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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1월 26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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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2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2022년 1월 26일 (수)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티모테오 성인과 티토 성인은 바오로 사도의 제자며 선교 활동의 협력자였습니다. 티모테오는 에페소 교회를, 티토는 크레타 교회를 맡아 돌보았다. 바오로 사도의 ‘티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서간, 둘째 서간’과 ‘티토에게 보낸 서간’에는 성직자와 신자들이 지켜야 할 지침에 도움이 되는 권고가 많이 담겨 있습니다.

 

 

✠ 오늘 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하며, 자신은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복음 선포의 임무를 맡았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고을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월 26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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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2티모 1,1-8

 

나는 그대 안에 있는
진실한 믿음을 기억합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바오로가, 


사랑하는 아들 티모테오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은총과 자비와 평화가 내리기를 빕니다. 


나는 밤낮으로 기도할 때마다 끊임없이 그대를 생각하면서, 내가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깨끗한 양심으로 섬기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나는 그대의 눈물을 생각하면서 그대를 다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게 된다면 내가 기쁨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나는 그대 안에 있는 진실한 믿음을 기억합니다. 먼저 그대의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에우니케에게 깃들어 있던 그 믿음이, 이제는 그대에게도 깃들어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한 까닭에 나는 그대에게 상기시킵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모든 민족들에게
주님의 기적을 전하여라.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주님께 노래하여라, 온 세상아. 주님께 노래하여라, 그 이름 찬미하여라. 모든 민족들에게 주님의 기적을 전하여라.

나날이 선포하여라, 그분의 구원을. 전하여라, 겨레들에게 그분의 영광을, 모든 민족들에게 그분의 기적을. 모든 민족들에게 주님의 기적을 전하여라.

주님께 드려라, 뭇 민족의 가문들아. 주님께 드려라, 영광과 권능을. 주님께 드려라, 그 이름의 영광을. 모든 민족들에게 주님의 기적을 전하여라.

겨레들에게 말하여라. “주님은 임금이시다. 누리는 정녕 굳게 세워져 흔들리지 않고, 그분은 민족들을 올바르게 심판하신다.” 모든 민족들에게 주님의 기적을 전하여라.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10장 1-9절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때에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 하느님, 거룩하신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복된 티모테오와 티토가 열성으로 전파하고 굳게 지킨 믿음을 저희가 더욱 풍성히 가꾸어 나가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안지헌 보니파시오 신부 집전

 

 

2022년 1월 26일 (수)
안지헌 보니파시오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1월 26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티모테오 성인과 티토 성인은 바오로 사도가 사랑한 제자들로, 사도의 선교 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협력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다음 날인 오늘 두 성인의 축일을 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명의 제자를 뽑으시어, 당신께서 몸소 가시려는 곳으로 둘씩 짝지어 보내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복음 선포로 하느님 나라에 모아들여야 할 온 세상 백성이 수확물에 비유됩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온 세상을 향하는 커다란 수확의 시작이었고, 이제 이를 함께할 일꾼들이 필요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 성인과 티토 성인을 각각 “사랑하는 아들”과 “착실한 아들”이라 부릅니다. 바오로 사도가 두 성인과 함께 펼쳤던 활발한 선교 활동에 잠시 머물러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가는 곳 어디에서나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마음으로 함께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환난도, 역경도, 박해도, 굶주림도, 헐벗음도, 위험도, 칼도, 그 무엇도 제자들의 복음 선포를 향한 열정을 막지 못하였을 것입니다(로마 8,35 참조).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복음 선포의 여정은 우리가 감히 상상도 못할 어려움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을 것입니다. 복음 선포를 위하여 파견되는 제자들은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으로 무장하여 온전히 자신들의 사명에 집중해야 합니다.

열두 제자, 일흔두 제자, 바오로, 티모테오, 티토를 비롯하여 수많은 이름 모를 제자가 흘린 땀과 피를 기억하며, 우리도 저마다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께서 주신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으로 복음 선포에 투신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기를 다짐합니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관계 성찰

 

어제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에 이어 오늘 디모테오와 디도 축일을 지내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 깊은 연관성이랄까 관계성 때문이지요. 두 분은 바오로 사도가 자기 아들이라고 부르는 개인적 친분의 관계일 뿐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도록 지역 교회의 책임자로 임명한 대리자들이요 동반자들이었지요.

 

이런 관계를 보면서 우리는 부러워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관계를 성찰해야 하기에 오늘은 저의 관계들을 성찰해봤습니다. 저의 관계들을 돌아보니 크게 네 가지입니다. 

