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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1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주간 화요일 -
2022년 1월 18일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주님께서는 사무엘을 이사이에게 보내시어 그의 아들들 가운데에서 임금이 될 다윗에게 기름을 붓게 하십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은 제자들을 비난하는 바리사이들에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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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1사무 16장 1-13절
사무엘이
형들 한가운데에서
다윗에게 기름을 붓자
주님의 영이
그에게 들이닥쳤다.
그 무렵
1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언제까지 이렇게 슬퍼하고만 있을 셈이냐? 나는 이미 사울을 이스라엘의 임금 자리에서 밀어냈다. 그러니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떠나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사이에게 보낸다. 내가 친히 그의 아들 가운데에서 임금이 될 사람을 하나 보아 두었다.”
2
사무엘이 여쭈었다. “제가 어떻게 갑니까? 사울이 그 소식을 들으면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암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가서, ‘주님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고 하여라.
3
그러면서 이사이를 제사에 초청하여라. 그다음에 네가 할 일을 내가 알려 주겠다. 너는 내가 일러 주는 이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어라.”
4
사무엘은 주님께서 이르시는 대로 하였다. 그가 베들레헴에 다다르자 그 성읍의 원로들이 떨면서 그를 맞았다. 그들은 “좋은 일로 오시는 겁니까?” 하고 물었다.
5
사무엘이 대답하였다. “물론 좋은 일이지요. 나는 주님께 제사를 드리러 온 것이오. 그러니 몸을 거룩하게 하고 제사를 드리러 함께 갑시다.” 사무엘은 이사이와 그의 아들들을 거룩하게 한 다음 그들을 제사에 초청하였다.
6
그들이 왔을 때 사무엘은 엘리압을 보고,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가 바로 주님 앞에 서 있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7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8
다음으로 이사이는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다. 그러나 사무엘은 “이 아이도 주님께서 뽑으신 이가 아니오.” 하였다.
9
이사이가 다시 삼마를 지나가게 하였지만, 사무엘은 “이 아이도 주님께서 뽑으신 이가 아니오.” 하였다.
10
이렇게 이사이가 아들 일곱을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으나, 사무엘은 이사이에게 “이들 가운데에는 주님께서 뽑으신 이가 없소.” 하였다.
11
사무엘이 이사이에게 “아들들이 다 모인 겁니까?” 하고 묻자, 이사이는 “막내가 아직 남아 있지만, 지금 양을 치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사무엘이 이사이에게 말하였다. “사람을 보내 데려오시오. 그가 여기 올 때까지 우리는 식탁에 앉을 수가 없소.”
12
그래서 이사이는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왔다. 그는 볼이 불그레하고 눈매가 아름다운 잘생긴 아이였다. 주님께서 “바로 이 아이다. 일어나 이 아이에게 기름을 부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13
사무엘은 기름이 담긴 뿔을 들고 형들 한가운데에서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러자 주님의 영이 다윗에게 들이닥쳐 그날부터 줄곧 그에게 머물렀다. 사무엘은 그곳을 떠나 라마로 갔다.
화답송
나는
나의 종 다윗을 찾아냈노라.
예전에 당신이 나타나 말씀하시고, 당신께 충실한 이들에게 선언하셨나이다. “내가 영웅에게 왕관을 씌웠노라. 백성 가운데 뽑힌 이를 들어 높였노라.” 나는 나의 종 다윗을 찾아냈노라.
나는 나의 종 다윗을 찾아내어, 거룩한 기름을 그에게 부었노라. 내 손이 그를 붙잡아 주고, 내 팔도 그를 굳세게 하리라. 나는 나의 종 다윗을 찾아냈노라.
그는 나를 부르리라. “당신은 저의 아버지, 저의 하느님, 제 구원의 바위.” 나도 그를 맏아들로, 세상의 임금 가운데 으뜸으로 세우리라. 나는 나의 종 다윗을 찾아냈노라.
