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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1월 29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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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2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3주간 토요일 -

 

 

2022년 1월 29일 연중 제3주간 토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주님께서 나탄을 다윗에게 보내시어,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를 데려다가 자기 아내로 삼은 일을 두고 재앙을 예고하십니다. 그러자 다윗은 자신이 주님께 죄를 지었다고 고백합니다.

 

 

✠ 오늘 복음

 

호수를 건너던 제자들은 거센 돌풍을 만나자 주무시고 계신 스승을 깨운다. 예수님께서는 바람과 호수를 꾸짖어 고요하게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월 29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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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2사무 12장 1-7ㄷ절, 10-17절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

 

그 무렵 


주님께서 나탄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나탄이 다윗에게 나아가 말하였다. “한 성읍에 두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부자이고 다른 사람은 가난했습니다. 


부자에게는 양과 소가 매우 많았으나, 


가난한 이에게는 자기가 산 작은 암양 한 마리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가난한 이는 이 암양을 길렀는데, 암양은 그의 집에서 자식들과 함께 자라면서, 그의 음식을 나누어 먹고 그의 잔을 나누어 마시며 그의 품 안에서 자곤 하였습니다. 그에게는 이 암양이 딸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부자에게 길손이 찾아왔습니다. 부자는 자기를 찾아온 나그네를 대접하려고 자기 양과 소 가운데에서 하나를 잡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의 암양을 잡아 자신을 찾아온 사람을 대접하였습니다.” 


다윗은 그 부자에 대하여 몹시 화를 내며 나탄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그런 짓을 한 그자는 죽어 마땅하다. 


그는 그런 짓을 하고 동정심도 없었으니, 그 암양을 네 곱절로 갚아야 한다.” 


그러자 나탄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0 
‘이제 네 집안에서는 칼부림이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이다. 네가 나를 무시하고,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의 아내를 데려다가 네 아내로 삼았기 때문이다.’ 

11 
주님께서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내가 너를 거슬러 너의 집안에서 재앙이 일어나게 하겠다. 네가 지켜보는 가운데 내가 너의 아내들을 데려다 이웃에게 넘겨주리니, 저 태양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가 너의 아내들과 잠자리를 같이할 것이다. 

12 
너는 그 짓을 은밀하게 하였지만, 나는 이 일을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 앞에서, 그리고 태양이 지켜보는 가운데에서 할 것이다.’” 

13 
그때 다윗이 나탄에게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 하고 고백하였다. 그러자 나탄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임금님의 죄를 용서하셨으니 임금님께서 돌아가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14 
다만 임금님께서 이 일로 주님을 몹시 업신여기셨으니, 임금님에게서 태어난 아들은 반드시 죽고 말 것입니다.” 

15 
그러고 나서 나탄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주님께서 우리야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아 준 아이를 치시니, 아이가 큰 병이 들었다. 

16 
다윗은 그 어린아이를 위하여 하느님께 호소하였다. 다윗은 단식하며 방에 와서도 바닥에 누워 밤을 지냈다. 

17 
그의 궁 원로들이 그의 곁에 서서 그를 바닥에서 일으키려 하였으나, 그는 마다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소서.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당신 앞에서 저를 내치지 마시고, 당신의 거룩한 영을 제게서 거두지 마소서.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소서.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시고, 순종의 영으로 저를 받쳐 주소서. 저는 악인들에게 당신의 길을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당신께 돌아오리이다.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소서.

하느님, 제 구원의 하느님, 죽음의 형벌에서 저를 구하소서. 제 혀가 당신 의로움에 환호하오리다. 주님, 제 입술을 열어 주소서. 제 입이 당신을 찬양하오리다.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소서.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르 4장 35-41절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35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36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37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38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4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41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전능하신 하느님, 성자의 살과 피로 저희를 기르시니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은총으로 저희가 언제나 기뻐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한장호 베네딕도 신부 집전

 

 

2022년 1월 29일 (토)
한장호 베네딕도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1월 29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왜 겁을 내느냐? 아직 믿음이 없느냐?

