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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1월 5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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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수요일 -

 

 

2022년 1월 5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수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요한 사도는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신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본 제자들은 겁에 질려 두려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으시고 풍랑을 멈추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월 5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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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1요한 4장 11-18절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십니다.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13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 

14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15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16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17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는 것은,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분처럼 살고 있기에 우리가 심판 날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18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
세상 모든 민족들이
당신을
경배하리이다.

 

하느님, 당신의 공정을 임금에게, 당신의 정의를 임금의 아들에게 베푸소서. 그가 당신 백성을 정의로, 가련한 이들을 공정으로 다스리게 하소서. 주님, 세상 모든 민족들이 당신을 경배하리이다.

타르시스와 섬나라 임금들이 예물을 가져오고, 세바와 스바의 임금들이 조공을 바치게 하소서. 모든 임금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모든 민족들이 그를 섬기게 하소서. 주님, 세상 모든 민족들이 당신을 경배하리이다.

그는 하소연하는 불쌍한 이를, 도와줄 사람 없는 가련한 이를 구원하나이다. 약한 이, 불쌍한 이에게 동정을 베풀고, 불쌍한 이들의 목숨을 살려 주나이다. 주님, 세상 모든 민족들이 당신을 경배하리이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르 6장 45-52절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뒤, 

45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 벳사이다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46 
그들과 작별하신 뒤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셨다. 

47 
저녁이 되었을 때, 배는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혼자 뭍에 계셨다. 

48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그분께서는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 

49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질렀다. 

50 
모두 그분을 보고 겁에 질렸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51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52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주님의 백성을 온갖 은혜로 다스리시니 오늘도 내일도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가 덧없는 현세에서도 위안을 받고 영원한 세상을 향하여 더욱 힘차게 나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최석수 요셉 신부 집전

 

 

2022년 1월 5일 (수)
최석수 요셉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1월 5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제 빵과 물고기의 기적을 통하여 놀라운 권능을 보여 주신 예수님께서 오늘도 놀라운 권능을 보여 주십니다. 빵을 배불리 먹은 군중을 돌려보내신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고자 산에 가시고, 제자들은 배를 타고 벳사이다로 향합니다. 그런데 배가 호수 한가운데에 이르자 맞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제자들은 위험에 놓입니다. 그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가십니다.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모습과,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멎는 상황은 그분의 신원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그분께서는 자연을 초월하는 능력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이 능력은 창조주 하느님만이 지니신 능력이므로, 예수님께서는 참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맞바람에 노를 젓느라 고생하는 제자들에게 가시려는 것입니다. 멀리서도 예수님의 시선은 위험에 놓인 제자들을 향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위험에서 구출하십니다. ‘새벽녘’은 바로 구원의 시간입니다(시편 46[45],6 참조). 

그런데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그들은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유령으로 생각하고, 겁에 질려 비명을 지릅니다. 멀리서도 위험에 빠진 제자들을 보시고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대비되는 제자들의 모습, 그 모습이 어쩌면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요? 

신앙 여정은 배를 타고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고요한 시간도 있지만, 우리를 위협하는 폭풍의 시간도 있습니다. 그러나 확고한 믿음으로 노를 젓는다면, 우리의 배는 세찬 바람과 거친 파도를 헤치고 무사히 목적지에 다다를 것입니다. 자연을 초월하는 능력을 지니신 참하느님,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용기를 내게 하는 믿음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제가 사랑하는 부부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부를 사랑하는 이유가 다른 부부에 대한 사랑과 비교하여 좀 다릅니다. 

이 부부가 서로 사랑하지만 그 사랑이 제 눈에는 냉골에서 서로 부등켜안고 있는 사랑처럼 보여 늘 안쓰럽고 안타까워 하는 사랑으로 봐 왔는데 이번에는 형제가 암에 걸려 외국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와 통화하며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소식은 제게도 그의 어머니에게처럼 청천벽력이었습니다. 

오늘 제자들은 호수를 건너다 역풍을 만나 악전고투합니다. 그러나 역풍보다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어두움이고 두려움입니다. 어두움이란 아무것도 볼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두움의 영성적 의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음입니다. 

