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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1월 12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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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2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주간 수요일 -

 

 

2022년 1월 12일 연중 제1주간 수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사무엘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응답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장모를 낫게 하신 뒤 많은 사람을 치유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월 12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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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1사무 3장 1-10절, 19-20절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그 무렵 


소년 사무엘은 엘리 앞에서 주님을 섬기고 있었다. 그때에는 주님의 말씀이 드물게 내렸고 환시도 자주 있지 않았다. 


어느 날 엘리는 잠자리에 누워 자고 있었다. 그는 이미 눈이 침침해지기 시작하여 잘 볼 수가 없었다. 


하느님의 등불이 아직 꺼지기 전에, 사무엘이 하느님의 궤가 있는 주님의 성전에서 자고 있었는데, 


주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셨다. 그가 “예.” 하고 대답하고는, 


엘리에게 달려가서 “저를 부르셨지요? 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엘리는 “나는 너를 부른 적이 없다. 돌아가 자라.” 하였다. 그래서 사무엘은 돌아와 자리에 누웠다. 


주님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자, 그가 일어나 엘리에게 가서, “저를 부르셨지요? 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엘리는 “내 아들아, 나는 너를 부른 적이 없다. 돌아가 자라.” 하였다. 


사무엘은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고, 주님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드러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주님께서 세 번째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자, 그는 일어나 엘리에게 가서, “저를 부르셨지요? 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제야 엘리는 주님께서 그 아이를 부르고 계시는 줄 알아차리고, 


사무엘에게 일렀다. “가서 자라. 누군가 다시 너를 부르거든,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여라.” 사무엘은 돌아와 잠자리에 누웠다. 

10 
주님께서 찾아와 서시어, 아까처럼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셨다. 사무엘은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9 
사무엘이 자라는 동안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어, 그가 한 말은 한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 

20 
단에서 브에르 세바에 이르기까지 온 이스라엘은 사무엘이 주님의 믿음직한 예언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

 

주님께 바라고 또 바랐더니, 나를 굽어보셨네.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오만한 자들과 어울리지 않고, 거짓된 자들을 따르지 않는 사람!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

당신은 희생과 제물을 즐기지 않으시고, 도리어 저의 귀를 열어 주셨나이다.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바라지 않으셨나이다. 제가 아뢰었나이다. “보소서, 제가 왔나이다.”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

두루마리에 저의 일이 적혀 있나이다. 주 하느님, 저는 당신 뜻 즐겨 이루나이다. 당신 가르침 제 가슴속에 새겨져 있나이다.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

저는 큰 모임에서 정의를 선포하나이다. 보소서, 제 입술 다물지 않음을. 주님, 당신은 아시나이다.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르코 1장 29-39절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 

29 
회당에서 나오시어,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가셨다. 

30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3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32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33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34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5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36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37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39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전능하신 하느님, 성체로 새로운 힘을 얻고 간절히 바라오니 저희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며 하느님을 충실히 섬기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동현 플로렌시오 신부 집전

 

 

2022년 1월 12일 (수)
김동현 플로렌시오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1월 12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기도를 가까이할 때에 삶이 바뀝니다.

 

‘카파르나움에서의 하루’가 이어집니다.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마르 1,27)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신 예수님께서 회당을 나와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가십니다. 그곳에는 그분의 도움이 필요한 시몬의 장모가 있습니다. 어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말씀’으로 치유하신 예수님께서, 오늘은 ‘행위’로 그를 치유하십니다. 그분께서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십니다. 치유받고 나서 곧바로 “시중을 드는” 그의 모습은, 하느님께 받은 ‘은혜’가 이웃을 위한 ‘봉사’로 이어져야 함을 묵상하게 합니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안식일이 끝나고 사람들은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데려옵니다. 그들을 낫게 하신 예수님께서는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외딴곳으로 가시어 기도하십니다. 이는 병자를 고쳐 주고 마귀를 쫓아내는 능력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분의 능력은 하느님을 만남으로써, 곧 하느님에게서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만나는 때인 기도 안에서 새로운 결단을 내리십니다. 모든 이가 열광하며 당신을 찾는 그곳에 머무르시지 않고, 다른 고을을 찾아 나서십니다. 온 백성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당신께서 오신 목적이며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마르코 복음사가는 어제와 오늘 복음에 걸쳐 예수님의 모든 활동을 요약하여 소개합니다. 하루에, 그것도 안식일에 이렇게 많은 활동을 하셨다는 것은 복음 선포가 그만큼 급하고 중요하였음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항해 여정을 기도로 시작하시고, 기도로 마무리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기억합시다. 믿음은 하느님과 만나는 시간 안에서 커 나갑니다. 기도는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채워 주고, 우리의 분주한 일상을 이끌어 주는 근원입니다. “기도는 노력입니다.” “기도를 가까이할 때에 삶이 바뀝니다”(『기도, 새 생명의 숨결』, 16면). 그래서 기도는 남는 시간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 속에서 희생하고 투쟁하며 기도를 위한 시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기도하러 가서는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일상, 아니 일생에 대한 요약입니다. 공생활 이후 예수님은 매일 그리고 돌아가실 때까지 이렇게 사셨습니다. 탁 드는 느낌은 불꽃 같은 삶이셨습니다. 그다음 드는 느낌은 “나는?”입니다. 

