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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1월 23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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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2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3주일 -

 

 

2022년 1월 23일 연중 제3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에즈라 사제가 나무 단 위에 올라 백성 앞에서 율법서를 펴자, 레위인들이 하느님의 율법을 번역하고 설명하면서 읽어 줍니다.

 

 

✠ 오늘 제2독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를 펴시고,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월 23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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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느헤 8장 2-4ㄱ절, 5-6절, 8-10절

 

레위인들은
율법서를 설명하면서
읽어 주었다.

 

그 무렵 


에즈라 사제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는 모든 이로 이루어진 회중 앞에 율법서를 가져왔다. 때는 일곱째 달 초하룻날이었다. 


그는 ‘물 문’ 앞 광장에서, 해 뜰 때부터 한낮이 되기까지 남자와 여자와 알아들을 수 있는 이들에게 그것을 읽어 주었다. 백성은 모두 율법서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율법 학자 에즈라는 이 일에 쓰려고 만든 나무 단 위에 섰다. 


에즈라는 온 백성보다 높은 곳에 자리를 잡았으므로, 그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책을 폈다. 그가 책을 펴자 온 백성이 일어섰다. 


에즈라가 위대하신 주 하느님을 찬양하자, 온 백성은 손을 쳐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였다. 그런 다음에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 주님께 경배하였다. 레위인들은 


그 책, 곧 하느님의 율법을 번역하고 설명하면서 읽어 주었다. 그래서 백성은 읽어 준 것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느헤미야 총독과 율법 학자며 사제인 에즈라와 백성을 가르치던 레위인들이 온 백성에게 타일렀다. “오늘은 주 여러분의 하느님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도 울지도 마십시오.” 율법의 말씀을 들으면서 온 백성이 울었기 때문이다. 

10
에즈라가 다시 그들에게 말하였다.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단 술을 마시십시오. 오늘은 우리 주님께 거룩한 날이니, 미처 마련하지 못한 이에게는 그의 몫을 보내 주십시오.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이 바로 여러분의 힘이니, 서러워하지들 마십시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
당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생기 돋우고, 주님의 가르침은 참되어 어리석음 깨우치네. 주님, 당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

주님의 규정 올바르니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계명 밝으니 눈을 맑게 하네. 주님, 당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

주님을 경외함 순수하니 영원히 이어지고, 주님의 법규들 진실하니 모두 의롭네. 주님, 당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

저의 반석, 저의 구원자이신 주님, 제 입으로 드리는 말씀, 제 마음속 생각,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주님, 당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

 

 

매일미사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1코린 12장 12-30절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형제 여러분, 

12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13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14 
몸은 한 지체가 아니라 많은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15 
발이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해서, 몸에 속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16 
또 귀가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해서, 몸에 속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17 
온몸이 눈이라면 듣는 일은 어디에서 하겠습니까? 온몸이 듣는 것뿐이면 냄새 맡는 일은 어디에서 하겠습니까? 

18 
사실은 하느님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각의 지체들을 그 몸에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19 
모두 한 지체로 되어 있다면 몸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20 
사실 지체는 많지만 몸은 하나입니다. 

21 
눈이 손에게 “나는 네가 필요 없다.”할 수도 없고, 또 머리가 두 발에게 “나는 너희가 필요 없다.”할 수도 없습니다. 

22 
몸의 지체 가운데에서 약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23 
우리는 몸의 지체 가운데에서 덜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특별히 소중하게 감쌉니다. 또 우리의 점잖지 못한 지체들이 아주 점잖게 다루어집니다. 

24 
그러나 우리의 점잖은 지체들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자란 지체에 더 큰 영예를 주시는 방식으로 사람 몸을 짜 맞추셨습니다. 

25 
그래서 몸에 분열이 생기지 않고 지체들이 서로 똑같이 돌보게 하셨습니다. 

26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27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28 
하느님께서 교회 안에 세우신 이들은, 첫째가 사도들이고 둘째가 예언자들이며 셋째가 교사들입니다. 그다음은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 그다음은 병을 고치는 은사, 도와주는 은사, 지도하는 은사, 여러 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29 
모두 사도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예언자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교사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기적을 일으킬 수야 없지 않습니까? 

30 
모두 병을 고치는 은사를 가질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신령한 언어로 말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신령한 언어를 해석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1장 1-4절, 4장 14-21절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

 


우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진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 엮는 작업에 많은 이가 손을 대었습니다. 


