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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1월 20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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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2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주간 목요일 -

 

 

2022년 1월 20일 연중 제2주간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사울의 아들 요나탄은 다윗을 피신시키고,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의 마음을 바꾸는 데 성공합니다.

 

 

✠ 오늘 복음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고, 그분께서는 더러운 영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셨습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월 20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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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1사무 18장 6-9절, 19장 1-7절

 

나의 아버지 사울께서
자네를 죽이려고 하시네.

 

그 무렵 


다윗이 필리스티아 사람을 쳐 죽이고 군대와 함께 돌아오자,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여인들이 나와 손북을 치고 환성을 올리며, 악기에 맞추어 노래하고 춤추면서 사울 임금을 맞았다. 


여인들은 흥겹게 노래를 주고받았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 


사울은 이 말에 몹시 화가 나고 속이 상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다윗에게는 수만 명을 돌리고 나에게는 수천 명을 돌리니, 이제 왕권 말고는 더 돌아갈 것이 없겠구나.” 


그날부터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게 되었다. 

19,1 
사울이 아들 요나탄과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겠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나 사울의 아들 요나탄은 다윗을 무척 좋아하였기 때문에, 


이를 다윗에게 알려 주었다. “나의 아버지 사울께서 자네를 죽이려고 하시니, 내일 아침에 조심하게. 피신처에 머무르면서 몸을 숨겨야 하네. 


그러면 나는 자네가 숨어 있는 들판으로 나가, 아버지 곁에 서서 자네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겠네. 그러다가 무슨 낌새라도 보이면 자네에게 알려 주지.” 

요나탄은 아버지 사울에게 다윗을 좋게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임금님, 임금님의 신하 다윗에게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다윗은 임금님께 죄를 지은 적이 없고, 그가 한 일은 임금님께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는 목숨을 걸고 그 필리스티아 사람을 쳐 죽였고, 주님께서는 온 이스라엘에게 큰 승리를 안겨 주셨습니다. 임금님께서도 그것을 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임금님께서는 공연히 다윗을 죽이시어, 죄 없는 피를 흘려 죄를 지으려고 하십니까?” 


사울은 요나탄의 말을 듣고, “주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다윗을 결코 죽이지 않겠다.” 하고 맹세하였다. 


요나탄은 다윗을 불러 이 모든 일을 일러 주었다. 그러고 나서 다윗을 사울에게 데리고 들어가, 전처럼 그 앞에서 지내게 하였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하느님께 의지하여
두려움이 없으리라.

 

하느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저를 짓밟는 사람들이 온종일 몰아치며 억누르나이다. 적들이 온종일 짓밟나이다. 드높으신 하느님, 저를 몰아치는 자들이 많기도 하옵니다. 하느님께 의지하여 두려움이 없으리라.

저는 뜨내기, 당신이 적어 두셨나이다. 제 눈물을 당신 자루에 담으소서. 당신 책에 적혀 있지 않나이까? 제가 부르짖는 그날, 그때 원수들은 뒤로 물러가리이다. 하느님께 의지하여 두려움이 없으리라.

하느님이 내 편이심을 나는 아네. 하느님 안에서 나는 말씀을 찬양하네. 주님 안에서 나는 말씀을 찬양하네. 하느님께 의지하여 두려움이 없으리라.

하느님께 의지하여 두려움 없으니,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하느님, 제가 당신께 드린 서원, 감사의 제사로 채우리이다. 하느님께 의지하여 두려움이 없으리라.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르 3장 7-12절

 

더러운 영들은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이르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10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11 
또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1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가 천상 양식을 함께 나누고 비오니 사랑의 성령을 부어 주시어 그 사랑으로 한마음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현종민 세례자요한 신부 집전

 

 

2022년 1월 20일 (목)
현종민 세례자요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1월 20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예수님의 죽음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 안에서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

 

예수님의 활동을 요약하는 오늘 복음은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오고 있음을 전합니다. “큰 무리”라는 표현이 두 번 반복되며, 적어도 외적으로는 지금까지 예수님의 활동이 성공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무리는 “갈릴래아에서 …… 유다와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 곧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의 거주 지역을 가리지 않고온 이스라엘 방방곡곡에서 몰려들었습니다. 이는 어제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헤로데 당원들과 예수님을 없애기로 모의한 모습과 대비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이 뜻밖입니다. 그분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을 피하시려고 제자들에게 거룻배 한 척을 준비하라고 이르십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이를 고쳐 주셨기에, 누구나 그분께 손을 대려고 밀려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더러운 영들은 예수님을 보기만 하면 엎드려 소리 지릅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처음 나옵니다. 더러운 영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외침은 신앙에서 나온 고백이 아니라 두려움에서 나온 외침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들을 통하여 당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시는 듯합니다. 그래서 당신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꾸짖으십니다. 예수님의 정체는 ‘십자가 죽음과 부활 안에서’ 비로소 온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이 누구이신지를 깨닫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우리도 십자가 죽음의 길을 함께 걸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시기 질투에 관하여

 

"그날부터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게 되었다." 

