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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1월 17일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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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1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

 

 

2022년 1월 17일 (월)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Memorial of Saint Anthony, abbot)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안토니오 성인은 3세기 중엽 이집트의 중부 지방 코마나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느 날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태 19,21)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감화되어, 자신의 많은 상속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뒤 사막에서 은수 생활을 하였고, 많은 사람이 안토니오를 따랐습니다. 

그는 세상의 그릇된 가치를 거슬러 극기와 희생의 삶을 이어 갔습니다. 안토니오 성인은 ‘사막의 성인’, ‘수도 생활의 시조’로 불릴 만큼 서방 교회의 수도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안토니오 성인은 4세기 중엽 사막에서 선종했습니다.

 

 

✠ 오늘 제1독서

 

사무엘은 주님의 말씀을 배척한 사울의 행동 때문에 주님께서 그를 왕위에서 끌어내리시리라고 예언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고 하시며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월 17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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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1사무 15장 16-23절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습니다.
주님께서도
임금님을 왕위에서
배척하셨습니다.

 

그 무렵 

16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하였다. “그만두십시오. 간밤에 주님께서 나에게 하신 말씀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가 사무엘에게 응답하였다. “어서 말씀하십시오.” 

17 
사무엘이 말하였다. “임금님은 자신을 하찮은 사람으로 여기실지 몰라도,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아니십니까? 주님께서 임금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이스라엘 위에 임금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18 
주님께서는 임금님을 내보내시면서 이런 분부를 하셨습니다. ‘가서 저 아말렉 죄인들을 완전히 없애 버려라. 그들을 전멸시킬 때까지 그들과 싸워라.’ 

19 
그런데 어찌하여 임금님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전리품에 덤벼들어, 주님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셨습니까?” 

20 
사울이 사무엘에게 대답하였다. “저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가라고 하신 그 길을 따라 걸으며, 아말렉 임금 아각은 사로잡고 그 밖의 아말렉 사람들은 완전히 없애 버렸습니다. 

21 
다만 군사들이 완전히 없애 버려야 했던 전리품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양과 소만 끌고 왔습니다. 그것은 길갈에서 주 어르신의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려는 것이었습니다.” 

22 
그러자 사무엘이 말하였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 

23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임금님이 주님의 말씀을 배척하셨기에 주님께서도 임금님을 왕위에서 배척하셨습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제사 때문에 너를 벌하지는 않으리라. 너의 번제야 언제나 내 앞에 있다. 나는 네 집의 수소도, 네 우리의 숫염소도 받지 않는다.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어찌하여 내 계명을 늘어놓으며, 내 계약을 너의 입에 담느냐? 너는 훈계를 싫어하고, 내 말을 뒷전으로 팽개치지 않느냐?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네가 이런 짓들 저질러도 잠자코 있었더니, 내가 너와 똑같은 줄 아는구나. 나는 너를 벌하리라. 너의 행실 네 눈앞에 펼쳐 놓으리라. 찬양 제물을 바치는 이는 나를 공경하리라.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르코 2장 18-22절

 

신랑이
혼인 잔치 손님들과
함께 있다.

 

그때에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단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20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21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22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복된 안토니오가 어둠의 세력을 누르고 승리하게 하셨으니 저희도 구원의 성사로 힘을 얻어 악의 유혹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이재형 마리오 신부 집전

 

 

2022년 1월 17일 (월)
이재형 마리오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1월 17일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공동체를 이루며 자신들의 스승처럼 단식하였고(마태 9,14 참조), 바리사이들은 속죄일 외에,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였습니다(루카 18,12 참조). 물론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들도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였습니다(『디다케』, 8,1 참조).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의 신랑과 손님을 비유로 들어, 제자들이 당신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필요가 없다고 변호하십니다. 혼인 잔치의 신랑은 예수님이시며 손님은 제자들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혼인 잔치는 ‘구원의 시간’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혼인 잔치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오신 ‘지금’이 바로 구원의 시간임을 드러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사 65,17)을 창조하시고, “새 마음”과 “새 영”(에제 36,26)을 주시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시간, 바로 하느님 나라의 시간입니다. 이렇게 혼인 잔치는 구원의 시간, 기쁨의 시간이기에 슬퍼할 수 없고(마태 9,15 참조), 단식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제자들도 “신랑을 빼앗길 날”에는 단식할 것입니다. 

