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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2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3주간 목요일 -
2022년 1월 27일 연중 제3주간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다윗은 주님께서 해 주신 일과 축복에 대하여 겸손한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등불은 등경 위에 올려놓듯 감추어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며, 되어 주는 만큼 되어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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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2사무 7장 18-19절, 24-29절
주 하느님,
제가 누구이며,
또 제 집안이 무엇이기에?
나탄이 다윗에게 말씀을 전한 뒤
18
다윗 임금이 주님 앞에 나아가 앉아 아뢰었다. “주 하느님, 제가 누구이기에, 또 제 집안이 무엇이기에, 당신께서 저를 여기까지 데려오셨습니까?
19
주 하느님, 당신 눈에는 이것도 부족하게 보이셨는지, 당신 종의 집안에 일어날 먼 장래의 일까지도 일러 주셨습니다. 주 하느님, 이 또한 사람들을 위한 가르침이 되기를 바랍니다.
24
또한 당신을 위하여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영원히 당신의 백성으로 튼튼하게 하시고, 주님, 당신 친히 그들의 하느님이 되셨습니다.
25
그러니 이제 주 하느님, 당신 종과 그 집안을 두고 하신 말씀을 영원히 변치 않게 하시고, 친히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 주십시오.
26
그러면 당신의 이름이 영원히 위대하게 되고, 사람들이 ‘만군의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시다.’ 하고 말할 것입니다. 또한 당신 종 다윗의 집안도 당신 앞에서 튼튼해질 것입니다.
27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당신께서는 당신 종의 귀를 열어 주시며, ‘내가 너에게서 한 집안을 세워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 종은 이런 기도를 당신께 드릴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28
이제 주 하느님, 당신은 하느님이시며 당신의 말씀은 참되십니다. 당신 종에게 이 좋은 일을 일러 주셨으니,
29
이제 당신 종의 집안에 기꺼이 복을 내리시어, 당신 앞에서 영원히 있게 해 주십시오. 주 하느님, 당신께서 말씀하셨으니, 당신 종의 집안은 영원히 당신의 복을 받을 것입니다.”
화답송
주 하느님은 그에게
조상 다윗의 왕좌를 주시리라.
주님, 다윗을 기억하소서. 그의 모든 노고를 잊지 마소서. 그가 어찌 주님께 맹세하고, 야곱의 장사 하느님께 서원하였는지 기억하소서. 주 하느님은 그에게 조상 다윗의 왕좌를 주시리라.
내 집 천막에 들지 않으리라. 내 방 침상에 오르지 않으리라. 이 눈에 잠도, 눈가에 졸음도 허락하지 않으리라. 내가 주님께 계실 곳을, 야곱의 장사 하느님께 거처를 찾아 드리리라. 주 하느님은 그에게 조상 다윗의 왕좌를 주시리라.
주님이 다윗에게 맹세하셨으니, 돌이키지 않으실 약속이로다. “나는 네가 낳은 아들을 너의 왕좌에 앉히리라.” 주 하느님은 그에게 조상 다윗의 왕좌를 주시리라.
너의 아들들이 내 계약을, 내가 가르치는 법을 지킨다면, 그들의 아들들도 길이길이, 너의 왕좌에 앉으리라. 주 하느님은 그에게 조상 다윗의 왕좌를 주시리라.
주님은 시온을 택하시고, 당신 처소로 삼으셨네. “이곳은 길이 쉴 나의 안식처, 내가 원하였으니 나 여기 머물리라.” 주 하느님은 그에게 조상 다윗의 왕좌를 주시리라.
