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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1월 24일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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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2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2022년 1월 24일 (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1567년 이탈리아의 사보이아 지역에서 한 귀족 가문의 맏이로 태어났습니다. 1593년 사제가 되어 선교사로 활동한 그는 특히 칼뱅파의 많은 개신교 신자를 가톨릭으로 회두시켰습니다.

1599년 제네바의 부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어 1602년 교구장이 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는 많은 저서를 남기고 1622년에 선종했습니다.

 

 

✠ 오늘 제1독서

 

사울이 죽자 원로들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웁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고 경고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월 24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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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2사무 5장 1-7절, 10절

 

너는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될 것이다.

 

그 무렵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있는 다윗에게 몰려가서 말하였다. “우리는 임금님의 골육입니다. 


전에 사울이 우리의 임금이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출전하신 이는 임금님이셨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너는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고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될 것이다.’ 하고 임금님께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원로들이 모두 헤브론으로 임금을 찾아가자, 다윗 임금은 헤브론에서 주님 앞으로 나아가 그들과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웠다. 


다윗은 서른 살에 임금이 되어 마흔 해 동안 다스렸다. 


그는 헤브론에서 일곱 해 여섯 달 동안 유다를 다스린 다음, 예루살렘에서 서른세 해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다. 


다윗 임금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에 사는 여부스족을 치려 하자, 여부스 주민들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너는 이곳에 들어올 수 없다. 눈먼 이들과 다리저는 이들도 너쯤은 물리칠 수 있다.” 그들은 다윗이 거기에 들어올 수 없으리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시온산성을 점령하였다. 그곳이 바로 다윗 성이다. 10 다윗은 세력이 점점 커졌다. 주 만군의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내 진실 내 자애가
그와 함께 있으리라.

 

예전에 당신이 나타나 말씀하시고, 당신께 충실한 이들에게 선언하셨나이다. “내가 영웅에게 왕관을 씌웠노라. 백성 가운데 뽑힌 이를 들어 높였노라.” 내 진실 내 자애가 그와 함께 있으리라.

나는 나의 종 다윗을 찾아내어, 거룩한 기름을 그에게 부었노라. 내 손이 그를 붙잡아 주고, 내 팔도 그를 굳세게 하리라. 내 진실 내 자애가 그와 함께 있으리라.

내 진실 내 자애가 그와 함께 있으니, 내 이름으로 그의 뿔이 높이 들리리라. 내가 그의 손을 바다까지, 그의 팔을 강까지 뻗게 하리라. 내 진실 내 자애가 그와 함께 있으리라.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르 3장 22-30절

 

사탄은 끝장이 난다.

 

그때에 

22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 

23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셔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24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25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 

26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 

27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29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30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예수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전능하신 하느님, 이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저희가 세상에서 복된 프란치스코의 사랑과 온유함을 본받아 하늘에서 그와 함께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양우철 야고보 신부 집전

 

 

2022년 1월 24일 (월)
양우철 야고보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1월 24일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마귀들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마르 1,24) 또는 “하느님의 아드님”(마르 3,11)이라는 예수님의 신원을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느님을 따른다는 율법 학자들은 이 사실을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았나 봅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서 베엘제불에 사로잡히시고, 마귀 우두머리의 힘으로 마귀들을 쫓아내신다고 모함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나라나 한 집안이 갈라서면 유지될 수 없듯이,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버텨 내지 못한다고 하시며 그들의 모순을 폭로하십니다. 마귀를 쫓아내시는 예수님의 능력은 마귀가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드십니다.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마귀 들린 이들을 고치신 기적들은 ‘힘센 자’인 마귀를 ‘더 힘세신’ 당신께서 묶어 놓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힘은 사탄이 결코 맞설 수 없는 힘, 바로 하느님께서 지니신 구원의 힘입니다. 마귀 들린 사람을 고치시는 예수님의 행위는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강한 의지이며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께서 내려오시고 그분을 광야로 인도하신 것처럼,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적 안에서 활동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율법 학자들처럼 예수님의 활동을 모함하는 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행위로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는 죄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마태 12,28).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영의 식별, 성령적인 것과 악령적인 것.

