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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1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주간 토요일 -
2022년 1월 15일 연중 제1주간 토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사울이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릴 사람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며, 당신께서는 죄인들을 부르러 오셨다고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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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1사무 9장 1-4절, 17-19절, 10장 1절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사람,
사울이
그분의 백성을 다스릴 것이다.
그는 벤야민 사람으로서 힘센 용사였다.
2
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이름은 사울인데 잘생긴 젊은이였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 그처럼 잘생긴 사람은 없었고, 키도 모든 사람보다 어깨 위만큼은 더 컸다.
3
하루는 사울의 아버지 키스의 암나귀들이 없어졌다. 그래서 키스는 아들 사울에게 말하였다. “종을 하나 데리고 나가 암나귀들을 찾아보아라.”
4
사울은 종과 함께 에프라임 산악 지방을 돌아다니고, 살리사 지방도 돌아다녔지만 찾지 못하였다. 그들은 사알림 지방까지 돌아다녔는데 거기에도 없었다. 다시 벤야민 지방을 돌아다녔으나 역시 찾지 못하였다.
17
사무엘이 사울을 보는 순간,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이 사람이, 내가 너에게 말한 바로 그 사람이다. 이 사람이 내 백성을 다스릴 것이다.”
18
사울이 성문 안에서 사무엘에게 다가가 물었다. “선견자의 댁이 어디인지 알려 주십시오.”
19
사무엘이 사울에게 대답하였다. “내가 그 선견자요. 앞장서서 산당으로 올라가시오. 두 분은 오늘 나와 함께 음식을 들고, 내일 아침에 가시오. 그때 당신이 마음에 두고 있는 일도 다 일러 주겠소.”
10,1
사무엘은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을 맞춘 다음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당신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그분의 소유인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셨소. * 이제 당신은 주님의 백성을 다스리고, 그 원수들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할 것이오.”
화답송
주님,
임금이 당신 힘으로
기뻐하나이다.
주님, 임금이 당신 힘으로 기뻐하나이다. 당신 구원으로 얼마나 즐거워하나이까! 당신은 그 마음의 소원 이루어 주시고, 그 입술의 소망 내치지 않으셨나이다. 주님, 임금이 당신 힘으로 기뻐하나이다.
은혜로운 복으로 그를 맞이하시고, 그 머리에 순금 왕관을 씌우셨나이다. 그가 당신께 살려 달라 빌었더니, 영영 세세 긴긴날을 주셨나이다. 주님, 임금이 당신 힘으로 기뻐하나이다.
당신 구원으로 그 영광 크오며, 당신이 존귀와 영화를 내리시나이다. 그를 영원한 복이 되게 하시고, 당신 앞에서 기쁨이 넘치게 하시나이다. 주님, 임금이 당신 힘으로 기뻐하나이다.
복음
마르 2장 13-17절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때에
13
예수님께서 호숫가로 나가셨다. 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14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5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16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7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전능하신 하느님, 성체로 새로운 힘을 얻고 간절히 바라오니 저희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며 하느님을 충실히 섬기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 집전
2022년 1월 15일 (토)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1월 15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해 주겠다.”(마르 2,1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마치 이를 증명하시려는 듯,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를 제자로 부르시고,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를 하십니다.
“나를 따라라.” 예수님의 초대에 세리 레위는, 갈릴래아의 어부들이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것처럼(마르 1,16-20 참조), 현재의 삶의 방식을 모두 버리고 그분을 따릅니다. 당시 세리는 이방인들과 자주 접촉하고, 자신의 직무를 이용하여 부정한 이득을 얻었기 때문에 ‘죄인’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죄인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게다가 그의 집에서 많은 세리와 죄인과 자리를 함께하시고 음식을 나누십니다.
율법 학자들은 자신의 깨끗함과 거룩함을 지키려고 세리들과 죄인들과 되도록 거리를 두었습니다. 그런 율법 학자들에게, 세리를 부르시고 죄인과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큰 문젯거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그들은 누구보다 먼저 당신을 필요로 하는 이들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율법 학자들이 세리와 죄인을 사회적 종교적 관계에서 단절하고 격리하였다면, 예수님께서는 그 관계를 회복시키십니다. 관계의 회복은 죄의 용서를 전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찾아 나서시는 분이시며,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을 제자로 부르시며 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시는 분이십니다.
“나는 ……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근사하기는 하지만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사울 얘기를 정식으로 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올해는 사울 얘기랄까, 사울이라는 인물 탐구를 할까 합니다.
