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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1월 16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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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1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주일 -

 

 

2022년 1월 16일 연중 제2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는 예루살렘을 두고 민족들이 그의 의로움을, 임금들이 그의 영광을 보리라고 합니다.

 

 

✠ 오늘 제2독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신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표징을 일으키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월 16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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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이사 62장 1-5절

 

신랑이 신부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라.

 


시온 때문에 나는 잠잠히 있을 수가 없고 예루살렘 때문에 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그의 의로움이 빛처럼 드러나고 그의 구원이 횃불처럼 타오를 때까지. 


그러면 민족들이 너의 의로움을, 임금들이 너의 영광을 보리라. 너는 주님께서 친히 지어 주실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리라. 


너는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화려한 면류관이 되고 너의 하느님 손바닥에 놓여 있는 왕관이 되리라. 


다시는 네가 ‘소박맞은 여인’이라, 다시는 네 땅이 ‘버림받은 여인’이라 일컬어지지 않으리라. 오히려 너는 ‘내 마음에 드는 여인’이라, 너의 땅은 ‘혼인한 여인’이라 불리리니 주님께서 너를 마음에 들어 하시고 네 땅을 아내로 맞아들이실 것이기 때문이다. 


정녕 총각이 처녀와 혼인하듯 너를 지으신 분께서 너와 혼인하고 신랑이 신부로 말미암아 기뻐하듯 너의 하느님께서는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시리라.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모든 민족들에게
주님의 기적을 전하여라.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주님께 노래하여라, 온 세상아. 주님께 노래하여라, 그 이름 찬미하여라. 모든 민족들에게 주님의 기적을 전하여라.

나날이 선포하여라, 그분의 구원을. 전하여라, 겨레들에게 그분의 영광을, 모든 민족들에게 그분의 기적을. 모든 민족들에게 주님의 기적을 전하여라.

주님께 드려라, 뭇 민족의 가문들아. 주님께 드려라, 영광과 권능을. 주님께 드려라, 그 이름의 영광을. 모든 민족들에게 주님의 기적을 전하여라.

거룩한 차림으로 주님께 경배하여라. 온 세상아, 그분 앞에서 무서워 떨어라. 겨레들에게 말하여라. “주님은 임금이시다. 그분은 민족들을 올바르게 심판하신다.” 모든 민족들에게 주님의 기적을 전하여라.

 

 

매일미사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1코린 12장 4-11절

 

한 분이신 같은 성령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형제 여러분,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그리하여 어떤 이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이,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에 따라 지식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 안에서 믿음이, 어떤 이에게는 그 한 성령 안에서 병을 고치는 은사가 주어집니다. 

10 
어떤 이에게는 기적을 일으키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예언을 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영들을 식별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여러 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신령한 언어를 해석하는 은사가 주어집니다. 

11 
이 모든 것을 한 분이신 같은 성령께서 일으키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그것들을 따로따로 나누어 주십니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요한 2장 1-11절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셨다.

 

그때에 


갈릴래아 카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에 계셨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그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으셨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 하였다. 


예수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말하였다. 


거기에는 유다인들의 정결례에 쓰는 돌로 된 물독 여섯 개가 놓여 있었는데, 모두 두세 동이들이였다. 


예수님께서 일꾼들에게 “물독에 물을 채워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물독마다 가득 채우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이제는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어라.” 하셨다. 그들은 곧 그것을 날라 갔다. 


과방장은 포도주가 된 물을 맛보고 그것이 어디에서 났는지 알지 못하였지만, 물을 퍼 간 일꾼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과방장이 신랑을 불러 

10 
그에게 말하였다.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하면 그보다 못한 것을 내놓는데,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셨군요.” 

11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신 예수님의 어머니 말씀대로, 하늘 나라 잔치에 함께한 주님의 일꾼으로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냅시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

 

주님, 저희가 천상 양식을 함께 나누고 비오니 사랑의 성령을 부어 주시어 그 사랑으로 한마음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이청준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2022년 1월 16일 (일)
이청준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1월 16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오늘 복음은 요한 복음의 첫 번째 표징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갈릴래아 카나의 어느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으십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 함께 계십니다. 그런데 잔치에 쓰던 포도주가 떨어지고 맙니다. 이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이 상황을 알아채시고 예수님께 전하십니다. “포도주가 없구나.” 어머니의 말씀에는 아들 예수님께서 이 위기를 잘 해결하실 수 있다는 신뢰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모호합니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때’는 하느님의 뜻이 결정적으로 이루어지는 십자가 위의 죽음의 때, 곧 예수님의 영광의 순간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로지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십니다. 