 

마르코 복음에서 공생활 초기의 예수님은 많은 사람에게 문제적 인간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복음과는 달리 사람들의 평을 가감없이 전해줍니다. 부모와 형제들도 예수가 미쳤는지 확인하려고 찾아오고, 오늘은 율법 학자들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내려와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부터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어쩌면 오늘날 어떤 문제가 있을 경우 교황청으로부터 조사관이 파견되는 것처럼 당시 교계 지도부에서 파견한 사람들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들은 예수님의 무엇을 보고 이런 판단을 하였을까요? 터무니없는 모함이나 뒤집어쓰기일까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저라도 그 당시에는 그들처럼 생각하였을 겁니다. 우선 예수님의 그 많은 행적은 초자연적인 현상이기에 초자연적인 힘, 곧 성령의 힘이나 악령의 힘 중의 하나에 의한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므로 그들이 예수님을 보고 악령적이라고 하는 더 큰 이유는 예수님이 일으킨 기적보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교회에 대한 태도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당시 교계 지도자들과 다른 것을 가르치시며 그들을 비판하였고, 이런 예수님이 그들의 눈에는 교회를 파괴하는 행위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악마가 하는 짓이 바로 교회를 파괴하는 것이니 악마에 의한 거라고 교계 지도자들은 보았을 것이고 그래서 율법 학자를 파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앞서 봤듯이 이단 조사를 위해 우리 교회가 조사관을 파견했던 것과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성령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은 어떻게 차이가 있으며 예수님과 이단들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제 생각에 성령적인 것은 교회에 대한 사랑이고, 더 정확히 얘기하면 하느님 교회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파괴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 건설이 목적입니다. 

건설적인 비판이라는 말이 있는데 예수님의 교회에 대한 비판이 바로 하느님 나라를 건설키 위한 비판이고 그것은 흩어진 양들을 모으라는 호소였지요. 

그리고 여기서 또 중요한 것은 교회로부터 떨어져나가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사랑하기에 비판도 하지만 하느님의 교회 안에 머무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교회 안에 머물며 비판할 때 박해는 피할 수 없는데 그럴지라도 교회를 떠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떠나는 것은 사랑도 아니고 하느님 나라 건설도 아니며 하느님의 흩어진 자녀들을 하느님 교회로 모을 수도 없으니 말입니다. 

여기서 저는 프란치스코가 참된 순종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을 보고자 합니다. 

"아랫사람은 장상이 자기에게 명하는 것보다 자신의 영혼에 더 좋고 더 유익하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을 때라도, 장상이 명한 것을 실행에 옮기도록 힘쓸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과 이웃을 흡족케 하므로 사랑의 순종이 됩니다. 그러나 만약 장상이 아랫사람에게 그의 영혼에 거스르는 어떤 것을 하도록 명한다면  그 장상에게 순종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를 버리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만일 이 때문에 다른 이들로부터 핍박을 당하더라도 하느님 때문에 그들을  더욱 사랑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형제들과 헤어지기를 바라기보다  핍박을 견디는 이가 자기 형제들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내놓기에 완전한 순종에  참으로 머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당신 교회를 건설하라는/쇄신하라는 사명을 하느님께 받은 프란치스코는 그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복음적인 생활 양식을 살기 시작하는데 그 겉모습이 당시 이단들과 비슷하여 처음으로 가는 교구에서는 이단들로 오해받곤 했지요. 

그래서 그는 복음 선포를 위해 교구에 들어갈 때 문전박대를 당한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이때 이단과 달랐던 태도 때문에 나중에 환영을 받게 되었지요. 

이단과 다른 태도란 교회 안으로 들어가 교회 안에 머묾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고, 

교회 안에서 교회를 쇄신하고, 

교회 안으로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 

이단과 달리 그리고 예수님처럼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프란치스코의 방식이었음을 묵상하는 프란치스칸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자아를 죽여야 함을 아는 사람은 성령을 모독할 수 없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는데, 그 힘이 바로 악령의 우두머리에게서 나온다고 그분의 적대자들이 말했기 때문입니다. 