복음
마르 4장 21-25절
등불은
등경 위에 놓는다.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을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21
말씀하셨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22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23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
24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25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전능하신 하느님, 성자의 살과 피로 저희를 기르시니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은총으로 저희가 언제나 기뻐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이현수 바오로 신부 집전
2022년 1월 27일 (목)
이현수 바오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1월 27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마르코 복음 4장은 네 개의 비유, 곧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등불의 비유’,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를 전합니다. 그 주제는 모두 “하느님 나라의 신비”(마르 4,11)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 가운데 ‘등불의 비유’입니다. 등불은 하느님 나라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활동 안에서 이미 경험할 수 있는 하느님 나라는 “함지 속이나 침상 밑”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아야 하는 등불처럼, 숨겨지거나 감추어질 수 없습니다.
등불이 공간을 밝히듯이 하느님 나라는 온 세상에 드러나야 합니다(마르 13,10 참조). 그러려면 우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등불보다 훨씬 밝고 강한 빛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고, 그분을 선포해야 합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2티모 4,2).
“너희는 새겨들어라.”
올바른 경청에 관한 절박한 호소는 ‘되다’와 ‘받다’의 비유를 통하여 설명됩니다.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되다’는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받다’는 선물로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뜻합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깨닫고, 그분 말씀을 실천하고 선포할 때 더 풍성한 은총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 안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이 우리 삶에서 싹을 틔우고 하느님 나라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이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 (콜로 3,16).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주는 사람에게 주신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주님의 이 말씀을 저는 이렇게 바꿔봤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의 됫박만큼 주신다. 하느님께서는 주는 사람에게 주지 주지 않는 사람에게는 주지 않으신다.
비가 오고 그 물을 양동이에 받는 사람은 양동이만큼밖에 받을 수 없다. 작은 양동이로 많은 비를 받을 수 없다. 더 많이 비를 받으려면 큰 양동이를 갖다놔야만 한다. 그리고 주는 것과 받는 것 두 개가 있지 않고 양동이는 하나뿐이다.
부모가 맏이에게 재산을 준 것은 동생들에게 나눠주라고 준 것이다. 그런데 준 재산을 몽땅 자기만 가지면 부모는 더 이상 주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나누라고 주신 것이고, 그래서 주는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주시고 또 주신다.
이상이 오늘 주님 말씀을 듣고 묵상한 바인데 요즘 여기 밥상에 대해서도 나눔을 할까 합니다.
저희가 <여기선교협동조합>을 시작했지만 생각만 많았지 한동안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고, 코로나로 인해 거의 개점휴업 상태였습니다.
그러다가 몇 달 전부터 <여기콩나물국밥> 집을 중심으로 지역 사회와 나누는 일을 하기 시작하니 많은 분이 관심을 보여주셨고, 아나바다를 위해서 정말로 많은 물품이 전국에서 보내져왔고 식당의 운영을 위해 많은 분이 성금을 보내주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모든 분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참으로 감동적인 얘기를 하나 소개하려고 합니다.
한 한달 전쯤 봉사자 한분이 5만 원을 주시는 거였습니다. 뭐냐고 하니 앞집 할머니가 전해달라고 하며 주셨다는 겁니다.
그 할머니는 조선족 할머니로 앞집 지하 셋방에 사는 분이고, 겨울철이나 아프실 때를 빼고 늘 햇빛을 쬐러 집앞에 계시던 분입니다. 그래서 예약 식당이 끝나고 음식이 남으면 주변 분들과 함께 모셔서 남은 음식을 나누곤 하였고 또 과일 같은 것도 나눠드리곤 했었지요.
그런데 한동안 보이지 않아 아들한테 물으니 편찮으시다는 겁니다. 그래서 같이 걱정하고 화살 기도도 해드렸는데 편찮은 것이 좀 나아지시자 다시 밖에 나오셨고 유모차를 끌고 경로당에도 가신다는 거였습니다.
마침 재속프란치스코회 국가선교회를 비롯하여 여러분이 귤을 한꺼번에 여러 상자 보내주셔서 그중 하나를 그 할머니를 통해 경로당에 보내드렸더니 그 마음씀이 고마우셨던지 그 돈을 보내오신 겁니다.