복음
마르 2장 23-28절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23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
24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26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27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28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가 천상 양식을 함께 나누고 비오니 사랑의 성령을 부어 주시어 그 사랑으로 한마음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현종민 세례자요한 신부 집전
2022년 1월 18일 (화)
현종민 세례자요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1월 18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때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를 지나가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배가 고팠는지 밀 이삭을 뜯었습니다. 평소라면 이웃의 밭에서 낫이 아닌 손으로 이삭을 자르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신명 23,26 참조). 문제는 이날이 안식일이었다는 점입니다. 안식일에는 추수 행위가 금지되는데, 밀을 뜯는 것이 추수 행위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비판하는 바리사이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본정신을 밝히십니다. 먼저,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사제만 먹을 수 있는 제사 빵을 먹었던 일화(1사무 21,1-7 참조)를 상기시키십니다. 안식일과 직접 관련되지는 않는 이 일화로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준수도 중요하지만, 인간의 절박한 상황을 해결하는 것이 더 먼저라는 해석을 보여 주십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율법보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람의 아들”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포하십니다.
우리 교회에도 많은 법과 규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이 법과 규정을 따르는 외적인 문제로 이웃을 단죄하기도 합니다. 법과 규정의 준수와 함께, 그 안에 담긴 본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의 법과 규정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과 연결되는 날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주일”(묵시 1,10)을 하느님 안에 머무르는 거룩한 날로 지냅니다.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때, 비로소 그날이 거룩한 날이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랑에서만은 내치지 않으시는
사울은 이제 하느님의 눈 밖에 난 것인가?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에서 제외된 것인가?
하느님의 눈 밖에 난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나는 이미 사울을 이스라엘의 임금 자리에서 밀어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그런데 하느님이 너무 한 것이 아닌가요? 어떻게 보면 한 번의 잘못에 당신이 기름부으신 임금을 내치시니 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내다보시는 분인데 이렇게 될 줄 모르고 선택하신 겁니까? 그래서 사울이 잘못한 것 때문에 선택을 후회하시고 결정을 바꾸신 겁니까? 그렇다면 꼭 우리 인간과 같지 않습니까? 우리와는 다르셔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다르셔야 합니다. 그러나 결정을 바꾸시는 것도 사랑입니다. 결정을 바꾸셔도 사랑에서 사울을 배제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임금의 자리에서 그를 내치시는 것이지 사랑에서 그를 배제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과 함께 개인과 인류의 역사를 만들어 가십니다.
예를 들어 하느님께서 우리를 수도자로 부르셨지만 그 부르심과 은총에 성실히 응답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부르심에 성실히 응답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수도원을 나갔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사랑을 거두지는 않으시고 그래서 수도원을 나간 거기서부터 그와 함께 다시 구원의 역사를 만들어 가십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느님은 우리 인간의 선을 가지고도 구원을 만들어 가시고, 악을 가지고도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사랑의 하느님, 구원의 하느님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의 선택만큼 당신의 결정을 바꾸시는 사랑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놀라운 하느님의 사랑이고 포기하지 않으시는 고마운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인간의 자유와 선택에 의해 당신의 결정이 바뀔 것을 내다보시면서도 하느님은 결정을 하십니다.
만일 내다보시는 것 때문에 미리 결정을 하지 않으신다면 하느님께서는 아무런 결정을 하실 수 없으시겠지요.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자유에 의한 어마어마한 악까지 각오하시며 결정하시고 인간과 함께 개인과 인류의 거대한 역사를 구원 역사로 만들어 가시는데 그것을 우리 인간이 다 아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래서 신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너무 거대하기에 다 알 수는 없지만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실 정도로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고, 그 사랑은 인간의 자유로 인해 당신의 결정이 수 없이 바뀔지라도 포기치 않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사랑이라는 것만을 믿으면 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안식일을 안 지키면 왜 대죄인가?
오늘 복음은 안식일 논쟁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다. 안식일에 일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행위를 정당화시키십니다. 배고픈데 일을 해서 먹는 것이 무슨 잘못이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안식일을 휴식과 행복의 시간이 아닌 자기 자신을 그 법에 얽어매는 바리사이들을 나무라신 것입니다.
안식일을 진정으로 지키는 것은 ‘휴식과 행복’에 있습니다. 따라서 안식일엔 무조건 행복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닙니다. 배고픈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최소한의 양식을 위해 안식일에 일했다면 오히려 안식일을 잘 지킨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을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행복하지 않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으로 행복하려 했습니다. 안식일은 하느님과 함께 머물며 쉬는 휴식과 행복 자체여야 합니다. 성당 미사 나와서 인상을 찌푸리면 안식일을 거룩히 지낸 것이 아닙니다.
