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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2월 30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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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3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탄 팔일 축제 제6일 -

 

 

2021년 12월 30일 (목)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요한 사도는 죄를 용서받은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 안에 영원히 머물러 있도록 그분의 뜻을 실천할 것을 권고합니다.

 

 

✠ 오늘 복음

 

한나는 하느님을 섬기는 데에 온갖 정성을 쏟으며 살아온 예언자로서, 아기 예수님을 보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2월 30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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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1요한 2장 12-17절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12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그분의 이름 덕분에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13 
아버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처음부터 계신 그분을 여러분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14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쓴 까닭은 여러분이 아버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쓴 까닭은 처음부터 계신 그분을 여러분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쓴 까닭은 여러분이 강하고, 하느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머무르며 여러분이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15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16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17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여라.

 

주님께 드려라, 뭇 민족의 가문들아. 주님께 드려라, 영광과 권능을. 주님께 드려라, 그 이름의 영광을.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여라.

제물 들고 그분 앞뜰로 들어가라. 거룩한 차림으로 주님께 경배하여라. 온 세상아, 그분 앞에서 무서워 떨어라.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여라.

겨레들에게 말하여라. “주님은 임금이시다. 누리는 정녕 굳게 세워져 흔들리지 않고, 그분은 민족들을 올바르게 심판하신다.”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여라.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2장 36-40절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그때에 

36 
한나라는 예언자가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37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38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39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예수님의 부모는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40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하느님, 성체성사로 저희에게 오셨으니 이 성사의 힘으로 저희 마음을 움직이시어 저희가 모신 성체에 더욱 맞갖은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유동철 리노 신부 집전

 

 

2021년 12월 30일 (목)
유동철 리노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2월 30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서철 바오로 신부

 

단 1초라도 네 마음을 하느님 아닌 다른 것에 빼앗기지 마!

 

이탈리아로 유학 간 첫 학기에 유독 어려운 과목이 있었습니다. ‘기업 윤리’라는 과목이었는데, 언어도 문제였지만 토론 수업이라 도무지 수업을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수업 시간마다 교수님께서 질문을 하셨습니다. 번번이 한마디 말도 못하고, 그저 멋쩍은 웃음으로 답을 대신하였습니다. 그렇게 한 학기가 끝날 때쯤 되자 교수님도 답답하셨는지 이렇게 놀리셨습니다. 

“자네는 성탄 방학이 되면 시칠리아섬의 작은 본당으로 봉사하러 갈 것이네. 가서 고해성사도 주고, 성탄 밤 미사 강론을 할 텐데, 신자들 앞에서 떠듬거리며 ‘오늘 밤은 성탄입니다.’ 하고 한마디만 하면 신자들이 박수를 치고 난리가 날 것일세.” 

‘아니 내 나이가 몇인데, 신부인 나를 다른 학생들 앞에서 놀리다니.’ 하는 생각이 들면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거리고,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그날은 영성 지도를 받는 날이었는데, 지도 신부님을 만나자마자 수업 시간에 있었던 일을 큰 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참을 듣고 있던 신부님은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바오로, 이 일로 배운 게 있어?” “네. 저는 가르치는 사람이 되면 절대로 학생을 놀리지 않겠습니다.”

“그래. 또 배울 게 있어?” 생각을 좀 하다가 “제가 이탈리아 말을 잘 못해서 이런 일이 생겼으니 언어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그래. 또?” “네, 이젠 없습니다.”

“그럼, 잊어버려!”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또 흥분하여 “아니 어떻게 잊습니까? 제가 이런 취급을 당하는 게 말이 됩니까?” 하며 씩씩거렸습니다. 

제 얼굴을 쳐다보던 신부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바오로, 너 지금 기도할 수 있어?”

“아니, 지금 기도가 중요합니까? 그 교수가 저를 놀렸다니까요?”

그러자 그 신부님은

“바오로, 하느님이 중요해? 그 교수가 중요해? 지금 네 마음을 온통 그 교수의 말에 빼앗겼잖아! 하느님이 중요하다고 말은 하지만 정작 너의 마음을 그 말에 빼앗겨 하느님은 안 계시잖아! 바오로, 단 1초라도 네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하느님 아닌 다른 것에, 세상 것에 빼앗기지 마!” 

이 말을 듣는 순간 홍두깨로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날마다 기도와 단식에 전념하고 성전에 나가 하느님을 섬긴 한나처럼, 단 1초라도 하느님이 아닌 세상 것에 우리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아무것도 너를

 

미드라쉬라는 유대교 문헌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다윗 왕이 어느 날 보석 세공인을 불러 자신을 위해 아름다운 반지를 만들라고 하면서 한 가지 조건을 붙였답니다. 

