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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화요일 -
2022년 1월 4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군중을 배불리 먹이시는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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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1요한 4장 7-10절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7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화답송
주님,
세상 모든 민족들이
당신을
경배하리이다.
하느님, 당신의 공정을 임금에게, 당신의 정의를 임금의 아들에게 베푸소서. 그가 당신 백성을 정의로, 가련한 이들을 공정으로 다스리게 하소서. 주님, 세상 모든 민족들이 당신을 경배하리이다.
산들은 백성에게 평화를, 언덕들은 정의를 가져오게 하소서. 그가 가련한 백성의 권리를 보살피고, 불쌍한 이에게 도움을 베풀게 하소서. 주님, 세상 모든 민족들이 당신을 경배하리이다.
저 달이 다할 그때까지, 정의와 큰 평화가 그의 시대에 꽃피게 하소서. 그가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끝까지 다스리게 하소서. 주님, 세상 모든 민족들이 당신을 경배하리이다.
복음
마르 6장 34-44절
빵을 많게 하신 기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로 나타나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34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35
어느덧 늦은 시간이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36
그러니 저들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
37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은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하고 물었다.
3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아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알아보고서, “빵 다섯 개,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9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령하시어, 모두 푸른 풀밭에 한 무리씩 어울려 자리 잡게 하셨다.
40
그래서 사람들은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았다.
41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
42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43
그리고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44 빵을 먹은 사람은 장정만도 오천 명이었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하느님, 성체성사로 저희에게 오셨으니 이 성사의 힘으로 저희 마음을 움직이시어 저희가 모신 성체에 더욱 맞갖은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도연 스테파노 신부 집전
2022년 1월 4일 (화)
김도연 스테파노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1월 4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그분께서는 부족함을 풍요로움과 충만함으로 바꾸시네.
‘빵과 물고기의 기적’은 네 복음서에 모두 언급되는 유일한 기적입니다. 그 가운데 오늘은 마르코 복음이 전하는 놀라운 빵과 물고기의 기적 이야기를 듣습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장정만 헤아려도 오천 명이나 되는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시니, 제자들은 당황스러움을 넘어 자신들의 한계와 무력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들을 먹이려면 적어도 이백 데나리온은 필요한데, 가진 것이라고는 고작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
“목자 없는 양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쪼개어’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 그 빵과 물고기를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던 제자들이 남은 것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찹니다.
푸른 풀밭에 앉아 모두 배불리 먹은 이 식사는 단순히 굶주림을 채우는 식사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잔치를 미리 맛보는 식사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네’(시편 23[22],1-2 참조). 예수님께서는 부족함을 충만함으로 바꾸시는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삶에서 부딪히는 부족함과 한계를 생각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그분께서는 부족함과 한계를 지닌 우리를 통하여 놀라운 일을 하신다는 사실도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처럼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도구입니다. 그분께서는 부족함을 풍요로움과 충만함으로 바꾸시고, 그 선물을 나누어 주시고자 우리를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도록, 오늘도 빵과 물고기의 기적을 베푸시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소유적 사랑과 하느님에게서 온 사랑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오늘 요한의 편지는 서로 사랑하라고 하면서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거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자연스럽게 사랑을 하려면 다른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하라는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아닌 다른 사랑은 무엇이고, 그런 사랑이 가능하기는 할까라는 질문도 또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물론 다른 사랑을 할 수는 있겠지요. 그것도 사랑이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좋아하는 사랑'입니다.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으로 착각하거나 좋아하는 것이 사랑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해야 할 것을 '나 너 좋아해'라고 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되는데 좋아하는 것이 실은 사랑하는 것의 반대이지요.
사랑하는 것은 나를 내어주는 것인 데 반해 좋아하는 것은 상대를 소유하려고 하고, 좋은 것이 있을 경우 좋아하는 사람은 그것을 소유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줍니다.
이것을 제게 처음 깨닫게 해준 영화가 있습니다. 1970년 대 영화인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입니다. 방속국 디제이를 사랑하는 여자가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곡을 신청하는데 그런 식으로 자기를 각인시키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감시합니다.