첫째는 제일 안 좋은 관계들로 저와 아무런 접점이 없는 관계들입니다. 

성향이나 취향이나 관심사나 가치관 같은 것이 다르기에 아예 아무런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 경우이고 그래서 어찌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관계들입니다. 

그렇기에 어찌 보면 두 번째가 문제입니다. 

저의 인격적 결함과 일하는 방식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저와 얽히기를 거부하는 관계들입니다. 

저의 교만이나 독선이나 위선이나 권위주의적인 면 때문에 저와 얽히기를 거부하는 경우가 제일 쓰라린 경우이고, 제 옆에 있으면 찔릴까 봐 피하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세 번째 관계는 저를 지지하고 제가 하는 일을 후원하는 관계입니다. 앞서 봤듯이 제가 인격적인 면에서 결함이 많지만 제가 하는 일만은 좋게 보기에 지지하고 후원하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 관계는 제 옆에 있으면 데일까 봐 적당히 거리를 두는 관계들이지요. 이에 비해 네 번째는 데이고 고달파도 제가 하는 일을 함께 하는 관계들입니다. 

말하자면 동역자 관계들인데 이 동역자들은 저로 인해 찔리고 데일지라도 그럼에도불구하고 하느님 때문에 저와 함께하는 분들입니다. 

그러니 저로서는 너무도 고맙지만 그런데 고마운 데는 늘 미안함이 같이 있잖아요? 

특히 미안한 것은 제가 바오로 사도 같으면 동역자들이 받은 은사를 불태우도록 옆에서 그 불을 북돋아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점입니다. 

오늘 디모테오 후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라고 얘기하는데, 저는 저의 동역자들에게 그리하지 못하고, 스스로 힘을 내고 불사르라고만 하기에 저의 동역자들이 결국은 지쳐 나가떨어지게 하지는 않는지 걱정이 되고 미안한 것입니다. 

지금은 그런 소리를 많이 듣지 않지만 옛날에는 종종 제게 카리스마적이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우리가 진정 카리스마 곧 은사를 사는 사람이라면 바오로 사도처럼 자신도 하느님의 은사를 불태우고 그럼으로써 다른 사람도 은사를 불태우도록 같이 불을 살라야 함을 마음에 새기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하느님의 은사 불 붙이는 법 : 고통과 멸시의 부싯돌을 사용하라.

 

오늘은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입니다. 성 티모테오와 티토 주교는 성 바오로 사도가 ‘안수’를 통해 지명한 지역 주교들입니다. 안수는 자신이 받은 은사를 전해주는 교회의 오랜 전통적인 방법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2티모 1,6)

이 말씀은 ‘은사’는 내가 불태우려는 노력이 없으면 불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마치 자동차의 기름처럼 내가 시동을 걸고 달려야 불탑니다. 

사제들도 악령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은사를 잘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단은 그 은사를 받은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인데, 이는 그 은사를 사용해보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사목 서간을 통해 그 은사를 불태우는 방법을 이렇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2티모 1,8)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그분으로부터 받은 은사를 불태우는 방법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주님께서 자신에게 청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으실 때 “고통과 멸시를 주십시오”라고 청했다고 합니다. 이는 자신이 받은 은사를 무용지물이 되게 하지 않으려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청한 것과 같습니다. 

다윗이 형제 중에 선택되어 기름 부음을 받는 것은 은사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은사가 바로 발휘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울도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그는 그 은사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였습니다. 반면 다윗은 그 은사를 믿고 골리앗과 맞섰습니다. 그 무모한 도전이 은사에 불을 붙인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위해 우리 상황을 어려운 처지에 몰아넣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받은 은사에 불이 붙습니다. 머리에 부어진 기름이 십자가와 결합할 때 후광이 되는 것입니다. 

김경일 인지심리학 교수가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이런 실험을 많이 하였다고 합니다. 1반부터 4반까지 있는 평범한 아이들이 있는 초등학교 3학년 교실에 각기 30분씩 들어갑니다. 여러 도형이 15개 그려진 그림을 보여줍니다. 1반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얘들아, 너희는 이 도형 중 각자 5개씩 골라서 새롭고 신기한 것을 만들어봐라.”

그러면 아이들은 특이한 도형은 절대 고르지 않습니다. 감당이 안 될 것 같아서입니다. 남자아이들은 대부분 네모와 동그라미 등으로 기차나 자동차를 만듭니다. 여자아이들은 대부분 집을 만든다고 합니다. 이젠 2반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얘들아, 마음에 드는 도형 다섯 개 골라라.”

