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1월 13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 13.
반응형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1월 1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주간 목요일 -

 

 

2022년 1월 13일 (목)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이스라엘인들은 필리스티아인들과의 전투에서 계약 궤마저 빼앗기고, 엘리의 두 아들도 죽임을 당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치유를 간절히 청하는 나병 환자를 낫게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월 13일 (목)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1사무 4장 1ㄴ-11절

 

이스라엘은 크게 패배하고,
하느님의 궤도 빼앗겼다.

 

그 무렵 필리스티아인들이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려고 모여들었다. 


이스라엘은 필리스티아인들과 싸우러 나가 에벤 에제르에 진을 치고, 필리스티아인들은 아펙에 진을 쳤다. 


필리스티아인들은 전열을 갖추고 이스라엘에게 맞섰다. 싸움이 커지면서 이스라엘은 필리스티아인들에게 패배하였다. 필리스티아인들은 벌판의 전선에서 이스라엘 군사를 사천 명가량이나 죽였다. 


군사들이 진영으로 돌아오자 이스라엘의 원로들이 말하였다. “주님께서 어찌하여 오늘 필리스티아인들 앞에서 우리를 치셨을까? 실로에서 주님의 계약 궤를 모셔 옵시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오시어 원수들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백성은 실로에 사람들을 보내어, 거기에서 커룹들 위에 좌정하신 만군의 주님의 계약 궤를 모셔 왔다. 엘리의 두 아들 호프니와 피느하스도 하느님의 계약 궤와 함께 왔다. 


주님의 계약 궤가 진영에 도착하자, 온 이스라엘은 땅이 뒤흔들리도록 큰 함성을 올렸다. 


필리스티아인들이 이 큰 함성을 듣고, “히브리인들의 진영에서 저런 함성이 들리다니 무슨 까닭일까?” 하고 묻다가, 주님의 궤가 진영에 도착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필리스티아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말하였다. “그 진영에 신이 도착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외쳤다. “우리는 망했다! 이런 일은 일찍이 없었는데. 


우리는 망했다! 누가 저 강력한 신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겠는가? 저 신은 광야에서 갖가지 재앙으로 이집트인들을 친 신이 아니냐! 


그러니 필리스티아인들아, 사나이답게 힘을 내어라. 히브리인들이 너희를 섬긴 것처럼 너희가 그들을 섬기지 않으려거든, 사나이답게 싸워라.” 

10 
필리스티아인들이 이렇게 싸우자, 이스라엘은 패배하여 저마다 자기 천막으로 도망쳤다. 이리하여 대살육이 벌어졌는데, 이스라엘군은 보병이 삼만이나 쓰러졌으며, 

11 
하느님의 궤도 빼앗기고 엘리의 두 아들 호프니와 피느하스도 죽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 당신 자애로 저희를 구원하소서.

 

당신은 저희를 버리시고 치욕스럽게 하셨나이다. 저희 군대와 함께 출정하지 않으셨나이다. 당신이 저희를 적에게 쫓기게 하시어, 저희를 미워하는 자들이 노략질하였나이다. 주님, 당신 자애로 저희를 구원하소서.

당신은 저희를 이웃에 우셋거리로, 주위에 비웃음과 놀림감으로 삼으셨나이다. 저희를 민족들의 이야깃거리로, 겨레들의 조솟거리로 삼으셨나이다. 주님, 당신 자애로 저희를 구원하소서.

깨어나소서, 주님,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소서, 저희를 영영 버리지 마소서! 어찌하여 당신 얼굴을 감추시나이까? 어찌하여 가련하고 비참한 저희를 잊으시나이까? 주님, 당신 자애로 저희를 구원하소서.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르 1장 40-45절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

 

그때에 

40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41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42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43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44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45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전능하신 하느님, 성체로 새로운 힘을 얻고 간절히 바라오니 저희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며 하느님을 충실히 섬기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홍찬호 모세 신부 집전

 

 

2022년 1월 13일 (목)
홍찬호 모세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1월 13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나병 환자의 치유는 부정(不淨)을 정(淨)으로 바꾼 기적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악성 피부병에 걸린 사람은 “죽음의 맏자식이 사지를 갉아먹는”(욥 18,13) 육체의 고통뿐만 아니라, ‘부정(不淨)한 자’로 여겨져 공동체에서 소외되고 마침내 단절되어야 하는 고통을 받습니다(레위 13,45-46 참조).

‘부정한 사람’이라 외치며 다른 사람의 접근을 막아야 하는 나병 환자가 용기 내어 예수님께 다가갑니다.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 무릎 꿇은 그의 간청에서 신뢰와 확신이 느껴집니다. ‘접촉해서는 안 되는’ 나병 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대시며, 깨끗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도 놀랍습니다. 나병 환자의 치유는 부정(不淨)을 정(淨)으로 바꾼 기적입니다. 그래서 사회적 종교적으로 단절된 관계를 회복시킵니다. 