과부의 작은 헌금이 부자의 많은 헌금보다 더 많이 봉헌한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할머니의 성금이 크기에 그 감동이 컸을 뿐 아니라 우리가 목표한 지역사회 복음화 차원에서 반응이 온 것이기에 감동이 더 컸지요.
나누지 않으면 여러분 중 아무도 저희에게 나눠주시지 않을 것이고, 나누니 여러분도 콩나물 국밥 집 봉사를 위해 시간을 나눠주시고 운영에 보태라고 가진 것도 나눠주시는 것이지요.
저희를 도와주시는 김에 저희가 겸손과 사랑으로 나눔을 끝까지 잘 실천할 수 있도록 기도도 해주시기를 또 부탁드리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더 가지는 사람이 되면 얻게 되는 것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마련이라고 하시면서,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이야기의 흐름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 중이셨느냐면, ‘씨뿌리는 농부의 비유’를 말씀하는 중이셨습니다. 씨는 곧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성령의 물과 햇빛의 따듯함으로 우리 안에서 자라나면 ‘사랑’의 열매를 맺습니다. 물론 이를 위해서 교만의 딱딱함과 육체의 돌멩이와 탐욕의 가시를 뽑는 일도 해야합니다. 이렇게 맺힌 사랑을 가진 이가 진정 가진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하느님을 가진 이는 정녕 가진 자이고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더 받게 됩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머슴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에 찌들었던 두메산골 소년이 덴마크 국왕과 이스라엘 대통령의 도움으로 유학 가서 박사가 되고 대학 총장이 된 사례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머슴인 데다가 8남매가 부대끼며 살아야 했던 가난의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집안에서 유일하게 초등학교를 보내준 덕택에 읍내에 나가 어렵게나마 중학교까지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갖은 고생 끝에 야간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까지 마칠 수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그는 농업기술이 발달한 나라에 가서 농촌을 잘살게 하고 싶다는 꿈을 가졌습니다. 어느 날 『새 역사를 위하여』란 책을 읽고 덴마크의 황폐했던 농촌이 세계적인 복지국가로 탈바꿈한 기록을 읽은 후 무작정 덴마크 유학을 결심합니다.
1960년대 돈도 없는 학생이 유학을 외국으로 간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무모한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13년 동안 이 꿈을 버리지 않고 기도하던 중에 덴마크 국왕에게 편지를 쓰라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내가 오직 바라는 건 한국 농촌이 잘 사는 것입니다. 당신네 나라처럼 훌륭한 나라에서 배워 우리 농촌을 잘 살게 하는데 내 인생을 바치겠으니 생활비와 전액 장학금을 좀 줄 수 없겠습니까?”
당시는 대사관도 없어서 백과사전을 뒤져 왕궁 주소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40일 후에 답장이 왔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기간,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분야를 공부할 수 있도록 우리 정부가 책임을 지겠다.”
아이가 집에서 마음대로 물건을 가지고 놀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집이 부모님 것이고 부모님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남의 집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부모님이 온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라면 어떨까요?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고작 80달러를 가지고 덴마크 유학길에 오릅니다. 그곳에서 다른 나라들의 농촌개발 사례들과 그 이론적 배경에 집중하여 연구했지만, 덴마크와 우리나라와의 격차가 너무 커서 바로 적용할 수 없다는 한계를 느꼈습니다. 그는 우리나라와 상황이 비슷하다고 여긴 이스라엘 대통령에게 편지를 씁니다. 이스라엘 대통령도 그의 청을 들어주어 그는 이스라엘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가진 것이 없다고 믿을 수도 있었지만, 하느님을 가졌기에 다 가졌다고 여기니 다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진 자의 특징입니다. 없다고 믿으면 있다고 여기는 것까지 잃게 됩니다.
