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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2월 29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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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2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

 

 

2021년 12월 29일 (수)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요한 사도는 누구든지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된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정결례 날 시메온은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아기가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리라고 합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2월 29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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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1요한 2장 3-11절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머무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것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나는 그분을 안다.”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그분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분 안에 머무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 계명이 아니라, 여러분이 처음부터 지녀 온 옛 계명입니다. 이 옛 계명은 여러분이 들은 그 말씀입니다. 


그러면서도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 계명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도 또 여러분에게도 참된 사실입니다. 어둠이 지나가고 이미 참빛이 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빛 속에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는 자입니다. 

10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머무르고, 그에게는 걸림돌이 없습니다. 

11 
그러나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서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여라.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주님께 노래하여라, 온 세상아. 주님께 노래하여라, 그 이름 찬미하여라.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여라.

나날이 선포하여라, 그분의 구원을. 전하여라, 겨레들에게 그분의 영광을, 모든 민족들에게 그분의 기적을.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여라.

주님은 하늘을 지으셨네. 존귀와 위엄이 그분 앞에 있고, 권능과 영화가 그분 성소에 있네.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여라.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2장 22-35절

 

그리스도는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십니다.

 

22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23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24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25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26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27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28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29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30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31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32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33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전능하신 하느님, 거룩하고 신비로운 이 성사의 힘으로 언제나 저희 생명을 보호하여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이규용 유스티노 신부 집전

 

 

2021년 12월 29일 (수)
이규용 유스티노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2월 29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서철 바오로 신부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요?

 

마리아와 요셉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하고 첫아들을 주님께 봉헌하고자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출산한 여인은 사십 일 동안 불결한 사람으로 간주되었기에,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일년생 어린양 한 마리와 비둘기 한 마리를 제물로 바쳐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만 다시 정결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첫아들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맏배는 하느님의 것이요 주님을 섬겨야 하기에 하느님께 봉헌해야 하였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이집트인들의 맏배를 치실 때 자기의 맏배들을 죽음에서 구해 주신 것을 기억하고, 그 후손들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레위인들은 첫아들을 사제로 봉헌하여 성전에서 봉사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은 맏아들을 봉헌하는 대신에 다섯 세켈(20데나리온)의 돈을 성전에 바쳤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아들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그 아들은 내게 가장 소중한 것, 가장 소중한 열정, 가장 소중한 사람, 가장 소중한 사랑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처럼 이렇게 소중한 것을 하느님께 봉헌해야 합니다. 그러나 온전한 봉헌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들어 알기는 하지만, 그래도 쉽게 놓을 수 없습니다. 그리 쉽다면 우리는 나약한 인간이 아닐 것이고, 아마도 그것이 소중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또 한 번 매달립니다. 

“제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 바치고서 홀로 어찌하란 말씀입니까? 이것마저 없으면 저는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엎드려 통곡합니다. “다른 모든 것을 내드릴 터이니 제 아들만 제게 남겨 주십시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하느님과 씨름한 뒤에야 비로소 애착에서 벗어나 평화 속에 하느님과 함께 걸을 수 있습니다.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요?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내 사랑이 자라려면

 

성탄절 전 한 수녀님께서 고백성사를 보시며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사랑이 자라 하느님 사랑처럼 될까요? 어떻게 하면 하느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될까요? 기도를 열심히 하면 하느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될까요? 

이에 저는 저의 경험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기도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되 사랑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내 욕심 채워달라는 욕심 기도가 아니라 이웃의 치유와 구원을 위한 사랑 기도 말입니다. 

다음으로 하느님 사랑을 배우는 묵상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하느님 사랑에 머물고 그럼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으로 충전이 되는 관상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를 통해 하느님 사랑을 배우고, 하느님 사랑으로 나의 사랑이 충만케 되면 이제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데 이 마지막 실천을 빼먹으면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사랑이 자라지 않고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에서 요한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계명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저는 매일 여기 콩나물 국밥집 영업을 봉사자들과 함께 기도로 시작하는데 매일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오늘도 당신 사랑을 저희에게 부어주시어 당신 사랑으로 충만케 하시고 그 사랑을 이 식당을 통하여 나눔으로써 당신의 복음이 이 지역 사회에 널리 전파되게 하소서.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주님은 어떤 사람을 관상기도의 은총으로 부르시는가?