어디에 있는지 현재 좌표가 보이지 않습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목적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가야 할지 수단방법이 보이지 않습니다. 도와줄 사람이 보이지 않고 하느님마저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두움이란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보이지 않으면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보이지 않으니 누가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보이지 않으니 무엇이 벌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데 이 알 수 없음이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보이지 않고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쌓여 있을 때 누가 다가오면 구해주러 오는 것이 아니라 해치러 오는 것으로 보이고, 그래서 내게 다가오는 그는 구원자가 아니라 유령 또는 악령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가왔을 때 제자들이 유령인 줄 알고 놀란 것이 바로 이때문이지요. 그런데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믿음과 믿음의 용기입니다. 

보이지 않고 알 수 없는 하느님이시지만 하느님은 분명 계시다는 믿음이요, 계실 뿐 아니라 나를 보고 계실 거라는 믿음이며, 보고만 계시지 않고 나를 구하러 오실 거라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런 믿음으로 인해 유령인 줄 알고 비명을 질렀던 입이 이제는 용기를 내어 주님이신지 묻고 주님을 맞아들이게 됩니다. 

어두운 밤, 두려움에 쌓일 때는 옆에 강아지만 있어도 덜 두렵지요. 그렇긴 하지만, 오늘 제자들처럼 공동체가 전체로 위험에 처하고 두려움에 쌓일 때, 그때는 옆에 누가 있다는 것이 위안은 되겠지만 큰 힘이 되고, 큰 의지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제자들은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고 주님은 뭍에 계셨지만 주님은 제자들을 보고 계셨고, 보고만 계신 것이 아니라 구하러 오셨지요. 

우리가 오늘 복음을 공현 시기에 읽는 뜻은 주님께서 비록 아니 계시고, 아니 보시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고 우리의 고통과 애씀을 다 보고 계시다가 적절한 때에 엠마누엘 주님으로서 나타나시리나는 것을 얘기하기 위함이고 그러니 이런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용기를 내라고 격려하기 위함이겠지요. 

다시 앞에 얘기한 부부를 하면 지금 이런 믿음을 가지고 용기를 내고 있습니다. 

"제게 지금 이 과정은 마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탕자의 여정이기도 하고 머리로 이해하고 분석하던 신앙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전적으로  의탁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올 한해도 염치없지만 감히 기도와 격려를  부탁"드린다고 신년 인사를 보내왔는데, 같이 기도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신앙생활을 해도 사자가 아니라 하이에나가 되는 이유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셔서 제자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내용입니다. 제자들은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저어 호수를 건너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은 물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제자들은 유령인 줄 알고 비명을 지릅니다. 이때 예수님은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그들에게 믿음을 북돋아 주십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배에 오르자 바람이 멎었습니다. 어려움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이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면 그냥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습니다. 만약 제자들이 예수님을 자신의 배에 태우지 않고 어려움만 극복하게 해달라고 청했다면 어땠을까요? 바람을 멎게 해주실 수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배에 물에 샌다던가, 동료들끼리 서로 다투게 되는 등의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모든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은 그분의 도움이 아닌 그분 자신입니다. 

어떤 분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데 말년에 당신과 친했던 사람들을 주님은 다 데려가시고 당신만 외롭게 남은 것에 하느님이 원망스럽기까지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저 기도만 드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기도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분은 마치 자신을 외롭지 않게 만들기 위해 사람들을 다시 살려내거나 아니면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생기게 해 달라고 청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기도는 왠지 ‘지금은 섭섭하지만 나를 외롭지 않게 해주신다면 사랑할게요!’ 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먼저 그분을 사랑해야 그분이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타시자 바람이 멎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바람을 멎게 하시고 배에 타신 것이 아닙니다. 먼저 우리가 그분께 감사하여 그분을 우리 배 안에 맞아들일 수 있을 때 우리 모든 어려움이 사라집니다.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결혼도 하고 자녀도 낳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행복하지도 기쁘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집을 떠나 몇 년 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가 이러저러한 산에 가면 그 꼭대기에 현자가 살고 있다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분명 그 현자가 인생의 의미를 발견할 방법을 알려줄 것이오.”

