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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2월 31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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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3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

 

 

2021년 12월 31일 (금)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요한 사도는 그리스도의 적들이 나타났고 지금이 마지막 때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고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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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1요한 2장 18-21절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18 
자녀 여러분, 지금이 마지막 때입니다. ‘그리스도의 적’이 온다고 여러분이 들은 그대로, 지금 많은 ‘그리스도의 적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이 마지막 때임을 압니다. 

19 
그들은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갔지만 우리에게 속한 자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속하였다면 우리와 함께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들이 아무도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20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21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진리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진리를 알기 때문입니다. 또 진리에서는 어떠한 거짓말도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여라.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주님께 노래하여라, 온 세상아. 주님께 노래하여라,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나날이 선포하여라, 그분의 구원을.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여라.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여라. 바다와 그 안에 가득 찬 것들은 소리쳐라. 들과 그 안에 있는 것도 모두 기뻐 뛰고, 숲속의 나무들도 모두 환호하여라.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여라.

그분이 오신다. 주님 앞에서 환호하여라. 세상을 다스리러 그분이 오신다. 그분은 누리를 의롭게, 민족들을 진리로 다스리신다.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여라.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요한 1장 1-18절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10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13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15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쳤다. “그분은 내가 이렇게 말한 분이시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16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17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18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주님의 백성을 온갖 은혜로 다스리시니 오늘도 내일도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가 덧없는 현세에서도 위안을 받고 영원한 세상을 향하여 더욱 힘차게 나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이규용 유스티노 신부 집전

 

 

2021년 12월 31일 (금)
이규용 유스티노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2월 31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서철 바오로 신부

 

여러분은 인생에 대한 계획이 있으십니까?

 

여행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장소를 정하고 비행기표를 사고, 잠은 어디서 잘지, 먹는 것은 어떻게 할지, 꼭 찾아보아야 할 곳은 어디인지 계획을 세웠습니다. 3박 4일의 여행을 알차고 의미 있게 만들려고 말입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일주일의 휴가와 휴가비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마도 계획을 열심히 세워 의미 있는 시간이 되도록 할 것입니다. 만일 한 달이 주어진다면? 한 달의 계획도 세울 것입니다. 만일 일 년이 주어지면? 백 년이 주어지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는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인생에 대한 계획이 있으십니까? 

제 인생의 계획이자 목표는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나서 병들고 늙고 죽습니다. 그렇게 변하는 인생길에서 제가 찾은 별은 하느님입니다. 살아 계시고, 사랑이시며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그 하느님을 닮고자 하는 것이 제 인생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닮은 사람, 곧 ‘성인’이 되고자 하는 것의 참의미를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글을 통하여 깨닫게 되었습니다. 거룩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이는 반드시 다른 이를 위하여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하다’라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본래에는 하느님만이 ‘거룩하시다’는 사실을 우선 상기해야 합니다.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한 인격이나 물건을 하느님의 소유가 되도록 옮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두 가지 서로 보완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한편으로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기 위해서는 평범한 것에서 따로 떼어 내어 구분하고 인간의 사적인 영역에서 ‘따로 떼어 놓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하느님 영역으로의 이 ‘넘겨 줌’에는 ‘보냄’, 곧 파견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느님께 바쳐졌기에 성별된 현실, 성화된 인격은 다른 이들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다른 이들에게 바쳐집니다. 하느님께 바쳐 드린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모두를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네딕토 16세 <베네딕토 16세 기도> 203-204면 참조).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깨달음의 마지막 때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요한 1,1) 

“자녀 여러분, 지금이 마지막 때입니다. 우리는 지금이 마지막 때임을 압니다.” (요한편지 2,18)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오늘 독서는 마지막 때를 얘기하고 복음은 한 처음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과 마지막 때는 같은 듯 다른 말이라는 것을 우리는 다 압니다. 마지막 날은 2015년의 마지막 날처럼 물리적인 시간의 마지막이지요. 

그러나 ‘때’라는 것은 물리적인 시간인 날과 달리 나에게 중요한 시간, 의미 있는 시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새로 태어난 시간, 내가 중요한 것을 깨달은 시간을 일컬어 ‘때’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독서에서 말하는 마지막 때란 어떤 때입니까?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의 적이 나타나는 때인데 이 말씀이 제게는 그리스도의 적이 나타나긴 하지만 그리스도처럼 하느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적을 물리칠 때이고 한 처음부터 계시는 말씀이 탄생하는 때로 이해됩니다. 

