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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2월 27일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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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2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

 

 

2021년 12월 27일 (월)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요한 사도는 열두 사도 가운데 한 명입니다. 어부 출신의 그는 제베대오의 아들로, 야고보 사도의 동생입니다. 두 형제는 호숫가에서 그물을 손질하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제자가 되었습니다. 

요한 사도는 성경에서 여러 차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로 표현되며, 예수님의 주요 사건에 동참한 제자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성모님을 맡기셨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요한 사도는 스승을 증언한 탓으로 유배 생활을 한 뒤 에페소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 오늘 제1독서

 

요한 사도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체험한 참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언합니다.

 

 

✠ 오늘 복음

 

마리아 막달레나의 이야기를 들은 두 사도는 무덤을 찾아가 빈 무덤을 확인하고 주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2월 27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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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1요한 1장 1-4절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그 영원한 생명을 선포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교는 아버지와 또 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지도록 이 글을 씁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여라.

 

주님은 임금이시다. 땅은 즐거워하고, 수많은 섬들도 기뻐하여라. 흰 구름 먹구름 그분을 둘러싸고, 정의와 공정은 그분 어좌의 바탕이라네.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여라.

주님 앞에서 산들이 밀초처럼 녹아내리네. 주님 앞에서 온 땅이 녹아내리네. 하늘은 그분 의로움을 널리 알리고, 만백성 그분 영광을 우러러보네.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여라.

의인에게는 빛이 내리고, 마음 바른 이에게는 기쁨이 쏟아진다.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여라. 거룩하신 그 이름 찬송하여라.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여라.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요한 20장 2-8절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주간 첫날, 마리아 막달레나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가 거행한 이 성사의 신비로 복된 요한 사도가 선포한 분, 사람이 되신 말씀께서 언제나 저희 안에 머무르시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집전

 

 

2021년 12월 27일 (월)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학문 바오로 신부 집전

 

 

2021년 12월 27일 (월)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조학문 바오로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서철 바오로 신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성 요한 사도는 제베대오의 아들로 성 대 야고보 사도의 동생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그물을 손질하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배와 아버지와 삯꾼들을 남겨둔 채 예수님을 따라나선 첫 제자들입니다(마태 4,21-22 참조). 

요한은 예수님의 중요한 순간에 늘 동행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곁을 지키고, 예수님에게서 어머니를 돌보아 드릴 것을 부탁받은 사랑받는 제자였습니다. 요한은 요한 복음과 서간 세 권의 저자로 알려져 있으며, 상징으로 독수리가 사용되는데 그의 신학이 독수리처럼 높고 깊은 경지에서 우리를 참된 신앙으로 인도해 주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를 마무리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20,31).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아드님을 내주실 뿐 아니라, 그 아드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기까지 당신의 살과 피를 내주시는, 그 끝없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의 삶에 변화가 찾아옵니다. 하느님께 내가 끝없이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은 삶에 기쁨이 넘치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 순간 새롭게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만나도록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그리고 하느님과 대화하며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맺는 인격적인 관계는 동시에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봉사하도록 이끕니다. 다른 이들은 내 사랑의 대상일 뿐 아니라, 그 사람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그에게 해 주는 것이 바로 하느님께 해 드리는 것임을 깨닫게 되어, 그들의 행복을 추구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본성인 사랑에 충만히 참여하게 되고, 그분을 닮아 가고 그분과 일치함으로써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랑에 머무는 사랑

 

오늘 복음은 어떻게 보면 성탄절에 안 맞는 복음일지도 모릅니다. 부활절에 읽는 복음을 성탄절에 읽으니 말입니다. 

그런 느낌이 없지 않지만, 우리 교회는 요한 사도가 성탄절의 사도라는  뜻으로 성탄 시기에 그 축일을 지내고 오늘 복음도 그 뜻으로 들려줍니다. 

오늘 두 사도는 주님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무덤이 비었다는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듣고 다른 제자들은 가만있는데 두 제자만 달려가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그런데 다른 제자는 왜 달려가지 않고 둘은 달려갔을까요? 다른 제자들은 체념으로 무덤이 비었건 말건 무관심하고 둘은 시체나마 없어서는 안 된다는 미련이 있었던 걸까요? 

