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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1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주간 금요일 -
2022년 1월 14일 연중 제1주간 금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이스라엘의 원로들이 임금을 세워 달라고 사무엘에게 청하자,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임금을 세워 주라고 이르십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지붕을 벗기고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내려보낸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를 고쳐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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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1사무 8장 4-7절, 10-22ㄱ절
여러분은
임금 때문에 울부짖겠지만,
주님께서는
응답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 무렵
4
모든 이스라엘 원로들이 모여 라마로 사무엘을 찾아가
5
청하였다. “어르신께서는 이미 나이가 많으시고 아드님들은 당신의 길을 따라 걷지 않고 있으니, 이제 다른 모든 민족들처럼 우리를 통치할 임금을 우리에게 세워 주십시오.”
6
사무엘은 “우리를 통치할 임금을 정해 주십시오.” 하는 그들의 말을 듣고, 마음이 언짢아 주님께 기도하였다.
7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백성이 너에게 하는 말을 다 들어 주어라. 그들은 사실 너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나를 배척하여, 더 이상 나를 자기네 임금으로 삼지 않으려는 것이다.”
10
사무엘은 자기한테 임금을 요구하는 백성에게 주님의 말씀을 모두 전하였다.
11
사무엘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이 여러분을 다스릴 임금의 권한이오. 그는 여러분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자기 병거와 말 다루는 일을 시키고, 병거 앞에서 달리게 할 것이오.
12
천인대장이나 오십인대장으로 삼기도 하고, 그의 밭을 갈고 수확하게 할 것이며, 무기와 병거의 장비를 만들게도 할 것이오.
13
또한 그는 여러분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 제조사와 요리사와 제빵 기술자로 삼을 것이오.
14
그는 여러분의 가장 좋은 밭과 포도원과 올리브 밭을 빼앗아 자기 신하들에게 주고,
15
여러분의 곡식과 포도밭에서도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 내시들과 신하들에게 줄 것이오.
16
여러분의 남종과 여종과 가장 뛰어난 젊은이들, 그리고 여러분의 나귀들을 끌어다가 자기 일을 시킬 것이오.
17
여러분의 양 떼에서도 십일조를 거두어 갈 것이며, 여러분마저 그의 종이 될 것이오.
18
그제야 여러분은 스스로 뽑은 임금 때문에 울부짖겠지만, 그때에 주님께서는 응답하지 않으실 것이오.”
19
그러나 백성은 사무엘의 말을 듣기를 마다하며 말하였다. “상관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임금이 꼭 있어야 하겠습니다.
20
그래야 우리도 다른 모든 민족들처럼, 임금이 우리를 통치하고 우리 앞에 나서서 전쟁을 이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1
사무엘은 백성의 말을 다 듣고 나서 그대로 주님께 아뢰었다. 22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그들의 말을 들어 그들에게 임금을 세워 주어라.” 하고 이르셨다.
화답송
주님,
당신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
행복하여라, 축제의 기쁨을 아는 백성! 주님, 그들은 당신 얼굴 그 빛 속을 걷나이다. 그들은 날마다 당신 이름으로 기뻐하고, 당신 정의로 힘차게 일어서나이다. 주님, 당신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
정녕 당신은 그들 힘의 영광, 당신 호의로 저희 뿔을 들어 올리시나이다. 저희 방패는 주님의 것, 저희 임금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의 것이옵니다. 주님, 당신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
복음
마르 2장 1-12절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1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2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3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4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
5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6
율법 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7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8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9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10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12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전능하신 하느님, 성체로 새로운 힘을 얻고 간절히 바라오니 저희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며 하느님을 충실히 섬기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이재형 마리오 신부 집전
2022년 1월 14일 (금)
이재형 마리오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1월 14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병의 치유’와 ‘죄의 용서’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쉬울까요?
