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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1월 8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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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

 

 

2022년 1월 8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시다.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는 들어 주십니다.

 

 

✠ 오늘 복음

 

요한은 예수님께서는 커지셔야 하고 자신은 작아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월 8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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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1요한 5장 14-21절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 주신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의 아드님에 

14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15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 주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그분께 청한 것을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 

16 
누구든지 자기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볼 때에 그것이 죽을죄가 아니면, 그를 위하여 청하십시오. 하느님께서 그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이는 죽을죄가 아닌 죄를 짓는 이들에게 해당됩니다. 죽을죄가 있는데, 그러한 죄 때문에 간구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17 
모든 불의는 죄입니다. 그러나 죽을죄가 아닌 것도 있습니다. 

18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나신 분께서 그를 지켜 주시어 악마가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합니다. 

19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고 온 세상은 악마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압니다. 

20 
또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오시어 우리에게 참되신 분을 알도록 이해력을 주신 것도 압니다. 우리는 참되신 분 안에 있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분께서 참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21 
자녀 여러분, 우상을 조심하십시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은
당신 백성을 좋아하신다.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충실한 이들의 모임에서 찬양 노래 불러라.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분을 모시고 기뻐하고, 시온의 아들들은 임금님을 모시고 즐거워하여라. 주님은 당신 백성을 좋아하신다.

춤추며 그분 이름을 찬양하고, 손북 치고 비파 타며 찬미 노래 드려라. 주님은 당신 백성을 좋아하시고, 가난한 이들을 구원하여 높이신다. 주님은 당신 백성을 좋아하신다.

충실한 이들은 영광 속에 기뻐 뛰며, 그 자리에서 환호하여라. 그들은 목청껏 하느님을 찬송하리라. 그분께 충실한 모든 이에게 영광이어라. 주님은 당신 백성을 좋아하신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요한 3장 22-30절

 

신랑 친구는
신랑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그때에 

2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유다 땅으로 가시어, 그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르시며 세례를 주셨다. 

23 
요한도 살림에 가까운 애논에 물이 많아, 거기에서 세례를 주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가서 세례를 받았다. 

24 
그때는 요한이 감옥에 갇히기 전이었다. 

25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다인 사이에 정결례를 두고 말다툼이 벌어졌다. 


26 그래서 그 제자들이 요한에게 가서 말하였다.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27 
그러자 요한이 대답하였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28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 

29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30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주님의 백성을 온갖 은혜로 다스리시니 오늘도 내일도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가 덧없는 현세에서도 위안을 받고 영원한 세상을 향하여 더욱 힘차게 나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동현 플로렌시오 신부 집전

 

 

2022년 1월 8일 (토)
김동현 플로렌시오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1월 8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주님 세례 축일을 하루 앞둔 오늘 세례자 요한이 등장합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를 통하여,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를 극적으로 드러냅니다. 대화가 전개될수록 이야기의 무게 중심이 세례자 요한에게서 예수님께로 완전히 옮겨지는 느낌입니다.

뒤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례를 준 것이라고 바로잡히지만(요한 4,2 참조), 예수님께서는 유다에서, 세례자 요한은 애논에서 세례를 줍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자신의 사명에 최선을 다합니다. 요한은 이미 자신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으로 증언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증언은 자신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하는 결실을 거두었습니다(요한 1,35-42 참조).

그런데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께 세례를 받으러 가는 것’이 못마땅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며, 예수님께서 바로 그리스도라고 증언합니다. ‘신부’인 이스라엘이 준비하고 맞이해야 하는 ‘신랑’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신랑의 친구’로서 충만한 기쁨을 얻었던 세례자 요한은 이 증언을 끝으로 무대에서 물러납니다. 작아져야 하는 세례자 요한의 삶은 커지셔야 할 예수님의 삶 안에 녹아 들어갑니다. 이제 구원의 무대에는 예수님만 계십니다. 그분께서 메시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고” 언제나 “참되신 분 안에 있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늘 기억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거절도 수락도 사랑으로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믿는 바인데 요는 그 믿음이 오늘 서간에서 얘기하는 그 확신인지 성찰케 됩니다. 

믿지 못하는 것과 믿는 것 사이에 단계와 정도가 있지요. 불신이 있고, 의심이 있고, 흔들리는 믿음이 있고, 흔들림이 전혀 없는 믿음 곧 확신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제 생각에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가진 것은 다 하느님께서 주신 거라는 것을 적어도 우리는 불신하지 않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합리적인 의심이나 의문은 가질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은 왜 가난한가? 하느님께서 아무것도 주시지 않아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은 차별이 없으시니 그에게도 주셨는데 그가 받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해야겠습니다. 하나는 하느님께서 모두에게 주시지 않는 경우와 하느님께서 모두에게 주셨지만 인간 측에 문제가 있는 경우입니다. 