어제 사무엘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른 나라처럼 임금을 세워달라고 사무엘에게 조르는 얘기였고 이런 요구가 탐탁치 않은 하느님이셨지만 임금을 세워주라고 하셨는데 오늘 그 임금이 될 사울이 등장한 겁니다.
이스라엘의 임금 하면 다윗이고, 이스라엘은 다윗의 왕조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도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고 예수님을 다윗 왕조를 다시 세울 분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 사울은 이런 다윗과 비교되는 슬픈 왕이랄까 가련하고 애처로운 왕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항상 비교당하는 신세니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울에 대한 묘사는 근사합니다.
"이름은 사울인데 잘생긴 젊은이였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 그처럼 잘생긴 사람은 없었고, 키도 모든 사람보다 어깨 위만큼은 더 컸다."
그렇습니다. 근사하다는 것이 사울에 어울리는 말입니다. 근사하다는 말은 한자어 近似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니까 뭣과 거의 비슷하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멋있다거나 잘생겼다는 뜻으로 쓰이는 이 말이 실은 진짜에 근사하다는 것이지 진짜는 아니라는 말이지요. 겉보기에 근사하지만 진품은 아니라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허우대는 멀쩡해가지고'라고 비슷한 표현이 또 있지요. 허우대 곧 껍데기는 멀쩡한데 속은 곯은 경우이거나 허우대는 그럴듯한데 실제는 그렇지 않은 경우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사람일까?
물론 저는 허우대가 그럴듯한 사람이 아니지요.
그러나 육체적인 키나 덩치가 작아 허우대가 결코 그럴듯하다고 할 수 없지만 영적으로는 왜소하지 않은 그래서 근사하게 보이고 싶은 저이지요.
예를 들어, 하느님 사랑에 근사한 사람 그러니까 저의 사랑이 하느님 사랑에 많이 근접한 사람이기를 바라거나 영적인 가난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에 근접한 저이기를 바라지요.
겨울로 접어들어 저의 누나 중 하나가 겨울옷을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외국에 있는 조카가 보낸 옷이니 이번에는 꼭 입으라는 거였고, 이럴 때 꼭 덧붙이는 말, '남 주지 말고'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그러나 저는 그 옷을 입을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좋은 옷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카한테는 너무 미안한 일이었지만, 그 옷을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겉 가난은 제가 그리스도의 가난을 닮으려고 하고 그래서 영적으로 근사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것 누구나 알고, 적어도 저는 알지요.
그래도 저는 이런 저를 옛날처럼 비하하거나 학대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어찌보면 뻔뻔한 것일 수도 있지만 가난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저라고 좋게 보는 것입니다.
저의 가난은 진짜 가난이 아니고 근사한 가난이지만 그게 저의 가난이라고 겸손하게 인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얘기한 것처럼.
근사하지만 다윗에 비하면 많이 부족한 사울을 보면서 그리스도와 프란치스코에 사뭇 못 미치는 저를 겸손하게 인정하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죽기까지 완전한 행복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마태오)를 부르시는 내용입니다. 이것에 불만을 품은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어울리며 식사하시는 것에 불만을 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우리가 죄인이 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변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 번은 죄인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의 나의 모습이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죄인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본인들이 잘살고 있는 의인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머물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탕자의 형이 그렇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께 열심히 봉사하는 신앙인이지만 형제들을 죄인으로 심판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있는 행복이 아닌 아버지로부터 보상을 바랐던 것입니다. 반면 작은아들은 죄인들의 상징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누려보았기 때문에 그 안에 공허함만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니 행복이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임을 압니다.
우리는 어느 쪽에 속합니까? 혹시 우리도 하느님이 지금 옆에 계신다면 약간 불편하지 않을까요? 하늘나라도 우리가 즐길 수 있는 것을 모두 차려놓으시고 하느님은 잠시 출타 중이시면 좋지 않을까요? 그러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분이 주시는 것으로 행복한 나라가 아니라 그분이 함께 계셔주시는 것만으로 행복한 나라입니다.
2016년 4월 16일 에콰도르 플라야 프리에타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33세에 세상을 떠난 아일랜드계 수녀님이 있습니다. ‘클레어 크로켓’ 수녀(Sr. Clare Crockett)입니다.
