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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1월 19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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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1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주간 수요일 -

 

 

2022년 1월 19일 연중 제2주간 수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소년 다윗은 주님의 도우심으로 무릿매 끈과 돌멩이 하나로 필리스티아전사 골리앗을 이깁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완고함에 슬퍼하시면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안식일에 고쳐 주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월 19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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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1사무 17장 32-33절, 37절, 40-51절

 

다윗은
무릿매 끈과 돌멩이 하나로
필리스티아 사람을 눌렀다.

 

그 무렵 

32 
다윗은 사울에게, “아무도 저자 때문에 상심해서는 안 됩니다. 임금님의 종인 제가 나가서 저 필리스티아 사람과 싸우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그러자 사울은 다윗을 말렸다. “너는 저 필리스티아 사람에게 마주 나가 싸우지 못한단다. 저자는 어렸을 때부터 전사였지만, 너는 아직도 소년이 아니냐?” 

37 
다윗이 말을 계속하였다.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저를 빼내 주신 주님께서 저 필리스티아 사람의 손에서도 저를 빼내 주실 것입니다.” 그제야 사울은 다윗에게 허락하였다. “그러면 가거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빈다.” 

40 
그러고 나서 다윗은 자기의 막대기를 손에 들고, 개울가에서 매끄러운 돌멩이 다섯 개를 골라서 메고 있던 양치기 가방 주머니에 넣은 다음, 손에 무릿매 끈을 들고 그 필리스티아 사람에게 다가갔다. 

41 
필리스티아 사람도 방패병을 앞세우고 나서서 다윗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42 
그런데 필리스티아 사람은 다윗을 보더니, 그가 볼이 불그레하고 용모가 아름다운 소년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그를 업신여겼다. 

43 
필리스티아 사람이 다윗에게 “막대기를 들고 나에게 오다니, 내가 개란 말이냐?” 하고는, 자기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였다. 

44 
필리스티아 사람이 다시 다윗에게 말하였다. “이리 와라. 내가 너의 몸을 하늘의 새와 들짐승에게 넘겨주겠다.” 

45 
그러자 다윗이 필리스티아 사람에게 이렇게 맞대꾸하였다. “너는 칼과 표창과 창을 들고 나왔지만, 나는 네가 모욕한 이스라엘 전열의 하느님이신 만군의 주님 이름으로 나왔다. 

46 
오늘 주님께서 너를 내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 나야말로 너를 쳐서 머리를 떨어뜨리고, 오늘 필리스티아인들 진영의 시체를 하늘의 새와 들짐승에게 넘겨주겠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계시다는 사실을 온 세상이 알게 하겠다. 

47 
또한 주님께서는 칼이나 창 따위로 구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도, 여기 모인 온 무리가 이제 알게 하겠다. 전쟁은 주님께 달린 것이다. 그분께서 너희를 우리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 

48 
필리스티아 사람이 다윗을 향하여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다윗도 그 필리스티아 사람을 향하여 전열 쪽으로 날쌔게 달려갔다. 

49 
그러면서 다윗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돌 하나를 꺼낸 다음, 무릿매질을 하여 필리스티아 사람의 이마를 맞혔다. 돌이 이마에 박히자 그는 땅바닥에 얼굴을 박고 쓰러졌다. 

50 
이렇게 다윗은 무릿매 끈과 돌멩이 하나로 그 필리스티아 사람을 누르고 그를 죽였다. 다윗은 손에 칼도 들지 않고 그를 죽인 것이다. 

51 
다윗은 달려가 그 필리스티아 사람을 밟고 선 채, 그의 칼집에서 칼을 뽑아 그를 죽이고 목을 베었다. 필리스티아인들은 저희 용사가 죽은 것을 보고 달아났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나의 반석
주님은 찬미받으소서.

 

나의 반석 주님은 찬미받으소서. 그분은 내 손가락에 싸움을, 내 손에 전쟁을 가르치셨네. 나의 반석 주님은 찬미받으소서.

그분은 나의 힘, 나의 산성, 나의 성채, 나의 구원자, 나의 방패, 나의 피난처, 민족들을 내 밑에 굴복시키셨네. 나의 반석 주님은 찬미받으소서.

하느님, 당신께 새로운 노래 부르오리다. 열 줄 수금으로 찬미 노래 부르오리다. 당신은 임금들을 구원하시고, 당신 종 다윗을 악독한 칼에서 구하시나이다. 나의 반석 주님은 찬미받으소서.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르 3장 1-6절

 

안식일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때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하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가 천상 양식을 함께 나누고 비오니 사랑의 성령을 부어 주시어 그 사랑으로 한마음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박상용 베드로 신부 집전

 

 

2022년 1월 19일 (수)
박상용 베드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1월 19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안식일의 주인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마르 2,28)이라는 어제 예수님의 선포가 오늘 치유 기적으로 증명됩니다. 이 기적은 유다인들에게 중요한 시간(안식일)과 공간(회당)에서 일어납니다. 

