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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1월 25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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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2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

 

 

2022년 1월 25일 (화)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바오로 사도는 소아시아 킬리키아 지방의 타르수스에서 태어났습니다. 바오로는 어릴 때부터 율법을 엄격히 준수하도록 교육받은 철저한 유다인이었습니다.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였으나,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고 극적으로 회심한 뒤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교회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별도로 지내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으로 이루어진 그의 회심이 구원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바오로 사도는 많은 이방인의 눈을 뜨게 하여 그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세력에서 하느님께 돌아서게 했습니다.

 

 

✠ 오늘 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백성에게 자신을 소개하며, 신자들을 박해하던 그가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서 주님을 만나 주님을 전하는 증인이 된 사연을 들려줍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하고 이르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월 25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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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사도 22장 3-16절

 

일어나
예수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 무렵 바오로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나는 유다 사람입니다. 킬리키아의 타르수스에서 태어났지만 이 도성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조상 전래의 엄격한 율법에 따라 교육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모두 그렇듯이 나도 하느님을 열성으로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신자들을 죽일 작정으로 이 새로운 길을 박해하여,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포박하고 감옥에 넣었습니다. 


대사제와 온 원로단도 나에 관하여 증언해 줄 수 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서 동포들에게 가는 서한까지 받아 다마스쿠스로 갔습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와 처벌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길을 떠나 정오쯤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큰 빛이 번쩍이며 내 둘레를 비추었습니다. 


나는 바닥에 엎어졌습니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고 나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내가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여쭙자, 그분께서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 


나와 함께 있던 이들은 빛은 보았지만, 나에게 말씀하시는 분의 소리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10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내가 여쭈었더니, 주님께서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일어나 다마스쿠스로 들어가거라. 장차 네가 하도록 결정되어 있는 모든 일에 관하여 거기에서 누가 너에게 일러 줄 것이다.’ 

11 
나는 그 눈부신 빛 때문에 앞을 볼 수가 없어, 나와 함께 가던 이들의 손에 이끌려 다마스쿠스로 들어갔습니다. 

12 
거기에는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율법에 따라 사는 독실한 사람으로, 그곳에 사는 모든 유다인에게 좋은 평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13 
그가 나를 찾아와 앞에 서서, ‘사울 형제, 눈을 뜨십시오.’ 하고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그 순간 나는 눈을 뜨고 그를 보게 되었습니다. 

14 
그때에 하나니아스가 말하였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선택하시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의로우신 분을 뵙고 또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15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16 
그러니 이제 무엇을 망설입니까? 일어나 그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주님을 찬양하여라, 모든 민족들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모든 겨레들아.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우리 위한 주님 사랑 굳건하여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여라.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르 16장 15-18절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15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17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18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 하느님, 복된 바오로 사도가 뜨거운 사랑으로 모든 교회를 돌보게 하셨으니 성체를 받아 모신 저희 마음에도 그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이현수 바오로 신부 집전

 

 

2022년 1월 25일 (화)
이현수 바오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1월 25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을 앞두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복음 선포는 의무이며, 그 대상에 경계와 구별이 없다는 이 말씀에서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 선포에 자신의 삶을 바친 바오로가 떠오릅니다.

오늘은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유다 사람”으로 태어나, “조상 전래의 엄격한 율법에 따라 교육”을 받은 바오로는 그리스도 신자들을 포박하고 감옥에 넣었던 박해자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이 완전히 바뀌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오늘 독서가 전하는 부활하신 예수님 체험입니다. 

바오로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려고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 번쩍이는 커다란 빛과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 특별한 체험으로 바오로는 ‘그리스도 박해자’에서 ‘그리스도 선포자’로 바뀝니다. 작은 습관 하나도 바꾸기 쉽지 않은 우리이기에, 사울에서 바오로로 바뀐 이름처럼 변화된 그의 삶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얼마나 강렬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지내며, 회개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회개는 자신의 노력과 하느님의 은총이 만나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회개의 결과는 ‘변화’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나는 회개하였는가?’라는 질문은 ‘나는 변화하였는가?’라는 질문과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과 그의 열정적인 복음 선포를 기억하며, 우리도 ‘회개’하는 신앙인, ‘선포’하는 신앙인, ‘변화’하는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합시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와 함께 고백합시다. 