"내가 큰 승리를 거둬 환희를 주체하지 못할 때 감정을 다스릴 수 있고. 반대로 절망에 빠졌을 때 다시 힘을 북돋워 줄 수 있는 글귀 하나를 반지에 새겨 넣어라." 

보석 세공인은 며칠동안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지만 이런 양극의 상황을  동시에 만족시켜줄 촌철살인의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며칠을 끙끙대던 세공인은 결국 지혜롭다고 소문이 나 있는 왕자 솔로몬을 찾아가서 해답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솔로몬이 세공인에게 알려준 문구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이것 또한 곧 지나가리라." 

솔로몬 왕자가 말했답니다. 

"왕이 승리에 도취한 순간 그 글귀를 보면 자만심이 금방 가라앉을 것이고, 절망 중에 그 글을 보면 이내 큰 용기를 얻어 항상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오늘 미드라쉬에 나오는 이 얘기를 길게 소개한 이유는 오늘 서간에서 세상 것들과 세상 것들에 대한 욕망은 지나간다고 얘기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것들은 본래 지나가는 것이고 사라지는 것이니 그 욕망도 지나가고 사라질 것이며, 욕망에 따른 근심과 걱정도 지나가고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지나가고 사라질 때 우리는 허무감에 빠져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것이 사라질 때 영원하신 하느님이 우리에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구름이 걷혀야 해가 나타나듯 세상 것들과 욕망이 사라져야 영원하신 하느님이 드러나고 하느님 갈망이 생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두 성인의 뛰어난 권고를 마음에 새깁시다. 

하나는 성녀 대 데레사의 기도입니다.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 지나가는 것 오 하느님은 불변하시니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다른 하나는 프란치스코의 권고입니다. 

"우리는 충만한 선, 모든 선, 완전한 선, 참되시고 최고선이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홀로 선하시고 자비로우시고 양순하시고 달고 달콤하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원하지도 바라지도 말며 다른 아무것도 마음에 들어하지도 만족하지도 맙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잡생각 끊는 법 : 내 생각은 내가 사는 집에 의해 결정된다.

 

오늘 복음에서 예언자 한나는 시메온과 함께 아기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아봅니다. 한나는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평생 성전에서 기도와 단식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긴 여인입니다. 

왜 성경은 굳이 그녀가 남편과 일곱 해를 살았던 것과 그 이후 성전에서 산 것을 밝힐까요? 그 이유는 그녀의 거처가 남편의 거처에서 하느님의 거처로 옮겨진 사실이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님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남편의 거처에 살면 그녀는 남편의 아내가 됩니다. 그러면 아내로 생각하고 아내의 감정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을 볼 여유가 없습니다. 한나는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자기 정체성을 주거지를 바꿈으로써 변화시킨 것입니다. 성전에 사는 예언자라는 정체성은 세속에서 굳이 신경 써야 하는 일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내 생각은 나의 정체성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학생이라면 학생이 아닌 사람이 가질 필요가 없는 생각과 감정으로 살아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어쨌거나 학교라는 공간에 머물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제라고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제는 성전에서 살아야 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집에 살 수도 있습니다. 

2021년 12월 30일 「매일미사」 묵상글에 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의 이런 글이 있습니다. 

이탈리아로 유학 간 첫 학기에 유독 어려운 과목이 있었습니다. ‘기업 윤리’라는 과목이 있었는데, 언어도 문제였지만 토론 수업이라 도무지 수업을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수업 시간마다 교수님께서 질문하셨습니다. 번번이 한마디 말도 못 하고, 그저 멋쩍은 웃음으로 답을 대신하였습니다. 그렇게 한 학기가 끝날 때쯤 교수님도 답답하셨는지 이렇게 놀리셨습니다. 

“자네는 성탄 방학이 되면 시칠리아섬의 작은 본당으로 봉사하러 갈 것이네. 가서 고해성사도 주고, 성탄 밤 미사 강론을 할 텐데, 신자들 앞에서 떠듬거리며 ‘오늘 밤은 성탄입니다’ 하고 한마디만 하면 신자들이 손뼉을 치고 난리가 날 것일세.” 

신부님은 생각했습니다. 

‘아니 내 나이가 몇인데, 신부인 나를 다른 학생들 앞에서 놀리다니.’ 

신부님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며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그날은 영성 지도를 받는 날이었는데, 지도 신부님을 만나자마자 수업 시간에 있었던 일을 큰 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신부님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바오로, 이 일로 배운 게 있어?” 