 

하느님 나라에 관한 네 개의 비유로 채워진 예수님의 하루가 저물어 갑니다(마르 4,1-34 참조). 그날 저녁,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호수 저쪽으로 가실 때 “거센 돌풍이 일어” 배 안에 물이 가득 찹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편안하게 주무시고 계십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제자들의 두려움은 그들이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아직 깨닫지 못하였음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 마치 더러운 영을 꾸짖으시듯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시자, 바람이 멎고 호수는 고요해집니다. 풍랑에 대한 제자들의 두려움은 놀라운 권능을 지니신 예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뀝니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이는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제자들에게 부족하였던 것은 ‘믿음’입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 믿음이 없느냐?” 

마르코 복음에서 믿음은 하느님의 권능을 지니신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깨닫고, 그분을 받아들이는 행위입니다. 우리 믿음의 항해는 언제든지 거센 바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탄 배에는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십니다. 바람과 호수, 모든 것이 그분 손 안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우리의 믿음은 어떠합니까? 이 질문에 올바른 답을 하려면 예수님과 함께 지내며(마르 3,14 참조), 그분을 따라야 합니다. 

“이 곤경 속에서 그들이 주님께 부르짖자, 난관에서 그들을 빼내 주셨다. 광풍을 순풍으로 가라앉히시니, 파도가 잔잔해졌다. 바다가 잠잠해져 그들은 기뻐하고, 그분께서는 그들을 원하는 항구로 인도해 주셨다.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자애를, 사람들을 위한 그 기적들을”(시편 107[106],28-31).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주님께 죄를 지었다고 하는 뜻

 

시편 기도를 하다보면 원수들의 복수를 대신 해달라는 기도를 볼 수 있습니다. 이를 보고 어떻게 신앙인이 복수의 기도를 바치는지, 그래도 되는지 의문을 가진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사실 복수는 내가 해야 직성이 풀리는 법인데 내가 그것을 하지 않고 하느님께 맡김으로써 복수가 기도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오늘 다윗은 주님께 죄를 지었다고 참회를 합니다.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 

그런데 어찌 우리야가 아니라 주님께 죄를 지은 거라고 합니까? 

전에 보고 싶었던 밀양이라는 영화를 우연히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영화를 보고 싶었던 것은 아주 강한 신앙적인 메시지가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이 아들을 잃고 괴로워하다가 신앙을 가지면서 간신히 자기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기로 하고 감옥을 찾아갔는데 그 원수는 이미 하느님 용서를 받았기에 주인공의 용서를 받지 않아도 된다고,  주인공이 용서해주지 않아도 자기는 이미 평안하고 행복하다고 대답을 합니다. 

이에 주인공은 용서할 수 있는 기회를 하느님께 뺏긴 것 때문에 하느님께 분노하는 영화로 기억하는데 제 기억이 정확한 지는 모르겠습니다. 

이런 얘기를 길게 꺼낸 것은 다윗이 하느님께 죄를 지었다고 하고, 하느님의 용서를 청하는 것도 같은 맥락의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가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우리야에 대한 죄책감 없이 하느님께만 죄 지었다고 생각했다면 같은 문제가 있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거라면 하느님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는 것은 인간에게 용서를 청하고 용서를 받는 그 껄끄럽고 쉽지 않은 과정을 회피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는 아주 간편한 수단이 되고, 우리 인간은 밀양의 그 살인자처럼 하느님의 용서를 악용할 것입니다. 

다윗의 경우 그럴 오해의 소지가 충분히 있습니다. 참회한 후 그가 지은 시편을 보면 "주님,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 죄를 지었삽고'라고 하니 말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죄 고백은 인간의 용서를 회피하기 위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그 반대일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거나 하느님을 믿더라도 하느님을 생각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의 용서를 구하지 않고 인간적인 용서를 주고 받는 것에 그칠 수 있는데 다윗에게 죄란 단지 한 인간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자녀를 파괴하는 죄라고 생각하기에 하느님께 죄를 지은 거라고 뉘우치고 고백하는 것일 겁니다. 

가정을 해봅시다. 

형이 동생을 죽였다면 동생에게만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 죄를 지은 것이고, 부모에게 더 큰 죄를 지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도 신앙인이라면 다윗처럼 죄를 지으면서도 하느님을 만나야 하고, 아담과 하와처럼 죄를 짓고 하느님으로부터 도망쳐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죄책감에만 빠져 있는 사람이 제일 불쌍하고 불행합니다. 그것은 자기 안에 갇힌 것이고, 자기 안에서도 죄 안에 갇힌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불쌍하고 불행한 사람은 내가 죄 지은 그에게 얽매여 있는 사람입니다. 얽매여 있다는 것은 그 사람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즐거울 수 없고 기쁠 수도 없습니다. 사랑을 할 수 없고 하느님께도 나아가지 못합니다. 

