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1년 12월 2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
2021년 12월 26일 (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집회서의 저자는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죄를 용서받고, 어머니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보물을 쌓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 오늘 제2독서
바오로 사도는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시어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내시는데,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갑니다.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제1독서
집회 3장 2-6절, 12-14절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아버지를 공경한다.
2
주님께서 자녀들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시고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권리를 보장하셨다.
3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죄를 용서받는다.
4
제 어머니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보물을 쌓는 이와 같다.
5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자녀들에게서 기쁨을 얻고 그가 기도하는 날 받아들여진다.
6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장수하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는 제 어머니를 편안하게 한다.
12
얘야, 네 아버지가 나이 들었을 때 잘 보살피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슬프게 하지 마라.
13
그가 지각을 잃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네 힘을 다하여라.
14
아버지에 대한 효행은 잊히지 않으니 네 죄를 상쇄할 여지를 마련해 주리라.
화답송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 네 손으로 벌어 네가 먹으리니, 너는 행복하여라, 너는 복을 받으리라.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
너의 집 안방에 있는 아내는 풍성한 포도나무 같고 너의 밥상에 둘러앉은 아들들은 올리브 나무 햇순 같구나.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
보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이렇듯 복을 받으리라. 주님은 시온에서 너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너는 한평생 모든 날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리라.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
제2독서
콜로 3장 12-21절
주님과 함께하는
가정생활
형제 여러분,
12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13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입니다.
15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여러분은 또한 한 몸 안에서 이 평화를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 지혜를 다하여 서로 가르치고 타이르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를 불러 드리십시오.
17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18
아내 여러분,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주님 안에 사는 사람은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19
남편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아내를 모질게 대하지 마십시오.
20
자녀 여러분, 무슨 일에서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 마음에 드는 일입니다.
21
아버지 여러분, 자녀들을 들볶지 마십시오. 그러다가 그들의 기를 꺾고 맙니다.
복음
루카 2장 41-52절
부모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있는
예수님을 찾아냈다.
41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42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43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44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45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46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47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48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49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50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51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52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성가정을 통하여 참된 삶의 모범을 보여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노래합시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 …… 주님은 시온에서 너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너는 한평생 모든 날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리라.”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지극히 인자하신 아버지, 저희를 천상 성사로 길러 주시니 저희가 언제나 성가정을 본받아 현세의 온갖 어려움을 이겨 내고 마침내 영원한 천상 가정에 들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박윤배 니콜라오
신부 집전
2021년 12월 26일 (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박윤배 니콜라오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파비아노 레베쟈니 파비아노
신부 집전
2021년 12월 26일 (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파비아노 레베쟈니 파비아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서철 바오로 신부
가정에 꼭 필요한 말 세 마디 - 프란치스코 교황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지난해 성가정 축일 삼종 기도 뒤에, 가정에 꼭 필요한 말 세 마디가 있다고 하시면서 이 표현을 자주 주고받아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 말은 “~해도 될까요? (미안하지만)”, “고마워요!”, “미안해요.”입니다.
첫 번째 “~해도 될까요?”는 ‘미안하지만, 그것이 당신을 기쁘게 한다면 해 주시겠어요?’라는 뜻입니다. 흔히 내 남편, 내 아내, 내 아이, 내 부모는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선물로, 그들 안에서 하느님을 보고(마태 25,40 참조) 존중해야 합니다. 그래서 무언가를 요청할 때는 “~해도 될까요?” 하고 물어보아야 합니다.
두 번째 말은 “고마워요!”입니다. 이 말은 ‘나는 당신이 나를 위해 한 일을 기억할 것입니다.’의 줄임말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그 사랑을 내주어야 합니다. 그 내주는 사랑을 받은 우리는 ‘당신의 사랑을 기억할게요.’라는 뜻으로 ‘고마워요.’라고 인사해야 합니다. 가정 안에서 얼마나 많은 도움과 봉사가 이루어집니까? 이 모든 일에 늘 고맙다고 말해야 합니다. 감사는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을 본 사람들의 표현입니다.
마지막 단어는 “미안해요.”인데,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이것이 가장 말하기 힘들다고 하십니다. 언제나 사랑하고 내주고자 하나 자신의 나약함과 섬세하지 못함에서 오는 많은 말과 행위는 상대방에게 상처를 줍니다. 그래서 언제나 “미안해요.”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을 하는 것은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와 같이, 우리가 용서의 삶으로 나가게 해 줍니다. 교황님의 권고처럼 이 세 마디의 말을 가족들과 자주 주고받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랑하되 가두지 말아야
오늘 본기도는 축일을 지내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성가정을 통하여 참된 삶의 모범을 보여주시니 저희가 성가정의 성덕과 사랑을 본받아 하느님의 집에서 끝없는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그런데 이 기도문을 묵상하면서 삐딱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느님 집에서의 끝없는 기쁨과 행복이라는 말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집에서 끝없는 기쁨과 행복을 누린다는 것이 정말로 행복할까? 지루하지는 않을까요?
