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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1월 11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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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1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주간 화요일 -

 

 

2022년 1월 11일 (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엘리 사제는 한나의 진실한 마음을 보고 안심하고 돌아가라며 위로합니다.

 

 

✠ 오늘 복음

 

사람들은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진 예수님의 가르침에 몹시 놀랍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월 11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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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1사무 1장 9-20절

 

주님께서 한나를 기억해 주셨기에
한나는 사무엘을 낳았다.

 

그 무렵 


실로에서 음식을 먹고 마신 뒤에 한나가 일어섰다. 그때 엘리 사제는 주님의 성전 문설주 곁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10 
한나는 마음이 쓰라려 흐느껴 울면서 주님께 기도하였다. 

11 
그는 서원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만군의 주님, 이 여종의 가련한 모습을 눈여겨보시고 저를 기억하신다면, 그리하여 당신 여종을 잊지 않으시고 당신 여종에게 아들 하나만 허락해 주신다면, 그 아이를 한평생 주님께 바치고 그 아이의 머리에 면도칼을 대지 않겠습니다.” 

12 
한나가 주님 앞에서 오래도록 기도하고 있는 동안에 엘리는 그의 입을 지켜보고 있었다. 

13 
한나는 속으로 빌고 있었으므로, 입술만 움직일 뿐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엘리는 그를 술 취한 여자로 생각하고 

14 
그를 나무라며, “언제까지 이렇게 술에 취해 있을 참이오? 술 좀 깨시오!” 하고 말하였다. 

15 
그러자 한나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나리!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닙니다. 저는 마음이 무거워 주님 앞에서 제 마음을 털어놓고 있었을 따름입니다. 

16 
그러니 당신 여종을 좋지 않은 여자로 여기지 말아 주십시오. 저는 너무 괴롭고 분해서 이제껏 하소연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17 
그러자 엘리가 “안심하고 돌아가시오.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당신이 드린 청을 들어주실 것이오.” 하고 대답하였다. 

18 
한나는 “나리께서 당신 여종을 너그럽게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는 그길로 가서 음식을 먹었다. 그의 얼굴이 더 이상 전과 같이 어둡지 않았다. 

19 
다음 날 아침, 그들은 일찍 일어나 주님께 예배를 드리고 라마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엘카나가 아내 한나와 잠자리를 같이하자 주님께서는 한나를 기억해 주셨다. 

20 
때가 되자 한나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한나는 “내가 주님께 청을 드려 얻었다.” 하면서, 아이의 이름을 사무엘이라 하였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저의 구원자 주님 안에서
제 마음 기뻐 뛰나이다.

 

주님 안에서 제 마음이 기뻐 뛰고, 주님 안에서 제 얼굴을 높이 드나이다. 당신의 구원을 기뻐하기에, 제 입은 원수들을 비웃나이다. 저의 구원자 주님 안에서 제 마음 기뻐 뛰나이다.

힘센 용사들의 활은 부러지고, 비틀거리던 이들은 힘차게 일어선다. 배부른 자들은 양식을 얻으려 품을 팔고, 배고픈 이들은 더는 굶주리지 않는다. 아이 못낳던 여자는 일곱을 낳고, 아들 많은 여자는 홀로 시들어 간다. 저의 구원자 주님 안에서 제 마음 기뻐 뛰나이다.

주님은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시며, 저승으로 내리기도 저승에서 올리기도 하신다. 주님은 가난하게도 가멸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높이기도 하신다. 저의 구원자 주님 안에서 제 마음 기뻐 뛰나이다.

주님은 비천한 이를 땅바닥에서 일으켜 세우시고, 가난한 이를 잿더미에서 들어 높이시어, 존귀한 이들과 한자리에 앉히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 저의 구원자 주님 안에서 제 마음 기뻐 뛰나이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르 1장 21ㄴ-28절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

 

카파르나움에서, 

21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22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2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24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2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26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27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28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전능하신 하느님, 성체로 새로운 힘을 얻고 간절히 바라오니 저희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며 하느님을 충실히 섬기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홍찬호 모세 신부 집전

 

 

2022년 1월 11일 (화)
홍찬호 모세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1월 11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마르코 복음에 기록된 첫 기적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그물을 던지던 시몬과 안드레아, 그리고 그물을 손질하던 야고보와 요한을 첫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사람 낚는 어부”(마르 1,17)가 된 그들과 함께 항해를 시작하십니다. 오늘 복음과 내일 복음은 이 항해의 첫날을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그 무대는 카파르나움입니다. 