이런 뜻에서 하느님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는 것은 죄책감에서 벗어남은 말할 것도 없고, 근본적으로 그리고 모든 것과 모두에게 해방되고 자유를 얻는 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길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돌풍에 휩싸여 죽을 지경에 있는 제자들을 구원하시는 내용입니다. 돌풍에 배에 물이 가득 찰 때까지 예수님은 고물을 베고 주무시기만 하십니다. 제자들은 배가 가라앉기 직전에서야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라며 예수님을 깨웁니다. 예수님은 바다를 꾸짖어 잠잠하게 하신 다음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증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이 두려워 일어나는 욕구가 ‘생존 욕구’입니다. 그리고 그 생존 욕구의 대표적인 것이 ‘소유욕, 성욕, 명예욕’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가 싸워야 할 세 가지 원수라 하여 ‘삼구’(三仇)라 부릅니다. 이 생존 욕구가 살아있는 한 하느님의 뜻, 곧 이웃사랑을 실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예로 제가 초등학생 때 성적조작을 해서 선생님에게 크게 혼이 난 적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저와 다른 아이에게 시험지 점수를 매기는 것을 시키셨습니다. 우리는 점수를 매기다가 서로 상대의 것을 2개씩 더 맞게 고쳐주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는 80점대가 되었고 저는 90점 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우리 두 시험지를 대충 점수를 매긴 상태였습니다. 우리 것을 고치는지 안 고치는지 시험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날이 저의 생일이었는데 낚시 채로 종아리가 시커멓게 맞았습니다.

이런 것이 명예욕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내가 명예를 높이려면 누군가는 나 때문에 손해를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선 내 점수가 우선이니 남이 나 때문에 점수가 떨어지는 피해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권력이나 경쟁에서 이기려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이웃에게 피해를 주며 살아갑니다. 그렇게 사회에서 사랑할 수 없는 본성으로 굳어져 가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녀가 생존 욕구에 길들어가는 책임은 어디에 있을까요? ‘원죄’ 때문입니다. 물론 부모의 탓이 있기는 하지만 그 부모도 그렇게 그 부모에게 자랐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죄의 굴레가 되는 것입니다. 

『내 안의 어린아이가 울고 있다』에서 니콜 르페라는 자신이 애인에게 지나치게 집착하게 된 이유가 엄마 때문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엄마도 그 이전에 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르페라의 아버지는 가정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정시에 퇴근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도착하기 한 시간 전부터 식사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자신이 또 생존의 위협이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될까 봐 항상 초조해하였습니다. 다행히 가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남편을 만나 이런 불안이 많이 해소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아빠가 올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빠는 돌아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30분이나 지났는데도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어린 르페라는 식탁 아래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엄마는 르페라의 존재를 까맣고 잊고 두 손을 비틀며 초조하게 창밖만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르페라는 자신의 존재가 잊힌 두려움을 세발자전거를 타는 데 집중하며 잊으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때 받은 상처를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엄마는 무언의 불안감이 점점 더 커지자 자신의 발아래에 있는 작은 생명체(르페라)를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그 순간, 엄마는 정서적으로 내게 반응하지 못했고, 그 자리에 있지 않아서 나의 욕구나 두려움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니, 그렇게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엄마가 불안감과 트라우마 반응에 잠식당해서 당면한 위협에만 집중했을 때 나는 인정받지 못하는 보잘것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와 같은 사소한 사건들을 겪으면서 나는 ‘아무도 내 생각을 조금도 안 해줘’라는 핵심믿음을 구축해갔다.”