오늘 여인들은 전쟁을 이기고 돌아온 사울과 다윗을 이렇게 환영합니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 

사실 이런 말을 듣고 시기 질투하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더욱이 여인들에게서 이런 말을 듣고 시기하지 않을 남자들은 없습니다. 

그러니 인간적으로만 보면 시기하는 사울보다 경쟁을 부추긴 여인들의 사려치 못함이 더 큰 잘못입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시기하면 안 되지요. 내게 득 되는 것은 하나도 없고 남의 평가에 나의 행불행이 좌우되는 나의 불행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부러워하면 진 것이라는 말이 있고, 영어에서 Envy는 부럽다는 뜻과 시샘 또는 시기라는 뜻이 있는데 부러워하는 것도 지는 거라면 시기하는 것은 더 크게 지는 거지요. 

왜냐면 부러워하는 것은 나도 그와 같이 되면 좋겠다는 거라면 시기하는 것은 그가 나보다 잘된 것을 싫어하는 것이며 그래서 부러워하는 것은 부러워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에 비해 시기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듯 우선 내가 아프고 그래서 남이 잘못되기를 바라거나 더 나아가 직접 파괴까지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러워하는 사람은 열심히 노력해서 그와 같이 될 수 있고, 그래서 성공할 수 있고 행복해질 수 있지만 시기하는 사람은 현재 불행하고 미래도 불행할 수밖에 없으며 내가 행복해질 수 없다면 그도 같이 불행하게, 아니 나보다 더 불행하게 만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앙인에게 시기란 또 다른 측면이 있겠지요? 시기하는 동안 하느님을 만날 수 없는 불행의 측면 말입니다. 시기하는 동안은 나의 시선이 하느님을 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시기란 하느님 뿐 아니라 내 주변에 숱하게 사람이 있어도 그들에게 시선이 가지 않고 오직 시기하는 사람에게 시선이 꽂히고, 다른 사람들을 보는 경우도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보느냐 그거잖습니까? 

이런 현상은 시기하는 동안 하느님을 볼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나의 하느님을 뵙지 못하고 그의 하느님만 볼 것이며,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그를 사랑하시고 그래서 그만 잘되게 해주시는 하느님을 볼 뿐일 것입니다. 

그리고 시기가 더 불행한 것은 단순 미움보다 더 거기서 빠져나오기 힘든 강한 미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시기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시기는 질투와 마찬가지로 끝까지 갈 확률이 높지만 그 시기의 끝에 그 끔찍한 불행 덕분에 오히려 내가 어리석었음을 깨닫게 되고, 나도 이제 행복해져야겠다고 마음 먹게 된다면 그래서 그의 하느님에게서 벗어나 나의 하느님과 나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면 빠져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시기하게 된 사울이 어떤 짓을 하고,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 계속 지켜보며 교훈을 삼아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내 자유를 지킬 줄 모르면 남의 자유도 인정할 줄 모른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이 밀쳐대자 ‘배 한 척’을 따로 마련하시어 그들 무리에서 조금 떨어지셨습니다. 사람은 받으면 교만해져서 당연히 주님이 주셔야 하는 줄 알고 그분에게 달려듭니다. 하지만 그분은 주시는 분이시지 빼앗기는 분이 아니십니다. 자유는 한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가장 큰 요소입니다. 따라서 자유가 무시당한다는 것은 존엄성이 무시당하는 것이고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면 그 사람은 자존감이 낮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존엄한 존재라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지심리학 박사이면서 개인 상담소까지 운영하던 ‘니콜 르페라’는 『내 안의 어린아이가 울고 있다』에서 자신이 육체와 정신적으로 병들어 있는 이유에 대해 말합니다. 그녀는 20대부터 항불안제를 복용하였고 무기력과 피로, 육체적 고통과 공황장애 등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도 남을 상담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찾은 이유는 바로 어머니로부터 가스라이팅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외형적으로 이상할 것이 없는 평범한 중산층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안정적인 직장에 다녔고 어머니는 전업주부였습니다. 가족의 좌우명은 ‘가족이 전부다’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말로 부모는 자녀의 자유를 인정해주지 않고 있었습니다. 가족이 전부가 되기 위해 자녀들의 자유를 희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특별히 어머니는 자신만의 환상 통증에 시달려 여러 날 침대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항상 불안했고 산만했습니다. 삼 남매의 막둥이인 니콜은 전부인 가족을 위해 자신의 감정은 무시하며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모님은 니콜을 ‘아기 천사’로 불렀습니다. 니콜은 부모님의 기대대로 모든 면에서 완벽해지려 노력하였고, 외향적으로는 활달했습니다.

