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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1월 21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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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2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

 

 

2022년 1월 21일 (금)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아녜스 성녀는 3세기 후반 또는 4세기 초반 로마의 유명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신심이 깊었던 그녀는 열네 살 무렵의 어린 나이에 순교했습니다.

청혼을 거절한 데 앙심을 품은 자가 고발하여 신자임이 드러났으나 끝까지 자신의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유약한 나이에 아녜스 성녀가 보여 준 위대한 신앙의 힘’을 높이 칭송했습니다. 

교회는 아녜스 성녀를 모진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증언하고자 정결을 지킨 순교자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녜스 성녀는 한 마리 양을 안고 있는 모습으로 자주 표현되고 있습니다.

 

 

✠ 오늘 제1독서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었지만 놓아주며, 그에게 자신의 진심을 호소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고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을 주시고자,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부르시어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월 21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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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1사무 24장 3-21절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

 

그 무렵 


사울은 온 이스라엘에서 가려 뽑은 삼천 명을 이끌고, 다윗과 그 부하들을 찾아 ‘들염소 바위’ 쪽으로 갔다. 


그는 길 옆으로 양 우리들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동굴이 하나 있었는데 사울은 거기에 들어가서 뒤를 보았다. 그때 다윗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그 굴속 깊숙한 곳에 앉아 있었다. 


부하들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가 너의 원수를 네 손에 넘겨줄 터이니, 네 마음대로 하여라.’ 하신 때가 바로 오늘입니다.” 다윗은 일어나 사울의 겉옷 자락을 몰래 잘랐다. 


그러고 나자, 다윗은 사울의 겉옷 자락을 자른 탓에 마음이 찔렸다. 


다윗이 부하들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는 내가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인 나의 주군에게 손을 대는 그런 짓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어쨌든 그분은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가 아니시냐?” 


다윗은 이런 말로 부하들을 꾸짖으며 사울을 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사울은 굴에서 나와 제 길을 갔다. 


다윗도 일어나 굴에서 나와 사울 뒤에다 대고,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 하고 불렀다. 사울이 돌아다보자, 다윗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였다. 

10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임금님께서는, ‘다윗이 임금님을 해치려 합니다.’ 하고 말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곧이들으십니까? 

11 
바로 오늘 임금님 눈으로 확인해 보십시오. 오늘 주님께서는 동굴에서 임금님을 제 손에 넘겨주셨습니다. 임금님을 죽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저는 ‘그분은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니 나의 주군에게 결코 손을 대지 않겠다.’ 고 다짐하면서, 임금님의 목숨을 살려 드렸습니다. 

12 
아버님, 잘 보십시오. 여기 제 손에 아버님의 겉옷 자락이 있습니다. 저는 겉옷 자락만 자르고 임금님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저에게 임금님을 해치거나 배반할 뜻이 없다는 것을 알아주시고 살펴 주십시오. 제가 임금님께 죄짓지 않았는데도, 임금님께서는 제 목숨을 빼앗으려고 찾아다니십니다. 

13 
주님께서 저와 임금님 사이를 판가름하시어, 제가 임금님께 당하는 이 억울함을 풀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제 손으로는 임금님을 해치지 않겠습니다. 
14 
‘악인들에게서 악이 나온다.’는 옛사람들의 속담도 있으니, 제 손으로는 임금님을 해치지 않겠습니다. 

15 
이스라엘의 임금님께서 누구 뒤를 쫓아 이렇게 나오셨단 말씀입니까? 임금님께서는 누구 뒤를 쫓아다니십니까? 죽은 개 한 마리입니까, 아니면 벼룩 한 마리입니까? 

16 
주님께서 재판관이 되시어 저와 임금님 사이를 판가름하셨으면 합니다. 주님께서 저의 송사를 살피시고 판결하시어, 저를 임금님의 손에서 건져 주시기 바랍니다.” 

17 
다윗이 사울에게 이런 사연들을 다 말하고 나자, 사울은 “내 아들 다윗아, 이게 정말 네 목소리냐?” 하면서 소리 높여 울었다. 

18 
사울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네가 나보다 의로운 사람이다. 내가 너를 나쁘게 대하였는데도, 너는 나를 좋게 대하였으니 말이다. 

19 
주님께서 나를 네 손에 넘겨주셨는데도 너는 나를 죽이지 않았으니, 네가 얼마나 나에게 잘해 주었는지 오늘 보여 준 것이다. 