르페라의 엄마는 르페라를 상처 주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냥 자신의 생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불안했을 뿐입니다. 다행히 아빠가 오는 것이 보이자 이 모든 상황은 끝이 났지만 르페라가 받은 엄마로부터의 상처는 르페라 역시 생존 문제에 집중하게 만드는 커다란 계기가 되게 했습니다. 그녀는 이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그런 순간들을 겪으면서 또 다른 교훈도 얻었다. 내적 동요는 오직 외적 요소로 가라앉힐 수 있다고 믿기 시작한 것이다. 엄마처럼 나도 안정감을 느끼고 싶어서 아빠를 대신해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애인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가 답장을 받지 못하면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았다. 혹은 누군가가 정서적으로 내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싶으면 (극히 오싹한) 두려움이 온몸을 덮쳤다. 절망에 바지고 비이성적으로 되거나 사랑받지 못할 때는 유년기의 그 집에 있는 것 같았다. 또다시 창가에 붙어선 엄마가 보였다. ‘내 생각을 조금도 안 해주는 사람이지만 내가 살아남으려면 저 사람이 필요해.’”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내 생존 욕구 때문에 자녀에게 상처를 주어 그 생존 욕구를 대물림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누군가에게 집착할 수 있지만 참다운 사랑을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해결해주실 수 있는 분은 우리 죽음까지 책임질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시기 위해 먼저 생존 욕구부터 해결해주고 싶으셨습니다. 마치 생존에 대한 아무 걱정이 없는 부모처럼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라고 하시며 우리 안에 사십니다. 우리는 생존의 위협을 느낄 때마다 죽음보다 더 강하신 그분을 깨워서 도와달라고 하면 그만입니다. 이렇게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하게 할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삼구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왕가리 마타이. 아프리카 여성으로서 최초로 200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인물입니다. 마타이는 1940년 4월 1일 케냐의 작은 마을 은예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소녀들은 남자 형제들이 학교에 간 사이 농사일과 집안일을 해야 했습니다. 남자 형제들이 말했습니다. 

“어머니, 왕가리는 우리처럼 학교에 가지 않나요?”

어머니가 대답했습니다. 

“그래? 그렇게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

왕가리는 어머니의 지원으로 아프리카 여성으로는 드물게 교육의 혜택을 받으며 미국에서 생물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뒤 1971년 나이로비대학교에서 동아프리카 여성 최초의 박사가 됩니다. 

나이로비 대학의 첫 여성 교수가 된 왕가리가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는 모든 나무가 베어져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척박한 땅을 보았고, 식수와 땔감을 얻기 위해 어머니와 여동생들, 그리고 마을 여성들이 매일 수십 킬로미터를 걸어야 하는 현실을 목격합니다. 

그녀는 ‘어머니와 여동생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한 그루의 나무를 심는 일부터 시작하면 어떨까?’라고 결심했습니다. 이렇게 케냐에서 1977년 ‘그린벨트 운동’이 시작되는 계기가 됩니다. 잘 키운 나무 한 그루당 3센트의 사례금을 지급하는 운동입니다. 그리고 공동체를 만들어 여성들을 위해 나무를 잘 가꾸는 법, 작물을 제값에 파는 법, 남편의 알코올 중독을 치료하는 법, 가정 폭력에 대처하는 법 등을 교육합니다. 

1989년 독재정권은 나이로비 시내에 있는 ‘우후루 공원’을 선진국에 매각하여 건물을 짓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왕가리는 공동체와 함께 나무를 등에 지고 행진하는 등, 정부에 저항합니다. 이 사실이 해외 언론에도 보도되자 외국인 투자자들이 건설계획을 포기합니다. 이 때문에 케냐 정부는 왕가리를 구속하고 가택연금을 하고 구타하였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죽을까 봐, 혹은 잡혀갈까 봐 겁나지 않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나쁜 결과를 미리 상상해본 적은 없어요. 제가 던지는 질문의 정당성에 대해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으니까요.” 

케냐 시민들은 우후루 공원 등을 지켜내며 좋은 정부와 환경보호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 2002년 12월 케냐 총선에서 야당 연합의 대대적인 승리가 있었고 왕가리는 98%의 압도적인 지지율로 국회의원에 당선됩니다. 39년 만에 독재정권이 다른 많은 요인도 있겠지만 특별히 나무를 심겠다던 한 여인의 의지로 막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내가 죽음의 위협을 느끼는데, 그래서 당장 생존하려는 마음이 앞서는데 누군가를 위해 좋은 일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왕가리 마타이는 어머니로부터 생존을 책임 받았고 또 독재정권과 싸우기 위해 분명 종교의 힘도 있었을 것입니다. 내 생존을 우선시하면 누구에게도 사랑의 시선을 돌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 생존을 부탁하지 맙시다. 그냥 그분께 맡기고 오늘을 살아갑시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이웃을 위해 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 있으며 두려워하는 것은 그분과 함께 있다는 믿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결과로 나타납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을 발견합시다. 그래서 그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믿음만으로 이미 생존을 보장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성체성사의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느 프로 권투 선수의 전적이 승리보다 패배가 훨씬 많다면 어떨까요?

