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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1월 9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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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주님 세례 축일 -

 

 

2022년 1월 9일 (일) 주님 세례 축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주님 세례 축일

 

주님의 세례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드러낸 사건이므로 주님 공현 대축일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주님 세례 축일은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 받으신 일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전례력으로는 주님 세례 축일로 성탄 시기가 끝나고, 다음 날부터 연중 시기가 시작됩니다.

 

 

✠ 오늘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는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 오늘 제2독서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나자렛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셨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성령께서 내리시고,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옵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월 9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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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이사 42장 1-4절, 6-7절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이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니 섬들도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이 당신 백성에게 강복하여
평화를 주시리라.

 

하느님의 아들들아, 주님께 드려라. 그 이름의 영광 주님께 드려라. 거룩한 차림으로 주님께 경배하여라. 주님이 당신 백성에게 강복하여 평화를 주시리라.

주님의 소리 물 위에 머무네. 주님이 넓은 물 위에 계시네. 주님의 소리는 힘차고, 주님의 소리는 장엄도 하네. 주님이 당신 백성에게 강복하여 평화를 주시리라.

영광의 하느님 천둥 치시네. 그분의 성전에서 모두 외치네. “영광이여!” 주님이 큰 물 위에 앉아 계시네. 주님이 영원한 임금으로 앉으셨네. 주님이 당신 백성에게 강복하여 평화를 주시리라.

 

 

매일미사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사도 10장 34-38절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 무렵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35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 

36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곧 만민의 주님을 통하여 평화의 복음을 전하시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을 

37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이 세례를 선포한 이래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온 유다 지방에 걸쳐 일어난 일과, 

38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신 일도 알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3장 15-16절, 21-22절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렸다.

 

그때에 

15 
백성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16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21 
온 백성이 세례를 받은 뒤에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22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베드로 사도가 말한 대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신 일도 알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아 새로 태어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갑시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

 

주님, 거룩한 양식을 가득히 받고 주님의 자비를 간청하오니 저희가 성자의 말씀을 충실히 따르며 주님의 참된 자녀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최봉원 야고보 신부 집전

 

 

2022년 1월 9일 (일)
최봉원 야고보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1월 9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신 이유

 

교회는 오늘 주님 세례 축일을 지내며 성탄 시기를 마무리합니다. 이 축일은 세례자 요한에게 받으신 예수님의 세례(마태 3,13-17; 마르 1,9-11; 루카 3,21-22 참조)를 기념하고, 우리가 받은 세례의 의미를 묵상하게 합니다.

세례의 표지인 ‘물’의 중요한 역할은 ‘정화’입니다. 손이 더러워지면 물로 씻듯이, 잘못을 저지르고 죄를 지을 때마다, 회개를 통하여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신 참하느님이신데, 왜 세례를 받으셨을까요? 아무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신 것은 죄인인 우리와 함께하시려고,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려고, 곧 우리와 같아지시려는(필리 2,6-7 참조) 이유가 아니었을까요?

루카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신 바로 다음 장면을 전합니다.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성령의 내리심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떠올립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요한의 세례가 죄의 회개를 위한 물의 세례였다면, 예수님의 세례는 죄의 용서를 위한 성령과 불의 세례입니다. 오늘 제1독서가 전하는 하느님 말씀이 예수님의 세례에서도 울려 퍼집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약속된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는 하느님의 보증입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기도’와 ‘성령’의 힘으로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제2독서의 증언처럼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온 유다 지방에 걸쳐”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가장 큰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우리가 받은 세례의 근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세례는 세례 받은 우리를 그분께서 걸으신 복음 선포의 길로 초대합니다. 세례를 받은 우리에게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가신 길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세례, 신분 세탁

 

"하느님, 외아드님께서 저희와 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으니 겉모습만이 아니라 내면에서도 저희가 그분을 닮아 새로워지게 하소서." 