니콜이 10대에 들어설 무렵 파티에 갔다가 충혈된 눈으로 혀가 꼬인 소리를 하며 비틀비틀 집에 돌아온 일이 있었습니다. 엄마는 ‘설마’ 했지만, 니콜이 써 놓은 글을 보고 술을 마신 것을 알고는 물건을 집어 던지며 울면서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네가 이 엄마를 죽이려는 거구나! 너 때문에 심장병이 도져서 당장 이 자리에서 죽어버릴 것 같아.”

엄마가 심장병 수술을 받은 지 얼마 안 되는 때였습니다. 니콜은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어머니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고 그렇게 또 자기 뜻대로 무언가를 결정하는 권한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니콜의 어머니의 부모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어렸을 때 분명 자유를 침해당했을 것이고 그렇게 자랐기에 자신도 자녀의 자유를 침해해도 된다고 당연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아직 10대도 아닌데 술을 마신 것에 대해 그렇게 반응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겠지만, 아이들은 나의 선택에 대해 부모가 영향을 받는다는 것에서 ‘경계’가 모호한 인성을 가지며 성장하게 됩니다. 

사람 사이에는 ‘경계’가 있습니다. 그 경계를 우리는 ‘자유’라고 부릅니다. 상대의 자유를 강요하는 것은 상대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행위입니다. 다시 말해 상대를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보아주지 않고 나의 종속된 물건으로 보는 행위입니다. 하느님도 인간에게 죄지을 자유를 허락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가리옷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지옥에 가겠다고 하면 예수님은 말리지 않습니다.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상대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지옥에 가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입니다. 자유를 침해당한 사람은 결국 남의 자유를 침해하는 죄를 짓게 됩니다. 우리는 절대로 자녀들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되고 보장해 주어야 합니다. 

제가 유학 갔을 때 처음 말을 배울 때는 인도 신학생과 아프리카 신학생과 함께 방을 쓴 적이 있습니다. 특별히 아프리카에서 온 신학생은 네 것, 내 것 개념이 없었습니다. 빌려달라고 하더니 빌려 간 것들을 하나도 되돌려주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가족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로서는 돈을 빌려 가고 갚지 않으면 강도입니다. 그러나 어렸을 때 경계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은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그 강도질을 하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존중하는 것을 먼저 배우게 하기 위해서는 부모가 자녀에게 먼저 자유의 중요성을 알려주고 자녀 스스로 그 자유를 책임감 있게 사용할 수 있는 수련을 할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강요당해서 끌려다니는 삶을 살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먼저 나의 자유를 목숨 걸고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선이나 좋은 일도 절대 남에게 휘둘려서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배 한 척을 마련하신 이유가 이것입니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1995)에서, 주인공 ‘윌리엄 월레스’는 오직, 스코틀랜드의 자유를 위해 높은 이상과 정의로움이 가득한 용감한 심장이 이끄는 대로 살다 죽습니다. 자유가 빼앗기는 것을 눈 뜨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13세기 말엽(1280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왕가는 서로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왕이 후계자 없이 죽자, 포악한 이교도로 악명 높던 잉글랜드 왕 ‘롱생크’가 스코틀랜드를 차지하게 됩니다. 스코틀랜드의 귀족들은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웠고, 롱생크는 작위와 영토라는 욕망의 미끼로 그들을 조정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전제 군주 ’롱생크’는 서서히 스코틀랜드 백성을 무참히 살해하는 등 폭정을 시작하게 되고, 인종청소의 하나로 반항심 강한 스코틀랜드인의 종자를 몰살시키기 위해, 결혼 첫날밤 신부를 잉글랜드 지주가 차지할 권리를 주는 “프리마 노테(초야권)”라는 제도를 부활하여 스코틀랜드 백성에게 큰 치욕과 좌절감을 주게 된다. 이러한 금수만도 못한 제도를 피해 마을 청년 ‘월레스(멜 깁슨)’는 사랑하는 처녀 ‘머론’과 비밀 결혼을 올리고 사랑을 키워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월레스는 자신의 신부를 욕보이려는 군인을 죽이고 달아나게 되고, 급기야 신부는 잉글랜드 군인에게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어릴 적 아버지와 형을 잉글랜드 군인에게 잃은 월레스는 저항군의 지도자가 되어 잉글랜드와 전쟁을 시작하게 됩니다. 월레스는 격자무늬 킬트(Kilt:스코틀랜드의 남자가 전통적으로 착용한 치마형 하의) 복장과 얼굴에는 파란색의 물감으로 강인한 전사의 의지를 채색하고 용감하게 돌격하여 수적으로 절대 우세한 잉글랜드군을 파죽지세로 누르며 점점 ‘롱생크’왕을 압박해 나갑니다. 

