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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실시간 성탄 낮 미사 (21/12/25 12:00)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

by 평화다방 2021.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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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1년 12월 25일
주님성탄대축일
실시간 성탄 낮미사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 집전
오늘의 말씀 묵상

- 21.12.25 12:00 -

 

 

2021년 12월 25일 (토)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 집전 평화방송 명동성당 실시간 생방송 성탄 낮미사(12:00)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루카 2,14)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이 세상에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창조주께서 피조물이 되셨습니다. 가장 높으신 분께서 가장 낮은 이가 되셨습니다. 이 놀라운 강생의 신비로 우리에게 지극한 사랑을 보여 주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오늘을 경축합시다.

 

 

✠ 오늘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는 예루살렘에서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구원하신다고 합니다.

 

 

✠ 오늘 제2독서

 

구약 시대에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지만 신약 시대에는 당신의 아드님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 오늘 복음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말씀은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으며 하느님이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셨습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2월 25일 (토) 주님 성탄 대축일 평화방송 명동성당 실시간 생방송 낮미사 12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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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이사 52장 7-10절

 

땅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 “너의 하느님은 임금님이시다.” 하고 시온에게 말하는구나. 


들어 보아라. 너의 파수꾼들이 목소리를 높인다. 다 함께 환성을 올린다. 주님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심을 그들은 직접 눈으로 본다. 


예루살렘의 폐허들아, 다 함께 기뻐하며 환성을 올려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예루살렘을 구원하셨다. 

10 
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한 팔을 걷어붙이시니 땅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그분이 기적들을 일으키셨네. 그분의 오른손이, 거룩한 그 팔이 승리를 가져오셨네.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주님은 당신 구원을 알리셨네. 민족들의 눈앞에 당신 정의를 드러내셨네. 이스라엘 집안을 위하여 당신 자애와 진실을 기억하셨네.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주님께 환성 올려라,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비파 타며 주님께 찬미 노래 불러라. 비파에 가락 맞춰 노래 불러라. 쇠 나팔 뿔 나팔 소리에 맞춰, 임금이신 주님 앞에서 환성 올려라.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매일미사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히브 1장 1-6절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온 세상을 만들기까지 하셨습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천사들보다 뛰어난 이름을 상속받으시어, 그만큼 그들보다 위대하게 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천사들 가운데 그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또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라.”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또 맏아드님을 저세상에 데리고 들어가실 때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천사들은 모두 그에게 경배하여라.”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요한 1장 1-18절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10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13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15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쳤다. “그분은 내가 이렇게 말한 분이시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16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17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18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믿는 이들은 사람이 되신 말씀을 통하여 참된 영광을 봅니다. 그리하여 은총을 받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들은 사람이 되시어 오신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여 어둠 속에 머무르게 됩니다. 성체 안에서 참된 영광을 바라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이들도 있습니다. 그 차이는 바로 믿음에 있습니다. 주님의 탄생을 경축하며 성체 안에 담긴 그분의 영광을 바라봅시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

 

자비로우신 하느님, 오늘 태어나신 구세주께서 저희에게 하느님의 생명을 주셨으니 저희가 불사불멸의 은혜도 받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명동성당
실시간 생방송 성탄 낮미사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 집전

 

 

2021년 12월 25일 (토)
명동성당 실시간 성탄 낮미사 생방송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 집전

 

 

평화방송 매일미사
주님성탄대축일
조정래 시몬 신부 집전

 

 

2021년 12월 25일 (토)
주님성탄대축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조정래 시몬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서철 바오로 신부

 

하느님께서 먼저 인간 안으로 들어오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인간이 하느님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겠는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여기에 살아 있는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사랑이신 말씀께서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가슴속에만 있는 말씀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말씀은 만날 수도 느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요한 1,14)

영광은 다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아기 예수님을 통하여 이 세상에 드러나신 것입니다. 이제 세상 사람들 모두 하느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초대를 받게 되었습니다. 

“‘말씀’은 우리를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2베드 1,4) 하시려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 인간이 ‘하느님의 말씀’과 친교를 맺고, 자녀 됨을 받아들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려고 성자께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460항)

그래서 이레네오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인간 안으로 들어오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인간이 하느님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겠는가?”