“나는 이중 무엇을 얼마만큼 잘 따르고 있나?”입니다. 

주님은 병을 고쳐 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어제 봤듯이 예수님은 책상받이가 아니십니다. 사람들의 삶 한가운데서 생사고락을 같이 하십니다. 대부분 시간을 병자들과 악령 들린 사람들 가운데서 보내십니다. 

이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제는 식사를 하며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나 간호사들이 얼마나 힘들지 형제들과 얘기를 나눴습니다. 노상 아픈 사람들과 상대를 하니 말입니다. 사람은 아픈 사람을 대하면 아픔이 전이되고 우울한 사람과 만나면 우울함이 전이되기 마련이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살려면 그리고 그 일을 계속하려면 둘 중의 하나입니다. 전이돼도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랑이 충만하던지 전이 되는 것을 아예 잘 차단하던지. 

많은 사람은 극복할 수 있을 정도의 사랑이 없기에 전이 되는 것을 차단하는 쪽으로 선택을 합니다. 저도 30대 후반까지만 해도 고통을 많이 겪는 분들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찾아가지 않아도 찾아오는 분들로 감당하기 힘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찾아가지 않기 시작하면서부터 감당하기가 더 힘들어진 겁니다. 

역시 찾아가야 합니다. 태도의 문제인데 더 능동적이기 위해서입니다. 찾아 떠나지 않고 찾아오는 분들을 맞이하는 것은 안주하고 수동적이지 않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지요. 오늘 주님은 붙잡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다른 곳으로 떠나십니다. 그러므로 저도 그랬어야 했고, 지금도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고통받는 분들을 제가 감당하지 못하고 그들 고통이 전이되는 걸 차단하게 된 더 큰 원인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기도 부족이었습니다. 

기도가 부족했다고 제가 말할 때 그것은 기도 시간이 짧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쩌면 기도 시간은 짧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기도 시간은 충분했었는지도 모릅니다. 

저의 기도에 있어서 부족했던 것은 시간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저의 사랑이 부족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하느님 사랑에 제가 풍덩 잠기지 못한 것입니다. 

기도란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에 잠기는 겁니다. 하느님 사랑의 샘에서 물을 깃는 겁니다. 주님은 그 바쁜 중에도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도 그랬어야 했고, 지금도 그러해야 합니다. 

기도하러 가서 무엇을 하지 말고, 생각을 하지 말고, 계획을 하지 말고, 자책을 하지 말고, 명상이나 심지어 묵상도 말고 오직 사랑에 잠겨 있다가 나와야 할 겁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본성을 변화시키는 사랑이란? 사랑의 봉사자가 되는 사랑뿐.

 

오늘도 예수님은 밤낮없이 온종일 병자들을 치유하시고 악령을 쫓아내시고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이것이 세례를 받아 ‘사람 낚는 어부’가 된 이들이 따라야 하는 삶임을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특별히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는데 사람들이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자 예수님은 그 부인의 손을 잡아 일으키십니다. 그랬더니 열이 그녀에게서 떠나갔.고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듭니다. 

이 짧은 에피소드가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해 오신 모든 복음선포의 사역을 한순간에 다 설명해줍니다. 당신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몸소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 제자들을 당신 복음선포 사역에 초대하셨습니다. 왜 그들을 당신 사랑의 실천에 ‘초대’하셨을까요? 그들 나름대로 하느님을 섬기면 안 됐을까요? 

사람은 아무리 누군가를 사랑하려 해도 명확한 어떤 ‘부르심’에 따르지 않으면 저절로 ‘자기 자신을 위한 사랑’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사랑으로 우리 본성이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더 타락할 수도 있습니다. 

미무라는 36세의 건축 디자이너입니다. 마레히사 씨에게 상담하러 온 이유는 자신은 9개월밖에 안 된 신혼부부인데 아내가 갑자기 이혼하자는 편지만 한 통 남겨놓은 채 집을 나가버렸다는 것입니다. 아내는 29세이고 이름은 아야였습니다. 아야가 워낙 이혼에 대해 굳은 결심을 하고 있어서 간신히 이혼을 전제로 3번만 함께 상담을 받아보기로 했습니다. 남편은 일 때문에 매일 거의 새벽 1시에 들어왔습니다. 아내는 “결혼을 했는데도 줄곧 외롭기만 했어요”라고 말합니다. 