“네. 저는 가르치는 사람이 되면 절대로 학생을 놀리지 않겠습니다.” 

“그래. 또 배울 게 있어?” 

신부님은 생각을 좀 하다가 “제가 이탈리아 말을 잘 못 해서 이런 일이 생겼으니 언어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해야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 또?” 

“네. 이젠 없습니다.” 

“그럼, 잊어버려!” 

신부님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또 흥분하여 “아니 어떻게 잊습니까? 제가 이런 취급을 당하는 게 말이 됩니까?” 하며 씩씩거렸습니다. 

영성 지도 신부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바오로, 너 지금 기도할 수 있어?” 

“아니, 지금 기도가 중요합니까? 그 교수가 저를 놀렸다니까요?” 

그러자 영성 지도 신부님은 “바오로, 하느님이 중요해, 아니면 그 교수가 중요해? 지금 네 마음을 온통 그 교수의 말에 빼앗겼잖아! 하느님이 중요하다고 말은 하지만 정작 너의 마음을 그 말에 빼앗겨 하느님은 안 계시잖아. 바오로, 단 1초라도 네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하느님 아닌 다른 것에, 세상 것에 빼앗기지 마!”라고 말했고, 이 말을 듣는 순간 신부님은 홍두깨로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며 날마다 기도와 단식에 전념하던 한나 예언자처럼 단 1초라도 하느님 아닌 세상 것에 우리 마음을 빼앗기지 않아야겠다고 말합니다. 사람을 ‘행동’하게 만드는 것은 ‘감정’입니다. 

바오로 신부님은 교수가 한 말이 감정이 상했습니다. 그 감정은 그 사건을 자꾸 ‘생각’하므로 일어납니다. 영성 지도 신부님은 생각을 주님께 돌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은 ‘정체성’에 의해 규정됩니다. 내가 판사라면 판사의 일을 생각하고 도둑이라면 도둑의 일을 생각할 것입니다. 

따라서 생각을 무조건 하느님께로 올리려 한다고 쉽게 되지 않습니다. 정체성부터 확고하게 바꿔야 합니다. 이는 마치 잘못 걸려온 전화가 계속 온다면 자신은 누구누구라고 명확하게 말해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다시 전화가 오지 않습니다. 

사제라는 정체성은 학생이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나게 해 줄 것입니다. 그런데 사제는 어디 머무는 사람입니까? 성전에 머무는 사람입니다. 정체성이 생각을 규정하기는 하지만, 그 정체성은 또 자신이 머무는 집에 의해 규정됨을 알아야 합니다. 

한나 예언자가 성전에 머물지 않으면서 예언자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성전에서 기도와 단식으로 주님을 섬기는 일을 밤낮으로 했기 때문에 그 정체성이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사제라고 하더라도 여행자로 몇 년 동안 놀러만 다니며 신자들과 미사도 하지 않는다면 사제는 자신이 사제인지 여행자인지 구분할 수 없어지고, 그러면 사제로 생각해야 할 것보다 여행자로 해야 하는 생각이 그 사람을 가득 메우게 됩니다. 

따라서 개집에 머물면 개가 되고 그러면 개의 생각과 감정으로 행동하게 되지만, 우리가 성전에 머물면 하느님 자녀가 되고 그 정체성에 맞는 생각과 감정으로 행동하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나 내가 초대한 대상의 집에 삽니다. 생각은 나의 정체성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나의 정체성은 내 안의 동굴에서 내가 누구와 대화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그 누가 바로 내 집을 규정하고 그 규정된 집의 정체성이 곧 나의 정체성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내 집은 내가 평소에 대화하는 대상의 집입니다. 내가 주님의 집에 산다면 자아가 나에게 말을 걸어올 때 잘못 걸려온 전화라고 하며 바로 끊을 수 있게 됩니다. 잘못된 전화가 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내 집의 정체, 혹은 나의 정체성을 밝히면 됩니다. 그러면 그쪽에서 더는 대화를 할 수 없게 됩니다. 

나는 누구와 함께 삽니까? 그 안에 신이 있으면 나는 성전에 사는 것이고 그 안에 뱀이 있다면 나는 다른 존재가 됩니다. 이는 평소에 누구와 대화하며 사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우리는 그 정체성에 따라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다가 죽습니다. 