헌 옷에 새 천 조각을 대고 깁지 않으며, 헌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 주어진 새로운 것, 곧 그분의 말씀과 행적 안에서 점점 가까워지는 하느님 나라를 강조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낡은 사고와 습관 안에 담을 수 없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는 회개와 이를 통하여 하느님과 이루는 화해 안에 그분의 나라를 담을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기신 하느님에게서 옵니다”(2코린 5,17-18).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나를 하찮게 여기지 말고 재물을 하찮게 여겨야.

 

오늘도 사울에 대한 인물 탐구를 계속하겠습니다. 

지난 시간 사울은 허우대가 그럴 듯한 근사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 그가 이제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자기에 대한 자신감도 가지고 뽐낼 법도 한데 오늘 얘기를 보면 자신을 하찮은 사람으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임금님은 자신을 하찮은 사람으로 여기실지 몰라도,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아니십니까? 주님께서 임금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이스라엘 위에 임금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만들어 낸 말 중에 근자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근거없는 자신감의 준말이지요. 이런 어법으로 얘기한다면 사울은 근열감의 소유자일까요? 

그런데 자세히 보면 사울이 자신을 하찮은 존재로 봤다기보다는 사무엘이 그렇게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무엘이 보기에 사울이 자신을 하찮게 여긴다는 것이고, 자신을 소중하고 귀히 여겨야 마땅한데 하찮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때 즉시 떠오르는 코린토 전서 6장 19절의 바오로 사도의 말이 있지요.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그 성령을 여러분이 하느님에게서 받았고 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모릅니까?" 

이 말은 자신의 몸을 함부로 굴려 겨우 욕망을 채우는 데 쓰지 말고, 성령의 궁전이 되도록 써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그리고 또 떠오르는 존재가 세례자 요한입니다. 주님께 대해서는 자신이 주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하지만 주님 외에는 그 누구와 비교해서 자신을 하찮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주님의 앞길을 닦는 자로서의 사명을 망각하여 함부로 살지 않고 자신을 근신하며 늘 사명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자신이 임금일 뿐 아니라 하느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임을 망각하였고, 세상 재물과 전리품에 욕심을 부려 모든 것을 다 없애버리라는 주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주님의 뜻은 재물을 하찮게 여기라는 거였는데 사울은 자신을 하찮게 여긴 것입니다. 핑계는 좋습니다. 주님께 예물을 드리기 위해서라고. 

그런데 그것은 강도질한 것으로 제물을 바치겠다는 것과 같은 논리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기름 부음 받은 자다운 것입니다. 기름 부움 받은 자는 성별된 자라는 뜻이며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세상 욕심이나 부려서는 안 되는 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느님을 위해서만 쓰이도록 성별된 자입니다. 성작을 가지고 술을 마시면 안 되고, 성체를 개나 쥐에게 주면 안 되듯이 우리를 함부로 굴리면 안 되겠습니다. 