안식일에 어느 회당에서 시작하신 예수님의 첫 항해는 사람들을 몹시 놀라게 합니다. 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이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는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이는 마르코 복음에 기록된 첫 기적이기도 합니다. 

이 기적은 오로지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더러운 영은 예수님의 이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이 모두 놀랍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그들은 기적 자체가 아니라,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 말씀에 복종하는 모습에 놀랐습니다.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을 주시는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오늘 복음은 더러운 영을 통하여 그분의 정체를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으로 밝힙니다. ‘거룩함’은 하느님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은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 하느님께 속하신 분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권위’도 하느님에게서 왔기에 더러운 영을 몰아내는 힘을 지닙니다. ‘거룩하신’ 분께서 ‘더러운’ 영을 몰아내십니다. 이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표지입니다(마르 1,15 참조).

참된 믿음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께 속하고,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향한 믿음의 항해를 시작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화풀이 기도?

 

어제는 한나 얘기를 하며 하느님을 열매 맺는 돌계집 얘기를 했습니다. 오늘도 한나 얘기를 통해 하느님을 열매 맺는 기도 얘기를 해보렵니다. 한나는 기도의 열매를 맺은 데 비해 우리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기도가 열매 맺지 못하는 것의 의미는 우리가 청한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꼭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청한 것과 다른 것일지라도 열매 맺을 수 있고, 아무것도 청하지 않아도 기도가 참 기도라면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열매 없는 기도란 기도를 했는데도 마음의 평화가 없고 사랑이 생겨나지 않으며, 지혜나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거지요. 

알로 치면 무정란입니다. 알을 품고 있는데 새끼가 알을 까고 나오지 않는다면 무정란이지요. 

옛날에 저희 수도원에 카나리아를 키울 때 지금은 돌아가신 신부님이 키우면 1년에 4번 이상 새끼를 까던 새들이 제가 키우면 알도 낳고 품기도 하는데 한 번도 새끼를 까지 않는 거였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먹이를 잘못 주거나 적게 주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무정란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도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의무로 합니다. 이 경우 기도를 한 것이 아니라 의무를 한 것이기에 의무를 다했다는 안도감이나 고작 죄짓지 않았다는 마음뿐 기도를 매일같이 꼬박꼬박해도 아무런 열매가 없습니다. 

기도한 것이 아니라 명상을 한 경우도 비슷합니다. 그래도 의무 기도와는 달리 마음의 평화 같은 열매가 있기는 하지만 하느님을 만나는 열매는 없습니다. 

대화의 경우 혼자 말하는 독백처럼 명상도 혼자 하는 자기 수행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기도는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이거나 대면이지요. 반드시 하느님을 상대하고 대상으로 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한나는 제대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성전에서 기도할 때 그는 마음이 쓰라려 흐느껴 울며 기도했지만 입술만 움직이며 속으로 기도했기에 사제 엘리는 술취한 줄 알고  나무라는데 이때 한나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는 마음이 무거워 주님 앞에서 제 마음을 털어놓고 있었을 따름입니다. 그러니 당신 여종을 좋지 않은 여자로 여기지 말아 주십시오. 저는 너무 괴롭고 분해서 이제껏 하소연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 앞에서>입니다. 주님 앞에 있기만 해도 기도가 되고 열매를 맺게 되는데 마음까지 털어놓으면 그 기도는 어떤 기도보다 훌륭한 기도가 됩니다. 

오늘 한나의 경우 기도로 마음을 털어놓는데 마음을 털어놓기 전에는 분노로 차 있었지만 기도를 함으로써 마음을 털어버립니다. 