그렇다기보다는 둘이 더 사랑했기 때문일 것이고, 그래서 무덤을 향해 달려가는 두 사도는 사랑의 경쟁자처럼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둘은 걸어가지 않고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오늘 축일을 지내는 요한이 더 젊었기 때문인지 먼저 도착했고, 그러나 양보하는 마음 때문인지 먼저 무덤에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보기에 둘 사이에는 사랑 분담 같은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엄마에게 큰아들은 듬직하니 남편 같은 아들이 되고, 작은아들은 상냥하니 딸 같은 아들이 되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베드로는 사도단의 맏이요 주님 교회를 이끎으로써 주님을 사랑하고, 요한은 사도단의 막둥이요 주님 사랑에 머묾으로써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요한 사도에게서 주님 사랑에 머무는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윗사람과 윗사랑에게 아랫사람과 아랫사랑이 하는 사랑은 받기보다는 사랑하겠다고 나대지 않는 것이 사랑이고, 그 사랑에 머물며 내리사랑을 받는 것이 더 사랑입니다. 

햇빛에게 내가 더 뜨겁다고 하지 않고 그저 햇빛을 쬐는 것이 더 사랑인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이 축일에 우리도 요한 사도처럼 다른 사랑을 사랑하지 않고 주님 사랑을 사랑하고, 그 사랑에 머물고 푹 잠기는 사랑의 첫 발걸음을 떼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세상에서 가장 나쁜 것이 생각하는 것임을 모르면 벌어지는 일

 

오늘은 성 요한 사도 복음 사가 축일입니다. 

성 요한 사도는 사도 중 가장 완전한 성덕에 오르신 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요한 사도의 ‘겸손함’이 엿보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에 베드로와 함께 달려 무덤에 도착했지만, 교회의 수장인 베드로에게 먼저 무덤을 살필 권한을 양보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예수님께서 정하신 질서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형제간의 질서를 존중하는 힘은 이미 돌아가셨어도 형제를 낳아준 부모에 대한 존중에서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어도 요한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한 베드로를 여전히 자신보다 높은 교회의 수장으로 인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힘은 분명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자기 생각’입니다. 요한에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배반한 베드로보다, 그리고 베드로보다 일찍 도착한 내가 먼저 무덤에 들어가 봐도 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 생각을 끊게 해준 것이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의지’인 것입니다. 

 모든 감정은 생각을 믿는 데서 생깁니다. 내가 누구에게 믿음을 주느냐가 나의 감정을 좌우합니다. 자아는 세.육.마.의 욕구를 자아내고 안 좋은 감정이 생기게 합니다. 이는 자동으로 일어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자아를 믿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면 그리스도를 따릅니다. 그리스도는 이웃을 믿고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자아가 생각으로 만들어내는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는 천재 수학자 쿠르트 괴델의 죽음과 관련된 사연이 공개됐습니다. 1906년 태어난 괴델은 타임지 선정 20세기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이자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가장 위대한 논리학자로 불릴 만큼 천재였습니다. 특히 그가 고작 24살에 발표한 ‘불완전성 정리’는 지금까지도 여러 학문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불완전성의 원리란 ‘증명할 수 없는 수학적 명제들이 있다’라는 지금까지 수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명제는 없다는 이론을 뒤집는 엄청난 업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괴델의 삶 역시 불완전했습니다. 그는 급여가 조금만 늦어져도 자신이 면직당한 게 아닐까 노심초사했고, 건강 문제로 불안에 떠는 등 매사 심각한 불안증에 시달렸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괴델은 8살 때부터 류머티즘에 시달리느라 소극적이고 자신감 없는 아이로 자라났습니다. 또 성인이 되고 업적을 세운 뒤에도 10년 가까이 대학 강사로만 지내야 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39년에는 그마저도 박탈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일들을 겪으며 자기혐오에 시달리던 그는 급기야 심각한 불안 증세를 보이게 됐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괴델을 가장 믿어준 건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27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 세기의 우정을 쌓았습니다. 괴델이 미국으로 건너와 시민권을 취득하는데 아인슈타인이 증인으로 참석하였고, “괴델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특권을 누리기 위해 연구소에 간다”는 편지를 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955년 아인슈타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괴델의 불안 증세는 더 커졌습니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죽음에 음모가 있을 거라 망상했고, 자신도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렸습니다. 심지어 누군가 독을 탔을 거라는 생각에 다른 사람이 주는 음식은 절대 먹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괴델은 사랑하는 아내 아델이 만든 음식만큼은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사망한 이유 역시 아델이 병원에 입원했기 때문입니다. 오랜 지병을 앓던 아델은 수술을 앞두고 주변 사람들에게 괴델을 간곡히 부탁한 뒤 병원으로 떠났습니다. 하지만 아내가 해준 음식만 먹던 괴델은 정말 아무것도 먹지 않았고, 심지어 강제 입원한 병원에서도 끝내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결국, 괴델은 영양실조로 아사했습니다. 사망 당시 그의 키는 168cm, 몸무게는 29kg이었습니다.

괴델의 망상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생각’에서 온 것입니다. 생각을 믿은 것입니다. 생각을 믿었다는 말은 자기 자신을 믿었다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을 믿는다는 게 이렇게 무섭습니다. 