어제 복음에서 나병 환자에게 ‘정’(淨), 곧 깨끗함을 선물하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중풍 병자에게 ‘죄의 용서’와 ‘병의 치유’를 선물하십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데, 어떤 네 사람이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옵니다. 군중 때문에 예수님께 다가갈 수 없자, 그들은 지붕을 벗겨 내고 구멍을 내어 그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냅니다. 그분께서는 어려움을 헤치고 자신에게 다다른 그들의 정성과 행동을 ‘믿음’으로 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쳐 주시는 대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예수님께는 병의 치유보다 죄의 용서가 더 급하고 중요합니다. 이 말씀이 율법 학자들에게 ‘하느님 모독’으로 들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죄의 용서에 대한 권한은 오직 한 분, 하느님만이 가지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들것을 들고 걸어 나가는 중풍 병자의 모습은 그의 병이 나았음은 물론, 그의 죄가 용서받았음을 증명합니다. 이로써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 곧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권한을 지니신 분이시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병의 치유’와 ‘죄의 용서’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쉬울까요? 이 질문은 병의 치유와 죄의 용서가 밀접히 관계되며, 둘 다 오로지 하느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비된 병자를 일으키시는 분, 죄를 용서하시는 분, 곧 참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통하여 ‘지금 그리고 여기에’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를 받아들이는 믿음입니다. 오늘 중풍 병자의 치유와 용서는 예수님의 ‘권한’과 사람들의 ‘믿음’이 만나 이루어졌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치유를 한다면 근원 치유부터.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오늘 복음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중풍 병자가 죄를 용서받고 치유까지 받는 얘기인데 우리는 여기서 왜 병을 치유하면서 주님께서는 죄가 용서받았다고 하시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겠지만 오늘은 그 의문에 대해 질문하고 답하기보다 용서와 치유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면 나는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 자문하렵니다.
왜 이런 질문을 하냐 하면 어제 여기 밥상에서 미사를 봉헌하며 제가 오늘처럼 선택과 관련한 질문을 던졌는데 사랑의 하느님과 능력의 하느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어떤 하느님을 선택해야 할지 같이 얘기 나눈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이자 능력의 하느님이시라는 것이 우리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 한분을 선택하면 두 하느님을 다 선택하는 것이 되지만 그래도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사랑의 하느님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왜냐하면 사랑없이 능력만 있는 것을 선택한다면 악령을 선택하는 것과 진배가 없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가 권고 5번에서 얘기하듯 악령도 능력으로 치면 대단하기에 우리의 병을 치유해 줄 수 있을 것이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병을 치유받기 위해서 악령의 하수인이 되곤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시면 우리는 죄의 용서와 치유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까요?
이에 눈치 빠른 분들은 죄의 용서를 청해야 한다고 답하실 테지만 우리는 그 이유를 알아야겠지요.
마찬가지로 용서가 아니라 치유만을 원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이 아니라 악령이나 의사에게 가면 됩니다. 그리고 치유만 받고 그 관계는 끝나거나 끝내도 됩니다.
우리는 병원에 가서 돈 주고 치유받고는 그것으로 끝나지요. 의사와 우리의 관계는 돈을 주고받는 관계지 사랑의 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도 그런 것이서는 안 됩니다.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려는 주님께 베드로가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자 주님께서 그러면 너와 나는 아무 관계가 없게 된다고 하신 바가 있지요.
기실 우리의 모든 죄가 하느님과의 관계를 거부하는 죄이고, 그래서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은 단절된 관계를 복원하는 것, 다시 말해서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것 말고도 죄의 용서를 선택해야 하는 또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곧 건강을 위해서도 죄의 용서를 선택해야 합니다.
전에 여러 차례 말씀드린 바 있지만 건강에는 육신의 건강, 마음의 건강, 정신의 건강, 영혼의 건강이 있지요.