그런데 믿음이 약한 이들은 그리스도의 적이 등장할 때 두려움에 싸이고, 비관적인 이들은 그리스도의 적이 설치는 세상을 볼 때 절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렵고 절망스러운 때가 바로 구원의 때이고 희망의 빛이 떠오를 때입니다. 한 해가 끝나면 새해가 오고 어둠이 짙으면 새벽이 오듯이 인간의 죄와 그 악이 극에 달할 때 구원자 하느님께서 나타나실 겁니다. 

우리는 종종 어둠이 있다고 얘기합니다. 우리 마음에 어둠이 있다고 하고, 우리 공동체에 어둠이 있다고도 하지요. 

그런데 정확하게 얘기하면 어둠이 있는 것이 아니고 빛이 없는 것입니다. 어둠이 있어서 빛이 없는 것이 아니고 빛이 없어서 어둠이 있는 거라는 말입니다. 

오늘 요한복음 1장의 표현들을 보면 이를 알 수 있습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요한 1,5)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고 맞아들이지 않았다.”(1,9-10) 

이 말씀을 풀이하면 어둠이란 것은 빛이 비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요, 빛이 세상에 왔지만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맞아들이지 않는 것이지요. 

은총을 보지 않고 죄만 보면 내 안에 어둠이 있고, 하느님을 보지 않고 사람만 보면 우리 공동체 안에 어둠만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은총을 보지 않고 하느님을 보지 않습니까? 하느님께서 은총을 늘 베푸신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하느님께서 오셔서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이것을 깨달을 때 어둠도 그리스도의 적도 사라질 것이고, 이것을 깨달을 때가 어둠과 그리스도의 적이 사라질 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반대의 깨달음도 있어야 합니다. 빛이 비친다는 것은 깨닫지 못하고 내가 참 어리석게도 어둠만 보고 있었구나 하는 깨달음입니다. 

그러니 깨달음은 늘 먼저 어리석음에 대한 깨달음이 먼저이고 어리석었을 때 모르고 못보던 것에 대한 깨달음이 다음입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이 이런 것을 깨닫는 마지막 때가 되기를 빕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요한은 마귀 들렸고 예수님은 먹보요 술꾼인가?

 

오늘 복음은 소위 ‘로고스 찬가’라고 불립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심, 곧 빛이 어둠에 내리심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에서 이상하리만큼 ‘세례자 요한’이 차지하는 비중이 큽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사도 요한은 빛을 증언하였던 세례자 요한의 역할을 그만큼 크게 보았던 것입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세상은 빛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미 빛을 보았던 세례자 요한만이 빛을 증언하는 유일한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모습과 세례자 요한의 모습은 사뭇 다른 것처럼 성경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루카 11,18-19)

그래서인지 우리 가톨릭교회는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큰 성당을 짓는 등의 모습이 그리스도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을 닮은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이미 술 취한 사람들에게 또 술을 만들어주신 것도 어느 정도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의 모습과 예수님의 모습일 다를 수 있을까요? 정말 예수님은 먹고 마셨고, 세례자 요한은 단식만 했을까요? 예언자가 어떻게 증언하는 분과 닮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태석 신부님이 예수님이라면 그분의 세례자 요한과 같은 분이 ‘울지마 톤즈’를 감독하였던 ‘구수환 피디’입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박해를 받게 되어있습니다. 구수환 감독은 가톨릭 신자가 아닙니다. 불교신자로 알고 있습니다. 유튜브 ‘체인지그라운드’에서 ‘부활’이라는 울지마 톤지 제2탄을 개봉하고 한 인터뷰에서 한 말은 의미심장합니다. 

“사실 밖에서는 잘 모르시지만, 가톨릭 단체로부터 ‘왜 저널리스트인 당신이 신부님의 삶을 일반화시켜서 (돈벌이로) 이용을 하느냐?’라고 굉장한 공격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소송까지 당했습니다. 신부님에 대해 제가 좋은 이야기하고 다니는데, 신부님을 이용해 돈벌이한다는 기사들이 주요 일간지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제가 신부님처럼 살지 않으면 사람들이 안 믿는 거예요. 제가 신부님처럼 살아야 신부님 이야기를 했을 때 ‘아, 저 사람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을 하니까 동시에 책임감을 느낍니다. 이태석 신부님에게 누가 되는 행동을 하면 안 된다. 그러니까 거의 개인 생활은 없습니다. 요즘 하루 생활이 뭐냐면 대중들을 만나고 해석해주고 이거예요.”

사람들은 누군가를 증언하는 사람이 그 증언하는 대상과 닮았는지를 먼저 봅니다. 그래서 닮지 않았다면 믿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를 전하는 이의 삶이 그리스도와 닮아있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은 그를 통해 돈벌이한다고 여길 것입니다. 