20 
누가 자기 원수를 찾아 놓고 무사히 제 갈 길로 돌려보내겠느냐? 네가 오늘 나에게 이런 일을 해 준 것을 주님께서 너에게 후하게 갚아 주시기를 바란다. 

21 
이제야 나는 너야말로 반드시 임금이 될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 왕국은 너의 손에서 일어설 것이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제 영혼이 당신께 숨나이다. 재앙이 지나갈 그때까지, 당신 날개 그늘로 피신하나이다.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께, 지극히 높으신 분께, 나를 위하시는 하느님께 부르짖네. 하늘에서 나에게 구원을 보내시어, 나를 짓밟는 자를 부끄럽게 하시리라. 하느님은 자애와 진실을 보내시리라.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 하늘 높이 오르소서. 당신 영광을 온 땅 위에 드러내소서. 당신의 자애 크시어 하늘에 이르고, 당신의 진실 크시어 구름에 닿나이다.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르 3장 13-19절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부르시어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셨다.

 

그때에 

13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14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15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16 
이렇게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17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18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19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하느님, 성인들 가운데 복된 아녜스에게 동정과 순교의 두 월계관을 함께 씌워 주셨으니 저희가 이 성사의 힘으로 모든 악을 용감히 이겨 내고 마침내 천상 영광에 이르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양우철 야고보 신부 집전

 

 

2022년 1월 21일 (금)
양우철 야고보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1월 21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신 목적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신 다음,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성경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산’은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 기도하는 장소입니다(마르 6,46 참조). ‘원하시는’ 열둘을 ‘가까이 부르시는’ 행위는 예수님의 주도권을, 그분께 ‘나아가는’ 행위는 사도들의 순명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장면을 상상하면 참으로 장엄하고 거룩하게 느껴집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신 목적은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파견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사명이 파견의 사명보다 먼저 언급된 것이 인상적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고 친교를 나누며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복음이 무엇인지를 배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지냄’은 사도들의 정체성이며, 파견 활동의 원천이 됩니다.

파견에는 ‘선포하는 활동’과 ‘마귀들을 쫓아내는 활동’이 포함됩니다. 열두 사도는 예수님과 함께하는 공동체 안에서 경험하고 깨달은 것을 선포하고, 마귀들을 쫓아내야 합니다. 열두 사도가 해야 하는 일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과 같습니다. 앞서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공생활을 이렇게 요약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마르 1,39).

예수님의 사명은 제자들을 통하여 계속됩니다. 그리스도인은 현재를 살아가는 그분의 제자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지내며’, 이웃에게 ‘파견되어’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나는 누구의 뒤를

 

"이스라엘의 임금님께서 누구 뒤를 쫓아다니십니까?“ 

어제 사무엘기에서 사울은 다윗에 대한 의심을 거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얘기를 보면 사울은 다시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닙니다. 

이것을 보면 한 번 드리운 의심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용서한 것 같은데도 다시 괘씸한 생각이 들고 미움이 되살아나는 것처럼 믿기로 하였지만 눌러놓은 뱀이 머리 쳐들 듯 의심이나 불신도 되살아나곤 하지요. 

그만큼 한 번 들어온 의심은 나가기 힘들다는 것인데 이는 뿌리를 근본적으로 제거하지 않으면(근절하지 않으면) 다시 풀이 나는 것처럼 의심도 그 뿌리를 근절하지 않으면 그렇게 됩니다. 

그렇다면 의심이나 불신은 어떻게 근절할 수 있겠습니까? 전과 똑같이 믿으려고 하면 다시 또 똑같이 의심하게 될 것이니 전과 다르게 믿으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전에 믿으려고 했던 것은 믿으려고 했다기보다는 의심하지 않으려는 식이었을 것이고 그런 소극적인 방식으로는 미워하지 않으려는 것이 최고로 잘 돼야 미워하지 않는 것이듯 최고로 잘 돼야 의심하지 않을 것이고 믿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나마도, 앞서 봤듯이, 의심하지 않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제 경험으로 볼 때 속을 셈치고 무조건 믿어주겠다고 해야 하고, 더 근본적으로는 부모가 자식에게 계속 속으면서 믿어주듯 그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니 그것은 믿는 것이라기보다는 사랑하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지 못하는 것은 내가 사랑하지 못하기에 그도 나처럼 사랑하지 않을 것이고, 나를 배신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기에 내가 그를 진정 사랑하게 되면 의심의 근본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처럼 시기에 의해서 의심하게 된 것이라면 더더욱 사랑이 의심의 근본 치료제인데 문제는 그 사랑을, 진정한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지닐 수 있느냐 그것입니다. 