그런데 우리는 육신이 건강하지 않을 때는 건강을 회복하려고 하고, 그래서 병을 인정하고 나으려고 하고 어떤 치유든 받아들입니다. 우울증이나 공황장애처럼 심리적인 병도 인정하고 나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정신에 병이 있다거나 영혼에 병이 있다고 하면 대부분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그러기에 고치려고 들지도 않을 뿐 아니라 더 심각한 것은 육신의 병 때문에 자살하거나 남을 죽이지는 않지만 심리적, 정신적, 영적인 병은 자살하기도 하고 남을 죽이기도 하잖습니까?
사실 많은 병은 서로 유기적입니다. 그래서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라는 말이 있고, 뒤집으면 건강한 정신과 영혼에 건강한 육체와 마음이 있습니다.
죄를 용서받는 것은 관계의 회복일 뿐 아니라 영적인 병의 치유이고, 그래서 주님께 죄를 용서받을 때 우리는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게 될뿐 아니라 영적인 건강을 되찾고 다른 건강도 되찾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근원 치유라고 할 수 있는 영혼의 치유부터 해야 하고, 영혼의 치유인 죄의 용서부터 우리는 받아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치유 기적이 줄어들면 고해성사도 줄어든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고쳐주시며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율법학자들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생각하며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여깁니다.
예수님은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라고 하시며 병자를 치유해주십니다. 병자의 치유가 곧 죄의 용서 증거로 사용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고해성사’와 ‘병자성사’는 서로 믿음을 보완한다는 뜻입니다.
병을 고치는 기적이 정말 고해성사에 대한 믿음을 증가시킬 수 있을까요? 당연합니다. 오상의 비오 신부님께 미사와 고해성사를 하려고 사람들은 성당이 열리기 몇 시간 전부터 기다렸습니다. 사람들은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 죄를 용서해주면 더 완전히 용서받는다고 여깁니다. 누구에게 고해성사를 받아도 죄가 용서받는데 말입니다. 이것은 병을 고쳐주는 기적과 죄를 용서해주는 기적이 별개가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하지만 저는 신학교에서 “기적을 하지 않아도 거룩하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세례자 요한을 봐라. 그는 기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지만 성인이다”라고 교육받았습니다.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어쩌면 기적을 하지 않아도 나의 의로움과는 상관이 없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 같습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은 아직 성사 이전의 회개를 외치는 이이기에 그가 기적을 한다면 굳이 예수님께 갈 필요가 없어서 기적을 하면 안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기적의 힘을 주시지 않은 것입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기적’을 ‘믿음의 증거’로 보았습니다. 누군가를 복자품에 오르게 하려면 공식적으로 인정받을만한 기적이 적어도 하나는 있어야 하고 성인이 되려면 두 개가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 사람이 의인이었는지 알려주는 방식은 곧 ‘기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지니고 세상에 파견하실 때 악령을 쫓아내고 질병을 고쳐주는 능력까지 주시며 보내셨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미사나 고해성사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면 그 이전에 병을 고치는 능력까지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사제들은 그것을 잘 믿지 못합니다. ‘나 같은 죄인에게서 이런 기적이 나올 수는 없을 거야!’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신부님도 당신에게서는 기적이 나올 수 없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마귀가 심하게 들린 사람이 있다고 고쳐달라고 청했습니다. 신부님은 ‘난 안 되는데!’라며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끌려가다시피 하였습니다. 구마경을 외우고 하니까 마귀가 신부님을 비웃었습니다. 마귀는 신부님의 죄를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기가 죽으면서도 ‘어찌 네가 감히 교회의 사제를?’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신자들을 그 마귀들린 사람 둘레로 빙 둘러앉게 하신 다음 묵주기도를 함께 바치자고 하였습니다. 처음에 비웃던 마귀는 점점 말이 없어지더니 식은땀을 흘리고 괴성을 질러대더니 결국은 그 사람에게서 도망쳤습니다.