안식일, 어느 회당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과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동체에서 소외되고 위축된 삶을 살았을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가운데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이 질문은 ‘선한 일’이나 ‘생명을 구하는 일’이 율법의 맹목적인 준수보다 중요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안식일은 선한 일을 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는 날입니다. 소외되고 위축된 삶을 회복시켜야 하는 날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분께서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하시려는 일입니다. 

“손을 뻗어라.” 이렇게 치유는 안식일을 위반하는 구체적인 행동 없이 권위 있는 말씀으로만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곧바로 사형 권한을 지닌 헤로데의 추종자들과 예수님을 없애기로 모의합니다. 그들의 행동은 “남을 해치는 일”, “죽이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하신 “좋은 일”, “목숨을 구하는 것”과 뚜렷한 대조를 이룹니다.

“사람을 위하여 생긴”(마르 2,27)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본연의 모습을 되찾고, 이집트 종살이에서 벗어나 이스라엘이 누리게 된 자유와 구원을 기억하는 날입니다(신명 5,12-15 참조). 우리도 모든 죄의 굴레에서 자유로워져, 우리 안에 담긴 하느님의 모습을 찾을 수 있도록 주님께 은총을 청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다윗에게 배우는 싸우는 법

 

이때까지만 해도 사울은 다윗을 사랑했고 그래서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려고 나가는 것을 말립니다. 사울의 말대로 다윗은 아직 소년이었고 그래서 경쟁자로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그가 다윗을 경쟁 상대로 보고 그래서 미움이 생기는 것은 내일 독서이기에 오늘은 사울 탐구를 잠시 멈추고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대해서만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까짓것'의 영성 차원에서만 봤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일이 닥쳤을 때 어리석은 사람은 사울처럼 그것을 너무 큰 일로 여기기에 해결치 못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다윗처럼 "까짓것' 할 수 있기에 해결하는데 다윗이 '까짓것'할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이 하느님의 눈으로 골리앗을 보고 하느님의 힘을 믿었기 때문이라는 거였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좀 다른 차원에서 이 얘기를 교훈 삼고자 합니다. 다윗에게서 싸우는 법을 배우자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무거운 짐을 고생스럽게 지는 사람에게 편하고 가볍게 지는 법을 가르치시면서 당신의 멍에를 메고 지면 멍에는 편하고 짐은 가볍다고 하셨지요. 그러면서 당신의 멍에는 마음의 온유와 겸손이라고 하셨고요. 

왜 내게 무거운 짐이! 또는 왜 내게 이 고통이! 또는 왜 나한테만! 이렇게 따지기 시작하고 그것도 거칠게 따지기 시작하면 짐은 더 무거워지고, 그 이전에 그 짐과 고통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처럼 싸우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겁 없이 그리고 칼 없이 싸우는 겁니다. 오늘 사무엘기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다윗은 손에 칼도 들지 않고 그를 죽인 것이다." 

그런데 겁과 칼이 없이 싸우는 것이란 단순히 겁과 칼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칼이 없어도 문제 없다는 자신이 있는 것이고, 자신이 있는 것은 자기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으면 된다는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믿음 없이 겁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 없이 칼이 없을 수 없습니다. 

사람마다 각기 다르겠지만 우리에게도 각기 싸워야 할 골리앗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유혹과 욕망일 수도 있고, 불의한 세력일 수도 있고, 두려움이나 병마일 수도 있고, 요즘 우리 모두에게 큰 고통을 주고 있는 코로나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거시 무엇이든 우리도 다윗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전열의 하느님이신 만군의 주님 이름으로 나왔다. 주님께서는 칼이나 창 따위로 구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기 모인 온 무리가 이제 알게 하겠다. 전쟁은 주님께 달린 것이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안식일은 대체 무엇을 하라고 있는 날인가?

 