사랑이신 말씀께서 가장 낮은 자리로 오셨습니다. 사랑은 사람의 아픔과 상처를 사랑하는 일이기에 말씀께서는 세상 가장 낮은 자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 말씀께서 ‘빵의 집’이라는 뜻을 지닌 베들레헴의 작은 구유 위에 누여 계십니다. 마치 ‘나 여기 너의 음식으로 있으니’ 하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말씀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받아 먹으라고 주십니다. 

“받아 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 (마태 26,26)

세상 사람들은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가지려 하는데, 말씀께서는 그저 내주시고 나누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먹을 수 있도록 더 작게 되시고, 우리가 그 생명의 빵을 먹음으로써 사랑 안에서 다시 태어나게 하십니다. 우리도 말씀처럼 더 낮은 자리로 찾아가고, 우리 자신을 내주고 나누어 주는 생명의 빵이 될 때, 하느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구유, 풍습인가, 성사인가?

 

"마리아는 해산 날이 되어 첫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저는 일찌감치 올해 성탄 대축일 강론 주제를 <주님 성탄과 구유>로 정했습니다. 

그것은 2년 전 교황 프란치스코가 반포한 '성탄 구유의 의미와 가치에 관한 교황 교서, 놀라운 표징(Admirabile Signum)'을 올해 뒤늦게 알게 되었고 그래서 늦었을지라도 이 주제로 강론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저희 수도회 총장 신부님도 성탄 메시지를 보내면서 이 주제에 부합하는 권고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올해 두 분의 서한을 중심으로 강론을 하고자 합니다. 교황 교서, 놀라운 표징에서 교황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성탄 구유는 그 기원인 프란치스코 성인 때부터 특별한 방식으로, 성자께서 강생하심으로써 몸소 택하신 가난을 느끼고 만져 보도록 우리를 초대해 왔습니다. 이는 베들레헴의 구유에서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그분께서 나아가신 겸손과 가난과 내어줌의 길을 따르라는 호소를 함축합니다. 가장 곤궁한 형제자매들에게 자비를 베풂으로써 예수님을 만나고 섬기라고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입니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구유를 Signum 곧 표지라고 합니다. 이는 우리가 성사를 논할 때 얘기하는 바로 그 Signum이지요. 성사론에서 Signum 곧 표지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유가 표지라고 함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라는 뜻인데 교황 프란치스코도 "프란치스코 때부터 특별한 방식으로 성자께서 강생하심으로써 몸소 택하신 가난을 느끼고 만져 보도록 초대하는 것"이 구유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강생하신 그리스도 자신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볼 수 있도록 오신 표지시라고 콜로새서는 얘기합니다.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십니다."(1,15)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는데 그리스도께서 우리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신 것이 육화이고, 그 육화의 겸손과 가난과 사랑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구유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의 겸손과 가난과 사랑을 눈으로 꼭 보고 싶었고, 그래서 요한이라는 귀족에게 예루살렘의 구유를 재현하라고 부탁합니다. 

"그레치오에서 우리 주님의 축제를 지내고 싶으면 빨리 가서 내가 시키는 대로 부지런히 준비하시오. 우선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아기가 겪은 그 불편함을 보고 싶고, 또한 아기가 어떻게  구유에 누워 있었는지 그리고 소와 당나귀를 옆에 두고 어떤 모양으로  짚북데기 위에 누워 있었는지 내 눈으로 그대로 보고 싶습니다." 

이렇게 해서 처음으로 구유 경배가 시작되었는데 눈으로 보고 싶은 간절함이 하느님 은총으로 이루어졌지요. 이처럼 구유는 눈으로 그리고 감각으로 주님을 만나려는 간절함의 성삽니다. 

이것이 사부 프란치스코의 성사적인 신앙이기에 그 후예인 저희 수도회 총장님께서도 이번 성탄 메시지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보는 것과 믿는 것은 성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 핵심적인 두 동사입니다. 보는 것은 우리에게 성 프란치스코의 신앙의 육체성을 상기시켜 줍니다. 성인에게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코로 냄새를 맡고, 귀로 듣고, 혀로 맛보고자 했습니다. 