“나는 열심히 집안일을 하고, 남편이 집에 돌아올 때는 웃는 얼굴로 맞이하면서 그가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신경을 쓰고 계속해서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지진이 났는데도 집에 바로 오지 않았어요. 남편은 배려가 없는 사람이에요. 이런 사람과는 함께 살 수 없어요.”

그녀가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은 남편이 3년 동안 사귀던 약혼녀인 직장 동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약혼까지 하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였습니다. 그래서 남편은 그녀에게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아야는 남편이 늦게 들어오면 집에서 걱정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도 그녀 밑에서 일한 경험이 있어서 그녀가 자신보다 훨씬 멋지다고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남편은 그녀에 관해 관심이 1%도 남아 있지 않았었습니다. 

이 둘이 합치면 잘 살까요? 당연히 이런 일이 반복될 것입니다. 아야는 ‘나를 위한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남편도 잘하는 것은 없지만, 어쨌건 사랑을 내가 하려고 하면 상대에게 ‘보상’을 요구합니다. ‘내가 이만큼이나 노력했는데, 돌아오는 게 이거야 결국?’이라고 생각할 때가 옵니다. 이런 사랑은 사랑을 잃은 원죄의 본성을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가리옷 유다처럼 오히려 자신의 본성을 더 타락시킵니다. 

[출처: 『오늘 알았던 걸 그때 알았더라면』, 이시이 마레히사, 밀라그로]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 아닌 제삼자 때문에 그 대상을 사랑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마더 데레사가 한 자살하려던 귀부인을 자신에게 오라고 해서 자신의 일을 돕게 만든 적이 있습니다. 그녀도 분명 사랑이 삶의 의미인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누군가 참사랑을 실천하는 이의 봉사자로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 주체적으로 사랑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을 해도 우울하기만 한 것입니다. 사랑은 나의 본성을 회복시킵니다. 그러려면 자아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 때문에’가 아닌 ‘사랑이신 주님이나, 주님의 뜻을 따라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와 같은 이들 때문에’ 봉사하는 마음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시몬의 장모가 ‘그들에게 시중들었다’라고 할 때,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 곧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시중들다’라는 단어는 우리가 ‘식탁의 봉사자’라 불리는 ‘부제’(디아코노스)에서 나온 ‘디아코네오’입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식탁의 봉사자들에게 퍼서 나누어주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이 ‘부제’(디아코노스)들입니다. 곧 사랑은 ‘포도주’입니다. 우리에게서 포도주의 본성이 나올 수 없습니다. 사랑은 곧 하느님의 본성입니다. 우리 사랑은 그 사랑의 흐름에 봉사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자아의 이기심에서 해방되어 나의 본성을 변화시키는 사랑을 하게 됩니다.

미국 동해안 메릴랜드에 병원을 개업한 ‘맥칼리스터 박사’는 아내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의사로서 손도 써보지 못하고 아내를 보내야 했던 심한 자책감과 우울증이 그를 점령했습니다. 그는 중풍을 앓게 되었고 휠체어를 타며 먹고 입고 눕는 것조차 자기 손으로 할 수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삶의 의욕을 잃은 그는 자살할 생각만 했습니다. 세 명의 간호사가 항상 붙어있어야 했는데 그는 죽지도 못하게 하고 자신을 비참하게 하는 그 간호사들을 싫어했습니다. 

그는 해변가 높은 곳에서 바다를 보았으면 좋겠다고 간호사에게 말했습니다. 간호사들도 별생각 없이 그를 바닷가로 데려갔습니다. 맥칼리스터는 자기 걱정은 하지 말라고 하며 간호사들보고 수영을 즐기라고 하였습니다. 간호사들이 수영을 즐길 때 자신은 벼랑으로 뛰어내릴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간호사 하나가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녀는 파도에 휩쓸려 바다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맥칼리스터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휠체어에서 일어나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맥칼리스터를 구조원이라 여겼습니다. 맥칼리스터는 간호사를 이른 시간에 구해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중풍으로 인한 후유증과 우울증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출처: 『어떻게 살 것인가』, 이충호, 하늘 아래] 