첫째로 하느님께서는 모두에게 주시지 않는다는 것에 우리가 주저하거나 변호를 하려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서간에서 얘기하는 대로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 뜻에 맞으면 다 들어주시지만 당신 뜻에 어긋나는 것은 청하더라도 주시지 않습니다. 마약을 달라는 자식의 청을 들어주는 부모가 없잖아요? 

그런데 이런 사랑의 거절을 경험한 우리는 온당한 청도 하느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불신할 수 있고, 그래서 이젠 하느님께 청하기보다 자기 힘으로 벌려고 하는데 이런 불신은 하느님 사랑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께 청을 드릴 때는 거절도 수락도 하느님께서는 사랑에서 하시는 분이라는 확신으로 하고, 그래서 들어주시지 않는 것도 하느님의 사랑이요 더 큰 사랑 또는 다른 사랑을 위한 거절이라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이 다 내게 선이 아니고 그래서 사랑이 아니라는 깨달음도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왠지 생각들이 얼키고설켜서 더 이상 풀어나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렇게 나눔을 마무리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세례자 요한은 왜 예수님을 찾아가지 않았을까?

 

오늘 복음엔 ‘예수님의 세례’와 ‘요한의 세례’가 대비되어 나옵니다. 요한도 세례를 주고 예수님도 세례를 주시니 마치 경쟁자가 된 것처럼 나옵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요한 3,26)

요한은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 가장 큰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나라에서 가장 작은 이도 세례자 요한보다는 크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한 번은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처럼 제자들을 보내어 그분이 메시아가 맞는지 확인하는 일을 합니다. 결정적으로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가 오셨는데, 그 메시아를 만나러 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분들은 이제 세례자 요한에 대해 재평가가 내려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왠지 세례자 요한을 높이는 것은 현실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확신하건대 우리는 모두 아무리 거룩해져도 세례자 요한보다 높을 수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같은 오해를 받는 분이 있다면 바로 ‘마더 데레사’입니다. 일부 개신교 신자들은 마더 데레사가 평생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확신을 느끼지 못하는 메마름 속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들어, 믿음이 약해 구원을 받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믿음은 물론 그리스도와의 거리를 나타냅니다. 하지만 그 ‘소명’ 때문에 이 지상에서는 어쩔 수 없이 그분과 멀리 떨어져 살아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로마의 카이사르는 평생 로마에서 살아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항상 로마의 국경을 더 넓히기 위해 변방에서만 살았습니다. 로마에서 떨어져 산 카이사르는 그러면 로마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물론 로마를 혼자 지배하려 들었기에 살해당하기는 하였지만, 로마 국민에게는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직무’상 멀리 떨어져야만 하는 역할이 있습니다. 달걀로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달걀의 노른자가 예수님이라면 예수님과 더 가까운 것은 껍데기보다 흰자입니다. 껍데기는 노른자보다 본질에서 다르고 더럽고 딱딱합니다. 그러면 노른자는 자신과 더 가까운 흰자를 더 사랑하는 게 맞을까요, 아니면 더 변방에서 더 고통스러운 일을 하는 껍데기를 더 사랑하는 게 맞을까요?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몸통과 더 가깝다고 팔뚝을 더 사랑하고 손은 사랑하지 않을까요? 오히려 끝에서 고생하는 것들을 더 사랑하고 보살펴야 합니다. 물론 거리상으로는 멀지만 어쩌면 안의 것을 보살피기 위해 더 고생하는 것들은 바깥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구가 자신을 감싸고 있는 둑보다 맨 끝에서 배를 부르는 등대를 덜 사랑한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도의 단계로 말하면 주님과 더 가까운 기도는 ‘관상기도-묵상기도-소리기도’ 순입니다. 저는 주로 묵상기도를 합니다. 관상수도원에 있는 수도자들은 주로 관상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마더 데레사는 거의 소리 기도를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분 사진에는 항상 묵주를 들고 있고 수도자들과 공동으로 하려면 성무일도와 같은 소리기도가 주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분은 저보다 묵상기도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더 가까운 기도를 하는 사람은 ‘관상가-저-마더 데레사’입니다. 이런 식이라면 마더 데레사는 성녀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계란의 노른자는 스스로 오염된 흰자를 더 고마워할까요, 아니면 자신을 지키려는 단단한 껍데기를 더 사랑할까요? 