어제 얘기를 연장해서 성찰한다면 우리는 소박데기나 버림받은 여자가 아니라 하느님 마음에 드는 여자요 그리스도의 신부이고, 프란치스코가 클라라의 자매들에게 얘기하듯 성부의 딸이요 성령의 정배들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헌 부대 새 부대 되는 법 : 새 포도주를 견뎌라!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단식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단식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단식하게 될 터인데 당신을 빼앗길 때라고 하시며, 지금은 신랑과 함께 잔치하는 중이라 단식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며 헌 옷에 새 천 조각을 대고 깁지 못하고 헌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당신이 새 천 조각이고 새 포도주라고 하시는 것이고, 그래서 당신의 제자들은 새 옷이며 새 부대라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당신을 담는 그릇이 되어야 우리가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새롭게 태어나는 방식은 누군가를 자신 안에 담음으로써입니다. 누군가를 자신 안에 담는다는 말은 감사하고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부모의 사랑과 가르침을 받고 감사하며 사랑합니다. 그래서 부모가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합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부모를 품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모로부터 상처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존감이 낮아서 자신이 낡은 부대로 있어야만 한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그렇게 낡은 부대로 머무르는 합리화가 바로 자신에게 상처 준 부모입니다. 그 부모를 품고 있으며 자신이 낡은 부대로 변화되지 않고 살아도 된다고 자기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자기가 품고 있는 것은 상처받은 자기 자신입니다. 이 자아가 자신에게 상처 준 부모를 품게 만들며 지금 이렇게 사는 것은 부모 탓이라고 여기게 합니다. 우리 뇌는 부정이 없습니다. 무조건 긍정입니다. 부모에 대해 안 좋은 생각 해도 부모를 품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알았던 걸 그때 알았더라면』의 저자 이시이 마레히사 씨에게 고야라는 한 남성이 찾아왔습니다. 연년생 형 때문입니다. 처음에 둘은 사이가 매우 좋았습니다. 공공의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폭군으로 사소한 일에도 물건을 집어 던지는 등 폭력을 일삼았습니다. 술을 마시고 오면 폭력이 더 심해졌고 밥상을 엎거나 밥공기를 집어 던지는 일이 일상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정말 날마다 지옥 같았어요. 그래도 형과 저는 항상 서로 의지하면서 살았어요. 언젠가 아버지에게 복수하자면서요. 그런데 대학생이 된 형도 주정뱅이가 된 거예요. 형의 술 취한 모습이 아버지와 너무 닮아서 형을 보는 것이 힘들어졌고 그렇게 형과의 관계도 멀어지게 되었어요. 형은 술만 마시면 친구들에게 아버지 욕을 하였는데, 아버지와 똑같이 물건을 집어 던지고 주먹을 휘둘러 싸움이 일어납니다. 얼마 전에는 술에 취한 형이 앞니가 부러진 채로 피를 흘리면서 우리 집에 찾아오기도 했어요. 저는 형에게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지는 말라고 했어요. 그러면 또 싸움이 일어나요. 어느 날 형이 토해내듯이 한 말이 있어요.”

“그 말이 뭔가요?”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라서 어쩔 수 없다’라는 거였어요.”

“그럼 동생도 술을 마십니까?”

“아뇨, 저는 전혀 술을 마시지 않아요. 결혼해서 원만하게 잘살고 있지요. 그러나 형은 술 때문에 여성과 헤어졌어요.”

형도 분명 아버지처럼 되기를 원치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처럼 되었습니다. 동생은 아버지의 모습과 반대로 나갔습니다. 그러니 그런 가정에서 자라서 그렇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이 그렇게 사는 것을 선택했을 뿐이고 자신에게 상처 준 아버지는 그렇게 사는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자신이 버리지 못하고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헌 부대로 있고 싶으니 헌 술을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헌 옷이 되고 싶으니 헌 사람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동생은 어떻게 아버지와 반대 길을 갈 수 있었을까요? 여기에 나오지는 않지만 자신 안에 새 포도주를 담은 것이 분명합니다. 사람은 욕구가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욕구는 그 욕구를 가진 사람과 함께 자신 안으로 들어옵니다. 욕구는 저절로 생기지 않습니다. 본래 우리에게는 생존 욕구만 넣어져 있었습니다. 나머지 사랑과 관련된 모든 욕구는 내가 누군가를 내 안에 받아들이면서,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감사하고 사랑하면서 함께 받아들인 것입니다.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제일 좋지만, 우선은 그분은 감당할 수 없기에 포도주를 조금씩 내가 견딜 수 있는 더 새로운 포도주로 넣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부대도 더 튼튼한 모습으로 바뀝니다. 이것이 내가 변화하는 방식입니다. 