모든 생각은 ‘자아’가 자신을 믿어달라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자신에게 관심을 보여달라고 이것저것 시킵니다. 이것이 자아의 뜻입니다. 괴델에게는 이것이 타인을 믿지 말라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자아의 뜻은 세속-육신-마귀의 생존 욕구를 실현하는 것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욕구는 뜻입니다. 그러고는 “나 없으면 어쩔 뻔했냐?”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자아가 하고 싶은 마지막 말입니다. 

자아로부터 탈출하는 유일한 길은 나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다른 이를 믿고 그러기 위해 예수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세.육.마.의 반대 욕구인 ‘사랑’을 욕구로 제시합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을 살리는 삶을 살도록 이끄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겠다는 의지만 확고하면 더는 자아가 생각으로 나를 괴롭히지 못합니다. 요한에게 “네가 먼저 들어가 봐도 돼!”라고 말할 때, “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건데?”라고 말하면 자아는 더는 나에게 말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생각의 목적이 욕구이기 때문에 이미 욕구가 확고하게 정해져 있다면 더는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명상과 같은 방법으로 억지로 생각을 끊는 것보다 더 완전히 자기 생각을 끊는 방법은 그래서 ‘사랑하고자 하는 확고한 의지’입니다. 이 의지만이 우리를 자아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먼저 믿고 사랑하려고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부모를 사랑하지 않으면 형제도 사랑스럽게 보이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를 창조하신 주님을 먼저 사랑해야 이웃도 믿고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제임스 딘이 사망한 이유는 피어 안젤리라는 여인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안젤리도 제임스 딘을 사랑하였고 제임스 딘의 청혼을 받아주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반대로 안젤리는 빅 데이몬이란 가수와 결혼하게 됩니다. 

하지만 제임스 딘도 힘들어하고 안젤리도 힘들어하여 빅 데이몬은 직접 촬영장에 있는 제임스를 찾아갔고 그에게 더는 안젤리를 힘들게 하지 말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한 20분 뒤 제임스는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임스 딘의 죽음에 대한 자책과 그리움으로 안젤리도 데이몬과 이혼하고 몇 년 뒤 마약 중독자가 되어 제임스를 따라갑니다. 

제임스 딘은 말합니다. 

“빨리 살고 일찍 죽는다. 그래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남긴다.”

피어 안젤리는 말합니다. 

“내 사랑은 이미 (포르쉐에서) 죽었다. 그래서 난 죽음이 두렵지 않다.”

아름다운 사랑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을 믿고 사랑하는 것에서 자기 자신을 벗어나려 한 한계를 말해줄 뿐입니다. 만약 인간을 사랑해서 자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면 예수님이 오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자아의 책략이 숨어있기 때문에 항상 불완전하고 그래서 그런 인간을 사랑하는 것으로는 자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우리에겐 우리를 순수하게 사랑해주시는 창조자 하느님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했다면 제임스 딘은 빅 데이몬도 사랑하려고 노력했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의 삶은 바뀌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리스도는 “사랑하라”는 말만 하십니다. 이것이 그분을 향한 생각의 결론입니다. 물론 이 결론에 이르게 하도록 생각도 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묵상기도입니다. 묵상기도는 그리스도께 더욱 완전한 신뢰를 두게 만들어 사랑하려는 욕구를 북돋웁니다. 그러면 마치 사랑이라는 기차에 몸을 담은 사람처럼 생존 욕구를 강요하는 자아에서 탈출하게 됩니다. 그러면 자아가 하게 만드는 생각을 믿지 않게 되어 생각에서 비롯되는 모든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께 순종하는 마음만 있었다면 뱀과 대화를 이어나갈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선악과를 바치라고 하셨어. 그리고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라고 하셨어.”

이것이 무엇입니까? ‘감사와 사랑’입니다. 감사하고 사랑하면 끝입니다. 더는 다른 생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감사와 사랑에 순종하면 생각이 끊깁니다. 그러나 주님께 완전히 신뢰하여 이 뜻만을 따르기로 하는 것은 오랜 수련이 필요합니다. 단순하지만 오랜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관상기도에 이르기 전에 오랜 묵상기도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생각을 끊는데 하느님 뜻에 완전히 순종하려는 굳은 의지만큼 완전한 방법은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수님이 사랑받았던 이유

 

칼 한 자루를 구입했습니다. 택배를 통해 받은 칼을 보다가 잘 드는지 궁금해서 손을 만졌다가 손을 베고 말았습니다. 칼이 잘 드는지 몸으로 확인한 것입니다. 당황스러웠습니다. 동시에 부끄러워서 그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못했습니다. 칼질하다 손을 벤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행동으로 인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어리석은 모습을 보인 경우가 참 많았습니다. 뜨거운 국물을 허겁지겁 마시다가 입천장이 다 까진 것, 책 읽다가 종이에 손을 벤 것 손톱 정리하다가 깊게 들어가 속살까지 잘라낸 것, 급하게 움직이다가 넘어진 것 등등…. 어리석은 모습이 내 안에 끝없이 나왔습니다. 
 