돌아온 그는 건국대학교 교수가 되었고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농촌운동을 하고 이후 건국대학교 부총장을 지내고 2002년에 ‘농촌 청소년 미래재단’을 설립하여 어려운 환경의 청소년들을 위한 장학사업과 청소년 건전육성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류태영 박사는 그의 책 『언제까지나 나는 꿈꾸는 청년이고 싶다』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한번은 신문을 넣고 돌아가려는데 쓰레기통에 밥 덩어리가 버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너무 배가 고파 참지 못하고 주위를 살펴보다가 얼른 그것을 집어 들었다. 묻은 연탄재와 모래를 떼어내고 그 밥을 다 먹어치웠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래도 나는 쓰레기통의 밥이나마 먹을 수 있게 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렸다.”
또 그의 책 『꿈과 믿음이 미래를 결정한다』에는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부터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기를 썼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감사하다’는 말이 가득하여 있다는 점이다.”
감사한 사람이 다 가진 사람입니다. 감사하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무너집니다. 그런데 그 감사는 하느님을 가졌을 때 옵니다. 연탄재 묻은 밥을 먹을 때도 하느님이 주신 것이니 감사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가진 사람이 결국 다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세상 모든 것이, 곧 나의 생명, 공기, 환경, 만나는 모든 사람까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넷플릭스 영화 ‘돈 룩 업’(2021)은 말 그대로 ‘위를 보지 마!’란 내용입니다. 대학원생 ‘케이트’와 ‘랜달’ 교수는 우연히 지구로 돌진하는 혜성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6개월 뒤 지구에 충돌하게 되고 지구의 생명체는 멸종하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여러 단계를 거쳐 그들은 미국의 대통령을 만납니다.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 중요한 일은 재선에 성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말을 무시합니다.
케이트와 랜달은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유명 생방송 TV 프로그램에 나가 모든 사실을 폭로합니다. 그러나 언론은 시청률을 끌어올려 돈을 더 버는 게 목적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웃음거리로 만듭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지지율이 떨어지자 혜성 충돌 상황을 일부러 대대적으로 언론에 뿌리고 안정을 추구하겠다는 약속으로 재선에 성공합니다. 우주로켓을 발사해 혜성의 방향을 바꾸겠다는 계획입니다.
하지만 대통령의 거대 스폰서인 대기업 회장이 혜성이 엄청난 가치의 천연자원이라는 것을 알아내고 그것을 폭파해 잘게 쪼개서 지구에 떨어뜨리자는 제안을 합니다. 대통령도 이를 허락합니다. 대통령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위는 쳐다보지 말고 그냥 살라고(돈 룩 업) 말합니다.
다른 국가들에서 혜성의 방향을 바꾸는 로켓들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어쩔 수 없이 혜성을 쪼개는 방법밖에 남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이 계획 역시 수포가 됩니다. 이제 죽는 일만 남았습니다.
함께 고군분투했던 케이트와 랜달은 랜달의 집에 모여 최후의 만찬을 벌입니다. 랜달은 아내와 가족들에게 그동안 잘못한 것들에 대한 용서를 청하고 포도주를 마시며 마지막을 맞습니다.
결국, 우리가 챙겨야 하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느님을 가져야만 얻을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돈과 명예와 즐거움. 그런 것들을 추구하는 것은 그것들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갖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하느님을 가진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을 전하며 얻어지는 전우애. 그리고 그 전우애 안에서 느끼는 편안함과 행복입니다. 관계가 행복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가 지속하면 천국이 됩니다.
우리는 자아를 가지고 탐욕과 쾌락과 교만을 추구할 것인지, 하느님을 가지고 사랑의 소명을 추구할 것인지 결정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것이 되시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양식이 되셨습니다. 내가 맺는 열매로 내가 무엇을 가졌는지가 드러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그 사람 기분에 나까지 휘둘릴 필요는 없지.
