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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주님 공현 대축일 후 목요일 -
2022년 1월 6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요한 사도는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나자렛의 회당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이 바로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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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1요한 4장 19-21절, 5장 1-4절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을
19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20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21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5,1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
2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실천하면, 그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3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
4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입니다.
화답송
주님, 세상 모든 민족들이
당신을 경배하리이다.
하느님, 당신의 공정을 임금에게, 당신의 정의를 임금의 아들에게 베푸소서. 그가 당신 백성을 정의로, 가련한 이들을 공정으로 다스리게 하소서. 주님, 세상 모든 민족들이 당신을 경배하리이다.
그의 눈에는 그들의 피가 소중하기에, 그는 억압과 폭행에서 그들의 목숨을 구하리이다.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늘 기도하며, 날마다 축복하게 하소서. 주님, 세상 모든 민족들이 당신을 경배하리이다.
그의 이름 영원히 이어지며, 그의 이름 해처럼 솟아오르게 하소서. 세상 모든 민족들이 그를 통해 복을 받고, 그를 칭송하게 하소서. 주님, 세상 모든 민족들이 당신을 경배하리이다.
복음
루카 4장 14-22ㄱ절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
그때에
14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15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17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18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22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전능하신 하느님, 거룩하고 신비로운 이 성사의 힘으로 언제나 저희 생명을 보호하여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도연 스테파노 신부 집전
2022년 1월 6일 (목)
김도연 스테파노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1월 6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성령에 이끌려”(루카 4,1) 광야로 가신 예수님께서 사십 일 동안 악마의 유혹을 이기시고,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께서 나자렛 회당에서 선포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이사 61,1). 루카 복음은 다른 복음보다 ‘성령’을 자주 언급하며, 예수님 활동의 힘(근원)이 성령께 있음을 강조합니다.
성령의 힘으로 공생활을 시작하시는 예수님의 시선은 먼저 ‘가난한 이들, 잡혀간 이들, 눈먼 이들, 억압받는 이들’을 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시고, 이들을 치유하시려고 오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주님의 은혜로운 해”, 곧 구원의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그리고 이어지는 짧은 말씀은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합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예수님께서는 구약 성경에 기록된 하느님 말씀이 ‘오늘’ 그리고 ‘여기’에서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참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복음은 우리를 통하여 ‘지금 그리고 여기’에 선포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하여 ‘지금 그리고 여기’에 실현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우리의 복음 선포와 사랑의 실천이 무엇보다 먼저 ‘가난한 이들, 잡혀간 이들, 눈먼 이들, 억압받는 이들’을 향할 수 있도록 성령의 은혜를 청합시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늦게 사랑해도 괜찮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늦게 사랑해도 괜찮다.
오늘 요한의 편지를 읽으면서 탁 떠오른 말씀은 이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고 그래서 하느님을 늦게야 사랑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늦게라도 사랑치 않는 것이요 끝내 사랑치 않거나 사랑이 점점 쪼그라드는 것일 겁니다.
아오스딩 성인도 고백록에서 이렇게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삽나이다. 내 안에 님이 계시거늘 나는 밖에서, 나 밖에서 님을 찾아 당신의 아리따운 피조물 속으로 더러운 몸을 쑤셔 넣었사오니! 님은 나와 같이 계시건만 나는 님과 같이 아니 있었나이다."
또 늦게 사랑하게 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참사랑을 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거짓 사랑을 참사랑인 줄 알고 방황했다면 먼저 그것을 아오스딩 성인처럼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 안에 있잖으면 존재조차 없을 것들이 이 몸을 붙들고 님에게서 멀리했나이다."
그러므로 방황의 끝에 늦게라도 그 사랑을 발견하면 됩니다. 이에 대해 아오스딩 성인은 이렇게 계속 얘기합니다.
"부르시고 지르시는 소리로 절벽이던 내 귀를 트이시고, 비추시고 밝히시사 눈멀음을 쫓으시니, 향 내음 풍기실 제 나는 맡고 님 그리며, 님 한 번 맛 본 뒤로 기갈 더욱 느끼옵고, 님이 한 번 만지시매 위없는 기쁨에 마음이 살라지나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참사랑을 맛본 사람이라면 그리고 하느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제 그 사랑을 이웃에게로 향합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이웃을 똑같이 사랑하되 우리가 갈망하고 만족하는 사랑은 다릅니다. 만족은 하느님 사랑으로만 하고, 이웃의 사랑에서는 만족을 구하지 않습니다.