십계명에 ‘안식일을 거룩히 지내라’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십계명을 어기면 대죄입니다. 고해성사를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일을 하는 것은 좋은 것인 줄 알면서 휴식하는 것의 중요성은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살면 삶의 방향을 잃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도 일하시고 일곱째 날 쉬셨습니다.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은 휴식에 있습니다. 이것을 기억하게 만드는 게 안식일입니다.
디오게네스는 거지였고 알렉산더는 대왕이었습니다. 술통에서 잠자는 디오게네스에게 알렉산더가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디오게네스는 늘어지게 자다가 알렉산더에게 “햇빛 가리지 말고 좀 비켜주시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알렉산더가 왜 놀기만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디오게네스는 알렉산더에게 왜 전쟁만 하느냐고 묻습니다. 결국, 전쟁이 다 끝나면 쉴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우리 목적은 쉼입니다. 이것을 알게 만드는 것이 안식일입니다. 그러니 안식일을 잘 지내지 않으면 삶의 방향을 잃습니다. 안식일이 행복하지 않아도 마찬가지입니다.
1998년에 NASA에서 엄청난 돈을 들여 화성 기후 탐사 궤도 우주선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실패로 끝났습니다. 실패 원인은 역추진 엔진의 결함 때문이었습니다. NASA가 다 만들지는 않기 때문에 아래도급 업체와 측정법이 다른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NASA는 이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뮬레이션을 통해 다시 측정치를 자신들 기준으로 되돌려 놓아야 했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만성적 과로에 시달렸기 때문에 그 과정을 지나친 것입니다. 일정을 미리 짜놨기 때문에 쉴 틈이 없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주님과 머물며 무엇 때문에 사는지 되돌아볼 시간을 갖지 못하면 마지막 때 이렇게 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의 행복은 일주일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영원한 안식의 상징이 됩니다.
『내 안의 어린아이가 울고 있다』의 저자 ‘니콜 르페라’는 4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SNS를 통해 도움을 받는 임상심리학자입니다. 그녀는 어릴 적 상처로 깊은 마음의 병을 지니고 있었고 그로 인해서 본인이 심리학 박사이고 개인 진료소도 운영하고 있고 사랑하는 반려자와 살고 있지만, 여전히 공허감과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게 다야?”
부족할 것이 없었지만 여전히 핵심적인 무언가가 빠져있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녀가 각성하게 된 계기는 도시 생활에서 벗어나 휴가차 떠난 여행이었습니다. 연인과 함께 작은 오두막을 얻어 오트밀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휴식하러 와서도 여전히 책에 집중하였습니다. 정서적 장애가 있는 엄마에게 받는 상처에 관한 책이었고, 어쩌면 그 책을 읽는 동안 자신 공허함의 원인이 어렸을 때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음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너무 지쳐 보여. 그만 읽고 좀 쉬어.”
하지만 일에 너무 집착하고 있던 그녀는 힘이 들면서도 쉴 수 없었습니다. 무언가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너무나 쉴 수 있는 공간이었기에 그런 자신의 모습이 이상하게 보인 것입니다. 그녀는 일에 지쳐 상담하는 중에 머리가 하얗게 되어 말이 떠오르지 않을 때도 있었고 건강이 좋지 않아 항상 어깨가 무거웠으며 자잘한 문제들이 쌓이면 기절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자신의 손아귀에 있던 에너지가 모두 바닥나 있음에도 충전할 줄 모르고 책을 읽으며 오트밀을 먹던 바로 그 순간 오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내담자를 돕기는커녕 자신도 돌보지 못하는 자기 한계에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어떤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하루하루 지치고 바쁘게만 살아온 자신이 한심했습니다.
그리고 그 책이 어렸을 때의 어머니로부터 받은 상처를 건들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감정이 북받쳤던 것입니다. 엄마와 다른 어른이 되겠다고 다짐하고 다짐했지만, 지금의 자신은 엄마의 삶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현실을 숲속 오두막에서 오트밀을 먹으며 진심으로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갑자기 이 ‘영혼의 어두운 밤’을 넘어 머리가 맑아지고 빛이 들어오며 깨달음을 얻습니다.