당연합니다. 자신과 멀어도 자신의 ‘뜻’을 더 충실히 따라준 껍데기를 더 사랑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에서는 내가 어느 수준의 기도를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맡겨진 소명에 어느 정도 충실했느냐?’로 결정됩니다. 

모든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세례의 중요성에 대해 말합니다. 특별히 요한복음은 더 그렇습니다. 소위 ‘로고스 찬가’(요한 1,1-18)에서 하느님과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며, 그분을 증언한 유일한 분으로 세례자 요한을 말합니다. 분명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길을 닦으라고 보내신 유일한 분이요, 구약으로 말하면 엘리야 예언자와 같은 분입니다. 

만약 기도의 단계로 본다면 세례자 요한은 기도를 시작하기 전의 ‘회개’ 단계에 있습니다. 그러니 타볼산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보고 기적을 행했던 그분의 제자들이 세례자 요한보다 더 위대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명을 충실히 수행한 면에서는 세례자 요한에 사도들 못지 않습니다.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요한 3,28)라고 명확히 말합니다. 

자신의 소명상 자신은 ‘회개의 세례’ 자리에 있어야지 그리스도께 가서 그분께 세례를 받으면 최초의 회개의 세례의 중요성을 선포하는 자의 역할이 약해집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은 보내도 끝까지 그리스도께 가지 않은 것입니다. 그 거리의 중요성을 보여주어야 하는 소명 때문입니다. 

삶의 기쁨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당연히 그 기도를 통해 받는 기쁨도 높아집니다. 그래서 기쁘지 않으면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영광을 직접 볼 수 있는 것보다는 큰 기쁨이 없습니다. 다만 그분의 목소리를 다른 이들을 통해서 듣는 기쁨뿐입니다. 그러나 요한도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에 그분이 커지시는 소식만 들어도 그 기쁨은 매우 충만합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요한 3,29)

기쁨의 충만함은 소명의 충실에서 옵니다. 그만큼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달걀부침 하나 뒤집는 것, 하다못해 지푸라기 하나를 줍는 것도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했다는 『하느님의 현존 연습』의 ‘로렌스 수사’(1605-1691)나 빗자루 수사로 불리는 ‘마르티노 수사’(1579-1639)는 그리스도의 변두리에서 마냥 기뻤습니다. 그만큼 완전하게 그리스도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피부가 검은 노예 취급되는 혼혈이었던 마르티노 수사는 수도원에 들어가서도 “나는 불쌍한 노예일 뿐입니다”라고 말하고, 수도회 재정이 나빠지자 “나는 수도원의 재산이니 나를 노예로 팔아 빚을 갚으십시오”라고 청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분들이 주방에서 평생 일만 하였고 마당을 쓰는 일만 하였다고 해서 누가 관상 수도회의 수도자들보다 영성이 낮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분들은 사랑의 현존 안에서 그 사랑이 자기 자신에게 요구하는 구체적인 사랑실천을 했기에 온전히 모든 시간의 삶이 기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행복했습니다. 

기도는 그분의 뜻에 내 마음을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나의 춤을 그분의 음악에 맞추는 것입니다. 이럴 때 기도의 맛을 느낍니다. 기도의 맛(기쁨)과 기도의 필요성(소명)만 잊지 않는다면 참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되어 기도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아테네에 있는 사람들이 누군가를 부활시킬 힘이 있다면 자신들을 위해 젊은 나이에 싸우다 요절한 알렉산더 대왕을 살려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기도를, 그것이 어떤 기도이건 간에, 당신 뜻에 일치하려는 강한 열망으로 했다면, 그 사람을 부활시켜 가장 당신과 가까운 자리에 앉히실 것입니다. 그 사람의 ‘뜻 안에’ 머무는 것이 그 ‘사람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주변에 누군가 하품을 하면 따라 하지 않습니까?

 

어느 대학의 심리학과 교수가 수업 시간에 낯선 사람과 함께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분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학자로, 실험을 위해 오늘 우리 학교에 오셨습니다. 박수로 맞이하겠습니다.” 
 