이웃의 사랑에서 만족을 구하려다 불만을 경험한 사람이 이제는 더 이상 인간의 사랑에서 만족을 구하지 않게 된 사람도 있지만 하느님 사랑으로 충만하기에 인간의 사랑에서 더 이상을 만족을 찾을 필요가 없게 된 사람도 있는데 이렇게 되면 더 완전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하느님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은 "하느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는 말씀처럼 이웃 사랑이 힘들지 않기에 지치지 않고 사랑하고 완전한 사랑을 합니다.
그러니 먼저 사랑하시는 하느님 사랑으로 먼저 충만해지고 그런 다음 이웃을 사랑하는 그 사랑의 순서를 어기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말씀을 받아들일 귀를 뚫는다는 의미는?
예수님은 광야에서 유혹을 물리치시고 “성령의 힘을 지니고”(루카 4,14) 갈릴래아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 회당에서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루카 4,18)라고 시작하는 메시아에 관련된 말씀을 읽으시고 이 말씀이 지금 이 자리에서 실현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성령과 결합하여야 힘을 발휘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라고 하십니다. 직역하면, “오늘 이 말씀이 너희 귀에 가득찼다”가 됩니다. 복음이 성령과 합쳐질 때 비로소 듣는 사람 귀에 가득 차게 된다는 뜻입니다.
성령은 광야에서 삼구의 유혹을 물리쳐 죄가 없는 사람에게 가득합니다. 성모님만큼 성령으로 가득하신 분이 없으셔서 성모님의 한 말씀이 엘리사벳을 성령으로 가득 차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소리만 지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이 내 안에 오시면 나는 피를 흘릴 수밖에 없고 그 피가 섞인 말씀만이 누군가의 귀를 가득 채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귀에 가득 차지 않는 말씀은 들리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소림사 18동인’(1976)이란 오래된 영화가 있는데, 여기에서 모든 어려운 과정을 다 마치고 마지막 하는 것이 있는데 불붙은 화로를 가슴에 안아서 그 화로에 쓰인 글자와 그림이 몸에 새겨지게 하는 과정입니다.
이처럼 말씀만으로는 안 되고 불이 있어야 합니다. 화로가 말씀이라면 불이 성령이십니다. 이 성령으로 불타는 화로를 옮기는 이는 그 말씀이 자신 안에 새겨집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복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을 통해 나에게 말씀이 새겨질 때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십시오! 꼭 필요하다면 말도 하십시오.”
그런데 오늘 복음 바로 뒤에서 그 성령으로 충만한 말씀을 들은 이들의 반응은 처음엔 이랬습니다.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루카 4,22)
하지만 곧이어서 그들은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루카 4,22)라고 말하고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24)라는 말씀에 잔뜩 화가 나서 예수님을 벼랑 끝까지 끌고 가 떨어뜨리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가십니다. 말씀이 그들 안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 묵상을 할 때 말씀의 뜻을 깨달으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말씀이 아무리 내 귀에 가득히 차도 귀가 뚫리지 않으면 그 말씀이 내 속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귀가 뚫린다는 말은 그분의 ‘종이 되려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종이 풀려날 수 있지만, 주인의 종으로 평생 남고 싶다면 주인이 그 종의 귀를 뚫었습니다(탈출 21,1-6 참조).
그리스도의 종이 되려는 마음이 없다면 귀가 뚫린 것이 아니고 아무리 말씀이 충만하게 주어져도 그 말씀의 참 의미를 깨달을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 아무리 묵상을 하려 해도 그 말씀의 뜻이 잘 다가오지 않는 이유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당신의 피와 함께 오는데 우리는 피 흘리려 하지 않는다면 그 말씀은 나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합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무브 투 헤븐’은 배다른 형과 동생의 긴 화해의 여정을 보여줍니다. 이혼한 어머니와 형은 잘살고 있었지만, 이복동생은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죽자 형은 이복동생을 고아원에 가지 않게 하려고 빼내 오려 합니다. 하지만 동생이 좋아하는 나이키 신발을 사러 갔다가 삼풍백화점 붕괴가 있어서 며칠 동안 갇혀 동생을 만나지 못합니다. 동생은 형을 화장실도 가지 않고 약속장소인 시골 역에서 사흘이나 기다리다가 결국엔 싸움꾼으로 성장하여 감옥까지 가게 됩니다.