제 생각에 그것은 그와 나를 뛰어넘는 사랑을 사랑을 경험함으로써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울이 다윗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임금님께서 누구 뒤를 쫓아 이렇게 나오셨단 말씀입니까? 임금님께서는 누구 뒤를 쫓아다니십니까?"라는 말을 듣듯이 시기하는 사람이 시기하는 사람에게서 시선을 돌리기가 쉽지 않지만, 시기로 인한 불행의 끝장에서, 어제 말씀드렸듯이, 나의 불행을 깨닫고 그리고 나의 행복을 위해서 시선을 하느님 사랑에 돌려야 하고 머물러야 합니다. 

이는 응달에서 양달로 박차고 나가듯 시기와 미움의 암투에 진절머리와 넌덜머리를 내고 하느님의 사랑에로 나가는 것이요 머무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사울과 다윗의 차이요, 이것이 사울이 다윗과 싸움 이전에 사랑에서 지는 이유입니다. 

다위은 자기를 해치는 사울을 하느님에게서부터 봅니다. 나를 시기하고 미워하는 사울을 그저 한 인간으로 보거나 나를 미워하는 사람으로 보지 않고 계속 하느님의 사람으로 봅니다. 

그래서 그는 원수인 사울을 죽이라는 부하들을 이렇게 나무랍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인 나의 주군에게 손을 대는 그런 짓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어쨌든 그분은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가 아니시냐?" 

하느님의 사람은 적대자도 하느님의 사람으로 봅니다. 자기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원수도 하느님 사랑의 대상으로 봅니다. 

아무튼, 사울은 다윗이 어디 있나, 어디서 무엇을 하나 하며 계속 다윗을 쫓았는데 그러지 말고 하느님을 쫓았어야 했고, 하느님 사랑에 머물렀어야 했습니다. 

이런 사울을 보는 우리도 그런 내가 아닌지 돌아보고 하느님 사랑을 쫓아 과감히 미움과 시기의 응달에서 박차고 나가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그리스도께 뽑히면 보장되는 행복 : ‘지금’을 살게 됨.

 

오늘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직접 뽑으시는 내용입니다. 특별한 점은 당신이 뽑은 사도들에게 “당신과 함께 머물게” 하는 특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특권일까요? 주님과 머묾이 왜 좋은 것일까요? 주님과 함께 머물면 자유가 없는데도 말입니다. 

우리의 모든 고통은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지금 십자가의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 그 고통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면 쉬어도 불안합니다. 

미래를 위해 뭐라도 해야 하는데 그러면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과거에 해결되지 않은 기억을 소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려 지금을 소진합니다. 그렇게 과거에 얽매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뭐 해야 하는지 알려주시며 과거의 안 좋은 기억을 소환할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영화 ‘기억의 밤’(2017)은 과거의 기억 속에서 사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잘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영화는 한 가족이 새집으로 이사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재수생인 동생과 모든 것에 완벽한 형은 우애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형이 조금씩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형이 조금씩 형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을 해치려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니 부모도 조금 이상합니다. 친부모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는 가족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낍니다. 결국, 집을 빠져나와 경찰서로 도망칩니다. 가족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 같다고 신고합니다. 그런데 경찰서에서 신원조사를 해 보고 거울을 보니 자신은 20대 초반의 재수생이 아니라 이미 40이 넘은 아저씨였습니다.

이 모든 것은 형이 꾸민 일이었습니다. 형은 사실 20대 초반입니다.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범인을 찾다가 결국 찾아냈는데 그 범인이 기억상실증에 걸려 자신의 범행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사 오는 중에 난 사고 이후의 모든 기억이 지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최면을 걸어 모든 것을 20년 전으로 돌려놓고 그 범인이 자기 부모를 살해한 것을 기억해 낼 수 있도록 꾸민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범인은 조금씩 기억을 되찾게 되었고 결국 이들이 자신의 가족이 아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결과는 어떨까요? 자신은 착한 재수생이고 형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동생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살인자였음을 알고는 자살합니다. 범임을 찾아 원수를 갚으면 속이 후련할 것이라 믿어 고생 끝에 범인의 기억을 되살려주기는 했지만 결국 허무함을 깨닫고 형도 자살합니다. 이렇게 영화는 허무하게 끝납니다. 과거에 얽매인 인생도 그러할 것입니다. 