당시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나병을 고치는 것은 하느님만이 가지고 계시는 능력으로, 죽은 이를 살리는 것과 맞먹는 능력입니다(2열왕 5,1-7 참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능력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이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시지만, 나병 환자는 놀라움과 기쁨을 혼자 간직할 수 없었나 봅니다. 그는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합니다. 이 문장은 직역하면, ‘그 말씀을 널리 선포하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입니다. 어쩌면 마르코는, 나병 환자가 예수님을 만난 뒤, 복음을 선포하는 제자가 되었음을 전하려 하였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다양한 고통과 단절의 상황에 부딪힙니다. 그럴 때마다 용기 내어 예수님께 다가가 엎드려 청합시다. 그리고 복음을 선포하는 제자의 삶을 충실히 살아갑시다. 그분께서는 간절히 청하는 우리를 자비의 손길로 깨끗하게 하시고, 고통과 단절에서 구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우리가 청하는 것은?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선이신가? 선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선을 주시는가? 선을 주신다. 하느님께서는 악은 주지 않으시는가? 악도 주신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선의 외에 악의도 있으시다는 것인가? 아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읽으며 제가 묵상한 내용입니다. 오늘 나병 환자는 자기를 깨끗하게 해주실 선의가 있으신지 여쭙니다. 깨끗하게 해주실 수 있는 능력이 주님께 있음은 굳게 믿고 있지만 깨끗하게 해주실 선의가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다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병환자가 믿음이 참으로 깊고 겸손한 사람이라고 우리가 믿는다면 주님께 선의가 있는지 없는지 무엄하게 묻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의에 자신의 병 치유가 들어가느냐 안 들어가느냐 여쭙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는 나병 환자에 대한 선의를 가지고 계시지만 병의 치유보다는 다른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믿음이 참으로 깊고 겸손한 나병 환자에게는 치유를 해주셔도 주님은 좋으신 분, 안 해주셔도 좋으신 분입니다. 

더 나아가 나병 환자에게 하느님은 선의를 가지신 분일 뿐 아니라 그 선의가 사랑에서 나온 것이기에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그런 사랑의 하느님을 나병 환자도 사랑합니다. 

이것을 바꿔 말하면 좋으신 하느님일 뿐 아니라 사랑의 하느님이고 사랑하올 하느님이신 겁니다. 

오늘 사무엘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두 번이나 필리스티아인에게 패합니다. 싸움에 져 많은 희생자를 냈을 뿐 아니라 계약의 궤마저 뺏겼습니다. 말하자면 하느님을 잃은 것, 하느님을 뺏긴 것입니다. 

계약의 궤를 모시고 나가면 전쟁에서 꼭 이길 것이라고 믿었는데 하느님께서 패하게 내버려 두신 겁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깨지고 무척 당황스러웠을 겁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을 거두신 걸까요? 그럴 리 없지요. 사랑을 거둔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입니다. 아니, 당시 이스라엘은 애초부터 사랑이 없었습니다. 

평소에는 하느님을 찾지도 않다가 전쟁이 나니까 찾은 거고, 살만할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죽게 되니까 찾은 겁니다. 그러니까 사랑해서 찾은 것이 아니라 승리를 위해서 찾은 것이고, 그들에게 하느님은 사랑하올 하느님이 아니라 필요한 하느님이며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하느님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우리 인간의 욕심을 채우시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나의 승리와 성공을 이루어주시는 하느님도 아닙니다. 그러기에 이런 이유로 하느님을 찾으면 하느님은 응답치 않으시고 그런 사람들 가운데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들을 피하고 멀리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하느님 계실 자리를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이니 하느님께서 피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느님을 밀어낸 것입니다. 

욕심이 있는 곳에는 하느님이 계실 곳이 없습니다. 하느님 대신 욕심이 거기에 있으니 그들 안에 하느님 계실 곳은 없을 수밖에 없지요. 

하느님은 우리의 욕심을 채워줄 선의까지는 없으시고 우리를 살리시고 살게 하실 선의만 있으시며, 그것도 영원히 살게 하실 선의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무엇을 청합니까? 사랑을 청합니까, 아니면 욕심을 채워주시기를 청합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모든 은총은 하나의 ‘시험’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병 환자를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께 ‘순종’하는 것보다 자신이 받은 은총을 전하는 것이 더 주님께 도움이 되겠다 싶었는지 자신의 이야기를 널리 퍼뜨립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더는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셔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대신분으로 부정하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은총을 받는 것이 중요한가, 그리스도와 교회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한가?’에 관한 내용입니다. 