성령과 악령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성령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왜 성령을 원하지 않을까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 자신을 죽이는 일입니다. 솔로몬에 성전에서 제물을 바칠 때 하늘에서 불이 떨어졌는데 그 불이 성령의 상징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죽이러 오십니다. 그러나 죽기 싫은 사람은 그 합리화를 성령이 나쁜 영이라고 말해버리는 것입니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2021)에서는 이전에 스파이더맨이 싸워야 했던 많은 악당이 등장합니다. 그 이유는 다원 우주라는 개념에서 오는데, 다른 차원의 우주에서 존재하던 같은 악당들이 지구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스파이더맨은 자신의 신상이 공개된 이후로 자신의 지인들에게까지 어려움이 닥치는 것을 보고는 닥터 스트레인지라는 마법사를 찾아가 자신을 아는 사람들의 기억을 다 지워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나 이 마법이 잘못되어 다른 차원의 지구에 존재하던 악당들이 지구로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지구로 들어온 다른 우주의 악당들은 지구에서 얻는 엄청난 힘에 만족해하며 다시 자신의 지구로 돌아가려 하지 않습니다. 그곳에서 스파이더맨과 싸우다가 죽을 운명임을 알았고, 여기 지구에서 함께 힘을 합치면 지금의 스파이더맨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자신들의 지구로 돌아가면 그들이 다 죽는다는 것을 아는 스파이더맨은 그들이 비록 악당이지만 돌려보낼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슈트를 만들었던 기계를 통해 그들을 치료할 수 있는 치료제들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파이더맨은 그들의 운명을 바꿔보려 그들을 집으로 데려야 치료제를 만듭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힘을 잃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스파이더맨의 큰어머니가 사망합니다. 도와주려고 했는데 자신을 가장 사랑해주는 분을 잃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큰어머니의 죽음을 무의미하게 하지 않는 방법은 보복하는 것보다는 그들을 치료해주는 것이라 믿고 결국은 그들 모두를 치료하는 데 성공합니다. 

악당들이 거부했던 것은 치료제입니다. 자신들이 갖게 된 힘을 잃어가면서까지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니 힘을 지니고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스파이더맨은 웃기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대부분 영화에 다 이 그리스도 십자가 희생의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사랑의 힘을 믿는 것입니다. 메이 큰어머니의 죽음을 통해 그 악당들을 죽여버려도 시원치 않지만 그는 그 죽음을 통해 치료제를 완성합니다. 

스파이더맨이 그리스도라면 그 치료제는 십자가에서 흘리는 그리스도의 피, 곧 성령입니다. 성령을 거부함은 자신의 힘을 잃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힘을 버리지 않으면 결국 죽게 됩니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그들을 본래의 세상으로 보내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2002년 4월 29일, 독일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총기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에르푸르트라는 도시의 구텐베르크 김나지움(10~19세 학생들이 다니는 인문계 학교)에서 퇴학을 당해 앙심을 품은 한 학생이 교사 열두 명과 여학생 두 명 등 총 열여섯 명을 죽인 사건입니다. 

대학입학 자격시험에 떨어진 로베르트(19세)는 기말시험을 치르지 않기 위해 가짜 진단서를 만들어 제출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발각되어 퇴학 처리되었고, 그는 이 모든 것이 교사들 때문이라 여겨 복수심에 이런 끔찍한 범행을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그가 교사들에게 총을 쏘는 동안 누구도 그를 저지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 한 교사가 나섰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총은 난사하는 그 앞에 60세의 라이너 하이제 교사는 복면을 쓴 그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차분히 복면을 벗겼습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이 가르친 학생 로베르트라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로베르트, 이게 무슨 짓이냐!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냐?”

그리고 하이제 교사는 자신의 가슴을 내보이며 말했습니다. 

“총을 쏘고 싶으면 쏴라. 내 눈을 보고 방아쇠를 당겨보란 말이다.”

로베르트는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선생님. 오늘은 실컷 쐈습니다. 이제 재미가 없네요.”

로베르트는 순순히 총을 내려놓았고 라이너 교사는 그를 빈 교실에 밀어 넣고 문을 잠갔습니다. 잠시 후 로베르트는 교실 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출처: 『어떻게 살 것인가』, 이충호, 하늘아래]

하이제 교사의 가슴에서 나오는 것이 성령입니다. 성령은 그 사람의 죽음과 함께 피와 섞여 나옵니다. 악마가 아니라면 그 성령은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고 자신의 잘못을 보게 만듭니다. 그래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고 그렇게 우리 자신을 죽입니다. 이 성령의 힘에 저항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악마가 된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로베르트도 그 성령의 힘에 압도당하여 더는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치료제가 바로 그리스도의 옆구리로부터 나오는 피와 물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을 모독하는 이는 이미 사탄이 된 존재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가리옷 유다가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오는 성령의 자비를 거부하며 스스로 더 먼 곳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곳이 지옥입니다. 지옥이 없다고 말하는 자도 성령을 모독하는 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곳으로부터 빼내 오기 위해 흘린 하느님의 피가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을 지옥으로 이끄는 것이 우리 자신임을 믿읍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죽지 않으면 그분께 순종할 수 없고 치료될 수 없음을 믿읍시다. 그러면 적어도 성령은 모독하지 않습니다. 지옥이 있음을 믿어야 하고 그 지옥으로 내려보내는 것이 다름 아닌 성령께서 죽이러 오시는 나 자신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성령을 모독하는 자가 됩니다. 그 끝은 끔찍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다시 태어나도 현재의 배우자와 결혼하시겠습니까?