예수님 당시 병과 죄는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병을 고치는 것이 죄를 용서하는 것이고 죄를 용서하는 것이 병을 고치는 것이었습니다. 요즘은 사제가 고해성사는 주면서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은 없다고 여깁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만약 이 믿음이 확고하였다면 아버지가 췌장암으로 길어야 3개월이라는 의사의 말을 들었을 때 몇 번이고 병자성사를 드리며 치유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의사의 말을 더 믿고 치유 기도를 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저 자신이 스스로 의인이 아님을 시인한 셈입니다. 정말 기적이 없다면 의인이 없는 것입니다.
사제도 그렇지만 신자들도 그렇습니다. 사제가 기적을 하지 못한다고 여겨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안수를 달라고 머리를 들이밀어야 하고 병자성사를 또 달라며 병이 낫지 않으면 한 달에 한 번은 또 병자성사를 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물론 병자성사를 남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한 번에 안 되면 곧바로 또 하셨습니다. 벳사이다에서 사람들이 소경을 고쳐달라고 할 때 예수님은 먼저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안수를 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마르 8,23)라고 물으십니다. 그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마르 8,24)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번에는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셨습니다. 그제야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마르 8,25) 되었습니다. 물론 이 치유는 상징적인 다른 의미도 있지만, 어쨌건 예수님께서 될 때까지 여러 번 노력하셨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니 신자들도 사제에게 될 때까지 병자성사를 청해야 합니다. 병자성사의 한 부분이 돌아가시기 직전의 ‘종부성사’가 되는 것이지 병자성사의 본래 의미는 아픈 이에게 기름을 발라 치유해주는 성사입니다.
제가 수원교구 영성관에 있지만, 작년 죽산성지도 잠깐 맡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미사를 자주 나오시는 어떤 분이 병자성사를 신청하셨습니다. 솔직히 ‘아, 병자성사는 자신의 본당에서 하시지 왜 나에게?’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병자성사를 부탁받으면 무조건 해 드려야 한다는 사제의식이 있기에 미사 후에 따로 병자성사를 해 드렸습니다.
갑상선 암을 수술하기 며칠 전이어서 병자성사를 드리는 중에 병이 나아 수술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얼마 뒤 미사를 하고 있는데 한 분이 한없이 울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목에 스카프를 한 것을 보니 그분인 것이 확실했습니다. ‘수술하셨구나. 그런대 왜 저렇게 많이 울고 계시지? 잘 못 됐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그분과 남편이 남아계셨는데, “신부님, 기적이에요”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왜요?”라고 물으니 “조직검사까지 다 끝나서 암이 확실했는데, 의사가 열어보니 암이 아니라 염증이었다고 해요. 그래서 항암도 안 해도 된대요. 염증만 제거했습니다”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주님께서 해 주셨구나!’라고 생각하면서도 “자매님이 믿음이 강해서 은총 받으셨네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서도 ‘아, 아버지가 아프셨을 때도 이렇게 할 수 있었다면!’이란 생각이 다시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만약에 본당에 가게 된다면 한 달에 한 번은 아프신 모든 분에게 병자성사를 주어야겠다’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기적이 없다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다면 의인이 없는 것입니다. 사제도 그렇지만 신자도 그렇습니다. 사제가 그런 믿음이 없다면 신자들이 청해야 합니다. 사제를 귀찮게 해야합니다. 예전에 “남편은 아내 하기 나름이에요”라는 광고도 있지 않았습니까? 기적이 많아져야 고해성사도 많이 보고 성체성사도 많이 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보지 않으면 믿지 못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엔 지금보다 더 많은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가톨릭교회에서 지금보다 훨씬 많은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대해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소명(Calling)과 생업(Job)의 차이
자신이 하는 일을 바라보는 모습에 따라 크게 소명(Calling)과 생업(Job)으로 나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두 부류의 차이는 너무나 큽니다. 소명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은 필요한 것이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며 세상에 무언가 이바지를 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생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보다 즐거움과 만족감이 훨씬 높았습니다.