물론 은총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은총은 좋은 만큼 모두가 하나의 ‘시험’입니다. 세상에 악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총의 시험을 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일류 대중 선동가이며 히틀러의 악행을 정당화하려 노력했던 ‘악마의 재능’이라 불린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세기의 선동가 ‘요제프 괴벨스’입니다. 괴벨스가 모든 면에서 재능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평탄치 않았고 질병에 시달렸습니다. 소아마비로 오른발이 마비되어 여러 차례 수술하였지만 결국 평생 발을 절룩거려야 했습니다. 

1차대전 때 독일군 입대를 신청했지만 절름발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했습니다. 이것은 자신과 가족의 굉장한 수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키는 163cm였습니다. 매우 작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런 열등감을 영웅을 찾아 극복하려 하였고 그 사람이 히틀러였습니다. 그가 히틀러를 만나기 전 쓴 소설이 있었는데, 실패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탓을 유대인에게 돌렸습니다. 히틀러는 그의 반유대주의와 소설가적 재능을 보고 그를 자신의 목소리로 사용하였습니다. 나치 선전 책임자로 세워 이용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는 영화와 팸플릿을 만들고 책을 쓰는가 하면 다른 책을 불태우고 독일인에게 유대인이 적이라고 이해시키려 했습니다. 

그는 이런 생각이 있었습니다. 

“대중은 거짓말을 처음에는 부정하고 그다음엔 의심하지만 되풀이하면 결국에는 믿게 된다.”

그는 거짓말을 어떻게 대중들에게 세뇌할 수 있는지 아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독일 영화산업을 장악하여 지독한 반유대주의를 담은 영화를 상영하고 언론을 통해 조장하였습니다. 역시 대중은 그의 거짓말을 듣다가 결국엔 믿게 됩니다. 

1938년 기회가 옵니다. 유대인 망명자가 나치 외교관을 암살한 것입니다. 괴벨스는 이 사건을 유대인의 반란이라 날조하였고 열광적인 연설을 통해 잔혹한 복수를 요구했습니다. 무력을 동원하여 어느 날 밤 폭동을 일으켰는데, 군대와 경찰까지 동원된 조직적 폭력이었습니다. 이날을 ‘깨진 유리의 밤’이라 부릅니다. 

한 나라의 사람들을 일제히 선동하여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있게 만드는 재능은 정말 천재적인 재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재능을 좋은 일이 아닌 히틀러를 위해 썼다는 데 있습니다. 사실 히틀러를 위해 쓴 게 아닙니다. ‘자신을 인정받기 위해’ 쓴 것입니다. 

히틀러도 외국의 비판이 거세지자 ‘깨진 유리의 밤’을 조장했던 괴벨스에게 화를 냈습니다. 괴벨스는 열등감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을 주님으로부터 받은 능력으로 극복하려 한 것입니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는 말을 하지 않아도 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나병 환자의 병을 고쳐주시며 ‘교회의 권위에 순종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에 속하려면 교회에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한다는 말은 나의 뜻을 바친다는 말입니다. 겸손해진다는 뜻입니다. 순종이 바탕이 된 안에서 은총이 와야 그 은총이 나를 망치지 않습니다.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2003)는 한 지방 방송국 앵커인 브루스가 하느님의 능력을 갖추게 된다는 설정으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능력을 갖추면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브루스는 쫓겨난 직장에서 잘 나가는 사람이 되려 합니다. 물론 잘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잃게 되는 게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자였습니다. 잘 나가다 보니 지금까지 사귀던 여자는 그냥 소모품처럼 여겨집니다. 그렇게 바람을 피우다 헤어집니다. 세상 것을 다 얻었지만 한 여자의 마음은 얻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얻어도 허전하기만 합니다. 

한 여자의 마음을 얻는 것도, 교회에 머무는 것도 내 뜻을 봉헌하지 못하면 불가능합니다. 준비 없이 받는 능력은 우리를 저절로 교만하게 만들어 누구도 그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합니다. 공부할 때도 항상 ‘겸손과 사랑의 증가’에만 초점을 맞추어야지 저는 공부를 많이 해서 오히려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모든 은총은 교회에 순종해야 함을 잊을 때 은총이 아닌 저주로 변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12장 전체를 은총이 교회의 선익을 위해 쓰여야 함을 강조합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그러며 제13장에서는 은사 중 가장 큰 은사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교회에 순종하는 겸손과 모든 이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 이것이 실제로 우리가 청해야 할 전부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도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성 프란치스코는 교회를 위해 이 은총을 사용하였습니다. 루터는 이 은총을 교회를 벗어나는 것을 위해 씁니다. 그래서 어쩌면 역사적으로 너무나 많은 사람이 성체성사와 고해성사를 하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은총을 구합시다. 그러나 은총이 나에게 시험이 되지 않으려면 교회를 사랑합시다. 교회에 유익하기 위한 목적으로 구합시다. 그러면 분명히 주님은 그 은총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동전을 던졌을 때 앞면과 뒷면이 나올 확률은?