“난 변해야 해!”
이것이 그녀가 깨닫고 변하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먼저 자신의 몸 어디가 안 좋은지 살피고 지금 필요한 것은 영양섭취와 운동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채식주의자로 살며 운동도 제대로 하지 않은 자신과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매일 아침 호흡 명상과 의식 성찰을 하기로 합니다.
물론 처음부터 잘한 것은 아닙니다. 며칠 의식 성찰 명상을 빼먹기도 하고, 하지 않던 운동을 해서 근육통에 시달리고, 그래서 힘들어 울기도 하고, 이젠 그만두겠다고 선언도 했지만,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몇 개월을 그렇게 자신과 싸움을 하고 나서야 새롭게 개선된 의식으로 매일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훨씬 더 강해진 느낌이었습니다.
이렇게 그녀는 육체의 고통이 정신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었고 육체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사고의 패턴과 습관을 의식적으로 알아차리고 변화시켜야 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면 아이와 대면하게 되었고 신체-정신-마음의 관계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인스타그램 등으로 함께 나누고 내면 아이 치유 명상을 하자고 했더니 3천 명이나 신청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런 변화는 어떻게 일어났을까요? 그녀가 진정한 안식일과 만났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휴식과 만나면 지금까지 내가 해오던 것의 의미를 파악하게 됩니다. 결국, 죽으면 그리스도와 만나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인데 우리는 이를 위해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목적이 아닌 방향으로 열심히만 살았다면 진정한 휴식 앞에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나를 올바른 방향으로 잡아주는 것이 안식일입니다.
따라서 안식일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내가 안식을 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만큼 중요한 것이 안식일이기에 안식일을 올바로 지내지 못하면 삶의 길을 잃기에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마치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르고 아무 기차나 잡아타며 길을 잃었다고 말하는 사람과 같아집니다.
하루의 안식은 언제일까요? 맞습니다. 잠들기 직전입니다. 잠들기 직전에 누구나 안식일을 짧게 경험합니다. 우리는 눈을 뜰 때부터 잠자기 직전의 그 만족스러움을 느끼기 위해 살아갑니다. 그 맛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루가 의미 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잠은 안식입니다. 하루 눈을 뜰 때 편안한 잠을 잘 목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일주일의 안식은 주일입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며 일에서 벗어나 쉬어야 합니다. 그러면 니콜 느페라처럼 삶의 방향을 바로잡는 일이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결국 영원한 안식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안식일은 잘 지키며 죽는 바로 그 순간의 행복을 위해 이생을 살고 있음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래야 삶의 방향이 바로 잡힙니다. 안식일은 바로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고 올바른 참 안식의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날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따라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음은 대죄입니다. 방향을 모르고 그냥 달리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은 ‘기도’의 연장입니다. 성호경 한 번 그을 때 짧은 안식을 취하는 것입니다. 그러며 삶의 방향을 바로잡습니다. 안식일을 잘 지키라는 말은 기도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대죄입니다. 자신의 삶을 망가뜨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힘은 사랑이다.
제가 군대 생활을 할 때, ‘우정의 무대’라는 텔레비전 프로가 유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군인들의 장기 자랑이 주 내용이지만, 이 프로그램의 하이라이트이며 가장 유명했던 것은 ‘그리운 어머니’ 코너였습니다. 어머니가 가림막에 실루엣만 보이고, 그 실루엣만 보고서는 자기 어머니가 맞다고 생각하는 사병이 무대로 올라옵니다. 그리고 하나같이 이렇게 말합니다.
“뒤에 계신 분은 제 어머니가 맞습니다!!!”
한 사병의 어머니일 텐데, 아들이라고 자청하는 사병이 자그마치 2~30명입니다. 어머니가 보고 싶다는 이유, 어머니에게 안부 인사를 텔레비전을 통해서 하겠다는 이유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어머니’가 보고 싶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에 어떻게든 가까이 다가서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사랑의 힘으로 이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통해 어떤 것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을 종종 잊어버리고 맙니다.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착각 속에서 힘든 삶을 계속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사랑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고, 철저하게 사랑의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이 사랑을 보려고 하지 않고 또 실천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율법이라고 주장하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에 관하여 바리사이들과 충돌을 일으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밀밭 사이를 질러가게 되었는데, 제자들이 밀이삭을 잘라 손을 비벼 먹은 것입니다. 이는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이라며 예수님께 따져 묻습니다.