그러면 아이들은 특이한 도형들을 고릅니다. 그제야 이렇게 말해줍니다. 

“네가 고른 다섯 개로 새롭고 신기한 것을 만들어봐라.”

아이들은 난감한 표정을 짓습니다. 하지만 꽤 재미있고 신기한 것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이젠 3반에 들어갑니다. 거기서는 도형을 아예 안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새롭고 신기한 것을 만들려면 무엇을 만들래?”

지구 평화를 지키는 로봇, 남북통일을 시킬 수 있는 무기, 영원히 충전하지 않아도 되는 스마트폰 등 엄청난 것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제 서서히 도형들을 보여줍니다. 

“너희가 말한 것을 이 도형 중 다섯 개를 골라서 만들어봐라.”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다섯 개를 골라서 작업을 합니다. 4반에 들어가서는 마찬가지로 먼저 만들고 싶은 것을 정하게 하고 나중에 도형을 보여준 다음에 다섯 개를 고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합니다. 

“다 골랐으면, 옆 사람과 바꿔!”

경상도 학교에서 이 실험을 할 때 한 아이가 이렇게 질문했다고 합니다. 

“교수님, 이거 아동학대 아닙니까?”

결과는 평범한 3반과 4반 아이들이 만들어낸 것들이 우리나라 3학년 아이 중 세계 학생 창의력 올림피아드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아이들에게 같은 그림으로 만들라고 한 것보다 창의력 점수보다 2~3배 이상 나온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람은 상황이 어려워질수록 자신의 능력을 더 끌어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능력도 아드님이 돌아가실 때 가장 완전히 드러납니다. 십자가의 희생, 그것은 고통과 멸시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당신 사랑이 가장 완전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능력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우리 안에 내재하여 발휘되고 있지 못한 능력들은 가장 먼저는 능력이 있음을 믿지 못하고, 그다음은 우리가 우리 환경을 십자가의 고통과 멸시의 환경으로 만들지 못해서 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능력이 있고 그 능력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발휘된다는 것을 믿으면 못 할 것이 없게 됩니다. 그러니 자신을 어려움 속에 몰아넣을 수 있는 것도 능력입니다. 

슈퍼맨 영화에서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은 슈퍼맨이 한 인간 아버지의 아들로 살아갈 때는 큰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아버지가 토네이도에 날아가 사망하기 직전에도 아들은 자신의 정체를 들킬 수 없어서 지금까지 자신을 키워준 아버지가 죽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새로 태어납니다. 자신의 참 아버지, 곧 자신이 타고 온 우주선에 입력된 아버지의 말을 통해 진정한 슈퍼맨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배트맨도 부모의 죽음으로 탄생한 캐릭터입니다. 모든 히어로가 탄생하는 데 나의 상황을 어렵게 만드는 누군가의 죽음이 전제되지 않는 히어로는 하나도 없다시피랍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능력과 은사가 있어도 그것을 누르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바로 나를 지배하고 있는 나의 자아입니다. 그 자아가 지금까지 나를 지켜준 것은 고맙지만 이제 참 아버지의 능력이 발휘되게 하기 위해서는 자리를 비켜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아가 나 자신이기에 나 자신을 죽이는 고통을 감내하지 않고서는 세례 때 받은 아버지의 능력이 발휘될 수 없습니다. 애벌레가 나비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이전의 나를 죽이는 고치가 되는 작업을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가장 좋은 방법이 ‘고통과 멸시’를 즐기는 것입니다. 지금이 뭐 중세시대냐고 말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2티모 1,7)라고 말하며, 주님을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또 그분 때문에 감옥에서 고통당하는 자신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하며,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내 안의 은사가 어떻게 발휘되는지 명확히 안 것입니다. 

추워 얼어 죽어가고 있는 동굴에서 내가 누군가에게 기름을 받았습니다. 그 기름에 불을 붙이기 위해서는 부싯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 부싯돌을 십자가를 위한 ‘고통과 멸시’로 보아야 합니다. 이 두 부싯돌을 부딪치면 불꽃이 튀어 내 안의 은사에 불을 붙입니다. 그러면 교회에서 필요한 진정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일원으로 교회에 머물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복음 때문에 고난을 겪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맙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는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좇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옛날에 읽었던 동화책의 내용이 생각납니다. 어떤 임금이 있었는데 그에는 세속적인 쾌락에 빠져 사는 동생이 있었습니다. 임금은 동생에게 깨우침을 주기 위해, 자기 방에 왕이 입는 옷을 벗어 놓은 채 외출했습니다. 쾌락에 빠져 있던 동생은 형인 임금의 외출 소식을 듣고는 방에 들어가 임금의 옷을 입어봅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만약 임금이 되면 얼마나 즐거울까?’ 
 