클레어는 처음부터 유명해지고 싶었고 부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물론 그런 길로 가고 있었습니다. 15세 때 이미 영국 유명 TV와 계약을 맺었고 17세 때는 그녀의 재능을 알아본 미국에서까지 러브콜이 왔었습니다. 그녀가 18세 때 수녀원에 들어오기 직전까지도 그녀는 영국에서 영화를 찍고 있었습니다. 고급 호텔에서 자고 고급 레스토랑에서 술을 마시며 담배도 피우고 정결하지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한순간 갑자기 수녀원에 입회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변할 수 있을까요? 클레어는 17세 때 우연히 스페인 성지순례를 친구와 함께 갔습니다. 당연히 거기에서도 먹고 마시는 파티가 이어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성지순례였습니다. 성 금요일에 어쩔 수 없이 성당에서 예식에 참가했고 아무 생각 없이 따라 나가 예수님 십자가에 친구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을 만납니다. 아무도 알려준 적이 없지만 바로 자신의 죄로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한없이 웁니다. 그녀는 어떻게 보답해야 하는지 생각합니다.
“나를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신 그분께, 내가 어떻게 나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을까?”
그녀는 바로 수녀님이 되기로 합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을 본 사람은 이렇게 먼저 ‘죄인’이 되고 ‘자기를 봉헌’하게 됩니다. 주님의 뜻에 자기를 봉헌하면서 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느님 자녀로 새로 태어나게 만드는 분은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다시 돌아와 영화를 찍던 그녀는 상태가 더 나빠집니다. 더 타락한 삶으로 돌아왔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추구하던 것들이 진짜 행복이 아니었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갈 데까지 간 그녀는 화장실에서 토하려고 하다가 자신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누군가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분명한 그리스도의 임재를 느낍니다. 그 십자가의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언제까지 나를 고통스럽게 할 작정이냐?”
침실로 돌아온 그녀는 내일 일정표를 보며 밤새 울었습니다. 그녀는 다 가졌다고 생각했지만, 가슴은 텅 비어있었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습니다. 주님을 가지지 못했다면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것입니다.
청빈, 정결, 순명을 위해 모든 것을 끊는 것이 두렵기는 했지만,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을 믿고 주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모든 것을 끊고 수녀원에 입회합니다. 그 이후로도 영화감독이 계속 전화하였지만, 그녀의 마음은 한결같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재능으로 항상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녀의 슬픈 모습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합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나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목숨을 버리고 자기 자신을 잊고 자신에게서 죽는다면 그것이 행복이다.’ 이것은 정말 진실입니다. 정말 진리입니다.”
수녀님은 그렇게 지진이 났을 때 기타를 가르치고 있었던 아이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뛰어다니다 건물이 무너져 계단에서 사망하였습니다.
저도 신학교에 들어오기 전에 화장실에서 클레어 수녀님과 같은 경험이 있습니다. 그 경험이 너무 강렬해서 친구에게 ‘화장실에서 만난 예수님’이란 글을 써 보낸 적이 있습니다.
저의 생일이었고 사람들은 저의 얼굴에 케이크를 묻혀가며 축하해 주었습니다.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케이크를 씻으려 화장실에 갔는데 주님께서 함께 계심이 느껴졌습니다. 화장실에서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느낀 것입니다. 그리고 밖으로 좀 전까지 나를 축하해 주던 이들은 자기들끼리 재밌게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나를 축하해 주러 온 것이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이 즐기러 온 것입니다. 군중 속의 고독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클레어 수녀님은 행복을 찾는 사람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하느님이 주실 수 있는 것들을 추구했지만 결국엔 그것들이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 방향의 전환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다행히 저도 할머니의 죽음으로 ‘행복’을 신조로 삼고 살아왔기에 잠깐이지만 화장실에서 주님과 함께 있었던 행복과 사람들과 함께 있던 행복의 엄연한 차이를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온 마음을 다해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부모님과 함께 있으면 그 행복이 달성됨을 압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행복만을 추구하지는 않습니다. 행복이라고 믿는 것들을 추구하고 그것도 자주 바뀝니다. 행복을 바라는 것과 행복한 것들을 바라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행복은 목적지인데 행복을 바라는 것들에 눈이 팔려 결국 방향을 잃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 신화에 오디세이가 자신들을 유혹하는 사이렌이라는 괴물들을 이기기 위해 어떻게 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자기 귀를 밀랍으로 막아 자신을 유혹하는 사이렌의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고 자신을 배의 기둥에 묶어서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게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나려면 죽기 직전까지 바라는 것이 ‘행복’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행복이 곧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행복의 기준을 가지지 못하면 세상의 행복이 행복이라 여기며 공허함만 주는 것을 가지고도 자신은 행복하다 착각합니다.
행복한 것들, 곧 돈이나 성, 혹은 명예나 권력이 아닙니다. 진짜 행복을 추구하면 그것들은 공허하기만 합니다. 완전한 행복을 맛보기 전에는 나의 항해를 멈추지 않겠다고 결심하십시오. 그래야 길잡이라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것만이 행복임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작은아들처럼 아버지의 집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사랑의 법을 따르는 길이 결국 자기를 위한 길이 된다.