이렇듯 기도는 분노의 마음을 하느님께 털어버리는 것이고, 이때의 기도는 분노의 기도이고 불풀이 또는 화풀이의 기도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로 분노의 마음을 털어버리고 풀어버리면 이제 분노로 가득 차 있어서 하느님 계실 자리가 없던 마음에 하느님이 계시게 되지요. 

오늘 우리도 한나처럼 무거운 마음을 하느님께 털어놓도록 하십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한 번은 하느님처럼 되어야 악령에 대한 권한을 가지게 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초기에 어떠한 권위로 가르침을 이어가셨는지를 보여줍니다.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악령 들린 사람이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라고 말합니다. 

사실 예수님께 대한 신앙고백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 자기를 들어 높이는 행위이고 그리스도를 자신과 한편이라고 말하며 그분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라고 하시며 악령을 당신 권위로 누르십니다. 사람들을 이것을 보고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마르 1,27)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악령에 대한 권위가 없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악령을 장난감 다루듯이 하십니다. 이 차이는 어디서 발생할까요? 당연히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은 성령의 힘을 지니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악령도 하나의 영이기에 영은 영에만 반응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은 원죄로 성령을 거부하였기에 쉽사리 악령의 노예가 됩니다. 악령을 이기기 위해서는 먼저 전능한 하느님처럼 되어야 합니다. 먼저 전능해지지 않으면 교만으로 유혹하는 악령 앞에서 언제나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알았던 걸 그때 알았더라면』의 저자 ‘이시이 마레히사’에게 웹 디자이너 ‘도츠’라는 남성이 상담하러 찾아왔습니다. 동거 중인 여자친구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사쿠라이’라고 부르는 그 친구는 메이크업 아티스트인데 도츠는 그녀가 들어오기 전에 반드시 먼저 집에 있으며 그녀를 맞이해야 한다고 합니다. 

도츠는 집을 사무실로 사용하기에 집에 있는 것이 당연하지만, 일이 있어 자신이 들어왔을 때 남자친구가 없으면 사쿠라이는 견딜 수 없어 하고 끊임없이 전화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집에 돌아오면 도츠를 범죄자 취급하며 심하게 몰아세웁니다. 도츠는 사쿠라이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몇 시간이나 사과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일들이 계속 반복되는 것입니다. 

한번은 도츠가 회사에서 중요한 회의를 하고 있는데 또 전화가 울렸고 그래서 받지 않았습니다. 계속 전화가 울려서 전화기를 끌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회의실 사무직 여직원이 회의실에 들어오더니 “저기…. 혹시 도츠씨 계신가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도츠가 어쩔 수 없이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밖으로 나가보니 여자친구가 사무실로 몇 번이나 전화해서 바꿔 달라고 소리를 지른다는 것이었습니다. 도츠는 어쩔 수 없이 전화해야 했고 흥분하여 막무가내인 그녀 때문에 회의를 중단한 채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일로 도츠는 회사에서도 조금씩 입지가 좁아지고 있었습니다. 

도츠의 노력으로 사쿠라이가 변할 수 있을까요? 사쿠라이는 왜 도츠를 ‘지배’하려 드는 것일까요? 도츠가 아무리 노력해도 사쿠라이의 도츠를 통제하려는 마음은 바뀔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쿠라이의 문제는 도츠가 아닌 자신의 어릴 적 상처 때문입니다. 

사쿠라이고 초등학교 4학년 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동물을 관찰하는 여름방학 숙제를 위해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아버지와 동물원에 가기로 된 날입니다. 모든 준비를 마친 사쿠라이에게 아버지는 미소 띤 얼굴로 “잠깐만 기다려. 꼭 끝내야 하는 일이 있어서 잠깐 나갔다 올게”라고 말하고 집을 나가고서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사쿠라이는 집을 나간 아버지가 계속 돌아오기를 바랐지만,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사쿠라이는 이 책임을 자신에게 돌렸습니다. 

“내가 숙제를 함께 하자고 하도 부탁해서 아버지가 그게 싫어서 집을 나가신 거야!”