이렇게 소명(Calling)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의 행복도는 훨씬 더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소명으로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까요? 자기 일에 얼마나 많은 의미를 찾아 나갔을까요? 이 모든 것이 자기 일에 대한 믿음을 가져온 것입니다. 바로 믿음은 커다란 의미를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온 갈릴래아 땅은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근처에 왔다는 말만 들으면, 하던 일도 모두 팽개치고 예수님을 향해 떠났습니다. 이렇게 많은 군중이 모여들면 겁이 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정치인입니다. 군중을 모으고 있는 사람이 자기네 편이면 상관없지만, 자기네 편이 아니면 큰일이기에 신중하게 살펴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사회의 정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 제관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 이 제관들에게 예수님의 발언과 행동을 보고하면서 뜻을 함께했습니다. 그런데 사건이 하나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서 들것을 달아 내려보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신성모독으로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얘야”라고 부르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특별히 믿음을 가상히 여길 때 이 사랑스러운 말씀을 쓰셨습니다. 그런데 중풍 병자의 믿음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복음은 이야기합니다.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셨으며 죄의 용서까지 해주셨습니다.
물론 죄의 용서는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 이제부터는 이 세상에서도 죄가 사해진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이를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치유하지 않으십니다. 말씀 한마디로 병을 고쳤다는 것은 하느님의 방법으로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무조건 믿고 중풍 병자를 들것에 실어 내려보낸 사람들의 믿음과 자신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는 이유로 따져보지도 않고 무조건 반대만 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불신이 크게 대조가 됩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나요? 계속 묵상하면서 주님과 자신의 관계를 생각하며 굳은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당신의 인생은 당신이 하루 종일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 달려있다.
- 랄프 왈도 에머슨
막연한 확률이 아닌 진짜 확률
1,000명의 미국인을 대상으로 자기 자신과 유명 인사들 여럿을 두고 각각 얼마나 천국에 갈만한지를 평가하게 했습니다. 유명 인사 중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사람은 성녀 마더 데레사로 79%의 표를 얻었습니다. 이어 오프라 윈프리가 66%, 마이클 조던 65%, 다이애나비가 60% 순이었습니다. 반면 아내 살해 혐의를 받는 전직 미식축구 선수 O.J. 심슨은 19%에 불과했습니다.
이제 “당신은 천국에 갈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몇 %가 “그렇다”라고 응답했을까요? 자그마치 87%였습니다. 성 마더 데레사 보다 천국에 들어갈 확률이 더 높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마더 데레사 수녀님보다 훌륭한 삶을 살고 있을까요? 자기 삶은 변화하려 하지 않으면서 막연하게 하느님 나라를 꿈꾸고 있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막연하게’가 아닌 구체적으로 그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키워야 합니다. ‘막연한’ 확률이 아닌 ‘진짜’ 확률을 높여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어느 쪽이 더 쉬우냐? (마르 2,9)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낼 정도의 믿음을 보시는 주님이시다. 함께 어우러지는 믿음이다. 병의 치유와 죄의 용서는 늘 함께 한다.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말씀을 우리들에게 들려주신다.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예수님의 치유는 그 어디에도 갇혀있지 않다. 갇혀있지 않기에 사랑은 역동적이며 치유는 명쾌하다. 지루하고 진부한 방식을 내려놓는 의식의 참된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더 쉬운 것이 더 시급하고 더 본질적인 것이 된다. 더 빠르게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언제나 하느님과 하나되는 사랑이다.
예수님께서는 죄의 용서로 인간의 소외감을 치유하신다.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다. 원래부터 하느님과 우리는 사랑으로 하나이다. 사랑은 우리의 고립과 소외를 근본적으로 치유한다. 죄의 용서와 병의 치유는 곧바로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힘찬 진리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과 행위로 우리를 치유하시는 참된 하느님이시다. 용서와 치유를 동시에 선택하시는 주님이시다. 율법을 뛰어넘는 그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하느님과 우리는 하나이기에 가장 어려운 것이 가장 쉬운 것이 된다. 사랑이신 하느님 쪽이 더 쉽다. 용서와 치유가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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