곧, 가장 깊은 데서 그를 움직이게 했던 갈망이 그의 감각들과 그의 전부를 움직이게 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스스로에게 주님을 보고 만지고 싶은  뜨거운 갈망을 여전히 지니고 있는지 묻습니다." 

본래 신앙과 신앙으로 보는 것은 육체성을 뛰어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육체를 가지고 사는 우리가 육체성을 무시해서는 안 되고 성 프란치스코는 신앙의 육체성을 인정하며 그 바탕에서 하느님을 영적인 눈으로 보고 만지고자 했던 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교황 프란치스코는 왜 구유에 관한 교서를 내셨을까요? 

그것은 요즘 우리가 구유에서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특히 아기 예수를 만나지 못하고, 아기 예수에게서 하느님의 가난과 겸손과 사랑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탄절 구유는 성탄절 트리와 비슷하게 하나의 성탄절 풍습에 불과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는 스스로에게 주님을 보고 만지고 싶은 뜨거운 갈망을  여전히 지니고 있는지 묻습니다."라고 한 저희 총장님처럼 질문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게 성탄의 구유는 풍습인지 아니면 성사인지, 그저 풍습인지 아기 예수를 보여주는 성사인지에 질문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평화의 길 : “허기진 이 세상에 따듯한 밥 한 그릇 같은 사람이 되어라!”

 

오늘은 기쁜 성탄 대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천사는 목동들에게 나타나 기쁨의 표징을 이렇게 일러줍니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목동들은 세상에서 소외된 삶을 사는 대표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목동들은 집도 없고 재산도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목동은 우리 모두를 대표하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입니다. 

성탄은 그들이 더는 그럴 필요가 없게 된 날입니다. 우리도 평화와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구유 위의 아기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없는 삶은 어떨까요? 춥고 배고프고 불안하고 외롭습니다. 이때의 세상은 지옥과 다름없습니다. 이런 모습을 잘 나타낸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에 나오는 가오나시입니다. 

치히로는 아빠, 엄마와 함께 차를 타고 새로운 동네로 향합니다. 그러다 길을 잃고 기묘한 동네로 들어와 버립니다. 거기에서 엄마, 아빠는 돼지가 되어버리고 치히로는 자신의 이름을 잃고 센이라는 이름으로 그 기괴한 곳에서 버텨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무섭고 외롭고 허기진 마음을 가오나시는 센이 목욕탕에서 일할 때 상징적으로 잘 나타내줍니다. 이 이상한 괴물은 사람들에게 금을 만들어주며 인심을 사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금만 좋아하고 자신을 알아주지 않자 그 허기짐에 사우나에서 일하는 사람까지 다 잡아먹습니다. 

센은 아무도 도와주기를 원치 않는 더러운 손님의 시중을 들며 그 손님으로부터 귀한 약을 받아냅니다. 그 약의 반을 잘라 자신을 도와주었던 용 모습의 친구를 치료해 주고 아무나 막 잡아먹는 가오나시에게 먹여 그동안 잡아먹은 것을 다 뱉어내게 합니다. 

센은 이런 과정을 통해 자신이 다시 치히로였음을 기억하고 아빠 엄마를 되찾아 그 마을을 나가게 됩니다. 여기서 상처가 치유되는 용이나 가오나시는 바로 이름을 잊어버린 치히로 자신을 상징합니다. 

남에게 하기 싫은 일을 해주는 것은 남의 밥이 되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 과정에서 얻게 되는 것은 상처받은 나 자신을 치유하는 약이고 나 자신의 허기를 채워주는 양식입니다. 

내가 양식이 되어줌으로써, 곧 먹힘으로써 나는 진정한 나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나에게 어쩌면 돼지처럼 보였던 참 부모의 모습을 발견하여 더는 혼란스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에 태어난 우리는 모두 치히로처럼 이름을 잊고 상처받고 허기지게 살아갑니다. 이때 동물의 밥통에 양식으로 뉜 한 인간이 된 하느님은 우리도 누군가의 밥이 될 때 진정한 인간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내가 내어주며 나의 창조자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큰가시고기의 부정은 유명합니다. 큰 가시고기는 둥지를 짓는 유일한 물고기라고도 합니다. 암컷은 둥지에 알을 낳고 떠나갑니다. 그러면 수컷은 알 냄새를 막기 위해 수풀과 돌들로 방어막을 칩니다. 그리고 수천 개에 해당하는 알들을 일일이 뒤집어주고 바람을 쐐줍니다. 큰 가시고기는 알들에 계속 부채질을 해주고 알을 훔치러 온 녀석들과 싸웁니다. 그래서 먹지도 않고 잠을 자지도 않습니다. 