우여곡절 끝에 그 사람은 산꼭대기에서 현자를 만나 자신의 어려움을 털어놓았습니다. 그 현자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어떤 숲에 하니에나 한 마리가 살고 있었소. 하지만 그 하이에나는 다리를 심하게 다친 것 같았소. 그런데 하이에나의 특징이 뭔지 압니까? 하이에나는 먹잇감을 발견하면, 떼로 공격한다는 거요. 그러다가 그 가운데 한 마리에게 어떤 일이 생기면, 다른 하이에나들은 그를 놔두고 떠납니다. 그들은 서로를 돌보지 않고, 단지 공격할 때만 함께하지요. 그것이 일반적인 동물의 생리지요. 그래서 그 다친 하이에나가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그 순간 사자 한 마리가 나타났소. 사자는 죽어가는 하이에나를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들었지요. 그래서 하이에나를 자기 굴로 데리고 가서 정성껏 보살폈소. 그리고 하이에나는 다시 건강을 회복해 아주 편안해졌습니다.”

현자가 이야기를 이어가려고 하는데, 그 사람은 현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이미 안다고 생각해 이야기를 중단시켰습니다.

‘그래, 집에 가야겠다. 가서 사자 앞의 하이에나처럼 겸손하게 가족과 함께 살다 보면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

그는 현자의 이야기를 더 듣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그가 집으로 돌아오자 가족들은 기쁘게 그를 맞아들였습니다. 정말 그는 행복해졌습니다. 가족들은 겸손해져서 돌아온 그를 위해 성대한 잔치를 열어 귀향을 축하해주었습니다. 그가 사랑을 얻고 가족의 돌봄으로 편안하게 되자, 마침내 인생의 의미를 발견한 듯했습니다. 

‘현자의 말이 옳았어. 그동안 나는 인생을 헛살았던 거야. 가족과 함께 사랑하고 사랑받는 삶은 얼마나 행복한지.’

그러나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가족들은 각자 삶에 바빠 그에게 관심을 덜 쏟게 되었고 심지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뒹굴뒹굴하는 그를 지겨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또 외로워졌고 인생의 의미를 잃었습니다. 그는 생각했습니다. 

‘그 현자가 틀렸는지 몰라. 다시 찾아가 봐야겠어.’

그는 현자가 있는 산꼭대기로 올라가 그동안의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현자께서 말씀하신 대로 호랑이 곁의 하이에나처럼 겸손하고 감사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행복했지만, 이제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현자님의 말씀에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현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나를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도움만 받으려 했습니다. 그러니 온전한 도움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도움을 받으려면 먼저 도움을 주는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못해서 듣지 못한 말이 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집에 가서 하이에나처럼 살지 말고 사자처럼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출처: ‘치유의 순간’, 안토니오 사지, 바오로딸]

예수님께 도움만 청하는 사람은 그분의 도움을 어설프게 받습니다. 그래서 결국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를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기분의 도움이 아니라 그분 자체이십니다.

그분의 도움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이에나처럼 비굴하게 사는 것이 아닌 사자처럼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되어 정말 삶의 의미를 찾게 됩니다. 그분의 도움을 청하는 불완전한 신앙에서 그분 자신을 사랑하는 참 신앙으로 나아갑시다. 

구엔 반 투안 추기경은 주교가 된 지 몇 년 후에, 베트남 공산정권에 의해 투옥되어 13년 9개월 동안 독방에 갇혀 지냈습니다. 처음에는 신자들을 위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를 몹시 힘들게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그에게 오셔서 물으셨습니다. 

“투안, 너는 나를 선택했느냐? 내 일을 선택했느냐?”

투안은 대답했습니다. 

“예수님, 저는 당신을 선택했습니다.”

그때 비로소 그는 모든 고통과 슬픔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우리는 배에 예수님은 태우려 하지 않으면서 예수님의 도움을 청할 때가 있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어려움을 겪게 하느냐며 하느님을 원망하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런 일을 겪게 한 것은 이유가 있고 그 이유가 그분을 더욱 사랑하게 만드시려는 것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키워가는 것이 중요하지, 그분이 도움을 주시면 사랑하겠다는 식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내 안에 모시는 것만이 모든 어려움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셨다면 우리는 하이에나의 삶에서 사자의 삶으로 바뀝니다. 진정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회개를 그토록 주님께서 강조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느 회사에서 신입사원을 뽑기 위한 입사 시험이 있었습니다. 이 시험은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첫 시험에서는 95점을 맞은 사람이 일등이었고, 이등은 85점이었습니다. 다음 날, 두 번째 시험이 치러졌는데 글쎄 첫 번째 시험과 똑같은 문제가 나온 것입니다.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이 문제를 풀었습니다. 결과는 어제 일등 했던 사람이 똑같은 점수인 95점으로 일등을 했고, 어제의 이등은 90점으로 이번에도 이등이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세 번째 시험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첫 시험과 똑같은 문제가 나왔습니다. 일등을 했던 사람은 10분도 안 되어서 답을 제출했습니다. 이번에도 그는 95점으로 전체 일 등이었습니다. 이등이었던 사람은 아깝게 94점을 맞아서 또 이등이 되었습니다. 회사는 누가를 채용했을까요? 
 