동생이 출소하던 그 날 형은 자기 아들을 돌봐달라는 조건으로 자신의 집을 자신에게 맡겼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형과 형수는 암으로 죽은 상태였습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찾아오지 않던 형이 미웠지만, 재산이 탐나서 조카가 사는 곳으로 들어갑니다. 조카는 지적 장애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죽은 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약속을 지키지 못한 괴로움에 매년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날만 되면 그 역을 방문했었고, 동생과 함께 타고 싶었던 놀이기구를 아들을 태워주면 동생을 그리워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삼풍 백화점에서 자신에게 주려고 꼭 껴안고 있었던 나이키 신발까지. 이 모든 것을 보며 그는 형의 사랑한다는 말을 받아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사랑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생각을 포기하고 그분 앞에 무릎 꿇으려는 마음을 가지기 전까지는 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통해 당신의 말씀이 또 다른 이들에게 흘러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 말씀으로 죽지 않으려는 사람은 그래서 아무리 묵상을 해도 ‘자기 생각 정리’밖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을 정리하는 것은 묵상이 아닙니다. 묵상은 그분의 말씀이 나에게 새겨져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게 만드는 과정입니다. 그 깨달음은 아주 짧고 강렬하고 기쁨을 줍니다. 그리고 나를 말씀의 종이 되게 만듭니다. 주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우리 귀가 그분의 말씀에 뚫려있는지 먼저 살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떻게 부모가 되어서 저럴 수 있을까?
종종 뉴스나 방송에서 이상한 부모를 만나게 됩니다. 자녀를 학대하고, 가정에서 폭력을 가하고, 가정을 돌보는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기적으로 사는 사람들을 봅니다. ‘어떻게 부모가 되어서 저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그럴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창조하신 첫 번째 사람이지만 부족한 면이 너무 많았습니다. 하와는 귀가 얇고 즉흥적이라 유혹에 쉽게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아담은 궁지에 몰렸을 때 남 탓이나 하는 유약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에 그들의 장남인 카인은 어떤가요?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해 앞뒤 사정 재지 않고 죄부터 저지르고, 또 책임을 지기보다 발뺌부터 합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우리의 원조가 지금을 사는 우리의 모습과 별다르지 않음을 묵상합니다. 유혹에 너무나 쉽게 넘어가고, 남의 탓은 또 얼마나 많이 하고 있습니까? 온갖 핑계를 대면서 나는 옳고 다른 사람이 틀렸다는 식으로 말하는 우리의 모습을 내 안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근본적으로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인 우리임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천 년 전에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메시아의 구원 시대가 당신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선포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기쁜 소식으로 이사야서 61장을 인용한 것은 바야흐로 그분께서 잡혀간 이들을 ‘해방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음을 나타냅니다. 즉, 죄에서 해방되어 하느님 나라 안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이 땅에 오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61장은 메시아의 종말론적 구원에 관한 예언이며, 마침내 ‘주님의 은혜로운 해’에 예수님의 전도를 통하여 이 세상에 실현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날은 언제 시작되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군중에게 말씀하시지요.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주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면 희년은 단 일회적인 사건만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면서 세상에 실천해나갈 때, 구원의 시작이 계속해서 이루어집니다.
부족한 우리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사랑에 감사의 기도를 바쳐야 합니다. 그리고 완전하신 하느님처럼 완전하기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우리 구원도 가까워질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이 어디 있는가. 모두가 한때일 뿐. 그러나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 법정스님
영적인 만남
가까이에 있다고 친한 사람이고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단정을 지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로 가득 찬 만원 버스를 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많아 꼼짝없이 붙어 있어야만 합니다. 이 인연으로 대화를 나눠서 친해질까요? 아닙니다. 정말로 가까이에 있음에도 서로의 거리는 엄청나게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말 부부로 사는 신혼부부가 있습니다. 직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멀리 떨어져 있지만 가까이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로 옆에 있는 것과 같은 가까운 마음 때문입니다.
공간적으로 가까이에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과 영 안에서 가까이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진정으로 가까이에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령 강림은 우리 모두를 위한 가장 큰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직접 보고 싶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공간적 만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만남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루카 4,21)
인간의 말과 인간의 뼈 사이에 주님의 말씀이 있다. 말씀과 기쁜소식은 둘로 나뉘지 않는다. 말씀에 한없이 아프고 말씀에 한없이 기쁜 우리들이다. 말씀이 우리를 업고 걸어가신다.
주님 말씀은 우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진다. 우리자신에게서 이루어져야 할 말씀이다. 듣는 법을 먼저 배우는 은총의 시간이다. 들어야 담을 수 있고 들어야 이룰 수 있다.
주님 말씀을 들으며 말씀을 닮아간다. 공현은 우리의 경청으로 신앙고백이 된다. 말씀은 경청의 신비로 오늘을 새롭게 한다. 말씀으로 자라나는 오늘이다. 말씀의 눈물이 말씀의 열매가 된다.
말씀은 다른 곳이 아닌 우리 삶의 자리이다. 말씀으로 완성되는 경청의 여정이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우리가운데에서 진정 듣고 있는지를 다시금 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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