오늘 주님 세례 축일 본기도인데 오늘은 이 본기도를 가지고 나눔을 할까 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주님 세례 축일은 공현 축일의 마무리이자 연중 시기의 시작입니다. 성탄이 아기 예수의 공현이라면 세례는 어른 예수의 공현이자 출현이지요. 

그리고 주님께서 세례를 받기 위해 요르단강에 들어가심은 성탄의 의미로는 하늘에서 이 세상에 내려오심의 의미이고, 공생활의 의미로는 세상 한가운데로 들어가심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제가 세례자 요한처럼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주고 있는데 주님께서 사람들 틈에 끼여 세례를 받으러 오신다면 저는 어떤 마음이 들고 사람들은 어떤 마음이 들까? 

저는 무진장 황송하고 사람들은 세례받는 것이 기껍고  자랑스러울 겁니다. 

먼저 세례자 요한처럼 제가 주님께 세례를 드리는 것을 상상하면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한 세례자 요한처럼 저도 겸손해질 것이고 나는 적어져야 하고 그분은 커져야 한다고 할 겁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요르단강에 들어가시고 세례를 받으심은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시는 육화와 비하처럼 우리를 낮아지게 하고 겸손케 합니다. 

자기 주제를 모르고 하느님처럼 높아지려다가 아담과 하와가 교만의 죄를 지었는데 주님께서는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시어 우리 인간과 같은 모습이 되심으로써 세례자 요한처럼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나는 하느님이 아닌 인간이라고 나의 인성을 참으로 겸손하게 그러나 그런 나를 사랑으로 끌어안게 합니다. 

다음으로 세례의 줄에 주님과 같이 서 있는 사람의 경우를 상상하면 세례받으러 가는 것이 포승줄에 묶여 재판정이나 감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목욕탕 곧 성령의 샤워장에 가는 것처럼 기쁘고 자랑스러울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과 함께 세례를 통하여 성령의 샤워를 받으면 우리는 신분 세탁을 하게 되어 신화되고 신성을 지니게 되는 겁니다. 

그분이 낮아지심으로써 우리는 높아지는 것이요, 그분이 인간이 되심으로써 우리는 신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제가 봉헌예절 때 물과 술을 섞는 뜻이고 성령의 세례의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같이 세례받으신 덕분에 우리는 세례를 통해 신분 세탁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고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물로서 겉을 씻는 정도가 아니라 존재가 아담에서 그리스도로 바뀌고 하와에서 성모 마리아로 바뀌는 신분 세탁입니다. 

이런 바람으로 오늘 저는 본기도로 강론을 마치겠습니다. 

"하느님, 외아드님께서 저희와 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으니 겉모습만이 아니라 내면에서도 저희가 그분을 닮아 새로워지게 하소서."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세례의 큰 은혜 : 감정이 상하는 두려움에서의 자유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주님의 세례를 통해 세례의 은총을 묵상합니다. 루카 복음은 특별히 ‘기도’를 강조합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고 성령께서 오시는 중간에 ‘기도’가 들어갑니다. 곧 “온 백성이 세례를 받은 뒤에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라고 씁니다. 

루카에게는 세례가 곧 성령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보다는 세례로 ‘기도할 수 있어서’ 성령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기도로 성령을 받을 능력’이 세례로 오는 것은 맞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하느님의 자녀라는 믿음이 생깁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

세례를 받으면 기도할 수 있고, 기도하면 성령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갖게 된다는 것이 오늘 복음의 줄거리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이 우리에게 주는 이익이 무엇일까요? 바로 ‘좋은 기분’입니다. 정체성인 주는 것은 ‘기분’입니다. 그리고 그 기분은 ‘감정’을 조절합니다. 사람은 감정으로 움직이는 동물이라 감정이 조절되지 않으면 그냥 동물처럼 됩니다. 

우선 감정은 이성으로 통제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전에 중국 북부 산시성 산젠 마을에서 한 남자(34)가 자신을 버린 부인에 대한 복수로 결혼식장에서 폭탄을 터뜨려 36명이 사망하고 30여 명이 다친 일이 있었습니다. 