미움이 양념처럼 있는 사랑이 사랑이고 미움이 있는 사랑이 짜릿하지 않을까요?
기쁨도 고통이 과정적으로 있어야 하고 행복도 불행이 과정적으로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또 하늘나라에서는 결혼하는 일도 없고 내 아내, 내 남편, 내 자식도 없다고 하는데 그런 하늘나라가 무슨 성가정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고, 이런 하늘나라를 우리가 가고 싶을까요?
가끔 제가 어머니들께 던지는 곤란한 질문이 있지요. 하늘나라에 가서 주님의 어머니가 되고 싶은지, 하늘나라에 못 가더라도 지금 아들의 어머니가 되고 싶은지.
그런데 천국에 가고 싶다고 손을 들었던 대다수 어머니가 이 질문에는 선뜻 답을 못합니다. 그리고 한참 생각한 뒤에 지금의 어머니로 그대로 있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죽어 어쩔 수 없이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면 지옥 가는 것보다는 천당을 가겠다는 것이지 이 세상을 떠나지 않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고, 무엇보다도 지금의 이 가족을 떠나고 싶지 않다는, 가족 중에서도 남편은 떠나도 자식은 두고 떠나고 싶지 않다는 거지요.
그러나 오늘 전례의 본기도는 우리의 가정이 하느님 나라에 가기 전까지의 가정이고, 하느님 나라를 향해 함께 가는 공동체여야 한다는 뜻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사랑이 성가정의 사랑을 닮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가정의 사랑은 누구도 나의 사랑으로 구속하지 않는 사랑이고,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나의 사랑을 내어드리고 맡기는 사랑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전에 남아있던 어린 예수가 가족과의 동행에서 이탈한 것 때문에 마리아가 나무라자 당신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 몰랐냐고 되려 나무라지요.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성가정의 마리아와 요셉조차 이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성가정의 마리아와 요셉도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니 우리가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도 사뭇 위로되지요?
아무튼, 예수님 뿐 아니라 우리와 우리 자녀들도 아버지의 집 곧 하느님의 집에 있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가족을 사랑하되 서로를 내 사랑 안에 가두지 말고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도록, 우리 가정에 머물기보다는 성전에 머물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성가정의 성인식 : 자녀에게 자유가 주어지고 부모의 책임도 끝나는 순간
오늘은 성가정 축일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예수님께서 부모의 말을 안 듣고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내용으로 나옵니다.
부모는 자녀가 자신들과 동행하지 않는 것을 하루 동안이나 모르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하루라는 시간은 지금 서울에서 부산을 왕복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부모가 그 긴 시간 동안 아들이 사라진 것을 몰랐는데 어떻게 자녀에게 그렇게 관심이 없는 가정을 거룩한 가정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또 아들도 사흘 동안이나 자신을 찾아다닌 부모에게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라고 말하는 것이 정상적인 모습일까요? 그렇습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관심을 끊고 자녀는 부모의 뜻에 관심을 끊는 것, 그것이 12살 때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성가정 가정교육의 가장 중요한 배울 점입니다.
지금은 명작 반열에 든 ‘흐르는 강물처럼’(1992)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몬태나 출신의 전 시카고 대학교수며 시인이자 작가인 노먼 매클레인이 70세가 넘어 쓴 자신의 자서전을 로버트 레드포드가 감독한 영화입니다.
노 교수는 나이가 들었음에도 아직 풀리지 않는 의문을 던집니다.
‘내 동생은 왜 죽었을까?’
노먼의 아버지는 교회 목사입니다. 어머니는 매우 순종적이고 노먼도 아버지의 교육에 순종적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이렇게 교육했습니다.
“장로교 목사였던 아버지는 인간은 본래 사악한 존재로 구원이나 송어처럼 좋은 것들은 은총으로 얻어지는 것이며 은총은 예술을 통해 얻어지는데 그것은 절대 쉽지 않다.”