마레히사 씨에게 남편의 속마음을 듣고 싶다며 남편과 함께 상담실을 찾은 아내가 있습니다. 남편은 이구치 순스케로 29세의 공인회계사였습니다. 이구치는 겉으로 보기에는 침착하고 냉정해 보이는데, 조금만 기분이 언짢아지면 난폭하게 돌변하고 심지어 손찌검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아내는 이혼하고 싶은데 이혼 말을 꺼내면 손찌검당할까 봐 겁내고 있었습니다. 

이구치는 앉자마자 한마디도 안 하고 마레히사 씨를 노려보았습니다. 마레히사 씨는 “혹시 아내가 왜 당신을 여기에 데려왔는지 아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계속 노려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아내는 남편분과 이혼하고 싶다고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구치는 의외로 냉정하게 “그렇군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아내가 왜 이혼을 원하는지 그 이유를 아십니까?”

“알아요, 안다고요! 내 태도. 공격적이잖아요.”

“확실히 그렇기는 하지만.”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항상 무시당하면서 자라왔어요. 부모에게서 사랑을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요. 항상 방임 상태에서 자랐어요. 부모가 나에게 한 말이라고는 ‘멍청이’, ‘저리 가!’ 이런 말뿐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사람을 보면 경계하고 공격하게 된 거고요.”

“그럼 개선하고 싶지는 않으신가요?”

“개선하고 싶지만 그게 잘 안 돼요. 나는 애초에 실패작이니까요.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이구치는 아내의 이혼 생각을 이미 예상하였습니다. 사실 그는 아내라는 새 포도주를 담을 능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약간 덜 새로운 포도주를 먼저 담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근육이 성장합니다. 이런 때 상담가에게 인정을 받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잠깐 만나는 덜 새로운 포도주. 마레히사는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이구치 씨, 사실은 당신도 바뀌길 원합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까지 온 거고요. 나는 나 자신을 잘 알아서 하는 말인데,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공인회계사는 되지 못할 겁니다. 공인회계사가 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으니까요. 공인회계사를 꿈꾸는 사람이 많다는 뜻은 그만큼 그 직업을 갖게 힘들다는 의미겠지요. 그래도 당신은 공인회계사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자신의 사무실을 열고 일도 잘하고 있으니까 당신에게는 훌륭한 능력이 있는 겁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지요?”

“당신은 실패작이 아닙니다.”

마레히사는 이구치에게 존재의 신비함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태어나기도 힘들고 그래도 그 무한 경쟁을 뚫고 태어나 이 나이까지 잘 자란 신비. 그래서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두 사람이 돌아간 뒤 아내에게 메일이 왔습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어요. 저는 남편이 선생님에게 폭력을 쓰지는 않을까 불안했어요. 그런데 남편은 선생님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줬어요. 지금까지 남편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만 있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그것만으로도 기적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리고 가장 놀라운 것은 남편이 상담 후 ‘오늘 상담 나쁘지 않았어’라고 말한 거예요. 무엇이 바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바뀔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으로는 바뀌지 않습니다. 계속 이 상담사의 말을 받아들이고 그를 견뎌내야 합니다. 그를 견뎌내면 이제 다른 사람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아내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되고 아내를 견뎌내면 거의 부모의 상처로부터 치유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견뎌내는 것이 힘이 들면 다시 부모를 되돌려 넣어놓고 자신이 변하지 못하는 합리화를 할 것입니다. 변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있느냐, 그 의지에 따라 변할 수 있습니다. 그 의지만 있다면 사랑이 점점 많이 필요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려 노력하면 됩니다. 사랑하면 그 사람이 내 안에 담기고 그 사람을 참아내면 내가 변화됩니다. 변화는 이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완전한 새 부대가 되려면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분을 사랑하면 과거의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새 부대가 되었는데 헌 포도주는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상처는 사라집니다. 상처에 집중하지 말고 변화에 집중해야 합니다. 변하고 성장하면 상처는 저절로 사라집니다. 그렇게 변하게 만드는 방법은 사랑밖에 없고 그 사랑의 완성은 그리스도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돈은 귀하기에 이렇게 잘 펼쳐서 줘야 한다.