전직 석탄 광산 폭발물 전문가인 이 남자는 29일 아침 마차에 50kg짜리 폭탄을 싣고 마을 대로에서 열리는 결혼식장에 도착, 폭탄을 터뜨렸으며 자신도 목숨을 잃었습니다. 범인은 지난해 부인 이 자신을 버리고 아들을 데려간 후 질투심과 분노에 가득 차 ‘최악의 사고’를 낼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사건의 원인인 범인의 부인과 세 자녀(아들과 두 딸)는 결혼식장에 없었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자신의 감정을 통제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감정은 억제되지 못했고 자신과 상관없는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게 했습니다. 우리가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후회스러운 일들이 일어납니까? 감정만 조절할 수 있다면 우리는 훨씬 평화롭고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감정조절법은 ‘시간을 두고 다른 일이 집중하라’라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감정은 저절로 사그라들고 또 다른 일에 집중하면 생각이 그것에서 벗어나 감정이 커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참을 인’(忍) 자 세 개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조선 시대 홍계관이라는 유명한 점쟁이가 어떤 젊은이의 점을 쳐 주었는데, 높은 벼슬을 할 팔자이지만 살인을 저지르는 점괘가 나왔습니다. 젊은이는 살인을 면할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었고, 홍계관은 집 안 구석구석에 ‘참을 인’자를 수없이 붙여놓으라고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젊은이는 높은 벼슬에 올랐습니다. 며칠 지방에 갔다가 밤늦게 돌아왔을 때 방 불이 꺼져있고 댓돌에 못 보던 신발이 놓여있었습니다. 

“아니, 감히 외간 남자를 끌어들여?”

그는 분노에 눈이 뒤집혀 부엌에 가서 칼을 집어 들었습니다. 부엌 벽에 ‘참을 인’자가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는 없었습니다. 방으로 들어갔을 때도 ‘참을 인’자가 보였습니다. 역시 그를 멈추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칼을 들어 내리찍으려고 하는데 천장에도 ‘참을 인’자가 보였습니다. 순간 그는 멈칫했고 그때 아내가 깨어 소리를 지르며 불을 켰습니다. 함께 누워있던 사람은 외간 남자가 아니었고 처제였습니다. 

이렇듯 시간을 두고 다른 것에 생각을 집중하면 감정의 폭발은 막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을 켰을 때 진짜 외간 남자가 누워있었다면 어땠을까요? 더는 그의 분노를 막을 ‘참을 인’자는 없었을 것입니다. 시간을 끌고 다른 일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는 감정을 조절하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외부적인 일이나 생각에서 생기는 것이 감정입니다. 감정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감정은 대부분 ‘나의 생존’과 관련됩니다. 동물의 생존 본능을 담당하는 편도체는 이성을 담당하는 영역과 구별하여 작동하기 때문에 이런 감정이 즉각적인 행동을 만들어냅니다. 

우리가 이성으로 숨 쉬고 심장이 뛰게 할 수 없는 것처럼, 감정은 이성과 관계없이 나의 행동을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나 감정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감정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는 길은 생존을 넘어선 사람이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냇 킹 콜’(1917~1965)은 미국 영화 ‘모정’의 주제곡을 부른 것으로 잘 알려진 세계적 가수입니다. 그가 열여덟 살 나던 해 어느 봄날 오후, 그는 아버지와 함께 백인들이 사는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젊은 백인 청년이 다가와 아버지에게 길을 물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길을 알려주려고 입을 여는 순간, 느닷없이 젊은 백인의 주먹질이 시작되었습니다. ‘미스터’라는 존칭을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냇 킹 콜의 아버지는 코피를 흘리는 와중에도 일어나 정중하게 사과하였습니다. 

“아이 엠 소리, 미스터.”

광경을 보던 주위 백인들은 낄낄거리며 웃었습니다. 눈이 뒤집힌 젊은 혈기의 냇 킹 콜은 불끈 주먹을 쥐고 백인에게 대들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아들의 팔을 붙들며 나직하면서도 엄격하게 타일렀습니다. 