 

다시 태어나도 현재의 배우자와 결혼하겠느냐는 질문에 몇 %나 긍정적인 대답을 할까요? 2014년에 있었던 조사 결과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남자는 42.6%, 여자는 22%만이 지금의 배우자와 결혼하겠다고 응답한 것입니다. 자신이 선택한 결혼인데도 이렇게 후회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즉, 부부로 살아가는 만족도가 높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를 ‘비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친구 남편은 돈을 잘 버는데, 우리 남편은 쥐꼬리만 한 월급만 가져다줘서 불만이다.” 
 
“친구 아내는 남편이 오면 반갑게 맞이한다는데, 내 아내는 집에 들어가도 눈길도 주지 않고 텔레비전만 보고 있어 불만이다.” 
 
비교를 통해 이런 식의 불만 사항이 계속 보이는데 어떻게 다시 결혼할 마음을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남과 비교한다는 것은 그만큼 타인의 평가나 생각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자기 인생의 주인공은 ‘나’인데도, 그 주인공을 ‘남’에게 넘기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타인을 무시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타인으로 인해 자신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면 스스로를 되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도 비교를 끊임없이 하고 있었습니다. 즉, 예수님과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말하는 잘못된 메시아 표상을 비교하면서 잘못된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고 말합니다. 
 
베엘제불은 유다인들이 이교도들의 신을 경멸하여 부르던 명칭이었습니다. 즉, 이교도들에게 성행하던 구마에서 부르던 신의 이름입니다. 이 주장은 다윗의 아들, 메시아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혼돈을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을 쫓아냈다면 그것은 사탄의 힘이 아니고 하느님의 영이 해낸 일입니다. 그러나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죄인들과 어울리는 모습에서 메시아일 리 없다고 말하는 종교 지도자의 말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너무나 많았습니다. 
 
주님은 비교할 수 없는 분입니다. 유일하시고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사탄과 예수님 사이에서 바른 선택이 필요합니다. 이 선택은 단순히 “저는 예수님을 선택합니다.”라는 말로 되지 않습니다. 그보다 주님께서 가장 강조하신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선택이 결정됩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생각하는 법을 가르쳐야지, 생각한 것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

- 코르넬리우스 구를리트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매일 만 보 이상을 걷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보통 걷는 거리가 10km가 넘습니다. 걷는 것 자체가 이제 습관이 되었는지, 10km 이내의 거리면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까운 거리’라고 생각하며 걷게 됩니다. 
 
아는 친구가 술 한 잔 마시자며 연락했습니다. 걸어가면 분명히 10km 이내이고, 차를 타면 1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그 술자리에 가기가 싫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인해, 평소에는 가깝다고 생각하는 거리가 너무나도 멀게만 느껴집니다. 
 
마음의 문제입니다. 어렵고 힘들다는 기준 역시 마음이 세우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는 어렵고 힘들다는 사실을 보편화 시켜서 누가 생각해도 자신이 최악의 상태라는 것을 강조하려고만 합니다. 자기 마음의 문제로, 이 마음은 자신만이 통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도 긍정적인 마음으로 새로운 변화로 이끌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마르 3,23)

 

새날이 밝았다. 하느님 사랑은 불빛보다 더 밝은 진실한 사랑으로 시작된다. 꺼지지 않는 사랑이다. 모순의 껍질을 벗듯 새날을 만나는 은총의 기쁜 새날이다. 아픈 이들에게 치유와 해방을 선사하시는 주님이시다. 

주님께서는 빼앗고 가두는 그런 분이 결코 아니시다. 생명을 모독하는 악령이 아닌 생명의 원천이신 성령께로 우리를 데려다 놓으신다.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우리의 생명과 우리의 내면까지 모두 모독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인격의 시간이 바로 살아계신 성령의 힘이시다. 하느님의 전능은 성령의 활동으로 전개된다. 성령께서는 일치를 체험하게 하신다. 좌우로 갈라지는 분열이 아닌 사랑과 용서라는 일치의 체험이다. 성령께서는 우리 삶의 아픔과 억압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 

갈라진 거기에서 성령의 힘을 만나게된다. 새로워지는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시는 성령의 힘을 진실로 믿는다. 어떤 날이 아니라 성령의 새날 새하루이다. 새생명 새마음의 빛나는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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