마리아께서 일꾼들에게 이르십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이 말씀은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한목소리로 한 대답을 떠올리게 합니다.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실행하겠습니다”(탈출 24,3).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정결례에 쓰는 돌로 된 물독 여섯 개”에 가득 채운 물을 모두 포도주로 바꾸십니다. 물독 하나가 두세 동이들이고 한 동이가 40리터가량이니, 모두 합치면 적어도 480리터가 넘는 ‘많은’ 양입니다. 게다가 과방장의 표현대로 ‘좋은’ 포도주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주시는 선물은 풍요롭고 충만합니다.

이와 같이 유다인들의 정결례에 사용되는 물이 예수님의 현존과 함께 새로운 포도주로 태어납니다. 이제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 산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내리고 모든 언덕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넘치리라”(아모 9,13).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소박데기가 아닌 그리스도의 신부

 

지난 주일에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드러내신 주님께서는 이제 가나 촌 혼인잔치에 참석하시고 거기서 공생활 최초의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주님께서 왜 공생활의 시작을 혼인잔치에 참석하시는 것으로 시작하셨을까 의문이 드는데 제 생각에 그것은 우리 인간의 잔치에 참여하시는 분임을 공현하기 위함일 겁니다. 

잔치는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자리이고 기쁨을 나누는 자리입니다. 어렸을 때 저의 경험을 보면 이 잔치에는 친척들 뿐 아니라 동네사람 모두 참석하고 심지어 다른 동네 거지들도 참석합니다. 

혼자서는 기쁠 수 없기에 모두 함께 기쁨을 나누려 잔치를 벌이는 것인데 주님도 이 인간의 잔치에 함께 하심으로써 기쁨을 더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주님을 생각할 때 우리는 제일 먼저 무엇이 떠오릅니까? 어떤 사람은 기적을 행하시는 주님과 가르치시는 주님이 떠오를 것이고, 가톨릭 신자들 대다수는 잔치 상의 예수님, 거기서 먹고 마시시며 즐겁고 기쁘게 사람들과 함께 나누시는 주님보다 수난의 주님을 먼저 떠올릴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먹고 마시는 분으로 나옵니다. 요한이 빵과 포도주를 먹지 않자 마귀 들렸다고 하고 당신이 먹고 마시자 먹보요 술꾼이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을 주님은 비판하시는데 주님은 분명 크고 작은 잔치에 참여하시고 오늘처럼 혼인잔치에도 참석하셨으며 세리들과 죄인들의 잔치에도 함께 하십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잔치에 참여하시는 뜻은 무엇입니까? 왜 잔치에 참여하십니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당신이 임마누엘 주님이요, 사랑의 주님이심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건 고고하게 하늘에서 초월자로 계시려고 하셨다면 이 세상에 오시지 않으셨을 텐데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셨고 그럼으로써 죄 외에는 모든 점에서 우리 인간과 똑같아지려 하셨으며 그럼으로써 쓰레기처럼 버림받은 소박데기인 우리를 당신의 아내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다시는 네가 ‘소박맞은 여인’이라, ‘버림받은 여인’이라 일컬어지지 않으리라. 오히려 너는 ‘내 마음에 드는 여인’이라, 너의 땅은 ‘혼인한 여인’이라 불리리니 주님께서 너를 마음에 들어 하시고 네 땅을 아내로 맞아들이실 것이기 때문이다." 

참 아름다운 얘기인데 저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눈물의 웨딩 드레스'라는 영화를 봤을 때입니다. '눈물의 웨딩 드레스'는 가족을 위해 윤락녀가 된 여자를 사랑하게 된 대학생이 가족의 반대에도 그 여자와 결혼한다는 그렇고 그런 영환데 대학생이었던 저도 그 얘기가 너무 감동적이어서 그러려고 생각한 적이 있지요. 