오늘 복음도 안식일에 관한 내용입니다.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가셨는데 그것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손이 마르고 있다는 말은 생명이 빠져나간다는 하나의 상징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일을 하시나, 하지 않으시나만 관찰합니다. 그들은 참다운 안식이 하느님 안에서 편안함을 누리는 것을 모릅니다. 그저 안식일에 일만 안 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이 물음에 대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은 일을 하지 않는 것만이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일을 하지 않는 목적이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것임을 말씀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데 어떻게 좋은 일을 하지 않고 사람을 살리지 않을 수 있냐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안식일의 주인이 되시어 오신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안식일의 주인으로 섬기려면 그리스도를 믿고 희망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존재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나의 생명을 구원하신 분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편안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어떤 신학생 선배가 제가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읽는 것을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부드러운’ 분이 아니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배운 예수님은 정의와 심판을 하시는 딱딱 떨어지는 그런 분이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책에 나오는 예수님은 잠깐만 읽어보아도 너무 착하시고, 너무 부드러우시고, 너무 사랑이 지극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면 제가 예수님과 함께 머물 때와 그분이 예수님과 머물 때, 누가 더 편안함을 느끼겠습니까? 당연히 예수님을 더 자비롭고 사랑 가득한 분으로 믿는 사람이 더 편안하고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신학교에서 예수님에 대해 많이 공부해도 그분을 더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공부라면 실제로 점점 예수님과 함께 머묾이 불편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사람을 살리시는 착한 분이시라는 체험을 계속해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노숙인 무료 숙박 시설을 운영하는 분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 시설에는 40여 명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추운 겨울에도 열댓 명밖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따듯한 방도 있고 침대도 있고 따듯한 물이 나오는 깨끗한 화장실이 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노숙인은 추운 곳에서 자면서도 여기에 잘 들어오려 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되겠지만, 저는 그분들이 그곳을 불편하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시설이 좋아도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제공하는 사람이 그만큼 자비롭다고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하늘 나라에 데려다 놓는다고 해도 하느님 자비를 믿지 못하는 이들은 불편해서 차리라 지옥으로 가는 것을 선택할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죄를 저지른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을 두려운 분으로 여겨 숨었습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것은 그분의 자비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를 위해 안식일이 필요합니다. 하루 동안 그분과 함께 지내며 그분이 너무 착하시고 나를 사랑하셔서 나의 죄는 보지 않으시고 다만 내가 행복하기만을 바라시는 분이라는 것을 체험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영원한 안식에 들어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넷플릭스 시리즈 ‘로스트 인 스페이스 시즌 1’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한 가족이 지구에서 더는 살 수 없게 되자 다른 행성으로 이주하기 위해 커다란 우주선, 레솔루트를 탑니다. 그러나 어떤 일로 우주선은 파괴되고 사람들은 탈출하여 이상한 별에 불시착합니다. 

이때 로빈슨 가족 중 막내 윌이라는 어린아이가 한 로봇을 구해주어 그 로봇과 함께 왔는데 때마침 자신의 일가족이 위기에 처한 상황이었습니다. 로봇은 윌에게 충성을 다하는 터라 가족을 도와줍니다. 그래서 윌의 가족은 로봇의 능력과 함께 아무리 이상한 행성이라 하지만 안전함을 느낍니다. 

문제는 그 로봇이 자신들의 우주선을 파괴한 주범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로봇이 윌을 따르고는 있으나 그 능력이 인간이 감당할 수는 없기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경계를 합니다. 이때 스미스라는 박사는 로봇의 힘으로 그들이 다시 우주선으로 돌아가게 되면 감옥에 갇히는 상황이었습니다.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로봇에 대한 미움을 갖게 만들어 그 로봇을 총으로 쏘고 결국엔 자신들 밖으로 몰아내게 만듭니다. 하지만 로봇이 없으니 외계 행성에서 그들을 도와줄 것이 하나도 없어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로봇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안식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같은 한 로봇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불편해하고 어떤 사람들은 편안해합니다. 그 이유는 로봇이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이십니다. 그분은 심판하시기도 하시고 구원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심판하는 분이심을 잊어버리십시오. 심판은 이미 일어났습니다. 그분은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다만 우리가 로빈슨 가족처럼 그분과 함께 지내며 그분이 좋으신 분임을 믿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유학을 하러 갔을 때 누구나 그랬겠지만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도하면 다 된다’는 생각을 가지려 했습니다. 주님은 좋으신 분이니 기도하는 사람을 힘들게 하시지 않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기도를 통해 몹시 어렵지 않게 유학 생활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믿고 함께하다 보면 어려움을 이겨내고 그러면 그분에 대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더 커집니다. 그럴수록 매일이 안식이 되는 것입니다. 

로빈슨 가족이 로봇과 함께 미지의 세상을 탐험하는 것, 이것이 안식일의 목적입니다. 그렇게 그분에 대한 신뢰를 쌓아갈 수 있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분에 대한 사랑을 증가시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분과 함께 머무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지옥에 보내 달라고 스스로 떠나게 될 것입니다. 하루하루 주님을 더 사랑하십시오. 그분이 하느님이시기에 그 믿음만으로 모든 날이 안식이 될 것입니다. 안식일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체험하라고 있는 날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눔이 사라지게 된 이유

 

어렸을 때, 이웃과 서로 나누는 음식이 참 많았습니다. 어떤 음식이든 조금 많다 싶으면 어머니께서 싸주셔서 이웃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그 나눔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언제부터 그 나눔이 사라졌을까요? 어느 책에서 보니, 냉장고가 커지면서 나눔이 사라졌다고 하더군요. 
 