그러나 디제이가 자기가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사랑을 자기에게 돌리려고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자 죽이려 합니다. 내가 소유할 수 바에는 파괴하자는 겁니다.
이처럼 소유적 사랑은 사랑의 이름으로 소유하려고 하고 폭력적이게 되는데 요즘 흔하게 된 데이트 폭력이나 스토킹이 다 이 소유적 사랑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소유적 사랑과 데이트 폭력은 요즘 현상만이 아닙니다. 요즘 이것이 부각되었을 뿐 전에도 많이 있었던 것이고 하느님에게서 온 사랑이 아닌 인간적 사랑을 하면 이런 사랑을 하게 됩니다.
인간은 아무리 사랑을 한다고 해도 자기 중심성이 있기 때문인데, 사랑할수록 더 좋은 사람이기를 요구하고, 사랑할수록 더 많은 사랑을 바라고 요구까지 하는 것이 다 이 때문이지요.
그러나 진정 사랑한다면 내 입맛에 맞는 사람이기를 요구하지 않고, 지금보다 더 좋은 사람이기를 요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며, 지금 받는 사랑도 과분하다고 하지 더 많은 사랑을 요구하지 않고 사랑하기에 사랑할 뿐 사랑해줄 것을 바라거나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런 뜻에서 저는 짝사랑 또는 외사랑을 참으로 아름답게 생각합니다. 인간의 사랑 중에서 꽤 괜찮은 사랑은 다 짝사랑 또는 외사랑입니다. 엄마의 자식 사랑은 다 짝사랑이고, 그것에 불만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인간 사랑도 그런 면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방적인 사랑이 대부분이지요.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이 엄마의 사랑을 받으며, 배우며 자라듯 신적인 사랑도 하느님 사랑을 받으며, 배우며 자라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나는 나를 향한 사랑으로 애끓는 예수님의 마음을 보러 미사에 나갑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예수님일까요, 아니면 백성들일까요? 제가 보기엔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떻게 당신을 만날 수 있는지 알게 해 주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제자들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납니다.
예수님은 오천 명을 먹이셨지만 오천 명 중에 진정 그분의 은혜를 받은 이들은 제자들이었습니다. 이 기적을 통해 예수님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고 하셨을 때, 빵을 먹은 이들은 모두 예수님을 이상한 분으로 여기고 떠나갔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차이는 왜 발생할까요?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의 능력을 본 것뿐만 아니라 그 기적을 통해 그분의 ‘마음’을 보았던 것입니다. 마음을 만난 경험이 있는 사람은 사람을 마음으로 만나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육체로, 어떤 사람은 정신으로만 만나려 합니다. 그것은 그만큼 마음으로 만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사랑이 흐르는 곳입니다. 부모의 마음을 만나지 못한 사람이 부모가 되면 자신의 자녀에게도 마음을 줄 수 없습니다.
채널A ‘금쪽같은 내새끼’에 ‘아이와 부정적인 소통 방식의 이유, 엄마의 과거 때문이었다…?’에 엄마의 이름을 막 부르고, 심지어 엄마를 새엄마, 쓰레기, 똥이라고 부르는 딸아이가 나왔습니다. 왜 이 아이는 엄마가 조금만 무엇을 해주지 않거나 혹은 무엇을 하라고 하면 짜증을 내는 것일까요?
여기에서 오은영 선생은 어머니가 과거에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던 것을 그 원인으로 찾았습니다. 어머니는 부모에게 ‘사랑한다, 잘한다’라는 말 한마디만 들어보고 싶다고 합니다. 하지만 무서운 아버지는 그런 말 하나도 해주지 않고 돌아가셨고, 그래서 동생들을 돌보며 어머니도 도망가지나 않을까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어떤 부모도 마음으로 딸을 만나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랑은 가슴에서 시작하여 머리로, 그리고 몸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가슴을 만나고 싶은데 엄마는 가슴이 닫혀있어 딸을 만나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가슴과 가슴이 만나는 방식은 십자가를 통해서입니다. 내 가슴에 있는 사랑이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흐르려면 가슴이 찢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제자들에게 당신 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이 본 것은 빵이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위해 흘려야 하는 그리스도의 ‘피’를 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만난 예수님의 마음은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스프랑크니조마이)입니다. 이 동사는 본래 인간의 ‘내장’(스프랑크논)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우리나라의 ‘애간장이 끓는다’라는 말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배고픔을 보시며 당신 사랑을 빵과 물고기를 통해 전해주려고 하셨습니다. 이 사랑의 ‘마음’을 보느냐, 보지 못하느냐가 진정 그리스도를 만났느냐, 만나지 못했느냐를 결정합니다. 빵을 먹은 이들은 이 마음을 보지 못했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았습니다.