 

초등학생 때, 어머니 심부름으로 석유 가게에 갔던 일이 기억납니다. 석유를 담는 통과 돈을 주시면서 석유를 사오라고 하셨습니다. 석유 가게에 가서 통에 석유를 담고서 계산을 위해 돈을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아저씨께서 화를 내시며 혼내시는 것입니다. 지폐를 꼬깃꼬깃 구겨진 채 주었다는 이유였습니다. 빳빳하게 펼쳐진 돈이나 꼬깃꼬깃 구겨진 돈이나 그 가치는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인아저씨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받는 사람에게 어떤 돈이 더 기분 좋겠니? 돈은 귀하기에 이렇게 잘 펼쳐서 줘야 한다.” 
 
그 뒤에 돈을 낼 때는 항상 잘 펼쳐서 드립니다. 그리고 마트에서 계산대에 물건을 올릴 때도 최대한 계산원이 쉽게 계산하도록 배려합니다. 
 
남을 배려하면 상대방도 저를 배려한다는 것을 많이 깨닫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만 배려받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사랑받고자 한다면 먼저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이 사랑은 신앙적인 사랑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사랑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실 많은 이가 자기 뜻을 따르지 않으면 죄인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자녀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부모를 본 적이 있습니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놀기만 합니다. 매일 게임만 하고 있으니 미치겠어요.” 
 
그러나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공부만 한다면?’ 더 큰 문제가 아닐까요? 사실 공부만 하는 사람, 놀기만 하는 사람, 먹기만 하는 사람, 잠만 자는 사람…. 이런 식으로 한 가지만 하는 사람은 옳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균형을 이루면서 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만 잘하면 정상일까요? 이 역시 아닙니다. 신앙생활도 인간 생활과 균형과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참 기쁨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신앙생활을 아주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단식도 하지 않고, 먹고 마시는 것을 더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이는 그들의 착각입니다. 신앙생활과 일상의 생활은 절대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특히 사랑은 어떤 상황에서도 무조건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사랑 안에서 참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살면서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는 실수할까 봐 계속 걱정하는 것이다.

- 엘버트 허버트

 

 

백해무익한 걱정

 

걱정을 많이 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납니다. 어쩌면 모두가 걱정 기계가 되는 것처럼 계속해서 걱정을 찍어내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만큼 걱정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비행기가 추락하면 어떻게 하지?’라고 걱정을 한다고 해서 추락 가능성이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자녀가 안전히 귀가하길 걱정한다고 해서 안전 귀가 가능성이 커지는 것도 아닙니다. 암 검사 결과를 걱정하며 기다려도 암이 아닐 가능성이 올라가지 않습니다. 
 
걱정은 그렇게 유용하지 않으며, 지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등 되레 해를 끼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런데도 걱정에 자유롭지 못한 우리입니다. 걱정으로 부정적 감정에 사로잡히는 것이 분명한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걱정보다 ‘지금’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다고 불만족스러운 상황을 변화시키거나 떠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바꿀 수 없거나 피할 수 없다면, 걱정보다는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걱정은 백해무익합니다. 주님 안에서 희망을 발견하면서 걱정을 줄여 나가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마르 2,22)

 

새로워지는 삶의 연속이다. 모든 생활의 중심에는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께서 계신다. 새 포도주가 맺어주는 새로워지는 사랑의 새 삶이다. 새 포도주로 얻게되는 새로운 삶이다. 

진심으로 사랑하면 진정 새로워지는 우리들 삶이다. 우리 생활에 영향을 주는 새 포도주이다. 그래서 신앙은 새 포도주가 주는 새 체험의 연속이다. 새 포도주가 우리를 안아준다.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준다. 

새 포도주가 주는 소중한 시간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새 포도주가 우리들에게 주는 선물이다. 새 포도주의 울림을 듣는 새 날이다. 새 포도주와의 친밀감이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새 포도주가 진정한 가치를 우리의 생활에서 만나게 하여 준다. 

새 포도주가 향하는 관계가 우리가 진정 사랑해야 할 사랑의 관계이다. 새 포도주 자체가 곧 새 부대이다. 신앙과 생활 사랑과 새로움은 언제나 하나의 일치로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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