처음부터 목격자로서 말씀의 종이 된 이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것을 그대로 엮은 것입니다. 


존귀하신 테오필로스 님, 이 모든 일을 처음부터 자세히 살펴본 저도 귀하께 순서대로 적어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는 귀하께서 배우신 것들이 진실임을 알게 해 드리려는 것입니다. 

그때에 

4,14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15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17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18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우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진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 엮는 작업에 많은 이가 손을 대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의 말대로 “목격자로서 말씀의 종이 된 이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것을 그대로” 믿고, 이스라엘 백성처럼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합시다. 우리가 배운 것은 진실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

 

전능하신 하느님, 성자의 살과 피로 저희를 기르시니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은총으로 저희가 언제나 기뻐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정신철 요한세례자 신부 집전

 

 

2022년 1월 23일 (일)
정신철 요한세례자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1월 23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은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쌓은 뒤(느헤 2,17; 6,15 참조), 율법 학자이며 사제인 에즈라에게 하느님의 율법서를 읽어 달라고 청합니다(느헤 8,1 참조). 에즈라와 레위인들은 하느님의 율법을 읽어 주고 가르치며 설명합니다. 

무너진 도시를 복구하는 외적인 작업도 중요하지만, 하느님과의 관계를 바로 세우고, 하느님 백성의 정체성을 되찾는 내적인 작업이 더욱 중요합니다. 율법의 말씀을 들으면서 백성은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았던 잘못을 뉘우치며 참회의 눈물을 흘립니다. 

느헤미야 총독과 에즈라 사제와 레위인들은 “오늘은 …… 하느님께 거룩한 날”이므로 슬퍼하거나 울지 말라고 하면서,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힘이라고 격려합니다.

나자렛 회당에서 또 다른 기쁨이 선포됩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이 성경 말씀은 “주님의 은혜로운 해”에 관한 기쁜 소식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하느님 말씀은 따뜻한 위로와 희망의 약속일뿐만 아니라, 확실한 실재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안에서 이미 실현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몸을 이룹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로서 우리는 예수님의 길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과 같이 우리의 마음을 ‘가난한 이들, 잡혀간 이들, 눈먼 이들, 억압받는 이들’에게 두어야 합니다. 그럴 때, 이천 년 전 나자렛 회당에서 선포된 ‘오늘’은,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오늘이 되고, 가난한 이들, 잡혀간 이들, 눈먼 이들, 억압받는 이들의 ‘오늘’이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 이루어졌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우리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하느님 말씀

 

지난 주일에는 주님의 능력이 기적으로 나타나 인간의 잔치를 풍요롭게 하는 것에 대해 들었습니다. 오늘은 구원을 주는 주님의 말씀에 대해 듣습니다. 

루가 복음에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주님은 광야의 유혹을 받으시고 성령의 힘을 지니시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십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에서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그것은 이사야 예언서의 한 부분인데 주님께서는 이 구절을 인용하며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어 아버지의 영이 내렸고 그래서 당신이 구원의 말씀을 선포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주님께서도 당신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도를 받아 말씀을 하셨듯이 우리가 선포하는 말씀도 구원의 말씀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적으로 훌륭한 말이 아니라 성령의 말씀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말씀은 자기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기에 듣는 이에게 꼭 필요한 말씀이고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듯 하느님 말씀이 우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지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쁨이 되고 묶인 이에게는 해방이 되며, 눈먼 이는 보게 되며 억압받는 이에게는 자유가 되는데 이처럼 성경 말씀이 듣는 가운데서 이루지게 하는 힘이 바로 성령입니다.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란 같이 듣고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들은 대로 각기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 강림절에 그곳에 모였던 많은 사람들이 경험한 바입니다. 여러 언어의 사람들이 모였지만 각기 자기 지방 말로 알아들었습니다. 성령의 언어는 이렇듯 맞춤형 언어인 것이기 때문이지요. 