이등이 채용되었습니다. 감독관은 탈락한 일등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점수는 뛰어나지만, 우리는 최고점을 받은 사람을 채용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매번 답안이 똑같고 변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회사는 하나의 방식으로만 운영되면 도태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성찰하며 계속 나아지는 사람입니다.” 
 
반성하지 않는 사람은 성장할 수 없습니다. 회개를 그토록 주님께서 강조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더 나아질 수 있도록 변화의 삶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호수에게 큰 난관에 빠집니다. 맞바람이 불어서 노를 젓기가 힘든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힘든 상태인데도 예수님께서는 그냥 스쳐 지나가려고 하십니다. 왜 그냥 지나가려고 하셨을까요? 제자들을 그토록 사랑하시는 예수님인데 말입니다. 
 
이는 제자들이 도움이 요청하여 외치는 일에 더 익숙하게 만드시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자들의 많은 수가 어부 출신이었습니다. 따라서 배 위에서는 자신이 최고라는 생각으로 이 문제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떨까요? 스스로 낮추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냥 지나치시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알아서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부족함을 깨닫고서 주님께 도움을 요청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주님을 배에 모셨을 때, 그들을 힘들게 했던 바람이 멎었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 삶 안에서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까? 그때 교만에서 벗어나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 도움을 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내 안에 모셨을 때,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성찰하는 계속된 변화가 필요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염려는 믿음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되고, 진정한 믿음이 시작되는 곳에서 사라진다.

- 조지 뮬러

 

 

주님께 대한 믿음에서 나오는 희망

 

죽음을 앞둔 자매님께서 병자성사를 청해 병원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암이 이곳저곳에 전이되어 이제 나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자매님 본인도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고 병원을 가고 있는 제게 가족이 이야기해주었습니다. 
 
병실에 들어가기 전에 계속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할지를 생각했습니다. 죽음을 앞둔 이 시점에, 영적인 이야기를 해줘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그 자매를 만나자마자 그런 준비가 별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완전히 야위어 있었지만, 미소를 지으며 저를 맞이해주셨습니다. 두려움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게 건강히 지내라는 말씀까지 해주셨습니다. 
 
위로를 드리려고 했는데, 그분과의 만남에 제가 더 위로받을 수 있었습니다. 죽음의 순간에서도 자기 모습으로 주변 사람에게 주님의 희망을 전할 수도 있음을 이 자매님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 자매님은 주님 안에서 위로와 힘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순간에서도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것은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마르 6,51)

 

지나가는 풍랑의 시간이다. 풍랑 속에서도 길을 찾는 우리들이다. 파도처럼 부서지지 않고서는 진정 깊어질 수 없는 우리들 신앙이다. 풍랑, 그 한 가운데에 계시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함께 계시기에 거센 풍랑도 은총이 된다. 흔들어놓기에 주님을 향하는 간절한 은총인 것이다. 간절함이 은총이다. 풍랑의 시간이 아니라 은총의 시간인 것이다. 숨길 수 없는 은총의 현주소이다. 

풍랑도 은총이 되게하시는 주님이시다. 진정한 믿음은 두려운 풍랑 속에서도 용기를 내는 것이다. 목마를 시간이 없는 은총의 연속이다. 삶을 치유하는 것은 또 다른 삶이듯 풍랑을 치유하는 것은 풍랑이다. 

인생의 맛은 풍랑을 통해 깊어지는 믿음의 맛이다. 풍랑이 지나간 자리가 은총의 자리였다. 믿음이란 안전한 곳을 찾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하는 이곳이 믿음인 것이다. 

믿음은 언제나 가장 가까이 있다. 풍랑의 빵이 믿음의 빵이다. 풍랑의 빵을 먹으니 풍랑은 우리를 사람이 되게하는 가장 큰 선물이었다. 풍랑 속에서 열리는 믿음의 순간들이다. 

사람다워지는 풍랑의 시간이다. 풍랑보다 더 센 사랑이시다. 뒤집어지고 엎어지며 삶을 배우는 우리들은 풍랑의 자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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