여기서 예술은 ‘반복되는 끊임없는 수련’을 의미합니다. 영화에서 이 수련은 송어를 잡기 위해 낚시법을 수련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는 노먼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직접 가르칩니다. 그리고 절제된 글이 나오게 하려고 계속 반으로 줄이라고 합니다. 노먼은 싫은 기색이 역력하지만, 은총은 예술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기에 차마 거부하지 못하고 그대로 따릅니다. 겨우 아버지의 검열을 통과한 노먼은 아버지가 “잘했다. 이젠 버려도 돼!”라는 허락이 떨어지자 작문을 꾸겨 휴지통에 버리고 기다리던 동생 폴과 함께 낚시하러 뛰어나갑니다.
여기서 느닷없는 장면이 나옵니다. 동생 폴이 밥을 먹지 않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폴이 밥을 먹지 않으면 마지막 감사기도를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말합니다.
“신은 수천 년 동안 우리에게 오트밀을 주셨고, 어린아이가 그 법칙을 깰 수는 없다.”
노먼은 여기서부터 어쩌면 ‘동생의 죽음이 아버지의 탓은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폴은 오트밀이 먹기 싫어서가 아니라 왼손잡이로 태어났는데 오른손을 쓰라고 하는 것에서 저항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어느 손이더냐?”라고 묻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왼쪽은 나쁜 쪽이기 때문에 아버지는 아들이 오른손을 쓰기를 원했습니다.
폴은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노먼에 비해 더 자유로운 아이였습니다. 낚시할 때도 아버지의 리듬을 깨고 자신만의 독특한 숭어잡이 리듬을 개발하여 서서히 아버지의 규칙에서 벗어납니다. 노먼이 아버지와 같은 목사가 되려 하고 폴은 그런 직업은 없다는 형의 말에도 불구하고 전문 낚시꾼이 되려는 것에서도 이런 차이가 잘 나타납니다.
노먼은 결국 아버지의 곁을 떠나 먼 곳에서 대학을 다니고 대학교수가 됩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규칙을 깨고 싶었던 폴은 고향 근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끝내 도박에 빠져 죽음까지 맞이합니다. 아버지는 폴의 죽음을 태연하게 받아들입니다. 마치 잘못된 작문이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것처럼. 죽은 폴은 손의 뼈가 부서져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왼손을 쓰도록 내버려 두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버지의 이 마지막 설교는 어쩌면 폴의 죽음에 대한 핑계처럼 들립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도와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도움을 주어야 하는지 모를 수도 있고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 우리 손에서 벗어나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들을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완벽하게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한계가 드러납니다. 내가 자녀를 잘 키우지 못해도 그래도 완벽하게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키울 능력도 사랑할 능력도 없습니다. 모든 능력과 사랑은 배우는 것이고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자녀가 흐르는 강물처럼 순리대로 주님께 흘러가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뿐입니다. 내가 그 길을 막으면 자녀는 부모에게 사로잡힙니다. 사회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아이는 마셔야 하는 물이 아니라 흐르게 해야 할 강입니다.
이런 면에서 유대인들은 아주 좋은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인식’입니다. 성인식의 가장 중요한 관문 중의 하나는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성인식을 위해 글을 배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을 줄 안다면 이제 부모의 책임은 끝난 것입니다. 모세오경을 읽을 줄 안다는 것이 증명되면 부모는 이렇게 화답합니다.
“이 아이에 대한 책임을 면하게 해주신 하느님께 축복이 있기를!”
물론 그 뒤로 1년 동안 성인으로 살아야 하는 것을 더 배워나가기는 하지만 부모는 성인식을 끝내면 할 일을 다 한 것처럼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강물을 강물로 흐르게 내버려 둔다는 말은 하느님의 뜻에 이제 자녀를 맡긴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의 아버지는 자녀를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두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방향으로 훈련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랑이라 여겼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부모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으면서도 집에 돌아가서 부모에게 순종하며 지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몸도 지혜도 성장했다고 합니다.
성인식을 마쳤다면 이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부모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명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계명 때문에 부모를 사랑하면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어른들도 나이가 들어서 자녀를 낳아보고 부모를 더 사랑하게 되지 않습니까? 이것이 성장입니다. 인생의 흐름과 삶의 이치에 자신을 맡기면 더욱 성장하지만, 부모가 잡아놓으면 부모의 그릇 밖으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 가정이 성가정이 되기 위해 자녀를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되새길 수 있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해야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 수 있다.
싸움 상황을 연출한 후, 10명에게 그 상황을 지켜보게 했습니다. 어느 방향에서나 똑같이 볼 수 있도록 했지요. 그리고 같은 상황을 본 10명의 관찰자가 말하는 이야기가 과연 모두 일치하는지를 알아보는 실험이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똑같은 상황을 보고 있었으니, 그래도 어느 정도 일치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우리의 예상과 달리 이 10명의 이야기는 모두 달랐습니다.