 

오늘 복음에서 아기 예수님은 성전에 봉헌되시고 이때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고 기쁨에 넘칩니다. 그 많은 사람 가운데 시메온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는 ‘성령’께서 그 사람 위에 머물러 계셨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그가 주님을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려주셨고 결국, 성령께서 그를 이끌어 메시아를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기도의 단계에서 가장 높은 ‘관상’의 단계에 도달한 것입니다. 

기도의 단계는 크게 세 단계로 나뉘는데 ‘소리기도-묵상기도-관상기도’입니다. 이 중에서 관상기도는 소리기도와 묵상기도를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이 마지막에 다다를 수 있는 가장 완전한 기도입니다. 

관상기도에서는 소리기도에서 육체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믿어지고 묵상기도에서 정신적으로도 함께 계신다고 믿어지던 그리스도를 실제로 만나서 마음의 큰 변화를 체험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 은총이 기도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지는 않고 오늘 시메온처럼 성령의 도움으로 인생에서 오직 그분을 만나는 것만이 의미가 있고 또 그분께서 반드시 만나주신다는 믿음을 성장시킨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포스베리의 역발상’이란 소리를 들어보셨습니까? 현재 육상 높이뛰기 선수들은 모두 배가 하늘로 향한 채 뒤로 바를 넘습니다. 이른바 ‘배면뛰기’ 자세입니다. 하지만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미국의 한 선수가 이 자세를 처음 선보이기 전까지는 아무도 생각지도 못했던 자세였습니다. 그전까지는 다들 바를 앞 또는 옆으로 장대를 넘었습니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당시 21살의 미국 선수 딕 포스베리가 배면뛰기를 처음 시도했고,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며 우승을 차지해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그의 이름을 따서 배면뛰기는 현재 ‘포스베리 플롭(fosbury flop)’이라는 공식명칭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포스베리 플롭은 지금도 스포츠사에서 역발상의 백미로 꼽히고 있고, 스포츠계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으로 불릴 정도입니다.포스베리는 높이 뛰기 선수였지만 배면뛰기를 하기 전까지는 올림픽 출전 가능성이 희박한 실력이었습니다. 선수 생활을 계속해야 하나 말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그는 분명히 이 한계를 극복할 방법이 있을 것이라 여깁니다. 

그러다 뜀틀 공중제비돌기를 하는 선수들의 모습을 보고 영감을 받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시도해보지 않은 뒤로 뛰기를 연습합니다. 어느 각도에서 어떻게 뛰어야 가장 좋은지의 수 없는 과정을 통해 기록이 향상되었고 올림픽 대표로 발탁되었으며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례는 현재 수영 자유형과 배영에서 발로 턴을 하는 동작인 ‘플립 턴’의 발견에서도 이어집니다. 아돌프 키예프 선수는 100야드(91.44m) 배영 경기에서 누구도 불가능하다는 마의 1분 벽을 깨고 싶었습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결과 물속에서 회전하여 발로 터치를 하는 방법을 발견하게 되었고 1935년 배영 100야드 경기에서 59.8초로 마의 1분 벽을 돌파합니다. 그리고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배형 100m에서 기록한 1분 05초 9는 이후 20년 동안 깨지지 않았습니다. 

바라고 믿으면 분명히 만나게 되는 게 있습니다. 이것이 기도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넘어서기 위해 극단적으로 자신을 몰아붙이면 반드시 만나는 해답이 있는데, 그리스도도 그렇게 만나게 됩니다. 희망과 믿음이 있다면 그 양 날개로 사랑이 있는 곳까지 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 단 하나만을 바라는 완전한 ‘희망’과 또 그렇게 희망하는 이에게 반드시 그분은 만나주신다는 ‘믿음’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시메온에게 그런 희망과 믿음을 ‘성령’께서 주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는 왜 누구에게 그런 희망을 주고 누구에게는 주지 않으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어떤 이는 진정으로 ‘원하고’ 어떤 이는 원하는 척만 하기 때문입니다. 

진정 그리스도를 만나기를 원해야 성령께서 이끌어주십니다. 목동들이나 동방박사들도 메시아의 탄생을 그렇게 원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천사와 별로 그들을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 이끄신 것입니다. 