사흘이 지나면 부화가 시작됩니다. 그러면 큰 가시고기는 더욱 바빠집니다. 먼저 깨어난 새끼들을 돌보고 늦게 깨어나는 고기들을 위해 계속 지느러미로 산소를 공급해줍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새 몸은 푸른색으로 변하고 지느러미는 갈라져 더는 물에 뜰 수 없게 됩니다. 새끼를 모두 탄생시킨 5일째 아비 물고기는 힘이 빠져 가라앉아 죽습니다. 그러면 새끼들이 아비 가시고기의 살을 먹으며 바다로 나갈 힘을 얻습니다.

큰가시고기는 몸집이 크지 않은데도 가시가 커서 그렇게 이름이 붙여진 것 같습니다. 가시고기가 죽어 봐야 큰 물고기들이 먹으려 해도 손해입니다. 가시가 큰 것에 비해 먹을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새끼들에게는 큰 이득입니다. 그 작은 새끼들은 아버지의 살을 가시들 사이로 들어가 먹습니다. 그 작은 새끼 물고기들에게 자기 몸을 주는 물고기가 그것들의 아버지임을 누가 봐도 압니다. 아버지가 아니면 그렇게 목숨을 내어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새끼 물고기들은 아버지 물고기를 먹으며 자신들도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랑도 먹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낳을 때 ‘사랑’으로 낳습니다. 모든 창조는 사랑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사랑으로 낳은 자녀를 부모는 사랑으로 살리려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자신의 피조물에 자신이 창조자임을 밝히는 방식은 어떤 것에 자신의 살과 피를 싸서 양식으로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체를 통해 이 천사의 전함이 지금도 실현되고 있음을 봅니다. 성반이라는 구유 위에 밀떡이라는 이불에 싸여 누워있는 양식이 된 하느님을 봅니다. 그러니 우리도 성체를 보며 구유의 아기를 보던 목동들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탄이 기쁜 이유는 단순히 2천 년 전 오늘 예수님이 태어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태어나신 예수님을 오늘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매일 성체 안에서 만나 나의 진정한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MBC 드라마 ‘밥이 되어라’는 시골에서 밥집을 운영하는 경수라는 총각에게 아버지가 한 여자아이를 맡겨놓고 사라지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누군지도 모르는 영신이란 아이를 키워야 하는 경수는 막막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영신의 똘똘한 모습에 경수도 정이 들어 영신을 키우며 학교를 보냅니다. 

영신은 음식솜씨가 타고났습니다. 그래서 궁궐이란 한식당에 취직하려 합니다. 이때 왜 음식을 만들려고 하느냐는 질문에 영신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허기진 세상에 따듯한 밥 한 그릇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이는 허기진 세상에서 자신이 경수에게 따듯한 밥이 무엇인지 그 사랑을 먹었기 때문에 가능한 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났다면 바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처럼 따듯한 밥 한 그릇과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이름을 찾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찾아 더는 아프지 않고 배고프지 않게 살 수 있게 됩니다. 