과거는 과거로 묻어버리고 현재를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살아오면서 수치스럽고 창피하고 분노가 끌어 오르는 일들이 그렇게 쉽게 잊힙니까? 혼자 힘으로는 잊히지 않습니다. 그것을 잊어도 괜찮다고 보증해 줄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그 누군가는 나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이여야 하고, 또 현재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줄 수 있는 분이어야 합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밖에 없고, 성장하면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러한 삶으로 부르십니다. 예수님과 있으면 과거와 미래가 사라집니다. 현재만 남습니다. 지금 해야 할 일을 지시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행복입니다. 

‘첫 키스만 50번째’(2004)는 하와이 라이프 파크에서 근무하는 수의사 헨리와 루시의 엉뚱한 데이트를 그린 로맨틱 코미디 영화입니다. 헨리는 그냥 바람둥이였지만 식당에서 우연히 만난 루시와 사랑에 빠집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루시는 교통사고로 매일 교통사고 이전의 기억으로 되돌아갑니다. 잠들었다 깨면 모든 기억이 원위치가 되니 최대한 모든 걸 쏟아부어야 하는데, 그 모든 것이 또 사라져버립니다. 그래도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요? 

헨리는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매일 그녀를 유혹합니다. 물론 키스도 50번이나 합니다. 하지만 루시에겐 매일의 키스가 첫 키스입니다. 그래도 헨리는 청혼합니다. 하루에 키스하고 잠자고 청혼까지 다 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 날 그녀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헨리는 매일 짧은 비디오테이프를 만들어서 모든 사실을 한 시간 안에 다 받아들일 수 있게 합니다. 그리고 루시도 매일 일기를 쓰며 아침에 모든 상황을 파악할 수 있도록 만듭니다. 그렇게 둘의 사이는 좋아지는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헨리가 자신을 위해 해마 연구를 하는 것을 포기하려 한다는 것을 알자 자기 때문에 그런 모든 것을 희생하는 헨리를 떠나보냅니다. 같이 추억을 공유할 수도 없고 결혼이나 아이를 갖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고 무엇보다 자신을 위해 꿈과 생활까지 포기하며 곁에 있어 주려는 헨리의 모습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둘은 그간의 모든 기억을 불태우고 서로 모르는 사람으로 지내게 됩니다. 

가끔 만나는 때가 있었지만 둘은 눈인사만 할 뿐이었습니다. 해마를 연구하기 위해 멀리 있는 길을 떠나는데 그의 가족들이 헨리를 붙잡습니다. 그녀가 헨리만 보면 기억은 못 해도 기뻐 노래하고 그의 얼굴만 그린다는 것입니다. 꿈에 헨리를 보는 것입니다. 헨리는 다시 그녀를 유혹하고 첫 키스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습니다. 어느 날 눈을 떠 본 루시는 자신이 결혼하였고 딸이 있고 헨리가 남편이고 그와 함께 해마 연구를 위해 요트에 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행복해합니다. 

예수님은 헨리와 같은 존재입니다. 내 기억이 다 사라져도 나를 사랑하여 옆에 있을 보증인입니다. 그러니 과거에 잊고 싶은 것은 잊어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내 잊힌 기억들을 대신 책임져 주실 만큼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할 수 있는 대로 그분 뜻에 충실하면 됩니다. 그러면 매일 똑같은 일상이지만 매일 새롭고 신비롭습니다. 매일 기쁩니다. 과거의 우울과 미래의 걱정에서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오늘 뽑힌 사도 중 가리옷 유다는 그리스도께 뽑혔음에도 자신을 잊기를 거부하였습니다. 미래의 걱정에 사로잡혔습니다. 자기 뜻대로 살아가려 했기 때문에 예수님도 돌아가시게 하고 자신도 죽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좋은 점은 모든 것, 과거의 꿈과 기억과 소망까지도 그분께 다 맡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분으로부터 뽑히고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제 할 일은 그분과 머무는 특권을 누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기십시오. 이를 위해 그분이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그리고 매일 새롭게 시작하십시오. 매일 같은 날이지만, 날마다 신비롭고 기쁜 하루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다만 그분이 하느님이시고 나를 사랑하시고 그래서 나를 부르셨고 나와 함께 계심을 믿어야만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제자들에게 주신 세 가지 사명

 

종종 시집을 펼쳐 들고 읽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때 시집을 읽을까요? 아무 때나 시집을 펼치지는 않습니다. 대신 마음이 다른 것으로 꽉 차 있을 때 시집을 펼치게 됩니다. 이때는 시를 읽어도 잘 이해가 되지 않거든요. 그래서 계속 반복해서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시가 이해되면서 동시에 복잡한 마음도 풀어집니다.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에 상처받는 사람이 많습니다. 실제로 상처 주기 위한 말과 행동일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 본인의 지레짐작이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복잡한 심경으로 부정적인 마음을 품기 때문입니다. 
 