그리고 제대 말년에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진정 사랑해서 그런 생각을 했다기 보다는 매우 감상적인 생각에서 그런 생각을 한 것일 뿐이지만 주님께서는 진정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아내로 삼으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런 그리스도의 사랑을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Sponsa Christi 교회론인데 이렇게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라면 교회의 구성원들인 우리도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잔치에 참여하시는 또 다른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잔치가 인간들만의 잔치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거룩한 잔치가 되고 성사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혼인은 본래 두 사람의 서약만으로도 이루어지지만 교회의 사제 앞에서 서약함으로 성사가 되고, 하느님과 무관한 혼인이 아니 되게 하는 것과 같지요. 

아무튼, 우리의 슬픔과 괴로움뿐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도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주님의 사랑을 느끼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자녀에게 사랑받는 법 : 어머니는 자녀에게 물을 줄 수도 있고 포도주를 줄 수도 있다.

 

오늘 복음은 ‘카나의 혼인 잔치’입니다. 여기에서 진짜 주인공은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예수님의 첫 기적을 끌어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라고 말씀하십니다.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성모님의 말에 대한 부정적인 대답입니다. 그렇지만 성모님은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라고 하시며 예수님께서 어쩔 수 없이 기적을 하시게 만드십니다. 

감시 저를 성모 마리아라 비유하자면 여러분은 누구이실까요? 바로 저의 글이나 동영상을 퍼서 날라주는 봉사자들입니다. 사랑은 나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흐르는 것을 받아서 전달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저는 어떻게 예수님으로부터 포도주를 얻어내야 할까요? 성모님은 예수님을 ‘한 없이 좋은 남편’으로 여기셨습니다. 여기서 성모님은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대표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머니라 부르지 않고 ‘부인’이란 의미의 “여인이시여!”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받기 전까지는 성모님이 어머니셨지만 이제 아버지의 아드님 위치에 선다면 성모님은 다시 교회의 일원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리스도의 가장 사랑받는 신부로서 신부가 신랑에게 얻어낼 수 있는 모든 것을 얻어낼 자격을 갖추신 분입니다. 

성모님이 왜 우리에게 공경을 받으실까요? 성모님이 예수님께 포도주를 얻어내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물만 마셔야 합니다. 물은 사랑이 빠진 음식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음식에 사랑이 더해지면 양식이 됩니다. 자녀는 양식을 먹어야 온전히 성장합니다. 음식만 먹으면 여전히 동물의 본성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성모님은 이것을 알기에 사랑의 주인이신 신랑에게 당신의 ‘피’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징이 레베카가 이사악에게 야곱의 축복을 얻어내는 장면입니다. 레베카는 사실 이사악의 모든 축복을 받을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악의 축복을 야곱에게 전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도 에사우가 레베카에게 해꼬지를 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어머니이기도 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야곱도 사랑해서 그런 일을 벌인 것입니다. 

원죄의 가장 큰 특징은 ‘하느님 자비에 대한 의심’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그들은 하느님이 두려워 숨었습니다. 그런 상태로는 자녀들을 위해 하느님의 은총을 얻어서 전해 줄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의심하지 않으려면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죄를 짓지 않은 상태에서 받은 에덴동산의 그 많은 은총을 보며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이심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성모님은 그런 분이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반대하시는데도 레베카처럼 우리 교회를 위해 은총의 중재를 감행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모님께서 교회에서 공경받는 이유입니다. 만약 성모님께서 아드님을 향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불완전했다면 우리는 성모님을 통해 물만 마실 것이고 우리 동물의 본성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렇게 해주지 못한 어머니인 성모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성당에서도 마찬가지이고,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당에서의 마리아는 사제이고, 가정에서의 마리아는 어머니입니다. 사제가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못하고 평소 불만이 많은 사람이라면 신자들에게 사랑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가 주는 것들은 양식이 되지 못하고 음식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기대한 것을 받지 못한 신자들은 사제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신자들은 동물의 본성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본성이 되고 싶어 합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머니가 아무리 자녀에게 잘하려 해도 자녀에게 원망만 듣는 경우가 있습니다. 혹은 자녀가 그냥 어머니이니까 억지로 존중하는 척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다 어머니가 자초한 일입니다. 자녀 앞에서 아버지의 자비를 믿지 못하게 하여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이 옳지 못한 것처럼 했기 때문입니다. 남편을 무시하는 아내는 자녀에게도 절대 사랑받을 수 없습니다. 어머니는 물은 줄 수 있지만, 포도주는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녀에게 미움을 받는 어머니는 자녀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성모 마리아를 닮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 74회에 이유 없이 엄마를 싫어하는 딸 한별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엄마는 최선을 다하는데 딸은 핸드폰에 엄마 전화번호도 없습니다. 딸의 가장 큰 위로자는 할머니입니다. 엄마가 밥해주는 것은 맛이 없다고 하고 엄마만 나가면 할머니와 아빠 편을 들면서 엄마를 이유 없이 미워합니다. 이유라도 알면 좋겠지만 이유가 없습니다. 전문가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아이가 지금 힘이 강한 할머니와 아버지 쪽에 붙은 것이라고 해석해줍니다. 