안식일에 걷는 행위도 금지되는 등 일상생활에서의 금지사항이 39개나 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가벼운 산책은 할 수 있지만 1km 이상을 걸으면 율법을 어기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서는 안식일에 시계태엽을 감지 않으며, 편지를 뜯지 않으며, 불을 지피지도 않습니다. 예수님 시대는 이보다 훨씬 엄격했었지요.
밀 두 이삭 이상을 따면 그것은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추수 행위라고 생각했습니다. 손으로 이삭을 비비는 것은 곡식을 타작하는 것과 같다고 보았습니다.
율법이 하느님의 법이라면 그것은 사람을 잘 살게 하려는 것이지 사람을 율법으로 얽어매서 괴롭히려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이 신성한 것이라면 그 안에서 사람들이 하느님을 섬기며 거룩하게 되기 위한 것이지 사람이 성전을 위하여 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원칙에서 벗어난 모든 것은 진짜 주님의 뜻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순간에도 지켜야 할 것, 바로 사랑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아무리 수치스러운 일을 했더라도 땅에 떨어진 평판을 고치는 것은 우리의 힘만으로도 가능한 일이다.
- 라 로슈푸코
죄책감과 수치심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은 자신의 특정 행동을 잘못된 것으로 판단하고 자신이 끼친 해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후회합니다. 하지만 똑같은 상황에서 죄책감이 아닌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잘못된 행동을 한 ‘나’라는 사람 전반을 부정적으로 인식합니다. 또한 잘못에 대한 뉘우침보다 부끄러움을 더 크게 느낍니다. 즉, 잘못에 대한 행동적 자기 비난은 죄책감을 가져오지만, 특성적 자기 비난은 수치심을 가져옵니다.
죄책감을 느낄 때 사람들은 후회하며 잘못을 뉘우치고 사과나 보상을 통해 잘못을 바로잡으려 노력합니다. 하지만 수치심을 느낄 때면 좌절감과 자신이 가치 없는 인간이라는 감정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그래서 자신이 상처 준 사람의 아픔에 공감할 겨를이 없고, 문제 해결보다 이대로 사라지거나 이 더러운 기분에서 빨리 벗어나는 것이 주된 목적이 됩니다.
죄책감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수치심은 내 삶의 어떤 변화도 가져올 수가 없습니다. 문제 해결에 집중하고, 주님의 사랑을 내 안에서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를 떠올려 보십시오. 분명히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안식일의 주인이다. (마르 2,28)
눈을 맞으며 맑은 산행을 했다. 사랑에서 멀어질수록 사람들은 안식일 규정을 찾게된다. 사랑은 사람을 살리지만 완고함은 사람을 또 죽인다. 생명의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우리의 아픔과 배고픔을 헤아리시는 하느님이시다.
사람이 보이는 사람의 날이 바로 안식일이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현실임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다. 사랑할 수 없는 현실을 모른 체 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의 복음은 현실이 되어야한다. 도움을 주고 사랑을 주는 이 순간이 살아있는 안식일이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결박한 냉혹한 안식일의 수 많은 규정을 사랑으로 풀어낸다. 사람에게로 가고 있는 안식일의 주인이시다. 사랑이 무너진 자리에서 사랑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예수님이시다.
사랑을 실천하시는 예수님을 통해 생명의 하느님을 다시 만난다. 안식일의 주인은 배고픈 우리 삶의 현장에 함께하신다. 사람이 사람을 율법으로 조정할 순 없다. 사람이 누구인가를 먼저 묻는 시간이다. 안식일이 먼저가 아니라 사람이 먼저다.
사람의 창조는 사랑의 시작이다. 사랑을 가로막는 완고한 모든 마음은 멈추어야 한다. 안식일이 아니라 사람이다. 사람의 행복은 거창하지 않다. 평범한 행복 소박한 행복을 일깨워주시는 안식일의 주인이 계신다.
우리모두가 행복과 사랑의 진짜 주인이다. 진짜 우리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할 사랑의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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