왕의 옷을 입고 있을 때, 형이 갑자기 들어와서 외칩니다. 
 
“반역이다. 이 자를 체포해서 처형하라.” 
 
동생은 그냥 한 번 입어본 것이라면서 자비를 청했지요. 그러자 형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동생이니 특별히 배려해 주겠다. 네가 왕이 되고 싶었던 모양이니 앞으로 일주일 동안 왕의 모든 권한을 누릴 수 있도록 해주겠다. 그러나 일주일 뒤에 처형할 것이다.” 
 
일주일 뒤에 왕이 동생을 불러서 물었습니다. 
 
“일주일 동안 왕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었는데 즐거웠냐?” 
 
동생은 울면서, “곧 세상을 떠날 걸 알고 어떻게 즐거울 수 있겠습니까? 단 하루도 편하게 잘 수 없었습니다.”라면서 말했습니다. 왕은 웃으며 말합니다. 
 
“이제야 깨달았구나. 너는 반드시 세상을 떠난다. 일주일 후든, 7년 후든 아니면 70년 후든, 그걸 알면서도 어떻게 쾌락만 좇을 수 있겠느냐?” 
 
이처럼 우리는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좇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라고 하십니다. 수확이라는 이미지는 구약성경에서 세상 종말에 가서 하느님의 백성을 모아들이는 종말론적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전교 활동의 주의사항은 여행에 필요한 용품 등을 준비하여서 다니지 말라는 금지입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오로지 하느님 나라 전파에만 마음을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화를 빌어주고,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된 준비를 못 하는 우리입니다. 하느님께만 온전히 맡기는 삶이 아닌, 세상의 것이 자신의 생명을 지켜줄 것으로만 착각합니다. 
 
이제는 주님의 말씀에 충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유일한 준비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

- 키케로

 

 

젊게 살기

 

독일의 어느 대학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이런 실험을 했습니다. 학생들은 1분에 30걸음을 걷는 속도로 넓은 실험실 안을 걸어 다녀야 했습니다. 평소 속도의 1/3 속도였고, 나이가 많은 어르신들의 평균 속도였습니다. 
 
이 짧은 실험이 끝난 뒤 학생 참가자들은 ‘깜빡하다’, ‘늙다’, ‘외롭다’ 등 노인과 관련된 단어를 훨씬 빨리 알아본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노인을 생각하도록 촉발했던 행동이 노인과 연관된 단어에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실제로 노인의 생각과 행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젊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젊은 사람을 생각할 수 있는 생각부터 해야 합니다. 희망, 도전, 열정…. 반대로 늙게 살고자 한다면 절망, 좌절, 포기 등의 생각을 하면 될 것입니다. 
 
희망의 주님이라고 우리는 말합니다. 그렇다면 희망은 어떤 생각을 해야 발견할 수 있을까요? 젊은 생각을 해야지만 희망의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루카 10,2)

 

생명이 사는 곳에는 수확이 있다. 가야 할 길은 수확을 돕는 일꾼의 길이다. 일꾼의 자세를 배우는 여정이다. 일꾼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주님과 함께하는 일꾼의 여행이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사람도 집도 음식도 욕심내지 않는다. 

일꾼이 누구인지를 가르쳐주시는 수확할 밭의 주인이시다. 주님을 믿고 평화를 믿고 가까이 온 하느님 나라를 진실로 믿는다. 말 할 수 있는 것이 나눌 수 있는 참기쁨이다. 음식을 함께 나누고 병자들을 고쳐 주는 기쁨이다. 사람은 사람을 통하여 사람이 되어간다. 

사람의 참기쁨을 알게하시는 주님이시다. 사람을 치유하는 것은 사람이다. 행복은 가까이 있다. 사람이 행복이며 사람이 복음이다. 수확할 행복은 일꾼의 새로운 삶이다. 

설레는 새로운 여행이 오늘 다시 시작된다. 그 여행의 한 가운데 있는 평화이다. 먼저 평화를 빌고 평화를 나누는 수확의 첫시작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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