 

권투로 재능이 없다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권투보다 다른 일을 하는 것이 낫다는 소리도 많이 들을 것입니다. 
 
영국의 피터 버클리라는 권투 선수가 있습니다. 그는 승리보다 패배가 훨씬 많은데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권투를 했습니다. 300회 경기를 마지막으로 은퇴할 때까지 통산 전적은 300전 4승 256패 12무였습니다. 심지어 5년 동안 88연패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기자가 계속 권투를 하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릴 적 나는 걸핏하면 말썽을 부려 경찰을 애먹였습니다. 그런 제가 권투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했습니다. 권투는 제 삶의 전부가 되었습니다.” 
 
그에게 승패보다 중요한 것은 좋아하는 일에 마음을 다하는 것이었습니다. 날마다 꾸준히 연습하면서 포기하지 않는 그의 마음이 비록 패배로만 가득한 그의 전적이었지만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지금 세상은 승리만 인정하는 곳으로 비칩니다. 그러나 세상의 승리가 진정한 승리일까요? 
 
예수님과 제자들을 태운 배가 호수 한가운데 왔을 때 갑자기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쳤습니다. 배는 고깃배고, 이 배에 탄 사람 중에는 어부가 많았습니다. 이런 상황을 어부들은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갈릴래아 호수에는 가을에 이런 돌풍이 자주 불어 닥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정신없는 가운데에서도 태연하게 주무시고 계십니다. 복음서 전체를 통틀어 유일하게 주무셨다는 기사가 여기에만 나옵니다. 전교 생활의 고달픔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부였던 제자들은 돌풍이 절망적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깨워서 살려달라고 청합니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라고 말씀하셨고, 곧바로 고요해졌습니다. 
 
그리고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왜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무서워하느냐는 뜻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주님께서 함께 계시면 절대로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간직하면서,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라는 말씀만으로도 모든 상황이 정리될 것을 굳게 믿습니다. 
 
주님께 굳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실패와 절망이지만, 그 안에서도 기쁨과 만족을 체험하게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지라도 내가 변하면 모든 것이 변한다.

- 오노레 드 발자크

 

 

사람은 변합니다.

 

극장에 가서 영화 안 본 지가 5년이 넘었습니다. 2014년에 본 한국 영화가 아마 마지막 영화 관람이었을 것입니다. 원래가 영화를 싫어했냐고 묻습니다. 아닙니다. 사실 저는 영화광이었습니다. 그래서 학생 때에는 돈이 없어서 한 편 값에 두 편을 볼 수 있는 삼류극장을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신부가 되면서 영화보다 책에 더 집중하게 된 것입니다. 
 
책을 읽다 보니 영화 보는 것이 힘들어졌습니다. 맘껏 졸다가 나오는 곳이 극장이 된 것입니다. 책 읽는 것은 계속 머릿속으로 생각하니 졸지 않지만, 영화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영화광이 독서광으로 바뀐 것입니다. 무엇이 더 낫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저 자신만 봐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변하지 않는 분은 주님뿐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변합니다. 그런데 왜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고 속단할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마르 4,39)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어떤 시간도 지나가는 시간이다. 우리를 성장시키는 거센 돌풍의 은총이다. 거센 돌풍은 고요와 평화로 바뀔 것이다. 거센 돌풍도 평화도 모두 주님께 연결되어 있다. 

깊어지는 믿음의 시간으로 이어져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 간절한 평화임을 다시 일깨워준다. 거센 돌풍 속에서 동행하시는 주님을 만난다. 우리를 믿음으로 성장시키고 우리를 은총으로 이끌고 가신다. 

우리 삶의 자리 거기에서 만나게 되는 주님이시다. 주님 앞에 우리의 두려움까지 조용히 내려놓는다. 도와주시고 잡아 당기시는 주님과 함께 오늘도 사랑을 체험한다. 주님 사랑은 한계가 없다. 

주님이 길이이다. 주님이 다시 길을 열어주신다. 겁 먹지 않는다. 동행하시는 주님께 맡겨드리는 삶의 순간 순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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