진정 우리 본성을 변화시키는 사랑은 사랑에 봉사하는 사랑입니다. 맥칼리스터가 중풍과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자기를 위한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예수님이라면!’, 혹은 ‘의사라면!’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 어떤 참사랑 때문에 그것에 봉사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을 따르는 것만이 순수한 사랑입니다. 이렇게 병으로부터 회복되는 사랑은 이전에 자기를 위해 아내를 사랑한 그런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죽기만을 원하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자기를 위한 사랑이 아니라 순수한 사랑의 방향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포도주가 그 여인에게로 행했고 맬칼리스터는 그저 그 포도주가 그녀에게 향하는 데 봉사한 것뿐입니다. 이런 사랑만이 우리 본성을 회복시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랑의 실천을 교회가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사랑하는 데 우리도 참여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사랑합시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사랑은 다 나의 본성을 더 타락시키는 이기적인 애착에 머물게 됩니다. 시몬의 장모처럼 그리스도와 교회에 시중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의, 사랑을 위한 봉사자들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돈을 써도 아깝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매칭 전문 기업 ‘이음 소시어스’는 미혼 남녀 1,145명을 대상으로 ‘돈을 써도 아깝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1위는 무엇이었을까요? 자그마치 33%가 대답한 ‘좋아하는 사람에게 쓰는 돈’이었습니다. 그 뒤를 ‘자기 계발이나 취미에 쓰는 돈’, ‘식비’가 차지했습니다. 
 
미래를 위한 투자에는 아깝다는 생각을 잘 하지 않게 됩니다. 시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미래를 위해 쓰는 시간은 전혀 아깝지 않지만, 순간의 만족만을 위해 쓰는 시간에 대해서는 아깝다는 생각이 가득합니다. 
 
그중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라고 하며, 하느님과의 관계를 더 친밀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특히 먼 미래에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는 절대 이 기도를 멈춰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도 기도하는 시간을 아까워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어떤 분은 쓸데없는 낭비라고도 생각합니다. 그래서 먼 훗날 할 일 없으면 그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 보겠다고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의 일과가 얼마나 바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카파르나움에서 안식일을 보내시는 예수님께서는 오전에 회당에서 설교와 더러운 영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리고 낮에는 모든 유다인이 안식일을 자기 집에서 지내는 관습대로 시몬 베드로의 집에, 저녁 후에는 베드로 집 문전에 모인 병자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튿날은 아직 날이 새기도 전에 일찍 일어나셔서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신 다음 다른 이웃 고을에 가십니다. 
 
하루 내내 바쁘고 지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다음날 새벽에 먼저 기도하십니다. 종종 우리는 피곤하면 기도를 뒤로 미루기도 합니다. 또 바쁘다는 이유로 기도를 하지 못하는 경우도 참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첫 번째 원칙은 바로 하느님 아버지와의 대화인 기도였습니다. 
 
이 기도의 힘이 곧바로 다른 이웃 고을로 갈 수 있도록 해주었고, 또 그곳에서 힘차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할 수 있도록 했던 것입니다. 
 
너무나 바쁘고 지친 가운데에서도 절대로 놓치지 않았던 기도를 우리 역시 놓쳐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일을 다 마친 후에 할 일이 없어야 하는 기도가 아니라, 모든 일의 시작에 두어야 하는 기도임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자신감은 지금까지 수없이 성공했으므로 앞으로도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니다. 자기 안의 불확실한 부분을 일깨워 보기로 결심하는 것이.

- 에마누엘 드레세르

 

 

다시 태어남.

 

인간의 세포는 수명이 있어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새롭게 태어난 새로운 세포로 교체가 됩니다. 이렇게 끝없이 분열과 재생을 평생에 걸쳐서 반복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재생 기간이 늦어지게 되지요. 이것이 바로 늙어 버리는 것입니다. 
 
가장 긴 시간에 걸쳐 재생되는 세포는 지방세포로 한 8년 걸린다고 합니다. 시간이 흘러 파괴된 내 몸의 모든 세포가 새로운 세포로 되는 시간은 8년 정도 걸리는 것입니다. 8년이 지나면 8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세포로 구성된 전혀 다른 ‘나’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종종 “다시 태어나고 싶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다시 태어나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세포를 이용해서 다시 태어나는 삶을 멋지게 살아봅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마르 1,38)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사랑이다. 사람을 움직이시는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의 하루가 다시 밝았다. 사랑과 나눔 봉사와 기도로 우리를 깨우시는 주님이시다. 우리를 만나러 오시는 예수님의 오늘이다. 

하루 내내 하느님을 향해 계시는 사랑 가득한 예수님의 일상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당신의 하루를 놓치지 않으신다. 오늘 우리의 시간은 어떠한지를 다시금 성찰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불안을 치유하신다. 우리의 하루를 헤아려주시며 우리의 삶을 어루만져 주신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치유의 축제가 펼쳐지는 오늘이다. 아픈 우리를 데리고 업고 걸어 가신다. 

사랑하기위해 떠나오신 예수님의 삶을 만나는 사랑의 눈부신 오늘이다. 우리는 과연 진실로 사랑하고 있는가? 사랑하기위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다. 사랑의 일은 가장 분명한 주님의 뜻이다. 

사랑이 모든 것을 치유하는 우리의 오늘이다. 오늘과 사랑은 분리될 수 없다.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오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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