롱생크왕은 무능한 자기 아들 대신 뛰어난 프랑스 출신 세자빈 ‘이사벨 공주(소피 마르소)’를 파견하여 월레스와의 협상을 시도하라 명합니다. 이때 영특한 이사벨 공주는 순수하고 열정적인 반군 지도자 월레스의 애국심과 뜨거운 열정에 사랑을 느끼게 되고, 잉글랜드의 간교한 계략(앞으로는 협상을 뒤로는 야습)을 알려줍니다. 잉글랜드의 계략을 알게 된 월리스는 협상 대신 전쟁에서 연승을 거두게 됩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최고의 귀족인 ‘부르스 백작’은 나환자인 자신의 교활한 정치인 아버지의 사주를 받아 백작들을 회유하여, 월레스를 잉글랜드에 바치는 대가로 자신들은 권력과 영토를 나눠 가지게 됩니다. 이런 계략에 속아 평화적 협상을 위해, 귀족 회의에 단신으로 참석한 월리스는 잉글랜드 군인에게 체포되어 런던의 롱생크 왕에게 압송됩니다. 

“자비(Mercy)”를 외치며 충성서약을 하면 살려준다는 회유에도 굴복하지 않고 갖은 고문 속에서도 그는 “자유(Freedom)”을 외치며 장렬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공개처형 후 그의 사지는 갈기갈기 찢겨서 머리는 런던 다리에 걸렸고, 팔과 다리는 영국의 네 군데 변방에 경고용으로 걸리게 되나, 이를 계기로 분노한 스코틀랜드의 백성들과 귀족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의 정신을 이어받아 잉글랜드와 ‘베노번 전투’에서 대승리를 하며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쟁취하게 됩니다. 

월레스가 ‘스털링’ 전투에서 수적으로 우세하고 훈련이 잘된 잉글랜드 군인들 앞에서 벌벌 떨며 무기를 버리고 도망가려 할 때 한 연설을 들어봅시다. 

“스코틀랜드의 자손이여! 난 윌리엄 월레스요. 여러분은 폭정에 도전하고자 정의의 칼을 뽑았소. 여러분은 자유인이요! 자유인으로서 싸우러 온 거요. 저 훈련된 잉글랜드 병사들을 상대로 싸우다 죽을 수도 있소, 하지만 도망치면 당분간을 살 수 있겠지만 세월이 흘러 죽게 되었을 때, 오늘부터 그때까지의 시간을 맞바꾸고 싶을 거요. 이 단 한 번의 기회를 얻어 다시 적에게 외치고 싶을 거요. 목숨을 빼앗을 수 있지만, 자유를 빼앗진 못할 거라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가끔은 심장에서 보내는 뜨거운 소리(Brave Heart)를 따라 자유롭게 생각하고 신념 있게 행동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더 숭고하고 고결하게 만들어 가야 합니다. 이 자유를 지킬 수 있는 용기는 가정에서부터 키워집니다. ‘내 부모도 함부로 하지 못한 나의 자유인데!’라는 생각을 키워줘야 합니다. 

다행히 저는 어머니가 7살까지만 키워주는 것이고 나머지 삶은 나의 선택에 달렸고 또 책임도 내가 져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셔서 자유롭게 선택하고 자유를 존중하며 살 줄 알게 성장하였습니다. 그런데 사회에 나오니 그렇지 않았습니다. 특히 군대에 갔더니 더 그랬습니다. 자대에 배치되자 일병 선임이 담배를 주면서 피우며 이야기를 들으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아무 생각 없이 “저는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더니 그때부터 버릇이 없다고 저를 갈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끝까지 피우지 않았습니다. 하느님도 터치하지 않는 나의 자유를 인간이 터치하게 두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의 경계는 내가 지키는 것입니다. 물론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지만 자유가 먼저 나의 것이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봉헌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나의 자유를 침해당하는데도 분노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의 자유도 존중하지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나 자신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자유는 그 사람의 존엄성입니다. 그것을 잃으면 다 잃는 것입니다. 자녀의 자유를 빼앗아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리고 나의 자유를 그 누구에게 빼앗겨서도 안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신앙인은 어떤 것에 열심히 해야 할까요?