과연 그럴까요? 엄마가 주는 것은 포도주가 아니라 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아빠를 존중하지 않기 때문에 딸이 엄마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레스토랑에 가서 포도주를 시키고 기다렸는데 물만 나온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실망스럽겠습니까? 화가 날 것입니다. 한별이는 지금 그런 상태입니다. 남편이 나와서 지금 아내와의 관계가 좋지 않고 자신은 무시만 당한다고 말해도 전문가는 아내도 힘들다고만 할 뿐입니다. 물론 아내의 탓이라고만 할 수는 없지만, 남편 말도 귀담아들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근데 제가 느끼는 가장 큰 핵심은 뭐냐면 (아내가 나에게) 공감을 못 해줘서 이 사람이 싫은 건 아니지만 14년 동안 결혼 생활을 함께하며 감정 교류가 안 된다는 게 생각보다 매우 힘들더라고요. 혼자 있어서 외로운 건 당연한 건데, 같이 있는데도 외롭다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제가 많이 힘든 일 있을 때도 전혀 공감을 안 해주고 나는 죽겠는데 옆에서는 쳐다보지도 않고 남 이야기처럼 말합니다. 내가 좋은 일이 있어서 집에서 함께 기뻐하고 싶은데 대답한 한결같은 무덤덤함이었습니다. 이걸 한별이가 똑같이 엄마에게 하거든요. 한별이도 ‘엄마 나 좀 사랑해줘’라고 말하는 거 같아요.”

전문가는 엄마 또한 남편이 감정을 나누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기에 남편의 감정을 무시하는 듯한 엄마의 문제는 실제로 문제가 아닌 것처럼 말합니다. 물론 남편이 아내에게 해주는 조언들이 항상 실패하기 때문에 아내도 남편에게 불만을 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내는 항상 성모 마리아처럼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라고 말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엄마가 해주는 밥이 세상에서 가장 맛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아빠의 피땀과 엄마의 피땀이 다 섞인 ‘포도주’의 맛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엄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도 여러분들에게 사랑받기 위해 “무엇이든 그가 시키는 대로 하십시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정말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존경해야 합니다. 아내도 이 노력을 해야만 자녀에게 사랑받습니다. 혼자 자녀를 위해 하는 노력은 포도주를 기대하는 손님에게 물만 주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쓰면 쓸수록 더 많아지는 것들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마야 안젤루는 40대 초반이었던 1970년에 첫 소설을 발표한 후, 2014년 세상을 뜨기 전까지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시나 소설 활동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수, 배우, 작곡가, 극작가, 프로듀서, 인권운동가, 저널리스트 등 다양한 활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변함없이 창의적인 일을 하는 것에 놀라움을 표현했습니다. 그러자 그때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창의력은 고갈되지 않습니다. 쓰면 쓸수록 더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2001년에 새벽 묵상 글을 시작하면서, 처음에는 ‘3년은 쓸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전혀 다른 내용으로 매일 다른 글을 쓴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의 창의력도 형편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20년 넘게 쓰고 있습니다. 창의력은 고갈되는 것이 아니라, 쓰면 쓸수록 새롭게 생성되는 것이 맞나 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좋은 것을 더 많이 쓸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래야 좋은 것들이 더 새롭게 생성되기 때문에, 모두에게 좋은 일입니다. 사랑은 쓰면 쓸수록 더 많아집니다. 평화도 쓰면 쓸수록 더 넓어집니다. 믿음은 쓰면 쓸수록 더 깊어집니다. 
 
좋은 것, 필요한 것은 고갈되는 것이 아니라, 쓸수록 새롭게 생성됩니다. 성모님께서도 당신의 사랑을 계속해서 새롭게 생성해주십니다. 
 