얼굴에 모반을 지니고 태어나 부모로부터 버려진 ‘김희아’ 씨는 ‘감사’를 찾음으로써 자녀들도 잘 키우며 살아갑니다. 부모도 없이 자란 김희아 씨가 이렇게 잘 살 수 있었던 이유는 ‘하느님의 마음’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하느님의 애간장 끊는 사랑’을 만난 것입니다.
“제가 스물세 살 때 보육원에 있던 친구들, 직장 동료들은 남자들도 사귀고 결혼 생각도 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나도 가정이란 것을 가져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날 저녁에 잠을 자기 전에 주먹을 쥐고 ‘하느님 이 주먹이 지우개가 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얼굴에 있는 점을 한없이 문질렀습니다. 점이 지워지게 해 달라고. 이 점 때문에 아프고, 슬프고, 부모님에게 버림받았고 다른 사람이 꿈꾸는 것을 나도 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우고 지우다 보니 눈물이 볼에 떨어질 때 따가웠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지워주실 것이라고 믿고 계속 문질렀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때 똑똑히 보았습니다. 하느님 모습을. 울고 계시는 거예요. 제가 우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당신으로부터 쏟아지는 눈물이 너무 많아서 고개를 들 수조차 없을 만큼 울고 계셨습니다. 제가 그때 이렇게 다시 기도했습니다. ‘제가 다시는 얼굴 때문에 하느님을 슬프게 해드리지 않겠습니다. 앞으로는 하느님께서 제 모습 때문에 기뻐서 눈물을 흘리게 해드리겠습니다. 하느님 죄송합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제가 잠이 들고 아침에 깼을 때 제 얼굴에 상처가 남아있었지만, 저는 그때 알았습니다. 하느님이 점을 지워주셨습니다. 제 ‘마음의 점’을 지워주셨습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제 얼굴을 어떻게 보든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나 자신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가장 중요하고 나 자신이 나를 사랑하면 남들도 나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자살만 생각하던 한 자매가 우연히 누군가의 초대로 참석했던 ‘소공동체 모임’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날이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 관한 복음을 나누는 날이었는데,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라는 대목을 읽을 때 예수님이 그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던 것입니다.
‘아, 내가 사랑받지 못한 것만 생각하셨는데 예수님은 항상 나를 가엾게 지켜보고 계셨구나!’
그 이후로 삼 년 동안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이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애끓는 마음’을 만나야 진정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인 성체 성혈을 영하면서도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 성체 성혈에서 그리스도의 애끓는 마음, 곧 십자가의 사랑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본래 인간이 아닌 ‘사랑’이십니다. 따라서 내가 하느님을 만나고 싶거든 하느님 마음, 곧 사랑을 전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를 향한 당신의 애간장이 끓고 끊어지는 사랑으로 우리 마음을 뚫어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영하는 이유입니다.
성체를 영할 때 그분의 마음을 만나지 못하면 그냥 빵을 먹은 것이 됩니다. 이제 모든 에너지를 ‘예수님 우리를 향한 애끓는 사랑의 마음을 만나려는데’ 쏟으십시오. 그러려면 육체와 정신적 배고픔은 잊는 게 낫습니다. 하나만 원해야 간절한 것이고, 죽도록 간절히 원해야 그분도 죽음을 통해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초등학교 도덕 문제입니다. 정답을 골라보세요.