제가 본당에 있을 때 주일 강론을 열심히 준비하였습니다. 지금은 강론을 써서 준비하지만 그때는 써서 하지 않고 묵상을 많이 하고 그 자리에서 나오는 대로 하였습니다. 그날도 그렇게 강론한 다음 미사를 마치고 신자들께 인사를 드리는데 많은 분이 '신부님, 오늘 강론 참으로 좋았습니다.'하고 얘기하는 거였습니다. 저는 기분이 좋았고, 잘 들어주셔서 고맙다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신자들이 거의 다 돌아가고 한 자매님이 나오시면서 같은 말씀을 하시는데 그래서 제가 '어떤 말씀이 그렇게 좋으셨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에게 와닿은 말씀은 제가 들려드리고 싶었던 내용이 아니라 얘기를 하던 중에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한 얘기였습니다. 

그 자매님에게는 그 때 그 말씀이 필요했던 것이지 제가 들려드리고 싶었던 말씀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걸 놓고 볼 때 그 말씀은 성령께서 제 안에서 하신 것이었습니다. 지나가는 그 말은 결코 제가 미리 생각한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런데 구원의 말씀이 이루어지려면 말하는 이만 성령을 받아 말씀을 선포해서는 안 되고 듣는 사람도 주님의 말씀으로 구원을 받고자 하는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배고픈 사람이라야 한끼 음식이 그렇게 소중하고, 그 한끼 음식으로도 힘을 얻고 난감한 처지에 처한 사람이라야 조언을 필요로 하고, 비록 대단한 말이 아니더라도  그 말에서 힘과 위로를 얻듯이 주님 말씀이 그립고 고픈 사람이라야 주님 말씀이 구원의 말씀이 됩니다. 

제가 20여 년 전에 결핵환자들과 함께 자활촌을 이루기 위해 시골 분교를 얻어 간 적이 있는데 동네 주민들이 6개월을 반대하였습니다. 분교 주위에 돌무더기를 쌓아 놓고 울타리 밖을 나오면 돌로 쳐 죽인다고 협박을 하여 우리는 그 밖을 나갈 수 없었습니다. 

너무도 절망적인 상황에서 매일 드리는 시편기도는 너무도 절절하였고 기도 중의 하느님 말씀이 이때처럼 제게 주님의 위로와 격려였던 적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구원의 말씀이 가난한 자, 갇힌 자, 억압받는 자에게 전해진 것은 이들이 이렇게 영적인 갈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런 영적인 갈망을 지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말씀의 검’ 사용 자격 ; 사랑 증가를 위한 열정

 

오늘은 ‘하느님의 말씀 주일’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기록된 책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 초반에는 루카 복음 사가가 왜 복음을 정리해 쓰게 되었는지가 나오고, 후반에는 예수님께서 이사야 말씀을 인용하시며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라고 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말씀을 ‘쌍날칼’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히브 4,12)

칼은 위험한 물건입니다. 앞뒤도 분간 못 하는 아이들에게 맡겨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납니다. 물론 더 큰 문제는 칼을 다룰 나이가 되었는데도 관심을 두지 않는 것에 있습니다. 아예 관심이 없거나 칼을 잘못 사용합니다. 

우선 성경에 관심이 없는 우리 모습을 살펴야 합니다. 개신교 신자들에 비하면 가톨릭 신자들은 성경을 많이 읽지 않습니다. 책이나 유튜브에 올라온 것을 보더라도 성경에 관해서는 개신교 것들이 천주교 것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이것은 몰라도 사랑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 나오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몰라도 사랑할 수 있을까요? 

누군가 밤늦게 문을 두드렸다고 생각해봅시다. 당신이 문을 열었더니, 키가 2m나 되는 거구의 사나이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당신 집에 강제로 들어와 당신과 가족을 꼼짝 못 하게 하는 동안에 당신의 가족들은 공포로 떨어야만 했습니다. 

순간 당신은 112를 기억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전화를 몰래 끄집어내 112로 다이얼을 돌릴 수 있다면, 당신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그렇게 한 후 한 대의 경찰차가 당신 집으로 파견되었습니다. 두 명의 경찰관이 그 불청객과 맞서기 위해 허리에 권총을 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우람한 사람은 되받아 쏘았습니다. 이때 두 명의 경찰은 무전기를 사용해 병력을 보강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갑자기 스무 대의 경찰차가 나타났습니다. 당신은 112 덕분에 자신과 가족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루카 복음 사가가 테오필로스를 위해 성경을 기록하였다면 성경은 분명 우리 믿음을 위해 유익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에 대해 알고 싶지 않다는 말과 같습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성경을 모르면 곧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지 않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이고 남을 이롭게 할 마음이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영화 ‘엑시트’를 보신 분이라면 에서 SOS를 의미하는 모스 부호 “따따따 따따따 따따따”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모스 부호는 길고 짧음이 있습니다. 조난 상황에서 자신도 구출하고 타인도 구출할 이것을 기억하십니까? 한번 해 보십시오. 