“나는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필리 3,10).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원하는 것이 원하지 않는 것보다 크면

 

저는 오늘 성 바오로의 회심 축일을 지내면서 성 바오로가 이렇게 된 것을 나는 은총이라고 생각하는지, 성 바오로처럼 되는 은총을 나도 받기 원하는지 자문하고 성찰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한결같이 바라는 것은 바오로 사도처럼 눈이 번쩍 뜨이는 체험, 바오로 사도처럼 극적이고도 강력한 주님 체험, 그래서 제 인생이 완전히 뒤바뀌는 체험을 한번쯤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지금의 저의 삶이 충분하다거나 문제 없다고 생각하지 않고, 완전히 또는 얼마간 문제가 있다거나 불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겠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저를 보면 꼭 그렇지 않은 것 같고 바뀌기를 바라는 것이 절실하거나 진실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저는 그럴 마음이 그리 강하지도 않고 많지도 않으며, 꼭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지도 않으면서, 그리되면 좋지 않을까 어쩌다 한번씩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정도가 아닌지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일까 오늘은 독서의 다음 구절이 눈에 특별히 들어왔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큰 빛이 번쩍이며 내 둘레를 비추었습니다. 나는 바닥에 엎어졌습니다." 

바닥에 엎어졌다는 말, 이것은 물리적으로 곧 몸이 엎어져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것만이 아닌 영적으로 또는 존재 전체가 완전히 무너지고 삶이 완전히 뒤집히는 것을 말함일 것입니다. 

내가 무너지는 것, 삶이 뒤집히는 것, 저는 이것을 아직 원하지 않고 오히려 두려워하고 있으며, 충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만족하며 사는 것일 겁니다. 

그렇지만 바오로 사도처럼 뜨거운 신앙과 삶을 살기 원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원하는 것이 원치 않는 것보다 강하면 주님께서 은총을 내려주시지 않을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열정이 없는 자는 회개시킬 수 없다.

 

오늘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와의 특별한 만남을 통하여 회심하고 또 그 이후 교회의 최고의 사도가 됩니다. 예수님은 바오로 사도를 교회에 보내셨고, 교회의 대표로 하나니아스가 그에게 세례를 줍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사도단에게 파견받습니다. 결국, 회개는 교회 공동체에 머물며 교회의 권위에 순종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교회에 순종하지 않으면 아직 온전히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바오로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 나에게 나타나시지 않고 바오로 사도에게는 나타나실까요? 회개는 방향을 틀게 만드는 과정입니다. 제가 ‘세속-육신-마귀’를 행복으로 추구하던 방향에서 방향을 틀어 반대로 거스르게 만든 과정이 회개였습니다. 그러니 회개는 ‘행복’과 직결됩니다. 행복이라고 믿는 방향을 바꾸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런데 바오로는 무엇이 특별해서 하느님께서 회개를 시켜주신 것일까요? 바로 자신이 행복이라고 믿는 것을 위해 직진했다는 데 있습니다. 저도 제가 믿는 행복을 위해 직진했습니다. 우리는 흐르는 강물 위의 나룻배 위에 탄 사람과 같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나룻배는 바다로 향합니다. 하지만 노를 젓지 않는다면 방향을 틀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 밑으로 내려갑니다. 하느님은 노를 젓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미워하는 사람보다 당신께 무관심한 사람을 더 어려워하십니다.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2001)는 ‘냉정과 열정 사이에 미지근함의 지옥이 있다’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입니다. 

피렌체에서 유화 복원사 과정을 수련 중인 쥰세이는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고 연인 메미와 공부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오래전 헤어진 연인 아오이를 잊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쥰세이는 자신을 초대한 복원의 대가 조반나 선생의 추천으로 모두의 관심과 부러움 속에 치골리의 작품 복원을 맡게 됩니다. 그런데 쥰세이는 이전 애인인 아오이가 밀라노에 왔음을 알게 되고 그를 만나기 위해 떠납니다. 

그러나 그녀 곁엔 이미 새로운 연인이 있었고, 냉정하게 변해버린 그녀의 마음만을 확인한 채 쥰세이는 다시 피렌체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자신이 작업 중이던 치골리의 작품이 처참하게 훼손된 채 발견됩니다. 그렇게 스튜디오가 문을 닫아 쥰세이는 일본으로 돌아옵니다. 

일본으로 돌아와 아버지가 자신의 아이를 밴 아오이에게 돈을 주며 자신을 떠나게 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아이도 아오이가 지운 줄 알았지만 실제로는 유산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몰랐던 아오이에 대한 비밀과 오해를 풀게 된 쥰세이는 그녀의 행복을 비는 마지막 편지를 아오이에게 보냅니다. 