냉장고를 통해 유통기한이 길어졌습니다. 냉장고가 없을 때는 버리지 않으려면 당연히 이웃과 나눌 수밖에 없었습니다. 냉장고가 없으니 보관 기간이 짧을 수밖에 없고, 음식을 상해서 버리는 것보다는 이웃과 나누는 것이 훨씬 낫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냉장고가 생기면서 이웃과 나눌 이유가 줄어들었습니다. 냉동실에 넣어두면 아주 오랫동안 보관이 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저희 집에 냉장고가 처음 생겼을 때를 떠올려 봅니다. 정말 행복했습니다. 아이스크림을 너무 좋아했는데, 아이스크림과 같은 시원한 얼음을 1년 내내 먹을 수 있었으니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나눔을 방해하는 물건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내게 편안함을 주지만 따뜻함을 나눌 수 없게 했습니다. 
 
나만 편한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함께 나누는 것이 좋을까요? 냉장고를 치워야 할까요? 그런데 이제 냉장고 없이는 못 살 것 같습니다. 나의 편안함에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논쟁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우선인지,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우선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에게는 율법을 어기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고 하면서 그 어느 것보다도 귀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율법에 굳어 버리다 보니 율법이 곧 하느님이 된 것입니다. 그들에게 율법은 가장 편안한 냉장고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자렛인들의 복음서’라는 외경에 나와 있는데, 그는 오른손으로 밥벌이하는 장인이었고, 손이 오그라들어서 가족을 부양하기 힘든 상황이 된 것입니다. 

정말로 안타까운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병자 앞에서 치유의 합법성 문제를 따지고 있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완고한 모습에 화가 나셨습니다. 치유될 수 있음에도 안식일 법에 따라서 모르는 체하는 그들의 위선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나눔을 실천하지 못하게 하는 냉장고처럼, 사랑이라는 근본정신을 가지고 있는 율법이 오히려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율법의 근본정신을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우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희망과 근심, 공포와 불안 가운데 그대 앞에 빛나고 있는 하루하루를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라. 그러면 예측할 수 없는 시간은 그대에게 더 많은 시간을 줄 것이다.

- 호레스

 

 

내 생각

 

우리는 하루에도 수만 가지의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이 생각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확신을 합니다. 그러나 생각의 오류에 빠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평소 친하게 지내고 있던 자매님이 당신을 보자마자 표정이 굳어지며 화난 얼굴을 합니다. 이때 어떤 생각이 들 것 같습니까? ‘나 때문에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나? 내가 싫은가?’ 등의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와 연관이 없었습니다. 마침 그 자매님의 자녀가 장난치다가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면 다음의 답을 머릿속 생각으로 대답해 보십시오. 
 
“17 x 24 =” 
 
그냥 대충 1724라고 대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하면서 정답을 이야기하려고 할 것입니다. 정답은 408이지만, 암산으로 정답을 말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하면 정답에 가까워집니다. 
 
생각을 통제하기 어렵습니다. 또 정답이 아닐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런데도 내 생각을 정답으로 착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평소에 자기 생각을 통제할 수 있고, 그래서 올바른 판단을 하고 있다는 교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겸손해져야 합니다. 나의 생각이지만 정답이 아닐 수가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손을 뻗어라. (마르 3,5)

 

더 나은 길을 제시해 주시는 주님이시다. 더 나은 길이란 아픔을 이겨내고 손을 뻗는 용기의 삶이다. 손을 뻗어 만나는 삶이 진짜 우리들 삶이다. 손을 뻗는 현실의 접촉이 용기있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가장 중요한 우리자신을 만나는 치유의 시작이다. 

오그라든지도 모른 체 살았다. 손을 뻗어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는 대상이 다름아닌 우리자신임을 뒤늦게 알게된다. 부정적인 방식을 바꾸는 것이 손을 뻗어 만나는 건강한 방식이다. 올바른 방향은 손을 뻗어 주님을 향하는 것이다. 깨어있어야 손을 뻗어 주님을 제대로 만날 수 있다. 

너무 많은 것에 묶여 우리자신의 삶을 살지 못했다. 손을 뻗어야 예수님의 손을 잡고 잔치의 기쁨을 맘껏 누릴 수 있다. 신뢰하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손을 뻗어 삶을 나눈다. 두려움이 아닌 용기가 필요한 시간이다. 

잘못된 믿음은 가치 없는 존재로 우리를 이끈다. 진실한 믿음은 손을 뻗는 용기와 감사이다. 손을 뻗는 집중과 선택 손을 잡는 소통과 기쁨이다. 오그라든 오늘이 아닌 손을 뻗는 뜨거움의 새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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