“참아, 냇! 지금은 안 돼. 아직은 안 된다.”

집에 돌아온 그는 한구석에서 분을 삭이지 못해 통곡하며 그 밤을 지새웠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편지를 남기고 집을 떠났습니다. 

“백인과 대등해지기 위해서는 우리 흑인이 백인 이상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로부터 수년 후, 그는 ‘백인 이상’이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백인들도 인정하는 유명 가수가 되었던 것입니다. [출처: ‘어떻게 살 것인가’, 이충호, 하늘아래]
냇 킹 콜이 화가 난 이유는 ‘나는 흑인이다’라는 믿음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성공했을 때는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나는 스타인데!’로 바뀌었습니다. 

감정은 생각으로 제어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만 제어될 수 있습니다. 위 젊은 사람의 살인을 막아낸 것은 ‘참을 인’자 세 개였을까요? 아닙니다. 아내가 불을 켜서 사실을 확인시켜주었기 때문입니다. 아내에 대한 믿음이 회복되지 않으면 감정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차곡차곡 쌓였다고 언젠가 다시 폭발할 것입니다. 

우리가 헷갈리는 것 가운데 하나는 ‘기분과 감정을 혼동한다는 것’입니다. 기분은 믿음에서 오는 것이고 감정은 환경에서 오는 것입니다. 오늘 누군가가 나를 무시하는 발언을 했다면 나는 기분이 나쁠까요, 아니면 감정이 상한 걸까요? 감정이 상한 것입니다. 그런 것으로 기분까지 나빠질 수 없습니다. 감정이 상했다면 원래 기분이 나빴던 것입니다. 기분은 환경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나의 정체성이 기분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은 내가 누구라는 믿음에서 옵니다. 

세례는 나의 정체성에 대한 믿음을 바꿔 내가 하느님 자녀라는 믿음을 줍니다. 그리고 ‘나는 이런 상황에서 기분이 나빠질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라는 믿음을 줍니다. ‘참을 인’자를 계속 보다 보면 ‘나는 화내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믿음이 생깁니다. 냇 킹 콜이 유명해졌다면 그는 흑인이라는 한계를 넘어선 것이기에 그로 인한 감정은 이전보다 훨씬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세례는 ‘하느님께 감사할 수 있는 특권’을 줍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기도로 언제든 하느님을 만나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기분은 믿음에 의해 결정되는데 그 믿음을 주는 힘이 성령이십니다. 

한 유방암이 걸린 교사를 위해 아이들이 노래를 불러주어 그 병이 치유된 적이 있습니다. 그 아이들이 노래를 불러줄 때 보이지 않게 오는 사랑이 성령입니다. 성령은 ‘나는 사랑받는 사람이다’라는 믿음을 주고 그러면 좋은 기분이 생겨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몰아내어 병까지 치유됩니다. 

하느님 자녀라는 좋은 기분을 유지하기 위해 자주 기도합시다. 그 기도로 성령을 받아 받게 되는 정체성, 그것이 세례의 가장 큰 은혜입니다. 세례받은 사람들은 그래서 기도로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세례의 큰 은혜 : 감정이 상하는 두려움에서의 자유

 

학창 시절에 소위 ‘울렁증’으로 힘든 시간을 오랫동안 보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말할 때,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만 받아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신부가 되기 전에 이 증세를 없애야 하는데,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런 불안감은 더 큰 불안감을 가져오면서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울렁증, 불안감을 없애기 위해 어떻게 했을까요? 우황청심환도 소용없었습니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대비’였습니다. 미사 독서를 해야 할 때는 거의 외울 정도로 계속 읽었습니다. 발표할 때도 제가 말할 내용을 모두 외워서 했습니다. 그 결과 떨기는 했지만,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강론을 위해 원고를 외우게 될 때까지 읽은 뒤에야 미사에 들어갑니다. 이제 울렁증이 전혀 없는데도 어떻게든 외워서 강론합니다. 이런 대비가 저를 더 나은 존재로 만들어줬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종종 불안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때 이 점을 이야기해줍니다. 
 