조반나 선생님의 갑작스러운 자살 소식에 쥰세이는 피렌체로 다시 오게 됩니다. 이때 동료로부터 미술품을 훼손한 건 쥰세이를 질투했던 조반나였다는 사실을 듣습니다. 아오이에 대한 마음을 접을 수 없던 쥰세이는 여자친구인 메미와 헤어지고 아오이 역사 마빈과 헤어집니다. 쥰세이는 오래전 두 사람의 약속을 떠올립니다. 바로 그녀가 서른 살 생일이 되는 날에 연인들의 성지로 불리는 피렌체 두오모에서 만나기로 했던 것입니다. 아오이도 쥰세이가 그리워 남자친구를 혼자 미국으로 떠나게 하고 두오모 돔 위에서 둘은 만나 사랑을 확인합니다. 

두 사람은 잠깐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지만, 다음날 아오이는 다시 떠납니다. 쥰세이가 잡아줄 것을 기대했겠지만, 쥰세이는 미안해서인지 그녀를 잡지 않습니다. 그러나 쥰세이가 자신이 좋아서 자신을 보기 위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되고 밀라노로 떠난 아오이를 따라가서 만나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왜 우리는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헤매며 뜨거워지지 못할까요? 실패할 것 같은 자존심 때문일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그래서 상대의 눈치를 봅니다. 상대가 나를 좋아한다는 확신이 있어야 나도 움직입니다. 그런데 이런 관계는 둘이 관계가 좋아져도 또 그런 패턴이 반복될 가능성이 큽니다. 

둘의 문제는 상대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관계 자체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생긴 것입니다. 관계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상대가 확실히 싫다는 표현을 할 때까지 굳건히 나아갑니다. 그래서 주님이 맺어주셨다는 확신이 둘의 믿음보다 더 필요한 것입니다. 그냥 움직이려 하지 않는 두 사람 사이에서는 누구도 둘의 관계를 열정이 지속하고 유지해줄 수 없습니다. 왜 움직여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강 위에 배를 타고 노를 젓는 사람과 젓지 않는 사람은 무엇이 다를까요? 아래든, 위든 노를 젓는 사람은 ‘소명’을 가진 사람입니다. 무엇이라도 해야 하는 소명이 있기에 무엇이라도 할 필요성이 있어서 그렇게 노를 젓는 것입니다. 그 심판의 시간이 ‘죽음’입니다. ‘죽음’을 대하는 자세가 나를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게 만듭니다. 죽음을 목전에 두면 누구나 노를 젓게 됩니다. 남기는 게 하나도 없고 후회만 남긴 죽음이 되는 것을 사람은 견디지 못합니다. 

​어느 젊은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사형을 집행하던 날, 형장에 도착한 그 사형수에게 마지막으로 5분의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절체절명의 시간이 초조히 지나고 있었습니다. 짧았지만 너무나도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 5분, 이 마지막 5분을 어떻게 쓸까?’

그 사형수는 순간 상념에 젖었습니다. 가족들과 친구들을 생각하는 사이 벌써 2분이 지나 버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돌이켜 보려는 순간 ‘아~! 이제 3분이면 내 인생도 끝이구나’라는 생각이 들며, 세월을 금쪽같이 쓰지 못한 것이 정말 후회되었습니다.

‘아~! 다시 한번 인생을 살 수만 있다면….’

기적적으로 사형집행 중지 명령이 내려와 간신히 목숨을 건지게 되었습니다. 구사일생으로 풀려난 그는 그때부터 5분간의 시간을 생각하며 평생 ‘시간의 소중함’을 간직하고 살았습니다. 날마다 시간을 5분 단위로 계산하여 살았고, 마지막 삶의 5분처럼 언제나 최선을 다하여 『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등의 수많은 불후의 명작을 남겼습니다. 그의 이름은 도스토옙스키입니다. 

죽음은 커다란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죽을 때에 삶의 심판을 받아야 함을 인식합니다. 그래서 오늘 죽는다고 생각하면 오늘은 충실히 살 수밖에 없습니다. 심판은 분명 ‘소명’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존재 이유를 떠올리고 오늘 죽는다면 보지는 못했지만, 심판자 앞에 설 것이 두려워 일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죽음을 생각하고 행복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행복을 생각하고 노를 저었습니다. 방향이 틀렸더라도 노를 저으니 주님께서 회개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는 움직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방향을 바로 틀어주십니다.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그래서 그냥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은 회개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바오로는 그렇게 소명으로 오늘 죽을 사람처럼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는 과연 주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아버지께서 하늘 나라에 가신 뒤, 읍사무소에 가서 ‘가족관계서’ 1통을 발급받았습니다. 부모님 재산을 정리하는 데 필요하다고 해서 발급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서류를 보는 순간 눈물이 저절로 나옵니다. 제가 결혼하지 않았으니, 증명서에는 저와 부모님만 나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 이름 옆에 ‘사망’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는 것입니다. 
 