“철수는 영희의 장난감을 빌려왔습니다. 철수는 빌려온 장난감을 ( )처럼 아껴 쓰고 영희에게 돌려줘야 합니다.”
1) 내 것
2) 빌려온 것
정답은 무엇일까요? 아마 대부분 1번을 선택하셨을 것입니다. 실제로 공식 정답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빌려온 것을 더 아껴 쓰고 돌려줘야 하지 않을까요? 내 것이야 조금 상해도 괜찮지 않습니까?
내 것이 우선일까요? 남의 것이 우선일까요? 어떤 것이 더 우선이라고 콕 집어서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에 기준을 맞춰본다면 우선해야 할 것을 명확하게 선택할 수 있게 됩니다. 즉,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기준에 맞춘다면 선택의 방향을 분명하게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무조건 내 것에 기준을 맞추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주님의 것에 기준을 맞추며 사랑의 실천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 사랑의 나라에서만 가장 행복한 나를 만들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빵의 기적을 행하십니다.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되는데 그들을 모두 배불리 먹으시고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가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이 빵의 기적을 통해 ‘내 것’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주님 것’에 주목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전지전능하심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실 수 있으십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도 빵의 기적을 행하실 수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이르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빵의 기적을 행하시지요. ‘내 것’을 내놓은 누군가 때문에 그 놀라운 기적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 것’이라 할 수 있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왜 내놓았을까요? 자기 혼자 먹기에도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내 것’이라는 생각보다, ‘주님 것’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가 빵을 받았는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낮은 풀밭에서 스스로를 낮추어 하느님의 빵을 받을 준비가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참회와 신앙을 간직한 사람만이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 것’을 ‘내 것’이라고 말하는 우리의 교만을 내려놓고 겸손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중요한 건 일정표에 적힌 우선순위가 아니라 당신 인생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다.
- 스티븐 코비
우리의 판단이 늘 옳지는 않습니다.
아기가 태어났는데 몸무게가 2.5kg입니다. 워낙 약하게 태어나서 아기의 부모는 잘 먹이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잘 자라지 않았고 늘 약했습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몸에 좋은 것을 먹였습니다.
이제 몇 년이 지난 뒤, 어린이집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린이집에 가면 늘 맞고 오는 것입니다. 워낙 작고 약해서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도, 맨날 맞고 오는 아이를 보면서 속상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맞기만 하니? 너도 때려! 사내가 맞고 다니는 것 아냐!”
어느 날, 아이가 드디어 맞고 온 것이 아니라 때리고 왔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매일 때리고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하고 착하기만 했던 아이가 난폭해지고 고집도 엄청났습니다.
맞고 울면서 집에 들어왔을 때는 아이에 대해 안쓰러움이 있었는데, 이제는 어린이집에 자주 가서 죄송하다고 사과해야 하고 또 다른 사고를 치지 않을까 늘 걱정입니다.
어떤 모습이 더 나을까요? 맞고 들어오는 것? 아니면 때리고 들어오는 것?
자신의 판단이 늘 옳지만은 않습니다. 한 번 더 생각하는 마음의 신중함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마르 6,37)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식사를 하신다. 하느님의 나라는 서로가 서로에게 빵이 되는 빵의 나라이다. 사랑을 먹고 사는 사랑의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사람과 빵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다. 그래서 그냥 빵이 아니다. 빵이 방향이 곧 사랑의 방향이 된다.
사랑의 빵을 주시는 분은 언제나 하느님이시다. 함께한다는 것은 사랑의 빵을 함께 먹는 사람의 소박한 행복이다. 줄 수 없고 나눌 수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으로 우리들은 다시 사람이 되어가는 기쁨을 맛본다. 탐욕의 빵이 아니라 사랑의 빵이다.
사랑을 잃어버려 허기진 우리들에게 빵이 되어 오시는 분이시다. 먹을 것이 나눌 것이며 사랑해야 할 우리의 소중한 관계이다. 빵이 되는 관계가 서로를 살리는 복음의 관계이다. 빵을 주듯 사랑을 나누는 빵의 하루 사랑의 삶이다. 사람은 빵을 향하고 빵은 사랑을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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