시를 이해하며 읽기 위해서는 마음을 비워야 함을 말씀드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삶을 살면서도 마음을 비워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야 시를 잘 읽을 수 있는 것처럼, 상대방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세상 것에 대한 욕심과 나만을 위한 이기심으로 늘 복잡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우리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조용히 나아가서 기도하며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마음을 다스리면서 주님의 뜻을 알 수 있고, 그 뜻을 실천하면서 얻는 행복이 얼마나 큰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는 주님께서도 직접 모범을 자주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비롯해서 자주 산에 올라가셔서 기도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모세는 산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고, 예수님께서도 산에 올라가셔서 하느님 나라의 기본 교육이라 할 수 있는 산상수훈인 진복팔단을 발표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 전날 밤에 올리브 산에서 뜨거운 기도를 올리셨던 것도 우리는 기억합니다. 이렇게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었고, 중요한 가르침이나 결정을 위해 꼭 필요한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기도하시면서 마음을 비우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사도직을 부여하는 순간 역시 매우 중요했기에 하느님을 만나는 산에 가셨던 것입니다. 
 
특별히 제자들에게 주신 세 가지 사명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사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주님과 함께 지내야 한다는 것. 
 
둘째, 파견되어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는 것. 
 
마지막으로 마귀들을 쫓아내야 한다는 것. 
 
우리도 어떻게 사는 것이 정답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주님을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세상에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쉽지 않은 삶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계속해서 비워가면서 주님의 마음으로 채운다면 불가능한 삶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나는 똑똑한 것이 아니다. 그저 문제를 더 오랫동안 연구할 뿐이다.

- 알버트 아인슈타인

 

 

천천히 걸으세요.

 

경관이 아름다운 산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이 산의 경관은 빼어났지만, 산길이 너무 험했습니다. 그래서 우뚝 솟은 산봉우리에 오르는 것이 너무 힘들어 발밑만 보고 앞으로 나갈 뿐이었습니다. 당연히 주변의 경치를 볼 수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의 표지판을 보게 되었습니다. 
 
“천천히 걸으세요. 풍경을 감상하는 걸 잊지 마세요!” 
 
산을 오를 때만 서두를까요? 이 세상을 살면서도 우리는 계속 서두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름다운 모습, 감명 깊은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기도를 바치면 곧바로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그러나 곧바로 이루어지면 기도가 이루어지는 과정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손길을 볼 수가 없습니다. 
 
무엇이든 서두르지 말아야 합니다. 마라톤을 뛸 때 초반에 전력 질주를 하면 결승점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인생은 마라톤보다 더 길고 험한 여정의 연속입니다. 서두르지 않으면서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손길을 발견하는 사람만이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들을 사도로 이름하셨다. (마르 3,14)

 

삶의 최전방에는 언제나 뜨거운 봉헌이 있다. 새로운 삶이 주어졌다. 참된 행복을 잃어버린 우리들 삶이다. 평범한 이들을 부르시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생활이 되시는 생활의 하느님을 만나게된다. 평범함을 꿰뚫는 것은 언제나 평범함이었다. 

평범함을 통해 우리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된다. 보통의 평범함이 만들어가는 아름다운 사람의 여정이다. 평범함 위에 피어나는 희망이 참된 희망이다. 희망의 깨끗한 얼굴들이 평범한 일상의 기쁜소식이 되었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평범한 열두 제자들이다. 평범함의 주소에서 출발했기에 평범함에 감사드린다. 신앙의 참기쁨은 평범함뒤에 숨어계신 평범한 주님을 만나는 기쁨이다. 평범함이 빚어내는 새로움이다. 

이제부터 삶의 이야기가 달라진다. 작은 것에 감사하게 된다. 평범함을 믿게 되었다. 우리가 사랑하지 않으면 안되는 평범한 일상의 기쁨이다. 쓰다 버린 이름이 아닌 가장 소중한 인격이 있다. 

심장이 뛰는 인격을 부르시는 주님이시다. 평범함의 기쁨으로 돌아가야 할 우리 교회의 모습이다. 평범함이 가장 큰 선물이다. 평범함의 최전방에 계시는 생활의 주님이시다. 생활을 바꾸어주시는 주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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