“따따따 따-따-따- 따따따”

세 번 짧게, 세 번 길게, 다시 세 번 짧게 하는 것입니다. 영화 내내 나오는 이것을 저도 잘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이 말은 ‘위험할 때 이것을 쓸 일이 있겠는가?’라는 교만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112’ 정도는 기억합니다. 위기 상황에서 자신과 가족을 위해 사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것이 성경 말씀입니다. 성경 말씀을 기억하려는 노력이 없다는 말은 자신과 이웃의 영원한 생명에 관한 관심이 없음을 의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성경 말씀의 칼날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남을 찌르는데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경 지식에 대한 열정이 있다면 뭐하겠습니까? 사랑을 증가시키지 못하는 말씀은 오히려 남을 해치는 데 유용합니다. 

‘패트릭 오브라이언’의 ‘위대한 정복자’(Master and Commander)라는 소설을 보면 나폴레옹과의 전쟁 당시에 무적의 함대라고 불렸던 영국 함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함대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함장이었던 잭 오브리 장군의 배인 서프라이즈 호가 신출귀몰하는 프랑스 전함 아하게론 호를 쫓는 이야기입니다. 

그 영국 전함인 서프라이즈 호에 탄 선원들은 모두 그리스도교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항해하는데 자꾸 불운이 겹치자 선원들이 성경 요나서를 펴고 그 배 안에 있는 요나를 찾습니다. 그 요나 때문에 하느님께서 자기들의 배를 저주하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결국, 한 사람을 지목하고 그를 따돌려서 자살하게 만듭니다. 그것이 영국 함대의 관례였습니다. 그리고 그 죽은 사람의 장례식에 모두 모여 요나서를 읽고 주님의 기도를 암송합니다.

이런 예는 역사에 수도 없이 많습니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점령할 때도 성경의 가나안 정복 전쟁을 근거로 삼았습니다. 성경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단으로 빠지고 남을 죽였는지 모릅니다. 말씀의 쌍날칼을 자신이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데 사용한 것입니다. 이렇게 가짜들은 성경의 지식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입니다.

쌍날칼을 사용하려면 훈련을 통한 자격을 얻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을 알고자 하는 열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성경에 나온 하느님 사랑에 대한 지식으로 내 심장이 뚫려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아파서 죽고 더 사랑하는 사람으로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이철환 작가의 『연탄길 2』에 나온 ‘아버지의 생일’을 읽어봅시다. 말씀의 쌍날칼은 우리에게 이렇게 다가와야 합니다. 

비에 젖은 아침 햇살이 콘크리트 바닥에 얼굴을 비비며 도란도란 속삭이고 있었다. 완섭 씨는 갈색 머리칼을 살랑살랑 흔들고 있는 가로수를 바라보며 졸음에 겨운 하품을 했다. 

바로 그때 음식점 출입문이 열리더니 여덟 살 쯤 보이는 여자아이가 어른의 손을 이끌고 느릿느릿 안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의 너절한 행색은 한눈에 봐도 걸인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담배 연기처럼 헝클어진 머리는 비에 젖어 있었다. 퀴퀴한 냄새가 완섭 씨의 코를 찔렀다. 완섭 씨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들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이봐요! 아직 개시도 못 했으니까, 다음에 와요”

“.....”

아이는 아무 말 없이 앞을 보지 못하는 아빠의 손을 이끌고 음식점 중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완섭 씨는 그제야 그들 부녀가 음식을 먹으러 왔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식당에 오는 손님들에게 그들 부녀 때문에 불쾌감을 줄 수는 없었다. 더욱이 돈을 못 받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내준다는 게 완섭 씨는 왠지 꺼림칙했다. 완섭 씨가 그런 생각을 하며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에 여자아이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어, 아저씨! 순댓국 두 그릇 주세요.”

“응, 알았다. 근데 얘야, 이리 좀 와볼래.”