구수환 피디는 또 말합니다. 

“이 영화 찍는데 3억 들어갔고 수입이 5천만 원이었습니다. 손해 보는 게 왜 즐겁고 행복한가? 사실 코로나 때문에 많은 분이 영화를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반대로 생각했습니다. 만약 이게 흥행이 되었다면 제가 더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신부님 팔아서 돈 많이 벌었어!’ 이런 이야기가 제일 두려웠습니다. 이런 잡음이 안 나와 좋았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쉽게 나의 이야기를 전하지 마라, 뛰어다니며 직접 전해라!’라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돈과 상관없이 이태석 신부님의 삶을 전하고 사람들의 생각을 변하게 만드는데 이런 기회는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구수환 피디는 영화를 찍고 하도 가톨릭에서 항의가 많이 들어와서 회사에서 다른 곳으로 쫓겨나는 수모를 겪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신부님을 놓지 않는 이유는 세상 사람들의 마인드를 바꿀 ‘기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추적 60분’과 같은 고발 프로그램으로는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음을 깨닫고 신부님의 섬기는 삶을 보여줌으로써 사회를 변화시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또 이태석 신부님을 증언하는 이들은 그분이 가르친 아이들이었습니다. 구수환 피디는 다시 톤즈로 가서 2010년 만났던 아이들을 다시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10년 만에 만난 아이들은 의대생이 되어있었습니다. 2010년 당시 한 60여 명 들어갈 수 있는 교실에 130명 정도가 들어가 열띠게 수업하는 모습을 찍은 적이 있는데 그때 구 피디가 물었습니다. 

“너희들 하루하루 먹기 힘든데, 왜 의대에 가려고 하니?”
“의대에 가려고 합니다.”
대부분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는 구 피디가 또 물었습니다. 

“돈도 없는데 왜 의대에 가려고 하니? 의사는 왜 되려고 하는데?”

그들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처럼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의대에 간 것을 보고 너무 놀랐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나라가 아무리 가난해도 ‘그래도’ 의대는 공부를 굉장히 잘하는 학생들이 간다고 합니다. 의아했습니다. 

‘우리로 말하면 산골에 있는 조그마한 학교에서 그 4~5년 만에 어떻게 59명의 아이가 의대에 갈 수 있었을까?’

이것이 굉장한 기적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의대 다니는 아이들을 만나고 새로운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기자, 공무원, 대통령 경호실 등에 근무하는 다른 많은 아이도 있음을 알게 됩니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아이들이 잘 성장했구나!’라는 정도만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센인 마을에 가서 진료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놀란 이유는 진료할 때 먼저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봐야 하는데 그들은 먼저 ‘악수’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물어봤습니다. 

“너 왜 자꾸만 악수하니?” 

“이게 신부님 진료 방식이에요.”

신부님이 쓰신 글에 이렇게 나온다고 합니다. 

“의사와 환자의 만남은 아픈 사람과 치료해주는 사람의 만남이 아니라 영혼과 영혼의 만남이다.”

진료가 끝나고 나서 한센인 환자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10년 만에 의사가 손을 잡아주었는데, 느낌이 어떻습니까?”

“신부님이 돌아오신 것 같습니다.”

그 당시에 몸에 전율이 오는 것 같았고, 다큐멘터리의 제목을 ‘우리가 의사 이태석입니다’라고 하려고 했는데, ‘아, 이것이 진정한 부활이구나!’라고 생각이 되어 제목을 ‘부활’로 바꾼 것입니다. 

빛이 있고 빛을 증언하는 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빛을 증언하는 이가 빛과 다를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메시아일 것으로 추측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빛과 너무 닮아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과 예수님의 모습이 다르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세속-육신-마귀를 광야에서 이기시고 가난과 정결과 순명의 겸손으로 사셨습니다. 그분은 머리 뉠 곳조차 없으셨고 성당을 짓기보다는 돌아다니시며 공간만 있으면 아무 곳에서는 설교하셨습니다. 첫 미사를 하시기 위해 성당을 짓지도 않으셨습니다. 남의 집을 빌려 미사를 제정하셨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교회가 부자가 되고 권위적으로 된다면 더는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능력을 상실했다고 봐야 합니다. 

‘어둠’이란 사람이 되신 ‘사랑’과 반대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법과 반대되는 어둠은 곧 재물에 대한 욕심, 무절제한 생활, 교만한 마음입니다. 그러니 가난하고 절제하고 겸손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빛을 본 사람의 상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지금 나의 모습이 세례자 요한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고 혹은 그 모습으로 더욱 다가가지 않는다면 분명 나는 빛이신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보다 먼저 우리가 닮아야 할 대상은 그분을 증언하는 세례자 요한입니다. 증언하는 자는 증언하는 대상과 닮을 수밖에 없습니다. 증언자와 닮는다면 그다음은 증언하는 대상과 닮으려 해야합니다. 교회에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잊혀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도 알 수 없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 죽음을 기억하라.