몇 년 동안 후회와 자신을 원망하는 마음으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중학교 2학년이 되던 어느 날, 아버지에게 여자가 이었고 그날 그 여자와 도망치기 위해 떠났다는 사실을 어머니에게 듣고는 이젠 자책이 원망으로 바뀌었습니다. 자신이 제일 의지했던 아버지가 자신을 버렸기에 아버지도 싫고 그렇게 버려지는 존재인 자신은 더 싫었습니다. 그래서 남자친구도 자신을 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그렇게 병처럼 집착하게 된 것입니다. 

악령은 이렇게 사랑의 상처를 받은 사람들에게 쉽게 스며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육체와 정신과 심지어 마음마저 점령해버립니다. 그러면 결국엔 마귀 들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악령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쿠라이는 어떻게 하면 아버지의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아버지를 넘어서야 합니다. 아버지보다 전능해져야 합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라는 아이들이 결국 도달하게 되는 곳은 어디입니까? ‘부모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공부도, 힘도, 키도, 사랑하는 마음도 부모를 넘어서면 그 아이는 비로소 ‘겸손’의 길로 갑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이 ‘부모덕’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사랑의 능력’입니다. 세상 살아가면서 관계의 능력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넘어서서 전능한 존재가 되어보지 못하면 그 아이는 성장해서도 끊임없이 일단은 부모를 넘어서려 합니다. 한 번은 전능해져야 합니다. 그러다 혼자 힘으로 안 되면 결국 악령의 힘까지 빌리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는 먼저 하느님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교만한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하느님처럼 전능해지지 못한다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악령에 휘둘리는 약한 존재로 머물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CCC, 460 참조). 

아담과 하와가 먼저 하느님처럼 되었다면 ‘하느님처럼’ 만들어주겠다던 뱀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악령이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라고 말할 때, 마치 자신이 그렇게 고백해 주어서 예수님이 이득을 보는 것처럼 유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하느님이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그 덕이 아버지께서 성령을 보내주셨음을 알기에 더는 악령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악령을 밟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부모를 넘어섰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한 사람이 되기는 하겠지만 여전히 하느님이 되려고 합니다. 자아의 욕심은 완전히 하느님처럼 되지 않으면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처럼 전능해지지 않으면 만족할 수 없게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전능해지지 않으면 전능해지라는 사탄의 목소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느님처럼 되었다고 믿지 못할 때, 사탄은 돈과 쾌락과 명예로 하느님처럼 만들어주겠다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어 이미 하느님이 되었다고 믿는 이에게는 그 유혹이 더는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만이 악령을 이기는 가르침을 줄 수 있게 됩니다. 

이미 하느님처럼 되었음을 믿는 이는 그 모든 것이 주님 덕분이기 때문에 자신을 위한 가르침이 아니라 오로주 주님께 영광을 올리기 위한 가르침을 줍니다. 그 가르침으로 사탄은 힘을 잃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르치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처럼 성령으로 하느님 자녀의 지위를 얻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도 누군가에게 이런 소리를 들으려면 먼저 하느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그분과 하나가 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체를 영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마르 1,27).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짜장면이냐? 짬뽕이냐?

 

지난번에 직원들과 함께 점심 식사를 위해 중화요리 집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늘 하던 대로 이번에도 고민이었습니다. 어떤 고민이었을까요? 맞습니다. ‘짜장면이냐? 짬뽕이냐?’라는 고민이었습니다. 이 고민 해결을 위해 주변 테이블을 바라봅니다. 많이 드시는 음식이 맛있을 확률이 높을 테니 말입니다. 그래서 짜장면을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직원이 고른 짬뽕을 보니 ‘짬뽕이 더 맛있겠다. 짬뽕시킬 걸 그랬나?’라는 생각이 곧바로 나옵니다. 
 
언제나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미련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다른 경우에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이라는 후회를 안고 사는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특히 늘 후회만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약 과거로 되돌아간다면 정말로 후회하지 않은 선택을 하게 될까요? 
 