계산대에 앉아 잇던 완섭 씨는 손짓하며 아이를 자기 쪽으로 불렀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음식을 팔 수가 없구나. 거긴 예약 손님들이 앉을 자리라서 말이야.”

아이는 주인의 말에 낯빛이 금방 시무룩해졌다.

“아저씨, 빨리 먹고 갈게요. 오늘이 우리 아빠 생일이에요.”

아이는 잔뜩 움츠린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다 말고 여기저기 주머니를 뒤졌다. 아이는 비에 젖어 눅눅해진 천 원짜리 몇 장과 한 주먹의 동전을 꺼내 보였다.

“알았다. 그럼 최대한 빨리 먹고 나가야 한다. 그리고 말이다. 아빠하고 저쪽 끝으로 가서 앉아라. 여긴 다른 손님들이 와서 앉을 자리니까.“

“예. 아저씨 고맙습니다.”

아이는 자리로 가더니 아빠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아이는 아빠를 데리고 화장실이 바로 보이는 맨 끝자리로 가서 앉았다.

“아빠는 순댓국이 제일 맛있다고 그랬잖아. 그치?”

“응·····.”

간장 종지처럼 볼이 패인 아빠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완섭 씨는 순대국 두 그릇을 갖다 주었다. 완섭 씨는 계산대에 앉아 물끄러미 그들의 모습을 바라봤다.

“아빠, 내가 소금 넣어줄게. 잠깐만 기다려.”

“······.”

아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소금 통 대신 자신의 국밥 그릇으로 수저를 가져갔다. 아이는 국밥 속에 들어 있던 순대며 고기들을 떠서 아빠의 그릇에 가득 담아주었다. 그러고 나서 소금으로 간을 맞췄다.

“아빠, 이제 됐어. 어서 먹어.”

“응 알았어. 순영이 너도 어서 먹어라. 어제저녁도 제대로 못 먹었잖아.”

“나만 못 먹었나 뭐. 근데······· 아저씨가 우리 빨리 먹고 가야 한댔어. 어서 밥 떠, 아빠. 내가 김치 올려줄게.”

“알았어.”

아빠는 조금씩 손을 떨면서 국밥 한 수저를 떴다. 수저를 들고 있는 아빠의 두 눈 가득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완섭 씨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뭉클해졌다. 조금 전 자기가 아이한테 했던 일에 대한 뉘우침으로 그들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다. 

음식을 먹고 나서 아이는 아빠 손을 이끌고 완섭 씨에게 다가왔다. 아이는 아무 말 없이 계산대 위에 천 원짜리 넉 장을 올려놓고 주머니 속에 있는 한 움큼의 동전을 꺼내고 있었다.

“얘야, 그럴 필요 없다. 식삿값은 이천 원이면 되거든. 아침이라 재료가 준비되지 않아서 국밥 속에 넣어야 할 게 많이 빠졌어. 그러니 음식값을 다 받을 수 없잖니?“

완섭 씨는 미소를 지으며 아이에게 천 원짜리 두 장을 다시 건네주었다.

“고맙습니다, 아저씨.”

“아니다. 아까는 내가 오히려 미안했다.”

완섭 씨는 출입문을 나서는 아이의 주머니에 사탕 한 움큼을 넣어주었다.

“잘 가라.”

“네, 안녕히 계세요.”

아픔을 감추며 웃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완섭 씨는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총총히 걸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완섭 씨 눈가에 눈물이 어룽어룽 맺혀 있었다. 민들레 하얀 꽃씨가 콘크리트 바닥 위로 아기똥아기똥 내려앉고 있었다. 말뚝잠을 자던 가로수가 초록손을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우리는 말씀의 칼을 들 용기가 있습니까? 그 칼을 들었다면 누구를 찌르렵니까? 말씀은 나의 ‘사랑을 향한 열정’을 증명하는 유일한 무기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미래를 알 수 없는 우리.

 

예전에 라디오 방송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한 10분 정도 일상 삶에서 느낄 수 있는 깨달음을 쉽게 풀어서 청취자들에게 전달하는 형식이었습니다. 그때 담당 PD가 했던 말 하나가 생각납니다. 
 
