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정답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장 긴 것은 시간입니다. 무궁무진하기 때문이죠. 가장 짧은 것도 시간입니다. 많은 계획이 시간이 부족해서 실현되지 못하기 때문이죠.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시간이 가장 느리게 가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고, 즐거운 사람에게는 시간이 너무 빠르게 갈 것입니다. 시간은 무한히 발전할 수 있고, 또 끝없이 나눠질 수 있습니다. 현재에 있으면 누구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지만, 나중에는 시간이 지나간 것에 안타까움을 표합니다. 시간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지요. 후세가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잊히고 위대한 업적은 시간이 지나도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았다. (마르 4, 26)

 

씨 뿌리는 사람을 우리는 몰라본다. 씨 뿌리는 사람은 예수님이시다. 씨앗이 땅을 향하듯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향해 오신다. 우리의 땅에 씨앗이 떨어졌다. 감사하고 기뻐할 선물이다. 

씨앗은 땅을 맞이하고 땅은 씨앗을 맞이한다. 사람은 사람의 아들같이 복음의 씨를 뿌려야한다. 기쁜소식은 씨를 뿌리는 적극적인 실천에서 비롯된다. 우리를 신뢰하기에 예수님께서도 씨를 뿌리셨다. 

신뢰의 시간이 기다림과 사랑의 시간이다. 버려진 것이 아니라 뿌려진 것이다. 씨앗과 땅은 하나이다. 하느님이 없다면 우리도 없다. 예수님과 함께 자라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소식이다. 

기쁜소식이란 씨앗과 땅이 만나 하나가 되듯 예수님과 사람들이 만나 기뻐하고 춤추는 오늘 여기가 하느님 나라이다. 예수님과 함께 기쁘게 씨를 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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