미국의 작가이자 소설가인 오 헨리는 사람들에게 늘 친절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친구와 함께 가게에서 간식거리를 샀습니다. 그런데 계산해주는 점원이 너무나 불친절한 것입니다. 계산하는 물건을 함부로 대하고, 계산하면서도 계속 구시렁구시렁하고, 무엇보다 남은 잔돈을 던지듯이 주는 것입니다. 친구는 이 점원을 보면서 무척 기분이 나빠졌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항상 친절한 헨리지만, 이 점원에게는 화를 낼 수밖에 없을 거야.’
이런 그의 예상과 달리, 오 헨리는 밝게 웃으면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며 가게를 나서는 것입니다. 친구는 물었습니다.
“자네는 그 직원이 그렇게 불친절한데도 왜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나?”
오 헨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합니다.
“그 사람 기분에 나까지 휘둘릴 필요는 없지.”
우리는 상대방의 기분이 휘둘리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상대방이 화를 내면 나도 화를 내고, 상대방이 웃으면 나 역시 웃습니다. 그런데 좋은 감정이야 전달되면 좋지만, 나쁜 감정까지 굳이 전달받을 필요가 있을까요? 그래서 주님께서 어떻게든 사랑하라고 말씀해주셨던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남의 감정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좋은 감정 안에 늘 머무르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등불의 비유를 보면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여기서 등불은 비유적으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가지고 오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이 오신 것을 함지로 가리거나 침상 밑에 놓아 숨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라고 하십니다. 심판 날에 모든 비밀이 명명백백히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모두 알려지기에는 시기가 아직 이르고 적절치 않아서 많은 사람에게 가려져 있지만 결국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역할은 분명합니다.
주님을 세상에 알리는 데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하며, 동시에 생활 속에서 주님의 뜻인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실천은 남에게만 좋은 일이 아닙니다.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지요. 주님께서 알아주시기에 더 많은 것을 받게 됩니다.
하느님께 마음을 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주님을 세상에 알리는 것, 그리고 주님의 사랑을 세상에 실천하는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산을 움직이려 하는 이는 작은 돌을 들어내는 일로 시작하느니라.
- 공자
작은 것에 충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신학교 입학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아침 미사 후 선배님의 호출을 받았습니다. 아침 식사를 하고서 자기 방에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선배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엄청나게 혼났습니다. 그 이유는 구두가 깨끗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만 그 선배의 지적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후배들도 그 선배에게 지적받고 눈물이 날 정도로 혼났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선배는 미사에 온전하게 참석도 하지 않고 후배들의 구두만 보고 있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선배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일상의 작은 것에 소홀히 하지 않아야 크고 중요한 일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상을 소홀하게 여기는 사람은 특별한 상황 역시 소홀하게 여기면서 제대로 일할 수 없습니다.
이런 깨달음을 얻은 뒤에 작은 일에도 소홀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변에서도 작은 일에 소홀하지 않은 사람에게 더 큰 믿음을 갖고 함께 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도 그렇지 않을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침상 밑에 놓겠느냐? (마르 4, 21)
우리 마음을 두어야 할 곳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이 아니다. 빛이신 예수님께 두어야 할 우리의 마음이다. 빛은 막을 수 없다. 서로를 비추는 사랑의 빛이 우리 신앙의 정체성이다.
마음이 있는 곳에 빛이 있다. 마음을 쏟아야 할 사랑의 빛이다. 마음을 모아야 할 곳또한 사랑이신 주님이시다. 우리가 가진 것은 마음이다. 어둠에서 벗어나는 것도 마음이고 빛으로 비추어주는 것도 마음이다.
서로를 비추어주는 등불의 관계가 건강한 신앙의 관계이다. 빛의 길을 걷게하시는 주님이시다. 마음이 닮아야 할 것은 서로를 환하게 비추는 빛이다. 마음을 주님께 활짝 열어드린다.
오늘의 우리마음을 빛이신 주님께 봉헌한다. 마음을 빛이신 주님께 두는 마음의 새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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