 

몇 년 전, 체코 여행을 갔다가 독특한 성당을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소위 해골 성당으로 불리는 곳으로 6만 구의 해골과 뼈로 성당 내부를 치장해 놓았습니다. 성당 안의 유골은 14세기 전후 흑사병의 창궐과 이어진 전쟁으로 인근에서 숨진 자의 것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해골과 뼈로 성당 안을 치장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죽음을 잊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이 있습니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라틴어입니다. 죽음을 피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기억할 때 삶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고대에서부터 있었습니다. 
 
고대 이집트 연회에서도 식사 중에 미라가 된 시체를 수레에 실어 들어온다고 합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지만, 죽음은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세 때에도 이런 생각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묘지를 마을 한가운데에 위치시켜서 죽음을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했습니다. 
 
죽음을 피할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는 것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음을 기억하며 하느님 나라를 소망하는 사람은 지금을 더 열심히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12월 31일. 2021년의 마지막 날입니다. 한 살 더 먹는 것이 싫다고 피할 수가 있을까요? 불가능한 일입니다. 2021년을 기억하면서, 2022년을 잘 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말씀의 육화 사건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하셨던 말씀, 그런데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것을 전해줍니다. 즉,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모두를 내려놓고 우리와 함께하셨음을 전해줍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도 누군가를 돕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모든 것, 심지어 생명까지도 내어놓고 남을 돕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 인간을 위해 당신 스스로 완전히 낮추어 나약하고 부족한 모습의 인간이 되시고, 자신의 생명 전체를 내어놓으셨습니다. 
 
이 사랑을 통해 하느님을 우리 모두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이 사랑을 쫓아 나의 이웃들에게 온전히 하느님을 알 수 있도록 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가득했던 2021년을 기억하면서, 2022년에는 우리 자신이 사랑을 이웃에게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해로 만들면 어떨까요? 
 
2021년 정말로 수고하셨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통제할 수 없다. 하지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통제할 수 있다.

- 웨인 다이어 (Wayne W. Dyer)

 

 

이 사회의 어른

 

우리 사회에 어른이 없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 법정 스님, 문익환 목사님 등 우리나라의 어른으로 길을 제시해 주신 분들이 계속 계셨는데, 지금은 도대체 그 어른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른이란 단순히 나이가 많고, 많이 배운 사람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가치 이상의 것을 좇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회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주로 자기를 더 챙기고 세속적인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기에 어른이 없다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이 사회의 어른이 된다는 것은 존경과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그렇지 않습니까? “먹보요 술꾼이다.”라는 말도 듣고, 이방인 취급을 받기도 하셨습니다. 
 
불의를 두려워하지 않고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 진짜 어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어른이 없을까요? 나 자신이 그렇게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그렇게 살지 못했기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렇게 살지 않기에 어른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부터 어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분명 우리 곁에 너무나 많은 어른이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감사의 기도를 바치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참빛이 세상에 왔다. (요한 1,9)

 

우리의 시작을 알게하는 말씀이시다. 말씀의 발자국이 빛의 발자국이다. 참빛이 세상의 문(門)을 연다. 희망이 빛난다. 참빛은 세상에 말씀을 심고 말씀은 쏟아지는 세상의 빛이 된다. 목숨을 내어놓으시는 말씀이시다. 

모든 것들은 말씀에서 나온 것들이다. 하느님을 알게하는 말씀이시다. 말씀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모든 사랑의 시작에는 말씀이 계셨다.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말씀이 되는 것이다. 

말씀이 사람을 섬기고 사람은 말씀을 받아 먹는다. 말씀의 방향이 참빛의 방향이다. 살맛나게 하는 말씀의 빛이 이 땅에 오셨다. 참빛의 진리를 우리의 삶으로 만나는 성탄의 시간이다. 

말씀의 빛 안에서 살아가는 사랑의 시간이다. 우리가 누군지를 알게 하여주는 참빛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오셨다. 빛과 말씀으로 살아가야 할 우리들 삶이다. 우리는 어떠한 말씀을 건네며 살고 있는지를 반성한다. 

말씀의 빛은 반성과 실천의 빛임을 믿는다. 생활의 시작과 마무리에는 언제나 말씀과 빛 반성과 새로운 실천이 있었다. 그 새로운 실천을 비추는 참빛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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