힘찬 박수에 인사하며, 화학자라는 사람은 가방에서 액체가 담긴 유리병을 꺼낸 뒤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제가 연구 중인 물질로 휘발성이 강해 병마개를 뽑으면 바로 휘발됩니다. 인체에 해가 없지만, 냄새가 조금 날 것입니다. 병을 열었을 때 나는 냄새를 맡은 사람은 얼른 손을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이윽고 병마개를 열자, 많은 학생이 차례로 손을 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학생은 이 냄새가 정말로 싫다는 듯이 인상까지 쓰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심리학과 교수님께서는 이 사람이 화학자가 아닌 일반인이고, 액체는 그냥 증류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주변 사람의 암시를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의 말을 믿고 있습니다. 저 사람이 병 안에 냄새가 나는 화학 물질이 있다고 했을 때, 여러분은 믿었고 그래서 냄새를 맡은 것입니다.” 
 
이런 심리적 암시는 우리 일상에서 자주 일어납니다. 주변에 누군가 하품을 하면 따라 하지 않습니까? 또 계속 기침을 하고 있으면, 자기 목도 간지러워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신호등을 무시하고 걸어가는 사람을 보면 자신도 똑같이 무시하고 건너갑니다. 
 
좋은 영향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 역시 좋은 영향을 이 세상에 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힘이 되는 영향, 긍정적 영향을 주고받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투덜거립니다. 세례를 자기들의 고유 상표로 생각했는데, 예수님도 세례를 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자기 제자들에게 예수님에 관한 증언을 천명합니다. 
 
신랑과 그를 축하하고 기뻐하는 신랑 친구에 비교하여 설명하지요.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며, 신랑의 친구가 그 신랑이 잘되는 것을 시기한다면 진정한 친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신랑의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듣고 마음으로부터 축하하고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신랑이신 예수님을 기쁘게 맞이하며 기뻐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신랑이신 주님은 커지셔야 하고, 신랑의 친구인 자신은 작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겸손한 세례자 요한의 영향으로 많은 이가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약 자기만 드러나는 삶을 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나요? 세례자 요한처럼 세상에 좋은 영향을 전달하고 있나요?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신중하지 않으면 찾아온 기회를 놓치기 일쑤이다.

- 퍼블릴리어스 사이러스

 

 

많은 생각으로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몇 년 전, 미국에서 아이들이 뜨거운 차 안에 방치되어 있다가 사망했던 사건이 큰 이슈였습니다. 부모가 차에 아이를 놔뒀다는 사실을 깜빡하고 자기 일을 보면서 발생한 사건이었습니다. 
 
이해하지 못한다며 사람들은 ‘아동학대’를 말했습니다. 무신경하고 어리석어서 어린아이를 죽음으로 이끌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죽은 아이의 부모는 평소에 아동을 학대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훌륭한 양육자이자 존경받는 사회의 전문가였습니다. 
 
아이가 차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것입니다. 차에 내리는 순간 복잡한 일을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고, 쇼핑하러 와서 살 물건 목록을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 밖의 생각들이 아이와 함께해야 한다는 생각을 잊게 한 것입니다. 
 
저 역시 저녁 식사로 먹으려고 소머리국밥을 사고는 차에 놔두고 그냥 놔둔 적이 있습니다. 며칠이 지나서 차에 타는 순간,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뙤약볕 밑에 세워둔 차 안의 소머리국밥은 완전히 상했습니다. 
 
하루에도 많은 생각으로 정작 해야 할 일을 못 하는 우리가 아닐까요? 중요한 것을 절대로 놓치지 않는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요한 3,29)

 

작아질수록 우리의 기쁨은 더더욱 충만하여진다. 버리지 않고서는 작아질 수 없다. 신앙의 진가는 작아지는 결심으로 그리스도를 향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향하는 삶의 변화란 어디에서 우리가 멈추어야 할지를 아는 것이다. 

우리가 멈추어야 그리스도께서 우리안에서 커지신다. 멈추는 아픔 뒤에 찾아오는 참된 기쁨이다. 멈추는 성찰과 버리는 반성이 필요한 우리의 여정이다. 참된 기쁨이란 버려야 할 것을 우리가 버리는 것이다. 

미련과 집착을 버리는 실행의 기쁨이다. 떠나 보내는 아픔을 망설이지 않고 미련없이 이제 떠나 보내는 것이다. 어리석음이란 떠나 보내야 할 것을 떠내 보내지 못하는 망설임이다. 

머뭇거리는 우리자신을 아는 것이 어리석음을 멈추는 길이다. 멈추어야 제대로 움직이게 되는 그리스도의 질서이다. 자아의 멈춤이 그리스도의 믿음이 된다. 믿음과 멈춤 사이에서 만나게 되는 충만한 기쁨이다. 

기쁨이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멈추는 기쁨 버리고 떠나 보내는 기쁨으로 충만해지는 기쁨의 신앙이다. 우리의 기쁨 우리의 신앙은 어떠한지를 묻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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