구유 위의 아기 예수님은 밥이 되어야만 참 하느님 자녀가 될 수 있는 약과 양식을 얻게 됨을 알려주는 진정한 우리 기쁨과 평화의 표징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땅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이사 52,10)

 

예수님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이천 년 전에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기쁘고 행복한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과 같은 휴일이 되면, 몇 년 전에 명절을 앞둔 어느 날에 대형 할인점에 갔다가 겪은 경험이 하나 생각납니다. 마트에는 명절을 지내기 위해 찾은 많은 손님으로 북적였습니다. 그래서 주차할 자리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계속해서 빈자를 찾아서 돌아다니는데, 마침 차 한 대가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 자리가 비자마자 얼른 주차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어떤 차가 제 차 바로 앞에 서더니 큰소리로 욕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주차하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제가 갑자기 새치기해서 주차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분명히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반말로 욕하는 모습에 저 역시 기분이 좋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욕할 일이냐?”라고 한소리를 할까 생각하다가 그냥 사과하고 그 자리에서 차를 빼주었습니다. 마침 그 옆의 차가 나가서 바로 옆에 있던 저는 차를 쉽게 주차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차에서 내려 사과했습니다. 그분 역시 사과를 하더군요. 주차 때문에 예민해져서 화를 냈다고 진심으로 죄송하다고 고개 숙여 사과하셨습니다. 
 
만약 저 역시 화를 냈으면 온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를 낮추는 행동 하나가 오히려 기분 좋은 자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사랑은 최고의 덕목입니다. 
 
아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최고의 덕목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세상의 어두움을 비추기 위해 하느님의 말씀은 혈육으로 강생해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이 과연 올바르게 살고 있었을까요? 그들도 또 그들의 선조들 역시 죄로 더 기울어진 삶을 살았습니다. 이 모습에 화를 내고 하늘에서 큰 불을 내려야 마땅할 것처럼도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불의를 불의로 맞서는 것이 아닌, 당신의 따뜻하고 큰 사랑으로 맞서셨습니다. 
 
이제 “땅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이사 52,10)라는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이 주님의 사랑 안에서 현실화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을 닮아 세상에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랑으로 온 세상을 구원하신 예수님이시기에, 우리 역시 간직한 사랑으로 주님의 구원사업에 동참하는 것이 됩니다. 하늘 나라에 가까이 다가서게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우리는 자신을 이김으로써 자신을 향상 시킨다. 자신과 싸움은 반드시 존재하고, 거기에서 이겨야 한다.

- 에드워드 기번

 

 

칭찬하기 쉬운 사람

 

세상에서 칭찬하기 쉬운 사람은 누구일까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을 칭찬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가까이 있는 사람, 내가 잘 아는 사람이 칭찬의 대상이 되기 쉽습니다. 그런데 가까이에 있음에도 칭찬에 인색한 대상이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바로 ‘나’입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고, 가장 많이 알고 있음에도 ‘나’를 잘 칭찬하지 못합니다. 단점만 보이고 남과의 비교를 통해 힘든 시간을 보냅니다. 그래서 우선 자기 칭찬에 집중해야 합니다. 
 

정신건강 전문의 한창수 교수는 ‘나 칭찬법’을 이렇게 제안합니다. 
 

1) 스스로에 대한 험담을 하지 말자.

2) 내 단점도 때론 장점이 된다고 생각하자.

3)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과거의 성과를 꼬집어내 칭찬하자. 
 

나를 칭찬할 수 있는 사람은 굳이 남과 나를 비교하지 않습니다. 지금 상태로도 충분할 수 있고 그래서 감사의 삶을 삽니다. 이런 긍정적 모습으로 살면 사람들도 함께 하려 합니다. 훨씬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다. (루카 2,11)

 

기다림의 끝은 언제나 하느님의 탄생이다. 다윗 고을도 구유도 하느님의 탄생으로 더욱 빛난다. 사랑은 속일 수 없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으로 구유에 누워계신다. 

보이지 않던 하느님께서 보이는 하느님으로 이 땅에 오셨다. 하느님께서 가장 작은 아기로 오셨다. 가장 초라하고 가장 무력한 이 자리에서 낡은 생각과 낡은 세상을 고치신다.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오늘 태어나셨다. 희망의 새로운 빛은 언제나 가장 아픈 곳에서 뜨겁게 시작한다. 낡은 선입견을 깨뜨리는 희망의 새로운 날들이 시작되었다. 

구유에 누워계신 구원자,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구유에서 은총이 쏟아져나온다. 사랑을 가득 풀어놓으신다. 하느님께서도 태어나신다. 새롭게 태어나야 할 우리들 삶이다. 

새롭게 태어나야 삶은 아름답고 아침은 눈부시다. 구원자와 함께하는 새날 성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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