자신의 선택에 어떤 커다란 원칙을 가지고 있다면 후회가 적다고 합니다(없지는 않습니다). 예를 드리어, 음식을 선택할 때는 ‘오늘 내가 먹고 싶은 것을 고른다.’라는 원칙이 있다면 후회를 줄일 수 있습니다. ‘내 선택에 후회하지 않는다. 이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다’라는 원칙이 있어도 후회를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어떤 선택을 하실 때, 늘 원칙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 대한 사랑 가득한 마음으로 인해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고 있는지를 눈여겨보고 있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시선에 상관없이 치유의 선택을 하셨습니다. 이 원칙을 누가 깨고 싶을까요? 바로 마귀는 사랑의 선택을 철저하게 방해합니다. 예수님을 향해서도 그러했지요. 
 
예수님 앞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소리를 지르며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말합니다. 어떤 정신질환이 아닌, 더러운 영이 들린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시 랍비가 쓰던 구마 방법이 아니고 단 한마디의 말로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마귀의 유무를 떠나서 병마로 힘들어하는 모습에 마음이 아프셨고, 가장 빠른 방법으로 고쳐주신 것입니다. 
 
더러운 영을 지닌 사람은 예수님의 일을 훼방하려고 소리소리 고함을 쳤습니다. 특히 신앙고백의 가면을 쓰고 예수님의 정체를 일찌감치 드러내어서 예수님의 선택을 방해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즉, 하느님의 일도 하기 전에 반대자들에게 방해받도록 하려는 잔꾀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훼방이 예수님께서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그 사람에게서 썩 나가라는 한 마디로 내쫓으십니다. 
 
사랑의 원칙 하나만으로 충분합니다. 그 원칙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마귀를 쫓아낼 수 있으며,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원칙은 무엇입니까?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자신을 거울에 비추어 보면 외모만 보게 되지만, 다른 사람에게 비추어 보면 인간적 품성이 드러납니다.

- 신영복

 

 

겸손과 사랑

 

아는 지인들과 술자리를 함께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자리는 무척 유쾌했고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분이 취한 것 같습니다. 목소리가 커지면서 했던 말을 계속 반복해서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다른 삶의 말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어떤 말이든 “그건 아니죠.”라면서 시비조로 말을 받습니다. 
 
술 취해서 그런 것이라고 받아들이면서도 기분이 그렇게 좋지 않았습니다. 다른 지인들도 그랬는지 그만 먹자는 말에 서로 동의하고 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의 형제님은 “한 잔 더” 만을 계속 외치고 있습니다. 
 
서로 기분이 안 좋은 상태에서 헤어졌습니다. 다음 날 그 문제의 형제님은 어떤 사과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제 다시는 그 형제님과는 안 마실 것 같습니다. 평상시의 모습은 너무나 훌륭한데 술만 마시면 이렇게 된다면 함께 마실 수 없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이 형제님을 통해, 남의 말은 전혀 듣지 않으면서 자기 말만 맞는다며 상대를 지배하려는 사람, 모든 것을 자기 위주로 돌아가게 하려는 사람은 주변 사람을 너무 힘들게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겸손과 사랑을 말씀하신 예수님을 떠올리게 됩니다. 모두와 함께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마르 1,27)

 

생명을 살리시는 생명의 권위이시다. 건강한 권위는 참된 가르침으로 드러나고 가르침은 권위의 주체이신 하느님을 향(向)한다. 권위 있는 가르침을 잃어버린 우리들 세대이다. 사람이 되어오신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의 권위가 되신다.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서 새롭게 가르쳐 주신다. 일깨움의 놀라움은 언제나 하느님께 있다. 꾸미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삶에서 권위를 만난다. 하느님의 가르침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우리들 삶이다. 

삶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건강한 삶을 가르쳐 주신다.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하느님의 힘과 하느님의 능력을 우리가 믿는 것이다. 건강한 삶은 언제나 하느님을 향한다. 건강하지 못한 삶을 치유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을 주시는 예수님께 건강한 삶을 묻는다. 소중한 삶으로 되돌려 놓으시는 주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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