“불안을 없애기 위해, 지금 해야 할 대비는 무엇인가요?” 
 
시험을 앞두고 불안한 사람이 불안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맞습니다. 공부하면 됩니다. 죽음을 앞두고 불안한 사람이 불안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느님 나라에 희망을 두고 기도하면 됩니다. 그리고 그 나라에 잘 들어가기 위해 사랑을 실천하면 됩니다. 
 
오늘은 주님께서 세례받으시는 날을 기념하는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아무런 죄도 없으신 분이 왜 회개의 세례를 받으셨어야 했을까요? 아무 죄도 없으신 분이 받아야 하는 세례라면, 죄 많은 우리가 받아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것을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세례는 앞서 우리의 구원 삶을 미리 대비하는 활동이 됩니다. 하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아무런 노력 없이 얻을 수가 있을까요? 그 어떤 영혼의 정화도 없이 참 기쁨과 행복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우리 구원을 위한 가장 큰 대비가 바로 세례입니다. 
 
이 세례는 단순히 세례받는 것으로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세례를 받은 신앙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직접 보여주신 겸손과 사랑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세례를 받은 참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대비를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지금 당장 내가 실천하고 노력해야 할 대비는 무엇이 있을까요?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인생은 꽃, 사랑은 그 꽃의 꿀.

- 빅토르 위고

 

 

나의 신앙 단계

 

운동을 처음 배울 때는 모든 것이 다 궁금합니다. 처음 수영을 배울 때, 팔의 각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숨은 언제 쉬고 또 언제 들이마시는 것인지, 어떻게 해야 가라앉지 않는 것인지 등등…. 궁금한 사항이 정말로 많아집니다. 그래서 수영을 가르쳐주시는 분에게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면 친절하게 가르쳐 주지만 솔직히 잘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어느 정도 능숙하게 수영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처음 배울 때의 궁금증이 모두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궁금했던 사항들을 하나하나 새기면서 수영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느 정도 숙련도가 올라가면 궁금했던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기억나지도 않습니다. 저절로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두꺼비가 지네에게 묻습니다. 
 
“너는 어느 순서로 다리를 움직여?” 
 
이 말을 듣고서 신경 써서 걸으려고 하니 지네는 걸을 수 없었다고 하지요. 
 
주님에 대해서도 이렇습니다. 처음에는 궁금한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즉 주님께 대한 믿음이 커지면서 궁금함보다 몸이 저절로 주님께 나아간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단계까지 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 더 알려고 노력하고, 더 믿음을 키우기 위한 노력이 커져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렸다. (루카 3,21)

 

세례로 기도가 열리고 하늘이 열린다.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신다. 사람의 아들이 세례를 받으신다. 비우시고 낮추시는 주님의 세례이다. 주님의 세례로 하늘을 보게 되었다. 

우리에게 오신 사랑의 하늘이시다. 사랑의 하늘은 기도의 하늘이며 사람의 하늘이다. 사랑의 하늘은 우리를 씻어주고 닦아주는 새로운 삶의 기쁨을 선사하신다. 산다는 것은 사랑을 배우는 여정이다. 

세례의 시간은 믿음의 시간이 된다. 믿음은 하늘을 연다. 사람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세례의 기본은 인격의 희망찬 새 시작이다. 세례는 가장 좋은 하느님의 사랑이다. 세례와 세례가 만나 기도의 공동체가 된다. 

새롭게 태어나고 새롭게 시작하는 희망의 방식이다. 세례성사는 일치의 성체성사로 이어진다.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알게되며 예언직 왕직 사제직을 받게된다. 우

리가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게하는 놀라운 세례성사의 신비이다. 씻어주는 세례의 방식은 하느님 나라의 가장 좋은 방식이다. 모든 은총의 시작에는 은총의 세례성사가 있었음을 깨닫는다. 

세례의 첫마음이 가장 좋은 기도의 첫마음이었다. 세례의 삶을 다시 뜨겁게 시작하게 하시는 세례의 주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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