관상기도를 아주 잘 표현한 영화가 있는데 이란의 마지드 마지디 감독의 ‘천국의 빛깔’(The color of Paradise)입니다. 아름다운 이란 북부의 자연이 특히 돋보였던 이 영화의 주인공 소년 무하마드는 시각장애인입니다. 

그에게 손가락의 감각으로 세상 사물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말해주는 아저씨에게 그는 눈물을 흘리며 그가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이렇게 말합니다. 

“아저씨도 알잖아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내가 시각장애인이기에 모두 내게서 도망가요. 볼 수만 있다면…. 나도 다른 아이들처럼 일반 학교에 다니고 싶어요. 그렇지만 나는 맹인학교에 다녀야 해요. 내가 원하는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곳이에요. 

우리 선생님은 우리가 볼 수 없기에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대요. 근데 왜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우리를 소경으로 태어나게 해서 당신을 보지 못하게 했을까요? 

선생님은 말했어요. 하느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그는 모든 곳에 존재하시고 저는 그분을 느낄 수 있대요. 저의 손가락의 감각을 통해서요. 그래서 저는 손을 여기저기 뻗는 거예요. 하느님을 만질 수 있을 때까지요. 그리고 그분에게 나의 마음속 비밀까지도 다 털어놓을 수 있도록요.”

아이가 원하는 것은 손의 감촉으로 나무의 질감을 느껴서 그것들을 생존을 위한 일거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삶의 의미를 찾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는 분명 손을 뻗다 보면 주님을 만질 수 있을 것을 믿습니다. 

어느 날 그는 새의 지저귐을 듣습니다. 직감적으로 새끼 새가 둥지에서 떨어졌음을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더듬더듬 나뭇잎들을 손으로 뒤집니다. 자칫 새끼가 다칠 수 있으니 아주 천천히 손을 움직입니다. 

고양이가 다가옵니다. 그는 새끼 새를 고양이에게 빼앗길 수 없어서 솔방울을 들어 고양이 울음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던집니다. 이것은 하느님과의 계약을 위해 제물을 준비하고 그것들을 노리는 새들을 쫓는 아브라함의 모습과 닮았습니다. 그렇게 작은 새 한 마리를 발견합니다. 

무하마드는 새끼 새를 자신의 윗도리 앞주머니에 조심스럽게 넣고 새소리가 나는 나무를 찾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로 기어오릅니다.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매우 힘겹게 기어오릅니다. 그리고 둥지를 찾아 새끼 새를 넣어줍니다. 그리고 고마워하는 새들의 소리를 듣습니다. 무하마드는 미소를 짓습니다. ‘사랑’을 만난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우리도 사랑을 만나기를 원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그분만을 만나려는 바램과 그분을 반드시 만날 수 있기에 나의 더듬거리는 손짓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 믿음과 희망만이 결국엔 우리를 한 완전한 실체인 사랑이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 이끕니다. 관상에서의 그분과 만남은 한 인간이나 혹은 생각이나 관념이 아닌 한 온전한 사랑의 실체와의 만남입니다. 

이 한 번의 만남은 하느님과 자기 자신, 그리고 세상에 대한 시각을 완전히 바꿔놓습니다. 한 번의 만남이 이런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분과 만난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내거나 아니면 사탄이 만든 것을 본 것뿐입니다. 이는 마치 애벌레의 시선이 나비의 시선으로 바뀌는 것과 같습니다. 

마더 데레사 성녀가 “목마르다!”라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목마른 모든 가난한 사람들이 예수님으로 보이게 된 것과 같습니다. 또한, 김하종 신부가 한 냄새나는 가난한 아저씨를 안았을 때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소리를 들은 것과 같습니다.

 나의 존재가 완전히 그리스도로 변하여 모든 사람 안에서도 그리스도의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돼지 눈에는 돼지가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가 보입니다. 이런 시각의 변화로 세상 어떤 피조물도 함부로 대할 수 없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시메온처럼 우리도 그분을 만나기만을 원하고 그분의 자비만을 원하며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분명 죽기 전에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묵상기도를 통해 무엇보다 이 희망과 믿음을 증가시켜야 합니다. 그러면 결국엔 주님께서 당신의 실체를 보여주시고, 그러면 우리는 주님을 찬미하며 사랑할 수밖에 없는 행복한 존재로 살게 됩니다. 이것이 관상가의 삶입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루카 2,29-30)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과연 누구의 말을 따라야 할까요?