제가 잘못해서 얻은 결과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잘못을 “그럴 수도 있지.”라고 말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길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남이 내게 이런 상처를 주면 어떨까요? “그럴 수 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자신에게 너그럽고 남에게 인색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든 다 똑같습니다. 내게 너그러울 수 있다면, 남에게도 너그러워야 합니다. 이런 일관된 모습만이 주님의 뜻을 제대로 따를 수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빈 무덤을 발견하고 11명의 제자를 대표하는 베드로와 신자들을 대표하는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알립니다. 이 둘은 이 말을 듣고 무덤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런데 요한이 훨씬 젊었는지 아니면 뜀박질을 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먼저 무덤에 도착합니다. 
 
여기서 이상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무덤에 도착했지만,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만 했을 뿐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무서워서 그랬을까요? 
 
그보다는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제자들을 대표하는 베드로에게 맡긴 것입니다.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던 제자라고 자신이 먼저 보고 판단하고 결론을 낼 수도 있었지만 모든 판단을 베드로에게 맡기는 겸손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했던 모습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어쩌면 이 겸손이 아닐까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분명히 알고, 자신이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절대 하지 않는 겸손의 모습이 그가 사랑받았던 이유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겸손의 모습으로 왔기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역시 겸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정반대의 모습을 산다면 분명히 어리석은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모두에게 너그러운 삶을 살아야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계획한 사업을 시작하는 데  신념은 단 하나, '지금 그것을 하라!' 이것뿐이다.

- 윌리엄 제임스

 

 

행복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아이들에게 어른들은 이런 질문을 자주 던집니다. 
 
“장래 희망이 뭐야? 커서 뭐가 되고 싶어?” 
 
문득 ‘나의 장래 희망은 무엇이었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담임선생님이 “명연이는 과학을 잘하니까 꼭 과학자가 될거야.”라고 말씀하셔서 한동안 과학자를 꿈꿨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선생님이신 아버지를 보면서 나 역시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운동을 좋아해서 운동선수의 꿈을 키운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긴 시간을 차지했던 저의 꿈은 ‘사제’였습니다. 어렸을 때 주로 놀았던 공간이 성당이어서 그런지, 신부님은 늘 선망의 대상이었고 그런 신부님이 되면 진짜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렸을 때의 꿈을 이룬 사람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의 궤도 안에 대부분 맴돌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어렸을 때의 꿈을 이룬 저는 행복한 사람일까요? 
 
꿈을 이룬 그 자체가 행복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보다 지금 이 순간의 만족이 행복을 가져다주고, 지금 꿈꾸고 있는 또 다른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길이 행복한 것이었습니다. 성취 자체는 순간의 행복만을 가져다줄 뿐이었습니다. 
 
행복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결과보다 과정에 집중하는 사람이 행복에 더 가까이에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보고 믿었다. (요한 20,8)

 

예수님께서 끔찍이 사랑한 성 요한 사도 축일이다. 성 요한 사도는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다. 빛과 생명으로 초대하시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와 늘 함께했다. 관점을 바꾸면 새로운 것들을 새롭게 볼 수 있다. 

예수님을 통하여 완전히 달라진 삶의 관점을 요한 복음을 통하여 우리는 오늘 만나게 된다. 달라진 관점이란 마음을 만나는 새로움이다. 우리 마음에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뜨거운 믿음이다. 

믿음이 죽으면 마음도 죽는다. 믿음이 이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우리 삶의 모든 여정이 뜨거운 신앙고백의 눈물어린 여정이 된다. 요한 복음은 우리들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주고 있다. 

빛 가운데로 나오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다시 만나게 된다.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 헤아릴 수 없는 은총과 영광을 우리는 체험하게 된다. 여기서 새로운 공동체가 탄생한다. 

새로운 공동체는 끝까지 하느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공동체이다. 성 요한 사도를 통하여 그가 나눈 요한 복음에서 다시금 사랑의 본질이 하느님이심을 깨닫게 된다. 진심이 통하는 사랑은 서로를 더욱 사랑으로 자라게한다. 

사랑의 빛 속에 나와 너 우리가 있다. 이 놀라우신 사랑을 성 요한 사도는 사랑에 목마른 우리들에게 들려주고 있다. 사랑은 예수님같이 사랑하는 이들의 나라임을 믿는다. 사랑이 인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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