 

저 때에는 고3 학력고사 체력장이란 것이 있어서, 학력고사 점수에 체력장 만점을 받으면 20점이 가산되었습니다. 그래서 운동장에서 꽤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열심히 하지 않으면 거의 모두가 거저 받는 20점을 못 받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달리기를 정말로 못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보통 13초 이내로 들어오는 100m 달리기를 매번 16초 이상의 느린 속도로 결승점에 들어왔습니다. 이 친구를 향해 체육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너 열심히 달리지 않을래? 걸어가도 너보다는 빠르겠다.” 
 
이 친구는 정말 열심히 달렸는데 안 되는 것을 어떻게 하냐면서 하소연했습니다.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것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열심히만 해서는 안 되는 것도 있습니다. 즉, 열심히 하지 않고 다른 길을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의 전환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조건 열심히 하면 좋은 것으로 착각합니다. 
 
‘열심’이라는 것은 열심히 해야 할 것에 집중해야 커다란 성과를 가져옵니다. 다른 것에 열심히 하면 오히려 잘못된 결과만 가져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인은 어떤 것에 열심히 해야 할까요? 하느님의 일에 열심히 하고, 하느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하는데 열심히 해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아주 열심히 살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열심한 삶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단식, 자선, 기도, 그리고 율법의 준수는 어떤 사람도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열심을 틀렸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 자기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열심’이 사람들은 혼란을 느꼈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틀린 말일까요? 아닙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산발한 채 이곳저곳을 다니며 이상한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의 말을 그 누가 믿었겠습니까? 의심할 수 없는 진실을 말해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말에 사람들이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여기에 계시는구나.”라면서 예수님께 최고의 예우를 취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더러운 영이 인정하는 말을 무조건 거부하면서,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서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에 반해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는 말도 안 되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열심을 보면서 오히려 굳게 믿었습니다. 
 
잘못된 열심을 보고서 믿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열심, 사랑의 실천을 위한 열심만이 주님을 진정으로 알아볼 수 있게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람은 언제 가서야 자연을 정복하고 굴복시키고 제압하고 폭행하고 파괴하는 일을 그만둘 것인가.

- 라인홀트 메스너

 

 

완벽함

 

완벽한 조각상을 만드는 조각가가 있었습니다. 그의 조각상은 진짜 사람인지 조각상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조각가에게 천사가 나타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말해주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한 조각가는 자기와 똑같은 조각상 11개를 만듭니다. 그리고 자신을 데리러 온 천사를 피하려고 조각상 사이에 숨었습니다. 천사는 진짜 조각가를 구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얼른 하느님께 가서 물었습니다. 
 
“똑같은 사람이 12명인데, 제가 데려올 사람은 한 명밖에 없을 때 어떻게 선택해야 합니까?” 
 
하느님으로부터 방법을 들은 천사는 조각상 사이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조각상들은 완벽해 보이지만 약간의 결함이 있구나.” 
 
이 말에 조각가는 튀어나와서 “결점이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말하며 따졌습니다. 그 순간 천사는 웃으며 말합니다. 
 
“드디어 잡았다. 너무 완벽하다는 것이 결점이다. 세상 어디에도 완벽한 것은 없다. 자 이제 죽을 때가 되었다.” 
 
우리는 완벽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하느님만이 완벽합니다. 그 점을 기억하면서 겸손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마르 3,11)

 

가짜와 진짜 사이에 우리가 있다. 아는 것과 사는 것은 분명 다르다. 진짜같은 가짜를 알아보신다. 가짜를 정화하여 우리 인생을 살게하시는 주님이시다. 진짜 주님 사랑을 잊고 살았다. 언제나 우리 편이 되시는 사랑의 주님이시다. 

가짜에 갇혀있는 우리를 당신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 가짜를 버리면 진짜가 보인다. 하느님께 속한 우리들 삶이다. 아는 것보다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하느님의 힘을 아는 사람은 맑은 사랑으로 나아간다. 

참된 사랑은 가짜를 녹여 진짜가 되게한다. 단 한 사람의 사랑을 통해 더러운 영들은 치유를 체험한다. 가짜를 치유하는 시간이다. 하느님께서는 아는 것보다 진짜로 살아가는 우리 삶을 더 좋아하신다. 

삶의 중심을 고백하는 사랑의 오늘이다. 사랑은 아는 것보다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단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사랑하는 것이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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