기억은 인지 기능이지만 정서와도 깊은 연관이 있기에, 당시의 정서적 반응에 따라 기억의 내용이 바뀔 수 있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종종 왜곡과 변형이 일어납니다.
이런 경험을 자주 할 것입니다. 상대방의 서운함에 너무 힘들어 어느 날 용기 내어 이야기했는데 상대방은 전혀 기억하지 못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때 상대방이 모르는 척하는 것이라고, 어떻게 이 일을 잊을 수 있냐면서 화를 내지 않았습니까?
진짜 기억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충분히 왜곡할 수 있고 변형되는 우리의 기억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불안한 기억력으로 상대방을 평가하고 단죄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해야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가정 안에서도 이런 왜곡되고 변형된 기억으로 일치를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사랑이 충만한 가정이 아니라 불신과 미움으로 가득한 가정으로 보입니다. 그런 가정이 아닌, 우리가 원하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가정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상대방의 부족함을 보는데 집중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마음이 있어야지만 가능합니다.
이런 성가정의 모범을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요셉 성인이 만든 가정에서 찾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아들을 성전에서 찾은 뒤에 성모님께서는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직 어린이로 취급하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제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사명감을 자각하고 있음을 드러내십니다.
이해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그러나 혼내기보다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합니다. 이 모습이 성가정이 되는 비결이 아닐까요? 서로가 서로를 믿는 것, 그리고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마음속에 간직하면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성가정의 시작이었습니다.
싸움이 가득하면서, 서로를 전혀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고 믿지 않으면서 진정한 성가정이 되려는 것은 큰 욕심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겸손함 없이 말하는 이는 말을 잘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공자
비우는데 집중하십시오.
어느 실내 공간의 가장 멋지고 예쁜 인테리어는 어떤 것일까요? 우드 앤 화이트? 아니면 멋진 대리석?
가장 훌륭한 인테리어는 물건이 하나도 없는 빈 공간이라고 하더군요. 인테리어 업체가 올린 사진을 보면 모두가 멋지고 예뻐 보이지요. 디자인을 잘한 이유도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실내 공간에 아무런 물건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고급 자재로 인테리어를 해봤자 물건들이 가득 들어 있으면 그 인테리어가 전혀 보이지 않으니 멋지게 보이지도 또 예뻐 보이지도 않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몸도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 몸이 멋지고 예뻐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건이나 물질로 나를 채워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것들로 나를 채우면 결국 나는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채우는 것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비우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야 최고의 멋지고 예쁜 내가 두드러질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루카 2,49)
사랑이 시작된 곳에서 성가정을 다시 만난다. 변화와 성장이 필요한 성가정의 삶이다. 정성을 솓아야 할 대상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가족이다. 성가정이란 참된 마음을 나누고 서로를 품어주는 하느님의 은총의 제일 높은 순위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가족이 되셨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성가정의 참된 기쁨이다. 가정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다시 보게된다. 우리 가정에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알게되는 이 여정이 성가정이 걸어가야 할 성가정의 참된 여정이다.
하늘 나라의 문을 여는 성가정의 삶이다. 어렵고 어리석고 고집센 우리를 이끌어 가시고 함께하시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 친히 가족이 되시어 가족을 구원하신다.
가족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다름아닌 말씀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하시듯 희망과 용기의 말씀을 이제 우리가 나누는 것이다. 우리의 자녀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하느님의 선물이다.
하느님께서 이끌어가시는 하느님의 것이다. 끝까지 믿는 믿음의 관계가 부모와 자식이 가져야 할 올바른 관계이다. 세상과 세상 사이에 성가정이 있다. 함께 성장하는 아픔과 눈물 기다림과 기도 사랑과 용서라는 성가정이 있다.
주님께서 머무시는 아버지의 집이 바로 성가정이다. 성가정이란 서로를 살리고 서로를 성장시키는 가정임을 믿는다. 모든 가정을 위해 기도드리는 성탄이다. 성가정의 탄생이 바로 성탄이다.
'매일미사 말씀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1년 12월 29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1.12.29 |
---|---|
21년 12월 28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1.12.28 |
21년 12월 27일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1.12.27 |
실시간 성탄 낮 미사 (21/12/25 12:00)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 (0) | 2021.12.25 |
실시간 바티칸 성탄 새벽 미사 (21/12/25 3:20) 프란치스코 교황 (0) | 2021.12.24 |
실시간 성탄 밤 미사 (21/12/24 23:45)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 (0) | 2021.12.24 |
실시간 성탄 전야 미사 (21/12/24 20:45) 손희송 베네딕토 주교 (0) | 2021.12.2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