 

아는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부동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특히 요즘 아파트 가격이 계속 오르는데 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라는 어떤 분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 말에 한 분은 지금이라도 빨리 사야 한다고 말하고, 또 다른 분은 이제 오를 만큼 올라서 곧 폭락할 것이라며 절대 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둘 다 확신에 차서 이야기하는데, 과연 누구의 말을 따라야 할까요? 
 
저 개인적으로는 이 두 분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까지 부동산으로 이득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인의 경험은 모두 망한 것뿐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의 말을 들어야 할까요? 
 
세상 안에는 너무 많은 말이 있습니다. 이 말 중에 진실은 얼마나 될까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말을 무조건 믿을 것이 못 됩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대부분의 사람, 특히 사람들이 존경했던 종교지도자들이 나서서 예수님을 반대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맞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올바르게 판단할 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기도와 묵상 안에서 주님께 의지하며 판단해야 해야 합니다. 오류를 줄이고 진리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시메온은 예루살렘에 사는 열심한 사람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그를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라고 전합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예언자’로 알려진 유명인사였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구세주를 기다렸고 마침내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과 그 부모를 보고 감격과 기쁨이 넘쳐흘러서 찬양의 노래를 부릅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 2,29.30) 
 
오래전에 자녀를 시장에서 잃어버린 어떤 부모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잃어버린 자녀를 딱 한 번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하시더군요. 시메온은 4천 년 동안 기다렸던 구세주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사람들과 달리, 갓난아기의 모습만 봐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평생 의롭고 독실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을 생각한다면, 우리 먼저 그 구원에 걸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의롭고 독실한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인생은 답을 찾는 여정이 아니다. 질문하는 여행이다.

- 브라이언 그레이저

 

 

행복은 시간을 남에게 할애할 때 주어진다.

 

한 그룹은 중병을 앓는 아이에게 희망을 주는 편지를 쓰게 했고, 다른 그룹은 라틴어 문장이 가득한 페이지에 철자 ‘이(e)’를 표시하게 했습니다. 
 
같은 시간에 과제를 마친 뒤에 자신의 시간이 얼마나 풍족했는지를 알아보았습니다. 그 결과 누군가를 위해 시간을 내어 준 참가자들이 그렇지 않은 참가자들에 비해 시간적 여유가 있다고 말했으며, 풍요로운(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남에게 자기 시간을 내어주었을 때, 우리는 마음의 풍요로움도 함께 느끼게 됩니다. 결코 시간 낭비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더 많이 사용하고 의미 있게도 보낼 수 있게 됩니다. 
 
행복은 시간을 남에게 할애할 때 주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내 시간만을 만들어나갈 때 우리는 시간이 없다는 말과 함께 어렵고 힘든 시간을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루카 2,30)

 

산고(産苦)의 고통 뒤에 찾아오는 구원의 빛이다. 구원의 빛은 언제나 구체적이다. 구원을 본 사람은 구원을 구체화시키는 사람이다. 공허한 일상이 아닌 주님과 함께하는 구체적인 일상의 빛이 된다.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주어진 일상이라는 무게를 피해 갈 수는 없다. 일상은 구원을 향해 있듯 구원은 일상이 되어 이미 일상 안에 들어와 있다. 일상을 반죽하면 감사와 기쁨으로 변한다. 

일상의 관계를 구원의 빛 앞에 내려놓는다. 내려놓기에 열리게 되는 일상의 신비이다. 내어놓기 싫은 일상도 이제 내어놓는다. 구원이란 우리의 일상을 내어놓는 내어놓음의 빛이다. 내어놓는 우리 일상의 그 자리에 성탄이 있다. 

일상이 있기에 구원이 있고 구원이 있기에 우리들 일상이 있다. 일상의 고통 뒤에 만나게되는 구원의 빛이다. 일상으로 드러나는 구원을 본다. 하느님께서 우리 일상 안으로 들어오셨다. 일상의 빛이며 일상의 영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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