분명 두 분의 장례를 치렀고, 자주 산소에 가서 미사와 연도를 바칩니다. 그러면서 부모님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이제 산소에 가도 눈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부모님의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나 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만 힘든 것일까요? 어떤 이별이든 우리에게 커다란 아픔과 상처를 가져다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별을 힘들어하면서도 이별의 삶을 계속 선택하며 사는 것 같습니다. 바로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주님과 진정으로 사랑의 관계가 되어야 하는데, 당연히 이별해야 하는 것처럼 관계를 끊으려고만 합니다. 이 이별은 괜찮을까요? 우리는 주님과 절대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관계이기에 삶 자체가 힘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과 끈끈한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어렵고 힘든 시간을 극복하는 가장 큰 힘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을 전달하십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사람은 단죄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믿는 이들에게는 여러 표징이 따른다는 약속도 하시지요. 믿음의 힘이 그렇게 크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서 자신의 모든 것을 봉헌하며 복음 선포의 사명을 충실하게 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바오로 사도입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율법을 엄격히 준수했던 철저한 유다인이었습니다. 율법만을 준수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생각을 따르게 되었고, 그래서 그리스도교를 박해했습니다. 주님과 이별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면서 회심해서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것입니다. 주님과 같은 관계를 맺게 된 것입니다. 
 
회심을 통해 얻게 된 믿음, 이 믿음이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커다란 가르침을 전달해주었습니다. 믿음으로 각종 표징이 일어난다는 것을 이방인의 사도로 활동했던 바오로의 삶을 통해 증명되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주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이별의 관계인가요? 아니면 사랑의 관계인가요?.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랑이란 자기희생이다. 이것은 우연에 의존하지 않는 유일한 행복이다.

- 톨스토이

 

 

사랑만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최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현재 논란 중인 식당 가격’이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습니다. 작성자는 흑미밥, 따뜻한 된장국과 3가지 반찬이 있는 사진을 올리며 다음과 같이 글을 적었습니다. 
 
“11년 동안 이렇게 차려주고 1,000원을 받습니다. 장사도 잘돼서 하루 100명이나 먹고 갑니다. 더 어이없는 건 식당이 적자라 사장이 투잡까지 뜁니다.” 
 
이 식당은 광주광역시 동구 대인시장에 있는 ‘해 뜨는 식당’입니다. 고(故) 김선자 씨가 사업 실패로 끼니조차 해결하기 어려웠던 시절 주위로부터 받은 도움을 갚기 위해 문을 연 식당은 현재 김 씨의 딸인 김윤경 씨가 어머니의 유언을 따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일반 식당은 공깃밥 한 그릇에 천 원을 받는데 이곳만큼은 고(故) 김선자 씨가 2010년 문을 연 뒤로 줄곧 밥값 천 원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공짜로 줄 수 있었지만, 돈을 내고 당당히 식사하시라는 따뜻한 배려였습니다. 
 
저도 신학생 때, 500원 받는 밥집에서 봉사활동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도 후원 없이는 불가능했는데, 30년이 넘은 지금 1,000원을 받고서 밥집을 운영한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이렇게 운영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밥집을 운영하는 분의 사랑과 이를 도와주려는 분들의 사랑이 모여서 이렇게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가능한 일로 만든 것입니다. 사랑만이 우리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 16, 15)

 

삶에 가장 필요한 것은 참된 방향이다. 방향을 틀어 하느님을 향하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 지를 다시금 처절하게 깨닫게 하는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이다. 가장 아픈 삶이 가장 기쁜 삶이 되게 하는 회심(回心)이다. 

하느님의 방식은 참된 회심의 방식이다. 회심은 참된 구원에 이르는 생명의 참된 길이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를 보게 되는 회심이다. 회심으로 하느님께로 가는 복음을 믿게 된다. 

하느님과 우리의 새로운 관계가 회심의 탄생이다. 다마스쿠스의 회심으로 성 바오로 사도가 탄생한다. 회심이 참된 사랑이다. 삶을 되돌려주고 되돌아가게 하는 빛은 사랑이다. 그 사랑으로 성 바오로 사도는 회심의 여행을 떠난다. 

되돌려주어야 할 복음의 사랑이다. 회심으로 자라나는 교회의 삶이다. 우리의 회심은 우리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져야 할 사랑의 빛임을 믿는다. 다마스쿠스와 수도원 사이를 이어주는 회심의 빛이다. 

한 사람의 참된 회심이 필요한 때이다. 하느님 사랑을 향하는 기쁜 회심 축일이다. 가장 좋은 회심의 때를 선물로 주시는 사랑의 주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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