하지만 내가 하느님 자녀가 되지 않으면 구원을 위한 사랑의 계명을 지킬 수 없습니다. 자녀만이 부모의 뜻을 이어받기 때문입니다. 한나 예언자처럼 성전에 머뭅시다. 그래야 세상 것들과 대화를 할 사람이 아님을 내가 알고 쓸데없는 생각들은 바로바로 끊어지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주님을 만나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히말라야 등산을 하려면 반드시 고용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등산 안내자로 널리 알려진 셰르파입니다. 이들은 많은 짐을 운반하고 또 온갖 잡일을 하면서 등반을 돕습니다. 그래서 네팔에는 약 7만 명의 셰르파가 있다고 하네요. 
 
등반을 돕는 셰르파가 꼭 필요한 것처럼, 이 세상을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셰르파 역할을 하는 도우미가 우리 주변에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이 도우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운이 없어서 어떤 도우미도 만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왜 못 만났을까요? 
 
등반을 돕는 셰르파를 만나려면 히말라야를 끼고 있는 네팔에 가야만 합니다. 서울 도심 한가운데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즉, 내가 직접 네팔까지는 가야 셰르파를 만나서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세상을 잘 살 수 있게 해주는 나의 도우미는 나를 직접 찾아오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그 자리로 가면 도우미를 분명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 계신 곳에 내가 가야 합니다. 주님 계신 곳은 주님의 뜻인 사랑이 펼쳐져 있는 곳입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 있으면서 주님이 안 계신다고 외쳐서는 안 됩니다. 
 
엉뚱한 곳에 서 있으면서 운이 없다고, 주님께서 외면하신다고 불평불만 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우리는 한나라는 예언자를 만납니다. 구약성경에는 남자 예언자의 역할은 막중합니다. 구원을 알리고 구세주를 예언했습니다. 그에 반해 여자 예언자는 수도 많지 않았고, 하는 일도 부녀자들에게 성경을 해석하는 정도였다고 합니다. 
 
주님의 봉헌식에 여자 예언자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 이름은 한나로서 밤낮으로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기도로써 하느님을 섬기던 할머니 과부였습니다. 아마도 성전에 살면서 성전 일에 봉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남편과 일곱 해 살고서는 과부가 되어, 여든네 살이 될 때까지 성전에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간을 생각해보십시오. 당시 풍습에 따라 15세 전후로 결혼했을 것이고 일곱 해 살고 과부가 되었으면 자그마치 성전에만 60년 이상 있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결코 적은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고 굳게 믿었기에 기다리고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구세주를 뵙는 영광과 은혜가 주어졌습니다. 
 
주님을 만나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나 예언자와 같이 주님 안에서 끝까지 기다리는 사람은 분명 주님을 만나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잘못되었음을 깨닫는 건 좋은 방향으로 한 걸음 나아간 것이다.

- 켄 로런스

 

 

채우려고 하지 말고 비우세요.

 

우연히 조병수 건축가가 지은 집을 인터넷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집 가로세로 7m 마당 곁에 한 평짜리 방 여섯 칸을 지었습니다. 하늘을 보고 빛과 바람을 느끼도록 만든 ‘땅집’입니다. 
 
인터넷에 있는 ‘땅집’ 사진을 보니 너무나 멋져 보였습니다. 조병수 건축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작게 지으려면 마음이 작아야 합니다. 마음이 작으려면 비워야 하고 무엇이 소중한지 알아야 하지요.” 
 
제 방만해도 너무 많은 것으로 채워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더 넓은 공간을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에 너무 많은 것을 채우고 있어서 계속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작은 마음이 필요할 때입니다. 오로지 주님만을 모실 수 있는 작은 마음만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마음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루카 2,38)

 

우리를 위해 오신 아기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막을 수 없다.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주님께로 가고있다. 성탄은 어제의 이야기가 아닌 오늘의 살아있는 이야기로 우리 마음을 울린다. 우리를 위한 우리들의 이야기가 된다. 잊어버릴 수 없는 하느님의 탄생이다. 

성탄은 우리를 일으키는 기쁨의 이야기이다. 성탄의 이야기를 통해 복음은 살아있는 복음이 된다. 이야기가 깊어지면 우리의 삶도 깊어진다. 이야기의 바탕에는 언제나 하느님의 은총이 있다. 

하느님의 이야기를 다시 듣는다. 하느님의 이야기가 우리를 지켜주고 있다. 비로소 바라보게 되고 비로소 듣게되는 성탄의 변화이다. 성탄의 이야기는 하느님을 잃어버린 우리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되찾아주고 있다. 

사람을 살리는 하느님 사랑이다. 사랑은 새롭고 사랑은 뜨겁다. 사그라들지 않는 아기 예수님과 함께 이 하루를 시작한다. 아기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사랑은 막을 수 없고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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