“신부님, 주제가 정해진 것이 없지만, 날씨에 관한 이야기만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이 방송은 생방송이 아니라 미리 방송 내용을 녹음했다가 그 날짜에 맞춰서 송출하는 녹음방송이었습니다. 따라서 날씨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가, 실제 날씨와 정반대가 될 수도 있게 됩니다. 예를 들어, 방송에서는 “오늘 날씨가 너무 좋습니다.”라고 했는데, 실제로는 비바람이 거세게 부는 궂은 날씨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20년 2월, 코로나19 바이러스도 날씨처럼 우리는 미리 알 수 없었습니다. 금세 바이러스를 물리쳐서 일상으로 되돌아갈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저만의 생각도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방송에 나오는 전문가들도 감기보다 못하다면서 별것 아닌 것으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1년을 넘어 2년째 코로나바이러스의 공포 속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미래를 알 수 없는 우리입니다. 이점만 봐도 우리가 얼마나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인지를 깨닫습니다. 그래서 주님 없이는 살기 힘듭니다. 주님만이 미래의 희망을 간직할 수 있도록 하며, 이 희망을 품고 지금을 잘 살 수 있도록 해줍니다. 
 
주님께서 이 희망을 오늘 선포하십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장소는 회당이었습니다. 
 
회당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민족적인 종교행사를 위해 매주 안식일마다 모이는 집회 장소였습니다. 이곳에서 종교 전례와 공동 기도가 행해졌습니다. 또한 말씀의 전례가 행해지고, 성경에 대한 해석과 설교가 있었습니다. 
 
이 회당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전해주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포를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이사야는 민족에게 구세주이신 메시아가 온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알리는 메시아의 예언자였고, 그 예언을 모든 국민이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의 장본인이 바로 ‘나다’라고 밝히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공적인 장소에서 공적으로 행하십니다. 주님을 통한 구원의 희망을 간직할 수 있도록,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주님 안에서 힘차게 지금을 살 수 있도록 선포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통해서만 희망을 간직하며 살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더 많이 알수록 상대방을 적으로 바라볼 가능성은 점점 줄어든다.

- 파커 파머

 

 

의심

 

어렸을 때의 부끄러운 기억이 하나 남아있습니다. 같은 동네에 살면서 등하교도 같이했었던 친했던 친구와 완전히 멀어지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일본에 출장을 다녀온 형님이 선물이라면서 일제 ‘흔들어 샤프’를 주었습니다. 흔들면 샤프심이 한 칸씩 나오는 정말 신기했던 샤프였습니다. 당시에는 거의 모두가 연필을 쓸 때였고, 제가 샤프를 들고 나타났으니 아이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게 되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애지중지했던 이 샤프가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샤프를 친한 친구가 쓰고 있는 것을 본 것입니다. 화를 내며 물었습니다. 
 
“이거 내 거 아냐?” 
 
친구는 아버지께서 사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믿을 수 없었습니다. 계속된 의심에 이 친구와 가까이할 수 없었습니다. 친구도 저의 의심하는 마음을 보았는지 저를 멀리했습니다. 이렇게 저희 둘은 멀어졌습니다. 
 
한 학년이 올라간 뒤, 저는 이 오해를 풀 수 있었습니다. 글쎄 그 샤프가 책가방 맨 밑의 받침 아래에 깔려 있었습니다. 저의 근거 없는 의심이었습니다. 
 
의심은 사람을 현혹해 분별력을 어지럽힙니다. 주님께 대한 의심도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합니다. 무조건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만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게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루카 1,21)

 

말씀을 먹고 사는 오늘의 우리들이다. 삶을 견디게 하는 말씀이다. 길을 되찾아 주는 말씀이다. 우리자신을 만나게하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고향 나자렛에서도 말씀이 선포된다. 

우리의 아픔을 헤아려주시는 말씀이다. 감사와 고마움의 말씀이다. 말씀의 길 위에 우리가 살고 우리가 있다. 우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말씀이다. 우리를 찾아오신 말씀이다. 

다시 말씀을 듣고 말씀을 받아들이는 오늘이다. 말씀이 빵이 되고 말씀이 기도가 되는 오늘이다. 갈증을 풀어주고 배고픔을 없애주는 말씀이다. 그래서 산다는 것은 말씀과 함께 살아가는 나날들이다. 

우리의 현실과 우리 삶의 현재에는 나자렛에서 선포되었던 말씀 그대로 지친 우리를 위로하신다. 말씀을 통해 만나게 되는 주님의 살아있는 오늘이다. 말씀으로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말씀 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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