 

동전 던지기를 했을 때, 숫자면과 그림면이 나올 확률은 각각 어떻게 될까요? 50:50으로 똑같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림이 있는 면의 확률이 더 높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림이 있는 면이 숫자가 있는 면보다 더 볼록하게 도드라진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니 맞는 것 같습니다. 숫자와 그림은 분명히 다르므로 같은 확률이 나올 수 없는 것이 정답입니다. 그런데 이 다름을 보지 않고 막연하게 같으리라 판단합니다. 
 
사람에 대해서도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는 모두 다릅니다. 심지어 쌍둥이도 다릅니다. 그런데 이 다름을 잘 인정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어? 남들도 다 하는 것을 왜 못하니? 너는 사람도 아냐!! 네가 잘못해서 그런 거야.” 등의 폭력의 말과 함께 그 다름을 틀렸다고 합니다. 
 
자기 시선이 잘못되었음을 왜 모를까요? 주님께서는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십니다. 그래서 그렇게 죄를 많이 지었음에도 그 자체도 인정해주시고 계속해서 기회를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요?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1) 
 
당시에 나병 환자는 주로 랍비를 찾아갔습니다. 나병이라는 병을 단순히 육체의 병으로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죄의 결과로 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랍비만이 나병 환자를 깨끗이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 나병 환자는 랍비가 아닌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왜 그럴까요? 랍비를 통해 어떤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온 나병 환자에게 거리낌 없이 손을 대십니다. 나병 환자를 만지지 말라는 것은 율법에도 나와 있는 사항입니다. 그런데도 손을 대신 것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넘어서는 분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그분의 사랑이 어떤 원칙보다 더 위에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육신의 상처나 허물 때문에 그들을 멸시하거나 혐오하거나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으로 혐오하고 업신여깁니다. 일반적이지 않다는 이유,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혐오하고 업신여깁니다. 그러나 영혼이 죄에 오염된 것을 혐오하고 업신여겨야 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다름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사랑을 세상에 실천하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인생은 늘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들 투성이다. 그 무엇도 완벽한 것은 없다.

- 카타리나 잉엘만순드베리

 

 

내 목소리

 

우연히 유튜브에 있는 제 강의 동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디에서 강의했던 것을 누가 영상으로 찍어서 올렸나 봅니다. 그런데 이 영상 속의 제 목소리가 진짜 제 목소리가 아닌 것처럼 들렸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기계를 이용하지 않고 직접 제가 듣는 내 목소리와 녹음되어 들려진 내 목소리 중에서 진짜 제 목소리는 무엇일까요? 전문가들은 녹음되어 들려진 자기 목소리가 더 진짜일 확률이 높다고 말합니다. 
 
목소리는 성대의 떨림입니다. 자기가 말하는 목소리는 성대의 떨림이 뼈로부터 전달되어서 들리고, 입 밖으로 뱉어져 내 귀에 닿은 목소리로도 들리니 두 개의 통로를 들리는 소리가 합쳐져 불순물이 낀 소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목소리인데 진짜 자기 목소리를 모를 수 있습니다. 자신도 스스로 잘 모르면서 남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요? 
 
겸손해야 합니다. 그 어떤 것도 정확한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진리는 오직 주님에게만 해당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마르 1,42)

 

사랑이란 이름의 뜨거운 치유이다. 우리가 사는 곳은 가엾고 괴롭고 안타까운 이들이 참으로 많다. 예수님의 사랑법은 언제나 아픈 이들을 치유하시는 깨끗한 사랑이다. 너무 아파서 돌보지 않는 이들을 주님께서 돌보신다. 

죽은 사람으로 취급받던 이들을 깨끗하게 치유하여 주신다. 삶을 되찾아 주시는 치유의 주님이시다. 아픈 맛이 살맛으로 바뀐다. 삶을 치유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셨다. 치유의 길을 가르쳐 주신다. 

아픈 시간들을 주님께 의탁한다. 치유하여 주시는 주님을 향한다. 건강한 삶을 만나게 된다. 참된 치유는 건강한 소통이다. 말씀을 듣고 말씀을 건네는 우리들 일상이 곧 치유의 현장이다. 사랑은 말씀으로 시작되고 치유는 말씀으로 사랑을 다시 만나는 것이다. 

먼저 깨끗하게 되어야 할 것은 우리의 마비된 소통이다. 소통의 첫걸음은 주님과의 소통이다. 병든 관계를 주님과의 관계로 건강한 관계로 되돌려 놓으시는 주님은 건강한 말씀이며 건강한 소통이며 건강한 사랑이시다. 

"저를 깨끗하고 건강하게 바꾸어 주십시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