사람은 상대의 잘못을 잘 잊어먹지 않습니다. 인간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분명 실수도 할 수 있지만, 실수보다 잘못으로 생각하며 단죄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이에 반해 상대의 잘했던 점은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어떤 모습을 기억하는 것이 더 유익할까요?
잘못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늘 부정적입니다. 감사하지 못하고 남 탓만 하게 됩니다. 가까워지기는 너무 먼 당신이 되고 맙니다. 이런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혼자서 잘 살 수 있을까요? 더 남 탓만을 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남이 잘못한 일에 대해 지나치게 원망하거나 마음속에 담아두는 것은 결코 자신에게 좋지 않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마음을 갖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호감 가는 사람의 공통점은 긍정성입니다. 이런 사람 곁에는 도움 주는 사람이 넘쳐날 수밖에 없습니다.
인복이 있다는 말을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단순히 운이 좋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만큼 잘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인복의 시작은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에게 진심을 가지고 대하면 인복이 저절로 생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은 인복 많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호숫가에는 로마인들이 세워 놓은 세관이 있었습니다. 이곳은 외국 상인들이 드나들던 곳으로, 유다인 상인들이 물건을 밖에 내다 팔려면 이곳을 지나야 합니다. 세관에 앉아 있던 세리는 로마인들을 위하여 그 상품에 관세를 물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리인 유다인들은 동족들의 눈에는 더럽고 치사한 민족 반역자였습니다. 이런 민족 반역자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라.”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의 제자 선택은 너무나 의외입니다. 지난번의 네 제자는 어부였습니다. 흙투성이의 발과 비린내 나는 손으로 사람들과 떨어져 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증오의 대상인 세리였습니다. 더군다나 유다인에게는 식사 자체가 종교 예절이었기에 죄인들과 함께 식사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식사를 함께 하니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분노를 이끌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을 어겼다고 난리였지만, 예수님은 율법을 따르지 않으십니다. 대신 하느님 나라의 법을 지키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법은 율법이 아니라 사랑의 법입니다. 이 법에 따라서 주님께서는 활동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법을 따르고 있나요? 사랑의 법을 따르는 길이 결국 자기를 위한 길이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과정에서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데 성공하는 일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중요한 것들은 희망이 없어 보이는 것을 계속 시도하는 사람들로부터 이뤄졌다.
- 데일 카네기
자기 변화가 이루어지는 곳
필리핀에 사는 가난한 여학생의 이야기입니다. 이 학생의 집은 너무 가난해서 집에 수돗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물을 긷기 위해 멀리 떨어진 우물까지 다녀와야만 했습니다. 힘이 약한 여학생이기에 길어오는 물의 양은 적었고 그래서 하루에도 수십 번 우물에 다녀와야만 했습니다. 물을 긷느라 다른 것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여학생은 어떻게 하면 더 쉽게 많은 물을 길어올 수 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이 생각과 함께 자기 몸을 열심히 단련했지요.
이 여학생은 성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역도 선수가 되어, 2020년 도쿄 올림픽에서 필리핀 역사상 첫 금메달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하이딜린 디아스입니다.
가난 때문에 물을 긷는 자기 처지를 한탄하며 원망의 삶을 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상황에서도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하이딜린 디아스 선수의 모습을 보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 안에서만 진정한 자기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르 2,17)
가슴벅찬 부르심다운 부르심은 지금부터이다. 부르심은 죄인에 대한 지극한 사랑에서 출발한다. 모든 부르심은 예수님이라는 지향점이 동일하다. 부르심은 만남의 연속이다.
부르심은 그래서 일방적이지 않다. 참된 관계로 나가는 것이다. 성숙을 향해 나가는 것이다. 참된 관계란 음식을 함께 나누듯 따뜻한 정(情)을 예수님과 함께 나누는 기쁨이다. 부르심의 불꽃은 감사의 불꽃이다.
부르심의 여정에는 정답이 없다. 부르심은 저마다 다채롭다. 존중이 필요하다. 부르심의 교훈은 두터운 관계로 성장하는 참된 존중이다. 존중을 되찾는 풍요로움의 여정이다. 존중의 식사 존중의 동행으로 풍요로워진다.
부르심에 대한 저마다의 존경심이 필요하다. 부르심의 공동체는 죄인들의 공동체이며 실천의 공동체이다. 용기있는 실천이 주님을 따르는 부르심이다. 죄인을 부르러 오신 사랑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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