유다인들의 혼인 잔치는 보통 여드레 동안 열린다고 합니다. 친척과 친지들이 모여서 축제를 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종종 잔치에서 중요한 포도주가 떨어지는 경우가 생깁니다. 오늘 복음의 카나에서도 이런 난처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남의 곤경을 돕기 위해 예수님께 부탁하십니다. 그런데 이 모자 간의 대화는 어머니와 아들 간의 일상적인 대화가 아닌 공적인 대화로 비칩니다. 
 
성모님은 아들에게 “포도주가 없구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시지요. 그러자 성모님은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아들에 대한 깊은 신뢰심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었지요. 더군다나 어머니를 ‘여인’이라고 부릅니다. 사적인 대화가 아닌, 공적인 대화를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기서 여인이란 ‘교회의 어머니’라는 뜻입니다. 
 
성모님의 이런 모습에 ‘기도의 전달자, 곤경에 빠진 모든 사람의 해결사인 어머니, 그에게 달려드는 모든 사람의 인자하신 어머니’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직 예수님의 때가 아니어서 기적을 일으킬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어머니의 간청으로 그 일이 앞당겨졌습니다. 사랑은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가능한 상황으로 만들어 줍니다. 
 
어떤 상황이든 상관없이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내 마음의 크기가 더 커질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시작부터 훌륭할 필요는 없지만, 훌륭해지기 위해선 시작해야 한다.

- 지그 지글러

 

 

올바른 판단을 하는 방법

 

우리가 남을 평가하는 것은 은연중에 자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등산을 좋아한다면 “등산하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은 없어.”라는 식으로 말하면서 등산하는 사람을 치켜세우지요. 결국 자신을 치켜세우는 것입니다. 반대로 등산을 싫어한다면 “어차피 내려올 산을 왜 올라가냐?”라면서 자신의 등산 싫어함을 등산 자체를 평가절하해서 드러냅니다. 
 
등산을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모두 자기 입장에 따라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중심적이다 보니 자기 상황에 따라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하는 것이 아닐까요? 올바른 판단이 될 수 없습니다. 
 
내 기준을 옳음의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그 기준을 사랑에서 찾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기준만이 우리가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요한 2,5)

 

혼인은 잔치중의 잔치이다. 만남과 결합의 잔치이다. 혼인잔치에 포도주는 마음과 마음 사람과 사람을 기쁨으로 이어준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졌다. 기쁨의 포도주가 다시 필요하다. 좋은 포도주는 사람과 사람 마음과 마음 사이에서 채워지고 일어난다. 

무엇이든지 변화시키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포도주의 주님이시다. 다시 카나의 혼인잔치가 기쁨의 맛으로 흥겨워진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삶을 맛나게 살길 바라시는 분이시다. 채워야할 것은 우리 마음의 물독이다. 

삶이란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그 어떤 관계도 기쁠 수 없다. 떨어진 것은 혼인잔치의 좋은 포도주이듯 우리 삶의 좋은 마음이다. 좋은 마음을 다시 채워주시고 살게하시는 마음의 주님이시다. 끝내 이루어주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만난다. 마음을 만나는 첫번째 마음은 변화의 기쁨이다. 

물이 포도주가 되고 포도주는 다시 예수님의 거룩한 피로 변화된다. 삶의 변화는 함께하시는 주님의 기쁨이다. 기쁘게 청하고 기쁘게 내려놓고 기쁘게 맡기는 이 믿음의 여정을 카나의 첫기적에서 다시 배운다. 

믿음이란 두 개의 가치가 아프게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포도주이신 주님을 선택하는 기쁨이다. 믿음의 선택 그 시작과 끝 모든 시간에 함께하시는 주님이시다. 

"물독에 물을 채워라." (요한 2, 7) 

삶의 자리에 물을 채웠을 뿐인데 물독마다 가득 차는 좋은 포도주의 기쁜 행복이다. 좋은 포도주가 되고 좋은 삶이 되는 믿음의 잔치이다. 사람을 변화시키시는 주님을 믿고 주님을 따른다. 

좋은 포도주의 향기와 맛처럼 다시 흥겨워지는 삶의 잔치이다. 삶의 잔치에 함께하시는 가장 큰 기쁨을 맛보는 기쁨의 주일이다.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말씀과 삶을 다시 만나는 기쁜 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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